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칸트는 이처럼 생각하는 내가 나만을 생각할 때 나는 끝없이 선험적 주관의 주위를 하염없이 헛되게 빙빙 맴돌게 된다고 고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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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칸트는 이처럼 생각하는 내가 나만을 생각할 때 나는 끝없이 선험적 주관의 주위를 하염없이 헛되게 빙빙 맴돌게 된다고 고백한다. ...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칸트는 이처럼 생각하는 내가 나만을 생각할 때 나는 끝없이 선험적 주관의 주위를 하염없이 헛되게 빙빙 맴돌게 된다고 고백한다. 이때 생각하는 나는 모든 규정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이렇게 ‘홀로 선 나’는 그 속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빈 수레’와 같다. 수레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텅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다. 빈 수레의 쓰임은 항상 무엇을 어디로 운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빈 수레로서의 자기의식의 쓰임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기의식 혹은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헛되게 자기 주위를 맴도는 공허한 생각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표상들의 종합을 위해서 필요하며, 주관의 형식인 범주를 다양한 경험에 적용하는 데에 그 쓰임이 있다. 그래서 칸트는 자기의식의 이러한 역할을 강조하여 선험적 통각이나 자기의식 자체를 적극적 활동성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적극적 활동성이 곧 자기의 식이라는 말은 마치 수레가 무엇을 운반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수레가 아닌 것처럼 이러한 활동성이 없는 자기의식은 자기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험적 통각은 그 자체 비어 있으면서도 자신을 채우는 내용과 더불어-지각함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나의 홀로서기는 오직 내가 나의 생각 밖으로 나감으로써만 가능하다. ‘생각하는 나의 홀로서기’는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나’에 기대어 있다. 시, 공간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내가 다양한 경험에서 나의 인식을 산출하기 위해 생각하는 나를 더불어 불러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