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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초기 대부흥운동에 대한 사회적 반응 = 신문ㆍ잡지의 반응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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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7615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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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한국 초대교회의 최대의 신앙사건이며, 한국교회가 성숙하는 획기적인 기점이다. 그러나 그 동안 이 대부흥운동이 당시 한국 민족사회에서 안에서 어떤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부족했다. 이에 이 글에서는 당시 국내외에서 발행되고 있던 활자 매체가 이 부흥운동과 관련된 사항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분석하여, 초기 대부흥운동에 대한 사회적 반향을 살피고자 했다. 본 논문에서는 이 대부흥운동에 대한 관심과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일정하게 나타나며, 그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극명할수록 사회적 반응지수가 높고, 부흥운동이 사회적 사건의 성격이 명확해진다는 가설을 좇았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은 매체는 신문과 잡지이며, 그 범주는 일반 매체와 기독교계 매체였으며, 국내에서 발행되던 것과 국외의 것으로도 분류하여 분석하였다.
      부흥운동이 일어난 1900년대 초반의 신문ㆍ잡지 매체는 한국교회의 신앙적 주제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기독교계 매체들은 대부분 대부흥사건의 경이로운 현상들을 보도하고 그 독특한 신앙태도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매체는 경이로운 현상과 신앙태도의 변화에서 일정한 긍정적 기대를 하고 있다. 그 기대는 회개 현상을 통한 내재적 특성에 대한 깊은 성찰로 한국교회가 성령강림의 체험적 신앙을 획득해 가고 있는 것으로 살피는 시각이다. 선교사가 중심이 된 기독교계 매체의 논리는 부흥사건에 대한 고무된 평가와 더불어 복음주의적 정교분리론을 강조하였다. 반면 국내외 일반 매체들은 입장에 따라 부흥운동을 다루는 정도와 관점이 다르다. 국내의 민족주의 계열의 매체들은 부흥운동에 대하여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표현 방식은 기사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소극적인 방법과 정치참여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한국교회의 일면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중심을 이루고 있던 부흥운동을 무력화시키려는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 언론은 부흥과 같은 신앙사건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국기독교계의 정치적 성향을 우려하였고, 교회가 민족과 하나 되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였다. 또한 일제의 한국 영유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00년대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와 평가 또한 명확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각각의 신문ㆍ잡지 매체들은 고유의 정치적 성향 혹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 부흥운동을 긍정적 측면으로 평가하여 그에 대한 기대를 하기도 했으며, 부정적 평가하여 신앙사건을 축소하거나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반된 입장과 각각의 소리들은 부흥운동이 철저하게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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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한국 초대교회의 최대의 신앙사건이며, 한국교회가 성숙하는 획기적인 기점이다. 그러나 그 동안 이 대부흥운동이 당시 한국 민족사회에서 안에서 어떤 사회적 ...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한국 초대교회의 최대의 신앙사건이며, 한국교회가 성숙하는 획기적인 기점이다. 그러나 그 동안 이 대부흥운동이 당시 한국 민족사회에서 안에서 어떤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부족했다. 이에 이 글에서는 당시 국내외에서 발행되고 있던 활자 매체가 이 부흥운동과 관련된 사항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분석하여, 초기 대부흥운동에 대한 사회적 반향을 살피고자 했다. 본 논문에서는 이 대부흥운동에 대한 관심과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일정하게 나타나며, 그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 극명할수록 사회적 반응지수가 높고, 부흥운동이 사회적 사건의 성격이 명확해진다는 가설을 좇았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은 매체는 신문과 잡지이며, 그 범주는 일반 매체와 기독교계 매체였으며, 국내에서 발행되던 것과 국외의 것으로도 분류하여 분석하였다.
      부흥운동이 일어난 1900년대 초반의 신문ㆍ잡지 매체는 한국교회의 신앙적 주제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기독교계 매체들은 대부분 대부흥사건의 경이로운 현상들을 보도하고 그 독특한 신앙태도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매체는 경이로운 현상과 신앙태도의 변화에서 일정한 긍정적 기대를 하고 있다. 그 기대는 회개 현상을 통한 내재적 특성에 대한 깊은 성찰로 한국교회가 성령강림의 체험적 신앙을 획득해 가고 있는 것으로 살피는 시각이다. 선교사가 중심이 된 기독교계 매체의 논리는 부흥사건에 대한 고무된 평가와 더불어 복음주의적 정교분리론을 강조하였다. 반면 국내외 일반 매체들은 입장에 따라 부흥운동을 다루는 정도와 관점이 다르다. 국내의 민족주의 계열의 매체들은 부흥운동에 대하여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표현 방식은 기사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소극적인 방법과 정치참여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한국교회의 일면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중심을 이루고 있던 부흥운동을 무력화시키려는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 언론은 부흥과 같은 신앙사건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국기독교계의 정치적 성향을 우려하였고, 교회가 민족과 하나 되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였다. 또한 일제의 한국 영유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00년대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와 평가 또한 명확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각각의 신문ㆍ잡지 매체들은 고유의 정치적 성향 혹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 부흥운동을 긍정적 측면으로 평가하여 그에 대한 기대를 하기도 했으며, 부정적 평가하여 신앙사건을 축소하거나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반된 입장과 각각의 소리들은 부흥운동이 철저하게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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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Pyeong Yang Revival Movement in 1907 is the greatest event of faith in early Korean church history. The revival movement became a turning point for evangelistic faith to become rooted in the Korean church. During the revival movement period, the institution of the Korean church was organized. So there are a large number of papers on Pyeong Yang Revival Movement itself. But it is rare papers on social response of this faith movement and its social effect. The main purpose of this article is that search, collect and analysis articles on revival movements in print media and then investigate how people deal with those movements socially. I hope this article can give a part of various historical aspects of events of faith.
      In this article, firstly, I found that there are much social interests in church, religious matters and movements of faith in the early 1900's. Secondly, the more revival movement spread, the more Korean churches stuck by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nd the points of chief christian print media leaded by missionaries were emphasis on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nd putting an premium on revivals. Finally, it is revealed that a position of domestic media is surely different from foreign media's. Because Japanese media support their national and political position, they encourage and exalt Japanese colonial policy. But naturally, Korean media that support national independent, restoring the sovereignty cannot help expressing diametric position. So-called, ‘national press' was negative to movement of faith. ‘Silence and ignorance' was passive attitude, while some national press took up a positive attitude. They incapacitated the affairs of faith in the social mood.
      Shortly, Revival movements responded regularly in Korea, and the understanding and evaluation of the movements were various. Of course, each press has their own attitude and position of Revival movements and the affairs of faith. Those are clearly distinguished. In the event, it meant that Revivals were 'social ma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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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yeong Yang Revival Movement in 1907 is the greatest event of faith in early Korean church history. The revival movement became a turning point for evangelistic faith to become rooted in the Korean church. During the revival movement period, the insti...

