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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州 九皇洞 三層石塔 舍利莊嚴具의 再照明 = The restudy of the reliquary of three-str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in Gyeu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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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42년 경주 狼山 동편에 위치한 구황동 삼층석탑 해체ㆍ수리 과정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엄구는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유입을 계기로 야기되는 신라 사리장엄 방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면 692년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이 건립된 이후. 700년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서 702년에 효소왕이 승하하자, 성덕왕 5년(706)에 불사리 4과와 全金彌陀像 1구, 『무구정경』 1권을 추가로 봉안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706년에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봉안한 배경에 대해『무구정경』의 ‘낡은 탑을 중수(修造佛塔)하는 功德’에 의거하여 성덕왕이 선대 왕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의도로만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건립된지 불과 14년 밖에 경과되지 않은 석탑을 낡은 탑〔塔〕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문헌자료를 통해 706년에 시행된 석탑 중수의 배경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권 제8성덕왕조의 기사를 통해 당시 신라사회는 705년에서 706년 사이에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가 극에 달하였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성덕왕이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봉안한 배경에는 先祖에 대한 追福供養은 물론, 신라에 새롭게 유입된 『무구정경』의 威神力을 빌어 자연재해로 인한 국난 극복의 의도가 강하게 내포되어 없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대해 품목별로 납입 시기를 살펴본 결과, 사리용기를 비롯한 유물들은 대부분 성덕왕대에 추가로 봉안된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692년 초창 당시에 납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은 금제여래입상이 유일한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초창당시의 사리장엄 방식이 금제여래입상을 중심으로 봉안되었을 가능성과 사리장엄구와 공반되는 불상의 성격에 대해 살펴볼 수 없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사리함에 기록된 납입품 가운데 무구정경은 1942년에 수습된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대나무 편들에 결부시켜, 付簡의 형태로 제작ㆍ봉안되었던 것으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무구정경』1권은 종이에 묵서된 寫經으로 별도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대나무 편에 기입된 經文은 다라니경 전체가 아니라 99벌 혹은 77볼 寫書한 6종의 陀羅尼呪 가운데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706년에 추가 봉안되었던 금제아미타좌상 1구와 사리함 명문에 기술된 6寸 크기의 全金彌陀像 1구와의 관련성이다. 지금까지 논란을 빚고 있는 6寸 크기의 불상에 관해 여러 異說이 제기되었다. 사리함의 명문에 명시된 6寸은 周尺을 기준으로 금제여래좌상의 크기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발견된 2구의 불상 가운데 명문에 기록된 ‘6寸 크기의 全金彌陀像’은 그동안 양식사적 접근을 통해 거론되어온 금제여래좌상임이 재확인되며, 아울러 신라에 周尺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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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경주 狼山 동편에 위치한 구황동 삼층석탑 해체ㆍ수리 과정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엄구는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유입을 계기로 야기되는 신라 사리장엄 방식의 변...

