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후보

      弁韓의 對外交易 = Foreign trade of Byeonhan in the Samhan period (4C B.C∼3C A.D)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1573692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Foreign trade were a important factor in development of Byeonhan. Trade, which is a part of production makes a lot of profits in the past as well as in present day.
      Through the geographical location of the mouth of Nakdong River and abundant resources of iron Byeonhan would have developed into a nation with not only the production techniques of iron but also maintenance of distribution networks for exporting iron. It is thought that there was a particular specialized group which was in charge of foreign trade with Japan and Han(漢). Tough it has not clarified yet the segmentalized aspect of it, it is believed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reveal the aspect through increased future materials. Foreign trade sessions can be catagorized into three sessions in large: session one, trade with Mahan with the West Gyeongnam Province as the center, session two, trade with Han(漢) through inland, session three,trade with Japan through sea. Although the trade party was changed, the center of trade in Byeonhan was concentrated in Gimhae, which is where Guyaguk(狗耶國) was located. Compared to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and Japan, a variety of Han culture was confirmed in Japan, particually in the northern part of Kyushu(九州) to the point of thinking that Japan would be more organized than the other in regard to accepting Han culture. On the other hand, according to records Byeonhan area was known to negotiate with many other areas by the medium of iron. However foreign materials are not among the best in that area and they do not exceed in quantity. It is considered that the aspect is caused by the different factors between Byeonhan and Japan; the first, which is mainly working on exchange in market place, the later,which is working on redistribution with a chief as the central figure.
      Also there was competition between Jinhan which use inland and Byeonhan which use sea. After later A.D. 1C, Byeonhan peacefully controled over trade network through sea. On the other hand, Jinhan’s inland network was unstable due to local force.
      번역하기

      Foreign trade were a important factor in development of Byeonhan. Trade, which is a part of production makes a lot of profits in the past as well as in present day. Through the geographical location of the mouth of Nakdong River and abundant resources...

      Foreign trade were a important factor in development of Byeonhan. Trade, which is a part of production makes a lot of profits in the past as well as in present day.
      Through the geographical location of the mouth of Nakdong River and abundant resources of iron Byeonhan would have developed into a nation with not only the production techniques of iron but also maintenance of distribution networks for exporting iron. It is thought that there was a particular specialized group which was in charge of foreign trade with Japan and Han(漢). Tough it has not clarified yet the segmentalized aspect of it, it is believed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reveal the aspect through increased future materials. Foreign trade sessions can be catagorized into three sessions in large: session one, trade with Mahan with the West Gyeongnam Province as the center, session two, trade with Han(漢) through inland, session three,trade with Japan through sea. Although the trade party was changed, the center of trade in Byeonhan was concentrated in Gimhae, which is where Guyaguk(狗耶國) was located. Compared to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and Japan, a variety of Han culture was confirmed in Japan, particually in the northern part of Kyushu(九州) to the point of thinking that Japan would be more organized than the other in regard to accepting Han culture. On the other hand, according to records Byeonhan area was known to negotiate with many other areas by the medium of iron. However foreign materials are not among the best in that area and they do not exceed in quantity. It is considered that the aspect is caused by the different factors between Byeonhan and Japan; the first, which is mainly working on exchange in market place, the later,which is working on redistribution with a chief as the central figure.
      Also there was competition between Jinhan which use inland and Byeonhan which use sea. After later A.D. 1C, Byeonhan peacefully controled over trade network through sea. On the other hand, Jinhan’s inland network was unstable due to local force.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변한의 발전에서 대외교역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해안을 중심으로 왜와 군현을 연결하는 지리적위치와 풍부한 철 자원을 통해 성장한 변한은 철기의 제작기술 뿐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하는 교역망의 정비를 통해 발전해 나갔다.
      대외교역의 획기는 크게 III기로 구분이 가능한데, 서부경남을 중심으로 마한과 교역하는 I기, 내륙을통해 한군현과의 교역이 중심이 되는 II기, 바닷길을 통해 왜와의 교역이 중심이 되는 III기로 나눌 수있다. Ⅰ기는 삼한이 시작되는 기원전 4세기, Ⅱ기는 준왕의 남하하는 기원전 2세기 초, Ⅲ기는 진한에서 변한으로 청동기 제작과 왜와의 교섭이 바뀌는 기원후 1세기 후엽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렇게 교역의대상지는 변화하지만 변한 내에서의 교역의 중심은 구야국이 존재한 김해로 집중화가 진행된다.
      또한 한반도 남부와 왜를 비교할 때, 일견 왜가 漢문화의 수용에 좀 더 조직적이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정도로 왜-특히 北部九州에서는 많은 漢의 문물이 확인된다. 변한지역은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철을 매개로 많은 지역과 교역을 하였지만, 남아 있는 유물은 상대적으로 격이 낮거나양적으로 풍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는 변한의 각 세력들은 시장교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각기 독자적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던 반면, 왜는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화된 교섭체제로 하위집단에게는 중심집단이 재분배하는 구조였고, 변한 사회가 청동기보다는 철기에 더 치중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내륙루트를 이용하여 교역하던 진한과 바닷길을 이용하던 변한이서로 경쟁적 관계에 있었지만 Ⅲ기부터 바닷길을 이용한 교역망을 원활히 운영하던 변한이 불안정한내륙망을 가지고 있던 진한보다 교역에 있어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번역하기

