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후보

      18~19세기 제주의 進上制 운영과 성격 = Operation of the Donation System and Its Characteristics in Jeju in the 18th ~19th Centuries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4235783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Due to its geometric and historical particularities, Jeju presented actual products as donation to the king until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nd the burden was not trivial. As the political basis of the Joseon government was changed since the days o...

      Due to its geometric and historical particularities, Jeju presented
      actual products as donation to the king until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nd the burden was not trivial. As the political basis of the Joseon
      government was changed since the days of King Sukjong and it tried
      to bring Jeju into the range of its rule, the central government made
      efforts to the burden of the donation upon Jeju. However, given the
      operational principles of the system of donation in Joseon, such efforts
      had limitations. Thus, the donation remained great burden for Jeju
      people until the end of the 19th century.
      On the other hand, local officials of Jeju including the local governors
      attempted at various ways to reduce the burden on people due to the
      donation. One of the ways they found out was the operation of Min-Go
      ‘storage for people,’ which was represented by Pyeong-yeok-go and
      Bo-min-go. The foundation and operation of Pyeong-yeok-go was
      intended toward resolving part of the burden of providing products for
      the donation by passing it to those in charge of other compulsory
      labors. The underlying basis for this was Gyun-yeok, which means the
      balance of the burden of compulsory labors. On the other hand,
      Bo-min-go was intended through the operation of grain loaning
      toward reducing the burden of the donation of products posed in the
      form of inhabitants’ tax. However, due to excessive expenditure,
      Bo-min-go had a financial structure in which the principal grains
      gradually disappeared. In the financial situation of Jeju at that time,
      what remained as potential sourcesof exploitation included such tax
      collections from newly cultivated land as Jang-se and Hwajeon-se.
      Thus, some of the rice for Jang-se, which did not fit to the principles
      of financial management, was underpaid for securing the financial
      resources of Bo-min-go. This suggests that toward the mid 19th
      century, even the principles of financial management maintained
      previously was not kept because the local finances of Jeju reached the
      limit. In other words, the financial condition of Jeju in the 19th century
      made it impossibleto find out a solution by sticking to the policy of
      financial management maintained since the early period of Joseon.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제주는 그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19세기까지 진상 물종을 현물로 상납하였다. 그리고 그 부담 역시 작지 않았다. 숙종대 이후 조선정부의 정책 기조가 바뀌고 제주를 통치영역안으...

      제주는 그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19세기까지 진상 물종을 현물로
      상납하였다. 그리고 그 부담 역시 작지 않았다. 숙종대 이후 조선정부의 정책
      기조가 바뀌고 제주를 통치영역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중앙정부
      에서도 제주의 진상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진상제도 운
      영 원리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진상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제주민들의 큰 부담으로 남아있었다.
      한편 제주 목사를 비롯한 제주의 지방관들도 진상으로 인한 민의 부담을 덜
      어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들이 찾은 방법은 평역고와 보민고
      로 대표되는 민고의 운영이었다. 평역고의 설치와 운영은 신역으로 부과되던
      진상물종 마련에 대한 부담 일부를 다른 형태의 신역부담자에게 전가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흐르고 있는 것은 均役, 즉 신역부
      담자의 부담을 고르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보민고는 환곡의 운영을 통해 戶斂
      형태로 부과되는 진상 물종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보민고는 수
      입보다 지출이 많아, 시간이 흐를수록 보민고의 원곡이 침식되는 재정구조였
      다. 당시 제주의 재정 상황에서 수탈의 여지가 남아있었던 것이 장세와 화전세
      등 새로 개간한 토지에 대한 수세였다. 때문에 재정 운영 원리상 어울리지 않
      는 장세미의 일부가 보민고의 재원으로 획급되었다. 이는 19세기 중엽에는 제
      주의 지방재정이 한계상황에 도달하여, 그 이전까지 유지되고 있던 재정 운영
      원리마저 지킬 수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제주의 재정
      상황은 조선 전기 이래 유지해오던 재정 운영 방침을 고수하는 것으로는 해결
      책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2 權仁赫, "조선후기 제주지역의 수취체제와 주민의 경제생활" 19 : 1998

      3 張東杓, "조선후기 民庫 운영의 성격과 運營權,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 상"

      4 鄭亨芝, "조선후기 交濟倉의 설치와 운영" 28 : 1995

      5 박찬식, "제주 해녀의 역사적 고찰" 19 : 2004

      6 "耽羅誌草本"

      7 "耽羅營事例"

      8 "耽羅志"

      9 "耽羅巡歷圖"

      10 "耽羅事例"

      1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2 權仁赫, "조선후기 제주지역의 수취체제와 주민의 경제생활" 19 : 1998

      3 張東杓, "조선후기 民庫 운영의 성격과 運營權,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 상"

      4 鄭亨芝, "조선후기 交濟倉의 설치와 운영" 28 : 1995

      5 박찬식, "제주 해녀의 역사적 고찰" 19 : 2004

      6 "耽羅誌草本"

      7 "耽羅營事例"

      8 "耽羅志"

      9 "耽羅巡歷圖"

      10 "耽羅事例"

      11 "經世遺表"

      12 "牧民心書"

      13 "濟州大靜旌義邑誌"

      14 韓榮國, "湖南에 實施된 大同法(上)" 15 : 1961

      15 "朝鮮王朝實錄"

      16 金容燮, "朝鮮後期의 民庫와 民庫田" 23 : 1980

      17 長森美信, "朝鮮後期濟州の進上物資調達と海上輸送" 93 : 2001

      18 文勇植, "朝鮮後期 賑政과 還穀運營" 景仁文化社 2000

      19 德成外志子, "朝鮮後期 貢納請負制와 中人層貢人" 고려대 2001

      20 權仁赫, "朝鮮後期 地方官衙 財政의 운영실태" 16 : 1996

      21 金德珍, "朝鮮後期 地方官廳의 民庫 設立과 運營" 133 : 1992

      22 "書啓輯錄"

      23 "日省錄"

      24 "承政院日記"

      25 "南宦博物"

      26 "南?錄"

      27 "備邊司謄錄"

      28 朴贊殖, "『耽羅巡歷圖』에 보이는 제주 진상의 실태, 耽羅巡歷圖硏究論叢"

      29 허원영, "19세기 濟州島의 戶口와 賦稅運營"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30 朴贊殖, "19세기 濟州 지역 進上의 실태 in 19세기 濟州社會 硏究" 일지사 1997

      31 權仁赫, "19世紀 前半 濟州地方의 社會經濟構造와 그 變動, 李元淳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32 김동전, "18·19세기 畓漢의 신분적 지위와 그 변동" 3 : 1993

      33 양진석, "18, 9세기 제주의 收取制度와 特徵" 24 : 2004

      34 박찬식, "17, 18세기 濟州島 牧子의 실태" 濟州文化硏究 1993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3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재인증) KCI등재
      2019-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9-05-14 학회명변경 영문명 : TAMLA CULTURAL INSTITUTE -> Research Institute for the Tamla Culture KCI등재
      2017-06-14 학회명변경 한글명 : 탐라문화연구소 -> 탐라문화연구원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0-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2 0.52 0.5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4 0.62 0.913 0.26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