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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세유표』를 통해서 본 복지국가의 전통 = The welfare state tradition appearing in the Gyeongseyu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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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통해서 제시한 것은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론이었고, 새로운 국가 경영 기획이었으며, 그 발전 전망을 담은 미래 국 가의 청사진이었다. 그는 장구한 기간 우리나라 중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대토지 소유를 해체 하여 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일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점유하고 식량 생산을 전담하게 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정전제를 시행할 것을 구상하고, 국가가 공전을 마련하여 이러한 원칙을 실천한 뒤, 구일세법을 관철시켜 지주제를 해체하 려고 구상하였다. 19세기 삼정 문란의 주범이었던 환곡 제도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제거하여 진휼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장구한 기간 국가가 진휼 정책을 통해서 국민을 보호하려 한 역사 전통을 계승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곡 제도 개혁안에도 불구하고 원곡이 고갈될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상평곡을 설정하였다. 그가 제안한 상평곡 운영은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른 미곡의 상품화를 활용하여 미가 조절을 통해서 진휼곡을 확보하려는 전진적인 방안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제도 개혁을 민의 자발성을 활용하여 추진하려고 구상하였다.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 구일세법을 강조한 것은 소작농들의 자발적인 지대 거부 운동을 유도한 것이었다. 또한 부공제도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공론에 입각하여 운영하려 하였다. 특히 환곡을 리 단위로 분배하자고 제안한 것은 조선후기 사회변동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서민 계층을 활용하여 진휼기능의 실효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향촌을 비롯한 각종 경제 공동체에서 민의공론과 자치 능력을 신뢰하고, 그에 의지하여 국가 권력을 강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정약용은 사적 토지소유를 부정하였지만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지만 매점매석과 같은 자본의 횡포는 국가가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자유 방임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구상한 국가는 그역할과 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복지국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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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통해서 제시한 것은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론이었고, 새로운 국가 경영 기획이었으며, 그 발전 전망을 담은 미래 국 가의 청사진이었다. 그는 장구한 기간 우리나라 ...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통해서 제시한 것은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론이었고, 새로운 국가 경영 기획이었으며, 그 발전 전망을 담은 미래 국 가의 청사진이었다. 그는 장구한 기간 우리나라 중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대토지 소유를 해체 하여 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일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점유하고 식량 생산을 전담하게 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정전제를 시행할 것을 구상하고, 국가가 공전을 마련하여 이러한 원칙을 실천한 뒤, 구일세법을 관철시켜 지주제를 해체하 려고 구상하였다. 19세기 삼정 문란의 주범이었던 환곡 제도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제거하여 진휼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장구한 기간 국가가 진휼 정책을 통해서 국민을 보호하려 한 역사 전통을 계승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곡 제도 개혁안에도 불구하고 원곡이 고갈될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상평곡을 설정하였다. 그가 제안한 상평곡 운영은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른 미곡의 상품화를 활용하여 미가 조절을 통해서 진휼곡을 확보하려는 전진적인 방안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제도 개혁을 민의 자발성을 활용하여 추진하려고 구상하였다.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 구일세법을 강조한 것은 소작농들의 자발적인 지대 거부 운동을 유도한 것이었다. 또한 부공제도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공론에 입각하여 운영하려 하였다. 특히 환곡을 리 단위로 분배하자고 제안한 것은 조선후기 사회변동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서민 계층을 활용하여 진휼기능의 실효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향촌을 비롯한 각종 경제 공동체에서 민의공론과 자치 능력을 신뢰하고, 그에 의지하여 국가 권력을 강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정약용은 사적 토지소유를 부정하였지만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시장 경제는 인정하였지만 매점매석과 같은 자본의 횡포는 국가가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자유 방임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구상한 국가는 그역할과 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복지국가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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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his work Gyeongseyupyo (經世遺表), Jeong Yak-yong suggested a reformative management plan and its benefits for the Kingdom of Joseon. As tenant farming had become a severe chronic problem in the 19th century, he tried to collect ownerships from landlords and to distribute the lands to truly active farmers. He applied a moderate version of the well-field system(井田制, an ancient chinese land distribution method) to boost productivity. Per his plan, the government organized public farmlands first, and enforced a strong tax system with the collection of one-ninth of the crop. Jeong Yak-yong also tried to inherit and to restore the national relief policy (賑恤政策) by purifying the most corrupt—hwangok (還穀)—system. He intended to prevent abuses of the system, and designed sangpyeongok (常平穀) to secure the supply of relief rice. Although Jeong Yak-yong objected to the privatization of land property, he did not hold socialist ideals. He accepted the market economy model, albeit with governmental intervention rather than adhering to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In its role and function, the national organization suggested by Jeong Yak-yong’s Gyeongseyupyo can be considered a precursor of today’s welfar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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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his work Gyeongseyupyo (經世遺表), Jeong Yak-yong suggested a reformative management plan and its benefits for the Kingdom of Joseon. As tenant farming had become a severe chronic problem in the 19th century, he tried to collect ownerships from...