      변한의 발전에서 대외교역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해안을 중심으로 왜와 군현을 연결하는 지리적위치와 풍부한 철 자원을 통해 성장한 변한은 철기의 제작기술 뿐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

      변한의 발전에서 대외교역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해안을 중심으로 왜와 군현을 연결하는 지리적위치와 풍부한 철 자원을 통해 성장한 변한은 철기의 제작기술 뿐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하는 교역망의 정비를 통해 발전해 나갔다.
      대외교역의 획기는 크게 III기로 구분이 가능한데, 서부경남을 중심으로 마한과 교역하는 I기, 내륙을통해 한군현과의 교역이 중심이 되는 II기, 바닷길을 통해 왜와의 교역이 중심이 되는 III기로 나눌 수있다. Ⅰ기는 삼한이 시작되는 기원전 4세기, Ⅱ기는 준왕의 남하하는 기원전 2세기 초, Ⅲ기는 진한에서 변한으로 청동기 제작과 왜와의 교섭이 바뀌는 기원후 1세기 후엽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렇게 교역의대상지는 변화하지만 변한 내에서의 교역의 중심은 구야국이 존재한 김해로 집중화가 진행된다.
      또한 한반도 남부와 왜를 비교할 때, 일견 왜가 漢문화의 수용에 좀 더 조직적이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정도로 왜-특히 北部九州에서는 많은 漢의 문물이 확인된다. 변한지역은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철을 매개로 많은 지역과 교역을 하였지만, 남아 있는 유물은 상대적으로 격이 낮거나양적으로 풍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는 변한의 각 세력들은 시장교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각기 독자적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던 반면, 왜는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화된 교섭체제로 하위집단에게는 중심집단이 재분배하는 구조였고, 변한 사회가 청동기보다는 철기에 더 치중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내륙루트를 이용하여 교역하던 진한과 바닷길을 이용하던 변한이서로 경쟁적 관계에 있었지만 Ⅲ기부터 바닷길을 이용한 교역망을 원활히 운영하던 변한이 불안정한내륙망을 가지고 있던 진한보다 교역에 있어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정인성, "樂浪土城의「滑石混入系」土器와 그 年代" 백제연구소 40 (40): 1-31, 2004

      2 콜린 렌프류, "현대 고고학의 이해" 사회평론 2006

      3 小田富士雄, "한일교섭의 고고학 -야요이시대편" 1991

      4 아라이 사토루, "한반도 남부 출토 고분시대 왜경 In 청동거울과 고대사회" 복천박물관 2010

      5 한빛문화재연구원, "포항 성곡지구 도시개발사업부지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10

      6 칼 폴라니,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 민음사 1994

      7 우리문화재연구원, "울산 농소 공영차고지 조성부지 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2010

      8 國立金海博物館, "영혼의 전달자"

      9 이재현, "영남지역 출토 삼한시기 倣製鏡의 文樣과 의미" 한국고고학회 53 : 33-58, 2004

      10 洪潽植, "신라·가야권역의 마한·백제계 문물,4~6세기 가야·신라 고분 출토의 외래계 문물" 2007

      1 정인성, "樂浪土城의「滑石混入系」土器와 그 年代" 백제연구소 40 (40): 1-31, 2004

      2 콜린 렌프류, "현대 고고학의 이해" 사회평론 2006

      3 小田富士雄, "한일교섭의 고고학 -야요이시대편" 1991

      4 아라이 사토루, "한반도 남부 출토 고분시대 왜경 In 청동거울과 고대사회" 복천박물관 2010

      5 한빛문화재연구원, "포항 성곡지구 도시개발사업부지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10

      6 칼 폴라니,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 민음사 1994

      7 우리문화재연구원, "울산 농소 공영차고지 조성부지 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2010

      8 國立金海博物館, "영혼의 전달자"

      9 이재현, "영남지역 출토 삼한시기 倣製鏡의 文樣과 의미" 한국고고학회 53 : 33-58, 2004

      10 洪潽植, "신라·가야권역의 마한·백제계 문물,4~6세기 가야·신라 고분 출토의 외래계 문물" 2007

      11 崔鐘圭, "늑도유적의 구조" 慶南考古學硏究所 2006

      12 李在賢, "남한출토낙랑유물의성격 ,낙랑의고고학" 2005

      13 李在賢, "금관가야의 성장과 대외교역-교역로의 변화를 중심으로- , 加耶의 海上勢力" 2005

      14 김권구, "고든 차일드의 사회고고학" (주)사회평론 2009

      15 尹容鎭, "韓國靑銅器文化硏究-大邱坪里洞出土一括遺物檢討" 10 : 1980

      16 李陽洙, "韓國式銅戈로 본 韓·中·日三國의 交差編年" 3 : 2009

      17 申敬澈, "韓國出土の生土器系土器 In 한일교섭의 고고학 -야요이시대편" 1991

      18 南健太郞, "韓半島에서 小形製鏡生産-製作技術로 본 初期야요이시대 小形製鏡의 製作地- In 한반도의 청동기 제작기술과 동아시아의 고경" 국립경주박물관 2007

