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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宗代 對明외교의 추이와 정치적 의도 = The development of Joseon´s diplomatic policy toward Ming and political purposes in Jungjong(中宗)´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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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에서는 중종대 외교 노선의 추이를 明 조정의 정국동향과 관련하여 살펴보고, 집권 후반기의 외교정책은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를 검토하였다. 먼저 중종대를...

      본고에서는 중종대 외교 노선의 추이를 明 조정의 정국동향과 관련하여 살펴보고, 집권 후반기의 외교정책은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를 검토하였다.
      먼저 중종대를 正德帝와 嘉靖帝 시기로 구분하여 명 조정의 정국동향과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책을 검토해 보았다. 정덕제는 정사에 관심이 없는데다, 京師 밖 출행도 매우 잦아서 황제가 신임하는 宦官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덕제 치하에서는 어떤 정치적 개변도 환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한 정덕제 시기에 중종은 反正으로 즉위하였다. 따라서 명 조정의 왕위 계승 추인이 중요한 외교적ㆍ정치적 과제였다. 이에 조선은 원칙을 중시하는 明 禮部 관리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환관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매개로 어려웠던 王位 承襲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선은 환관이 주도하는 명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면서도 환관들을 통하여 외교적 난점을 해결하였으며, 이들의 뇌물 요구와 징색에 모두 응하는 등 친환관 노선을 걸었다.
      정덕제가 후사도 없이 사망하자 가정제는 명대 황제 중 유일한 傍系로 皇位에 올랐다. 가정제는 즉위하자마자 그의 親父에 대한 존칭문제를 두고 신료들과 큰 정치적 갈등을 겪었으니, 이른바 대례의 사건이다. 이는 결국 가정제의 의도대로 귀결되었으나, 가정제는 친부모에게 지속적으로 尊號를 올리며 대례의의 정당성을 더욱 확고히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조선은 명의 황제와 신료들이 대립하는 대례의 관련 사안을 두고 進賀使 파견을 고민하였으나, 전례를 참고하며 명과의 관계에 누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수위 조절을 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신하들과의 마찰 속에서도 대례의 경우처럼 황제를 위한 사행파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가정제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는 성과를 얻었다.
      신하들과 의견 충돌을 지양했던 중종의 일상적인 통치 방식과 달리 그가 사행파견을 강력하게 주도했던 이유는 중종 24년 대두된 辨誣問題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변무문제는 작게는 王家의 문제지만 크게는 국가의 正統性과 관계되는 일이었다. 중종이 각종 폐단이 따르는 사행파견을 힘써 주도했던 것은 단순히 자주의식이 쇠퇴했거나 중국에 대한 의탁심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변무문제 해결을 위해 명과의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중 대례의 관련 사행 파견이 가정제로부터 극진한 환영을 받게 되자, 중중은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자신의 반정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황제가 조선을 우대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외교적 난점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중종의 주장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중종의 변무 성취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더욱 드높여 줄 수 있는 상징적 과업이었다.
      중종대 조선은 명 조정의 정국동향의 변화에 주목하고, 이에 따라 다양한 외교노선을 취하였다. 정덕제 시기에는 친환관 노선을 통해 큰 무리 없이 왕위를 책봉 받았고, 가정제 시기에는 친황제 정책으로 변무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에 맞는 전략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종대 대명관계의 모습은 16세기 사대의식이 심화되어 가는 와중에서도 역동적인 외교가 전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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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objective set in this article, is to inspect the development of the diplomatic course in Jungjong(中宗)'s reign with reference to a shifting of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Ming dynasty court, and to examine what political purpose was Joseon's...