      Pyeong Yang Revival Movement in 1907 is the greatest event of faith in early Korean church history. The revival movement became a turning point for evangelistic faith to become rooted in the Korean church. During the revival movement period, the institution of the Korean church was organized. So there are a large number of papers on Pyeong Yang Revival Movement itself. But it is rare papers on social response of this faith movement and its social effect. The main purpose of this article is that search, collect and analysis articles on revival movements in print media and then investigate how people deal with those movements socially. I hope this article can give a part of various historical aspects of events of faith.
      In this article, firstly, I found that there are much social interests in church, religious matters and movements of faith in the early 1900's. Secondly, the more revival movement spread, the more Korean churches stuck by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nd the points of chief christian print media leaded by missionaries were emphasis on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and putting an premium on revivals. Finally, it is revealed that a position of domestic media is surely different from foreign media's. Because Japanese media support their national and political position, they encourage and exalt Japanese colonial policy. But naturally, Korean media that support national independent, restoring the sovereignty cannot help expressing diametric position. So-called, ‘national press' was negative to movement of faith. ‘Silence and ignorance' was passive attitude, while some national press took up a positive attitude. They incapacitated the affairs of faith in the social mood.
      Shortly, Revival movements responded regularly in Korea, and the understanding and evaluation of the movements were various. Of course, each press has their own attitude and position of Revival movements and the affairs of faith. Those are clearly distinguished. In the event, it meant that Revivals were 'social ma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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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1. 머리말
      • 2. 1907년을 전후한 신앙사건에 대한 각 매체의 보도상황
      • 3. 신앙사건에 대한 긍정적 반향들과 매체의 정교분리론 성향
      • 4. 신앙사건에 대한 부정적 반향들과 매체의 정치사회적 참여 성향
      • 5. 맺음말 -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1907년 대부흥운동
      • 1. 머리말
      • 2. 1907년을 전후한 신앙사건에 대한 각 매체의 보도상황
      • 3. 신앙사건에 대한 긍정적 반향들과 매체의 정교분리론 성향
      • 4. 신앙사건에 대한 부정적 반향들과 매체의 정치사회적 참여 성향
      • 5. 맺음말 -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1907년 대부흥운동
      • 참고자료
      • 국문초록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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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996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기독교문사 Ⅰ : 1989

      3 서정민, "한국교회의 역사" 살림 2003

      4 서정민,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 한울아카데미 2000

      5 德部猪一郞, "韓國に於ける傳道" 1908

      6 內村鑑三, "朝鮮國と日本國-東洋平和の夢" 1909

      7 內村鑑三, "幸福なる朝鮮國" 1907

      8 The Korea, "The Million Movement and its Results" 1911.1

      9 W. N. Blair, "The Korean Pentecost and Other Experiences on the Mission Field, New York :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07

      10 Revival Ewa, "The Korea Mission Field" 1906.5

      1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1996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기독교문사 Ⅰ : 1989

      3 서정민, "한국교회의 역사" 살림 2003

      4 서정민,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 한울아카데미 2000

      5 德部猪一郞, "韓國に於ける傳道" 1908

      6 內村鑑三, "朝鮮國と日本國-東洋平和の夢" 1909

      7 內村鑑三, "幸福なる朝鮮國" 1907

      8 The Korea, "The Million Movement and its Results" 1911.1

      9 W. N. Blair, "The Korean Pentecost and Other Experiences on the Mission Field, New York :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07

      10 Revival Ewa, "The Korea Mission Field" 1906.5

      11 The Korea Mission Field, "The Holy Spirit in Pyeong Yang" 1907.1

      12 J. Z. Moore, "The Great Revival" 1907

      13 The Korea Mission, "The Direct Effect of the Revival" 1908.5

      14 W. G. Cram, "Revival Fires" 1905

      15 基督敎朝鮮, "Official Journal of Korean Methodist Church" 監理會 1908

      16 G.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ong Yang"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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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5-04-21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Society For Korean Church History -> The Society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Korea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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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43 0.43 0.57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 0.64 0.945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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