      1942년 경주 狼山 동편에 위치한 구황동 삼층석탑 해체ㆍ수리 과정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엄구는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유입을 계기로 야기되는 신라 사리장엄 방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면 692년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이 건립된 이후. 700년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서 702년에 효소왕이 승하하자, 성덕왕 5년(706)에 불사리 4과와 全金彌陀像 1구, 『무구정경』 1권을 추가로 봉안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706년에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봉안한 배경에 대해『무구정경』의 ‘낡은 탑을 중수(修造佛塔)하는 功德’에 의거하여 성덕왕이 선대 왕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의도로만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건립된지 불과 14년 밖에 경과되지 않은 석탑을 낡은 탑〔塔〕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문헌자료를 통해 706년에 시행된 석탑 중수의 배경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권 제8성덕왕조의 기사를 통해 당시 신라사회는 705년에서 706년 사이에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가 극에 달하였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성덕왕이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봉안한 배경에는 先祖에 대한 追福供養은 물론, 신라에 새롭게 유입된 『무구정경』의 威神力을 빌어 자연재해로 인한 국난 극복의 의도가 강하게 내포되어 없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대해 품목별로 납입 시기를 살펴본 결과, 사리용기를 비롯한 유물들은 대부분 성덕왕대에 추가로 봉안된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692년 초창 당시에 납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은 금제여래입상이 유일한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초창당시의 사리장엄 방식이 금제여래입상을 중심으로 봉안되었을 가능성과 사리장엄구와 공반되는 불상의 성격에 대해 살펴볼 수 없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사리함에 기록된 납입품 가운데 무구정경은 1942년에 수습된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대나무 편들에 결부시켜, 付簡의 형태로 제작ㆍ봉안되었던 것으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무구정경』1권은 종이에 묵서된 寫經으로 별도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대나무 편에 기입된 經文은 다라니경 전체가 아니라 99벌 혹은 77볼 寫書한 6종의 陀羅尼呪 가운데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706년에 추가 봉안되었던 금제아미타좌상 1구와 사리함 명문에 기술된 6寸 크기의 全金彌陀像 1구와의 관련성이다. 지금까지 논란을 빚고 있는 6寸 크기의 불상에 관해 여러 異說이 제기되었다. 사리함의 명문에 명시된 6寸은 周尺을 기준으로 금제여래좌상의 크기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발견된 2구의 불상 가운데 명문에 기록된 ‘6寸 크기의 全金彌陀像’은 그동안 양식사적 접근을 통해 거론되어온 금제여래좌상임이 재확인되며, 아울러 신라에 周尺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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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It is very important the reliquary discovered inside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in Cyeoungju that shows the change of practice with Buddhist relic woship as the introduction of R?mivimalavi?uddhaprabh?n?ma-sutra in Silla.
      The reliquary was engraved in 692 A.D.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angdong was bolt to play for the repose of King Sinmoon by the King Hyoso and the Queen Sinmok, King Sinmoon's wife, then the Queen Sinmok who demised in 700 A.D. Also, the King Hyoso who demised in 702 A.D. This is next to the four pieces of the Buddha's bodily relic, one of the statues of Amitabha which is made of gold, one of the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were enshrined in by the King Sungduk, in 706 A.D. Therefore, we can think that the reason of adding to a re-liqury was to pray for the repose of the late king, based on the teaching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the charity of repairing a old pagoda.
      It is difficult that the three-story pagoda at Goowhang-dong has been only fourteen years since it was built thinking the age old pagoda. Therefore, in 706 A.D., the repairing of the stone pagoda can be another reason. On investigation, we can see that lots of people perished by famine and drought between 705 A.D. and 706 A.D. in Silla. It is the reason of adding to be enshrined a reliquary by the King Sungduk that pray for the repose of the late king and overcome a national crisis, through natural disaster and the power of the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We studied the time which reliquaries discovered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was buried. As a result, the majority of the main relics including reliqaury proved to be enshrined in the stone pagoda the King Sungduk period. Also, the stone pagoda was built first, 692 A.D. and Standing Buddha made of gold turned out the only relic buried at that time. So we can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liquary and Standing Buddha made of gold.
      The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in the buried items of being engraved a reliquary has relation to bamboo pieces which was written letters and missing since it was discovered, in 1942. It may be manufactured and enshrined as bamboo book form. But, according to witness's evidence at that time, one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can be enshrined separately and The Sutra which was recorded of bamboo pieces cam be a part of charm copied ninety-nine or seventy-seven set, not all dh?ran?.
      Finally, the Buddhist statue of six Chon(寸) solved the exchange of Buddhist statue's size by calculating the measure of being reflected, In result, the size of Buddhist statue, six chon(寸) equal the size of the seated Buddha made of gold by JooCuck(周尺)
      Therefore, The Amitabha statue which is made of gold of six Chon(寸) size in the two Buddha statue of being discovered the stone pagoda was reconfirmed seared Buddha made of gold and it is a very important example that may be of use Joochuk(周尺) in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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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is very important the reliquary discovered inside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in Cyeoungju that shows the change of practice with Buddhist relic woship as the introduction of R?mivimalavi?uddhaprabh?n?ma-sutra in Silla. The rel...

