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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慎守勤에 대한 재평가와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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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과제는 다음과 같은 목차에 의해 2단계로 진행될 것이다. (1) 행적과 당대 평가 ① 연산군 시기의 정치활동 : 慎守勤의 출세 배경은, 그의 부친인 慎承善이 臨瀛大君의 사위가 되어 세...

      본 연구과제는 다음과 같은 목차에 의해 2단계로 진행될 것이다.
      (1) 행적과 당대 평가
      ① 연산군 시기의 정치활동 : 慎守勤의 출세 배경은, 그의 부친인 慎承善이 臨瀛大君의 사위가 되어 세조의 지원으로 고위직에 오르고, 성종 연간에 딸이 세자빈에 간택된 데 있었다. 신수근은 宣慰使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가 ‘便宜四事’를 건의하였다. 또한 도승지 시절에 사림들과 대립하다가 무오ㆍ갑자사화를 주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과 ‘소문’에 대하여 당대와 후대의 견해 차이가 큰 만큼, 보다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신수근의 현실인식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② 반정과 논란 : 신수근 형제가 반정에의 동참을 거부하면서도 사전에 모의를 고변하지 않았던 이유를, 군주에 대한 의리와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논의해본다. 晋城大君의 부인인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왕비에 책봉되기 전에 폐출당하였다. 중종 10년 金淨ㆍ朴祥의 慎妃復位疏에서 신씨 폐출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논거로 신수근의 죄의 문제를 거론한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수근의 생전과 사후 사림들의 인식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점에서 신비복위소는 중요한 소재이다.
      ③ 훈구와 사림의 평가 : 『연산군일기』, 『중종실록』에서 신수근 형제에 대한 평가는 부정일변도이다. 실록청 총재관이 각각 成希顔과 李芑라는 사실은 실록 편찬 당시 반정세력의 정치적 개입을 짐작케 해준다. 신수근 형제에 대한 南袞, 李耔, 李荇 등의 부정적인 시각은 조선후기 관료ㆍ문인들에 의해 비판되고 있으므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것이다. 신수근 사후 신진사림들의 인식이 부정적이지 않으며, 사림들이 재등용되던 인종 연간에 신원, 복관되는 것을 비중 있게 다룰 것이다. 신수근의 신원ㆍ복관은 신씨의 복위에 큰 걸림돌이 제거된 것임을 논의한다.

      (2) 재평가의 과정과 의미
      ① 숙종 연간의 신씨 追復논의 : 신수근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는 일은 신씨의 복위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였다. 김정ㆍ박상ㆍ趙光祖 등의 신씨복위론은 宋浚吉, 宋時烈, 金壽恒-金昌協 부자를 통해 계승되었음을 논의한다. 숙종 24년(1698) 신씨의 추복논의는 李世白-李宜顯 부자, 尹趾善-尹趾完 형제, 南九萬, 權尙夏, 崔錫鼎, 尹拯 등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현실정치와 유학자적 책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노ㆍ소론 간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주의깊게 볼 것이다. 선왕의 폐비를 후세의 자손이 함부로 추복할 수 없다는 원칙과, 희빈 장씨가 폐비로 있던 시기적 특수성을 검토하고, 신수근 논의는 김정ㆍ박상의 상소에서 진전되지 못했음을 밝힌다.
      ② 영조 연간의 贈職ㆍ贈諡 : 영조 15년(1739) 신씨의 추복논의가 숙종의 때와는 성격이 다름을 살펴본다. 端敬王后의 추복으로 인해, 신수근은 영의정 益昌府院君이 추증되고, ‘信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李德壽가 쓴 諡狀, 李瀷이 쓴 延諡宴의 서문, 영조의 비망기 등을 통해 신수근의 君臣義理에 대한 평가에 주목한다. 영조가 세제 시절 자신의 建儲ㆍ代理와 관련해 목숨을 잃었던 노론 4대신의 신임의리를 인정해주는 영조 16년 庚申處分과 관련해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慎後聃이 영조 21년에 戊申亂의 여얼로 처단된 李穡의 생질임에도 불구하고, 영조 51년에 ‘古今同忠’을 써서 내려주는 은전에서, 탕평정치기 신수근에 대한 영조의 평가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③ 정조 연간의 旌閭와 군신의리 : 정조 23년 신수근의 마을에 旌門을 세워주어 그의 충성과 의리를 표창하였는데, 국구를 충신으로 정려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조는 辛壬義理, 壬午義理, 『明義錄』 의리를 통합한 새로운 군신의리를 천명하고자 하였고, 군주의 정당한 의리 천명에 적극 호응하는 군신간의 신뢰와 화합을 강조하였다. 정조의 ‘大義理’ 정립을 위한 중요한 시점에 신수근의 충의에 대한 포장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특히 정조가 재위 말년 右賢左戚의 노선을 포기하고 喬木世家를 척신으로 삼아 정치적 지원세력을 양성하려 했던 정국에서 외척 신수근의 군신의리을 통해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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