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작물의 생산성과 관련된 토양 관리 및 시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의 농업기술은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얻어진 것이었으며 중국의 농서에 의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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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Korean
학술저널
1-1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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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작물의 생산성과 관련된 토양 관리 및 시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의 농업기술은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얻어진 것이었으며 중국의 농서에 의존하...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작물의 생산성과 관련된 토양 관리 및 시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의 농업기술은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얻어진 것이었으며 중국의 농서에 의존하고 있었다. 세종 시대에 편찬된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인 “농사직설”에 비료 쓰는 법, 토양개량법 등이 기술되고 있다. 과학으로서의 토양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것은 19세기 말, 안정수가 편찬한 “농정신편” 이다. 그러나 이 신학문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 정세 등으로 우리의 힘으로 싹을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을사보호조약, 통감부 설치,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그들의 식량생산 기지로 삼아 자국에 공급할 식량을 증산할 목적으로 토양조사, 토양교육과 시험ㆍ연구 등을 주도하였다. 1906년 개교한 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었으나, 1908년 평양농림학교가 설립되고 1910년과 그 이듬해에는 한반도 각지에 15개의 농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는 10개년(1936~45년) 계획으로 농사시험장에서 전국적으로 규모의 농경지 토성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농경지 면적의 63%까지 조사하였으나 패전으로 사업이 중단되고 이 사업은 보고서 발간도 보지 못한 채 미완에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을 맞아 우리의 농사시험연구기관에서 과거의 조사 자료를 정리하는 등 뜻있는 사업을 수행한 바 있지만 6ㆍ25 전쟁으로 다시 혼란기를 겪게 되었다. 체계적인 토양비료에 관한 시험ㆍ연구와 교육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 것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설립된 남한 각지의 농업학교는 광복 후 농과대학(또는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농화학과가 설치되면서 토양비료분야 발전의 동력을 얻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새롭게 시작된 토양조사사업은 국제기구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지만 한국정부가 계승하여 자력으로 확대 실시하였다. 전 국토를 대상으로 하여 실시한 조사결과는 토양도로 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산화 하여 활용되고 있으며 주곡자급 달성과 녹색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국토 전 면적의 토양을 체계적으로 조사 분류하여 1/25,000 축척의 시군별 정밀토양도를 발간하였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우리의 자랑이다. 한국토양비료학회가 창립된 지도 40년을 넘기고 있으며 2014년 세계토양학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동안 토양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관심 대상 영역도 확대되었으며, 관련 산업, 제도 등에도 많은 변화가 발전이 있었다. 이에 부응하여 토양비료분야 교육과 정부 연구기관의 시험연구 사업은 확대 개편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축소 조정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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