      The objective set in this article, is to inspect the development of the diplomatic course in Jungjong(中宗)'s reign with reference to a shifting of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Ming dynasty court, and to examine what political purpose was Joseon's diplomatic policy toward Ming in the second half of the time of Jungjong(中宗).
      First, I would like to segment the time of Jungjong(中宗) on the basis of the emperors' change in the Ming, Zhengdedi(正德帝) and Jiajingdi(嘉靖帝). I also look through the shifting of Ming's political situation and Joseon's response to that.
      Zhengdedi(正德帝) was not interested in the affairs of state, and went out the capital of China frequently. So eunuchs trusted by him seized power. Nobody couldn't engage in politics without the cooperation of eunuchs under Zhengdedi(正德帝)'s rule. This time, Jungjong(中宗) was enthroned by deposing Yeonsangoon(燕山君) in Joseon. Therefore it is a diplomatic and political works of the greatest importance that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was ratified by the court of Ming. Though Ming's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who valued principles as being very important criticized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in Joseon, Joseon solved the difficult problem about that by the medium of Ming's eunuchs. While Joseon criticized Ming's political picture led by eunuchs, Joseon sloved the diplomatic problems and continued to maintain the pro-eunuch stance, such that Joseon accepted all of their demands for bribes.
      Zhengdedi(正德帝) died without having a son to carry on his name, then Jiajingdi(嘉靖帝) succeeded to the throne in the quality of the only collateral line. This case was the only one of its kind in the Ming Dynasty. As soon as Jiajingdi(嘉靖帝) mounted the throne, he suffered political conflict with subjects because of his father's title. So called it is the Grand ceremony(大禮議). Finally that issue was concluded with Jiajingdi(嘉靖帝)'s intention. Furthermore, Jiajingdi(嘉靖帝) intended to raise his authority by strengthening legitimacy of the Grand ceremony(大禮議) with addressing eulogistic posthumous title of his parents.
      Joseon was in a quandary over whether to allow dispaching the envoys for celebration(進賀使) to the Ming as there was a feud between the Ming Emperor and his subjects about the Grand ceremony(大禮議) issue. So Joseon tried to control the diplomatic level without damaging relations between the Ming while Joseon refered to a precedent. But as Jungjong(中宗)'s time went on, he showed an more enthusiastic attitude on dispatching envoys to Jiajingdi(嘉靖帝) in spite of his subject's dissenting opinion. As a result, Joseon achieved excellent results that Joseon was kindly treated by Jiajingdi(嘉靖帝).
      The reason why he led dispatching envoys powerfully was to resolve the jonggye(宗系) correction issue emerged in 1592. Such his behaviour differed from his earlier management style that headed off the collision with his subjects. The jonggye(宗系) correction issue related to the royal family of Joseon. On the other hand, that issue connected to the legitimacy of the dynasty. Jungjong(中宗) took the lead in dispatching envoys though which followed by various negative effects. That did not mean a lack of a individuality and autonomy. It was that Jungjong(中宗) tried to overcome usurpation complex using this golden opportunity tactically. This facts showed clearly Jungjong(中宗) insisted Joseon had to solve the crux of diplomatic affairs using this Jiajingdi(嘉靖帝)'s hospitality too. To solve the jonggye(宗系) correction issue meant a kind of symbolic task that heighten the legitimacy of his throne for Jungjong(中宗).
      In Jungjong(中宗)'s time, the members of Joseon's court watched the shifting of the political situation in Ming's court, then they selected various diplomatic course. Jungjong(中宗) was fully invested by continuing to maintain the pro-Ming's eunuch stance in Z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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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三田村泰助, "환관-측근정치의 구조" 도서출판 나루 1992

      2 계승범, "파병 논의를 통해 본 조선전기 對明觀의 변화" 대동문화연구원 (53) : 309-34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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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구도영, "중종대 사대인식(事大認識)의 변화 - 대례의(大禮議)에 대한 별행(別行) 파견 논의를 중심으로 -" 한국역사연구회 (62) : 345-37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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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김경록, "조선초기 종계변무의 전개양상과 대명관계" 108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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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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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김덕수, "조선문사와 명사신의 수창과 그 양상" 27 : 2001

      12 김동철, "조선 후기 수우각 무역과 弓角契貢人" 4 : 1991

      13 부남철, "조선 전기 君主權 유지를 위한 이념정책" 25 (25): 1991

      14 서인범, "압록강하구 沿岸島嶼를 둘러싼 朝明 영토분쟁" 명청사학회 (26) : 31-68, 2006

      15 조영록, "수우각 무역을 통해 본 鮮明關係" 9 :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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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王春瑜, "明朝宦官" 陝西人民出版社 2007

      23 전순동, "明朝 前期 宦官 勢力의 推移와 機能" 중국사학회 61 (61): 39-8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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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1999-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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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7 0.87 0.9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98 2.253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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