      It is very important the reliquary discovered inside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in Cyeoungju that shows the change of practice with Buddhist relic woship as the introduction of R?mivimalavi?uddhaprabh?n?ma-sutra in Silla.
      The reliquary was engraved in 692 A.D.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angdong was bolt to play for the repose of King Sinmoon by the King Hyoso and the Queen Sinmok, King Sinmoon's wife, then the Queen Sinmok who demised in 700 A.D. Also, the King Hyoso who demised in 702 A.D. This is next to the four pieces of the Buddha's bodily relic, one of the statues of Amitabha which is made of gold, one of the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were enshrined in by the King Sungduk, in 706 A.D. Therefore, we can think that the reason of adding to a re-liqury was to pray for the repose of the late king, based on the teaching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the charity of repairing a old pagoda.
      It is difficult that the three-story pagoda at Goowhang-dong has been only fourteen years since it was built thinking the age old pagoda. Therefore, in 706 A.D., the repairing of the stone pagoda can be another reason. On investigation, we can see that lots of people perished by famine and drought between 705 A.D. and 706 A.D. in Silla. It is the reason of adding to be enshrined a reliquary by the King Sungduk that pray for the repose of the late king and overcome a national crisis, through natural disaster and the power of the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We studied the time which reliquaries discovered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was buried. As a result, the majority of the main relics including reliqaury proved to be enshrined in the stone pagoda the King Sungduk period. Also, the stone pagoda was built first, 692 A.D. and Standing Buddha made of gold turned out the only relic buried at that time. So we can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liquary and Standing Buddha made of gold.
      The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in the buried items of being engraved a reliquary has relation to bamboo pieces which was written letters and missing since it was discovered, in 1942. It may be manufactured and enshrined as bamboo book form. But, according to witness's evidence at that time, one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can be enshrined separately and The Sutra which was recorded of bamboo pieces cam be a part of charm copied ninety-nine or seventy-seven set, not all dh?ran?.
      Finally, the Buddhist statue of six Chon(寸) solved the exchange of Buddhist statue's size by calculating the measure of being reflected, In result, the size of Buddhist statue, six chon(寸) equal the size of the seated Buddha made of gold by JooCuck(周尺)
      Therefore, The Amitabha statue which is made of gold of six Chon(寸) size in the two Buddha statue of being discovered the stone pagoda was reconfirmed seared Buddha made of gold and it is a very important example that may be of use Joochuk(周尺) in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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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Ⅱ. 사리장엄구의 조사와 봉안상태
      • Ⅲ. 기록에 보이는 九皇洞 三層石塔과 사리장엄구의 조성배경
      • Ⅳ. 사리장엄구의 납입시기와 납입품
      • Ⅴ. 맺음말
      • Ⅰ. 머리말
      • Ⅱ. 사리장엄구의 조사와 봉안상태
      • Ⅲ. 기록에 보이는 九皇洞 三層石塔과 사리장엄구의 조성배경
      • Ⅳ. 사리장엄구의 납입시기와 납입품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국문초록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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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정병삼,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2 주경미, "중국 고대 불사리장엄 연구" 일지사 2003

      3 이주형, "인도 초기불교미술의 佛像觀" 15 : 2001

      4 한정호, "경주지역 신라 전형석탑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4 : 2004

      5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6 황수영, "韓國金石遺文" 일지사 1994

      7 김원룡, "韓國美術史硏究의 二三問題" 7-3, 1964

      8 주경미, "韓國 佛舍利莊嚴에 있어서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意義" 2 : 2004

      9 박상국, "舍利信仰과 陀羅尼經의 寫經 片 ,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10 신영훈, "皇龍寺九層塔과 周尺" 9-11, 1976

      1 정병삼,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2 주경미, "중국 고대 불사리장엄 연구" 일지사 2003

      3 이주형, "인도 초기불교미술의 佛像觀" 15 : 2001

      4 한정호, "경주지역 신라 전형석탑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4 : 2004

      5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6 황수영, "韓國金石遺文" 일지사 1994

      7 김원룡, "韓國美術史硏究의 二三問題" 7-3, 1964

      8 주경미, "韓國 佛舍利莊嚴에 있어서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意義" 2 : 2004

      9 박상국, "舍利信仰과 陀羅尼經의 寫經 片 ,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10 신영훈, "皇龍寺九層塔과 周尺" 9-11, 1976

      11 강우방, "新羅 十二支像의 分析과 解析" 1973

      12 이홍직, "慶州狼山東麓 三層石塔內 發見品, 韓國古文化論攷" 을유문화사 1954

      13 김재원, "慶州 九皇洞 石塔 出土 舍利器 및 佛像, 韓國과 中國의 考古美術" 문예출판사 2000

      14 박흥수, "度量衡, 度量衡과 國樂論叢" 1980

      15 "大正新修大藏經"

      16 강우방, "佛舍利莊嚴論 佛舍利莊嚴" 국립중앙박물관 1991

      17 황수영, "佛國寺三層石塔發見 無垢淨光大陀羅尼經, 佛國寺三層石塔 舍利具와 文武大王 海中陵"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18 박흥수, "中國 上古때 度量衡制度에 關하여, 度量衡과 國樂論叢"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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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3-23 학회명변경 한글명 : (재)성강문화재단 한국미술연구소 -> 한국미술연구소
      영문명 : Sung Kang Foundation -> Center for Art Studies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6-29 학회명변경 한글명 : (재)성강문화재단 -> (재)성강문화재단 한국미술연구소
      영문명 : Sungn Gang Culture Foundation -> Sung Kang Foundation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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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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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4 0.84 0.8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2 0.61 0.83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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