      In his work Gyeongseyupyo (經世遺表), Jeong Yak-yong suggested a reformative management plan and its benefits for the Kingdom of Joseon. As tenant farming had become a severe chronic problem in the 19th century, he tried to collect ownerships from landlords and to distribute the lands to truly active farmers. He applied a moderate version of the well-field system(井田制, an ancient chinese land distribution method) to boost productivity. Per his plan, the government organized public farmlands first, and enforced a strong tax system with the collection of one-ninth of the crop. Jeong Yak-yong also tried to inherit and to restore the national relief policy (賑恤政策) by purifying the most corrupt—hwangok (還穀)—system. He intended to prevent abuses of the system, and designed sangpyeongok (常平穀) to secure the supply of relief rice. Although Jeong Yak-yong objected to the privatization of land property, he did not hold socialist ideals. He accepted the market economy model, albeit with governmental intervention rather than adhering to the principle of laissez-faire. In its role and function, the national organization suggested by Jeong Yak-yong’s Gyeongseyupyo can be considered a precursor of today’s welfar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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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1. 머리말
      • 2. 국가의 역할과 민의 자발성
      • 3. 복지국가의 전통과 새나라 만들기
      • 4. 맺음말
      • 1. 머리말
      • 2. 국가의 역할과 민의 자발성
      • 3. 복지국가의 전통과 새나라 만들기
      •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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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조성을, "年譜로 본 茶山 丁若鏞-샅샅이 파헤친 그의 삶" 지식산업사 2016

      2 김용흠, "홍이섭 사학의 성격과 조선후기 실학" 한국실학학회 (25) : 497-529, 2013

      3 한영국, "호구정책의 강화" 국사편찬위원회 34 : 1995

      4 이헌창, "한국사 파악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점" 40 : 2007

      5 연세대 국학연구원, "한국 중세의 정치사상과 周禮" 혜안 2005

      6 김용흠, "한국 중세 국가 연구의 방향과 사회인문학" 국학연구원 (150) : 41-85, 2010

      7 金俊亨, "지방행정체제의 변화" 국사편찬위원회 34 : 1995

      8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와 실학" 연세대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 : 2009

      9 오일주, "조선후기 재정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3 : 1992

      10 丁海廉, "역주 경세유표 1~3" 現代實學社 2004

      1 조성을, "年譜로 본 茶山 丁若鏞-샅샅이 파헤친 그의 삶" 지식산업사 2016

      2 김용흠, "홍이섭 사학의 성격과 조선후기 실학" 한국실학학회 (25) : 497-529, 2013

      3 한영국, "호구정책의 강화" 국사편찬위원회 34 : 1995

      4 이헌창, "한국사 파악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점" 40 : 2007

      5 연세대 국학연구원, "한국 중세의 정치사상과 周禮" 혜안 2005

      6 김용흠, "한국 중세 국가 연구의 방향과 사회인문학" 국학연구원 (150) : 41-85, 2010

      7 金俊亨, "지방행정체제의 변화" 국사편찬위원회 34 : 1995

      8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와 실학" 연세대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 : 2009

      9 오일주, "조선후기 재정구조의 변동과 환곡의 부세화" 3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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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김용흠, "서울과 지방의 학술 소통: 다산학과 다산학단" 8 : 2015

      12 李泰鎭, "상평청․진휼청의 설치 운영과 구휼문제" 국사편찬위원회 30 : 1998

      13 라메쉬 미쉬라, "복지국가의 사상과 이론 (Society and Social Policy, 1981)" 한울출판사 1996

      14 프랑수아-자비에 메랭, "복지국가" 한길사 2000

      15 박진태, "다산의 토지문제 인식의 추이와 연속성" 6 : 2013

      16 이영훈, "다산의 정전제 개혁론과 왕토주의" 민족문화추진회 19 : 1996

      17 김용흠, "다산의 국가 구상과 정조 탕평책" (4․5) : 2012

      18 최윤오, "다산 정약용의 어린도설과 정전제" 한국민족문화연구소 (56) : 3-39, 2015

      19 안병직, "다산 정약용 연구" 사람의무늬 2012

      20 김태영, "다산 정약용 연구" 사람의무늬 2012

      21 김용흠, "다산 실학의 성격과 국가 구상- 21세기 유학의 변용 가능성 탐색" 한국학연구원 (56) : 45-8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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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金敬泰, "茶山의 政治經濟 思想" 창작과비평사 1990

      31 鄭允炯, "茶山의 政治經濟 思想"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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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丁海廉, "經世遺表 原文" 現代實學社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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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최주희, "19세기 전반 중앙재정의 문제와 다산의 중앙재정개혁론" 2017

      42 정일균, "1950/60년대 ‘근대화’와 다산 호출" (4․5) : 2012

      43 최재목, "1930년대 조선학 운동과 ‘실학자 정다산’의 재발견" (4․5) : 2012

      44 홍동현, "1894년 강진지역 동학농민전쟁과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8 : 2015

      45 趙圭煥, "16세기 還穀 運營과 賑資調達方式의 변화" 서울대 국사학과 37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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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4-01-20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DONG BANG HAK CHI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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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3 1.23 1.1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06 0.97 2.154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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