      19 李陽洙, "韓半島南部出土漢鏡의 分配와 流通" 15 : 2006

      20 李陽洙, "韓半島出土三韓·三國時代銅鏡의 考古學的硏究" 釜山大學校大學院 2010

      21 李陽洙, "靑銅器의 磨硏과 磨耗" 釜山考古學會 4 : 2009

      22 柳田康雄, "銅鏡鑄造における湯口について" 2005

      23 朴敬源, "金海地方出土의 靑銅遺物" 106 : 1970

      24 武末純一, "茶戶里遺蹟과 日本" (特輯) : 2009

      25 車崎正彦, "考古資料大觀 5 - 生·古墳時代鏡" 小學館 2002

      26 鄭澄元, "終末期無文土器에 관한 硏究-嶺南地方을 중심으로 한 예비적 고찰" 20 : 1987

      27 福泉博物館, "神의 거울-銅鏡"

      28 田尻義了, "生時代小形製鏡の製作地-初期小形製鏡の檢討" 22 : 2003

      29 田尻義了, "生時代小形製鏡の生産體制論" 18 : 2004

      30 高倉洋章, "生時代小形製鏡について(承前)" 70 : 1985

      31 高倉洋章, "生時代小形製鏡について" 58 : 1972

      32 後藤直, "生時代の倭·韓交涉-倭製靑銅器の韓への移出" 國立歷史民俗博物館 2009

      33 福岡市博物館, "生人のタイムカプセル"

      34 申敬澈, "熊川文化期紀元前上限說再考" 7 : 1980

      35 李康承, "漢鏡을 伴出한 細形銅劍의 一例" 1984

      36 井上主稅, "泗川勒島遺蹟의 쇠퇴-그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2011

      37 鄭仁盛, "樂浪土城と靑銅鏃" 東京大學大學院人文社會系硏究科·文學部考古學硏究室紀要 2002

      38 鄭仁盛, "樂浪土城と靑銅器製作" 東京大學大學院人文社會系硏究科·文學部考古學硏究室紀要 2001

      39 高久健二, "樂浪古墳文化硏究" 學硏文化社 1997

      40 西谷正, "朝鮮考古學の現段階" 1977

      41 梅原末治, "朝鮮古代の墓制" 座右刊行會 1947

      42 韓炳三, "曲玉의 起源" 129 : 1976

      43 杉原莊介, "日·韓出土の同鑄型による小銅鏡" 1978

      44 小田富士雄, "日·韓出土の同小銅鏡" 9 : 1982

      45 윤태영, "扶餘 九鳳里遺蹟 出土 鉇에 대한 考察" 부산고고학연구회 7 (7): 1-25, 2010

      46 片岡宏二, "彌生時代渡來人と土器·靑銅器" 1999

      47 高倉洋章, "弁韓·辰韓の銅鏡" 2002

      48 鄭仁盛, "弁韓·加耶의 對外交涉-樂浪郡과의 교섭관계를 중심으로 In 가야 고고학의 새로운 조명" 혜안 2003

      49 李在賢, "弁·辰韓社會의 발전과정 -木槨墓의 출현배경과 관련하여" 17 : 1995

      50 李在賢, "弁·辰韓社會의 考古學的硏究" 釜山大學校 2003

      51 林昭延, "弁·辰韓地域出土銅矛硏究" 釜山大學校大學院 2006

      52 井上主稅, "嶺南地方출토 倭系遺物로 본 한일교섭" 慶北大學校大學院 2006

      53 李昌熙, "嶺南地域으로의 鐵器文化流入에 대한 再考" 1 : 2006

      54 朝鮮總督府, "大正十一年度古蹟調査報告第二冊-南朝鮮に於ける漢代の遺跡" 1925

      55 이양수, "圓形으로 再加工된 漢鏡에 대하여 -破鏡과의 關係를 中心으로" 영남고고학회 (57) : 81-102, 2011

      56 穴澤光, "南部朝鮮出土の鐵製留甲" 76 : 1975

      57 李盛周, "南海岸地域에서 출토된 倭系遺物 In 古代東亞細亞와 三韓·三國의 交涉" 2002

      58 高久健二, "勒島遺蹟出土樂浪系遺物의 性格, 三國志魏書東夷傳과 泗川勒島遺蹟" 2005

      59 李在賢, "加耶地域出土銅鏡과 交易體系" 9 : 2000

      60 小田富士雄, "九州系生文化の對外傳播覺書 In 日本民族とその周邊·考古篇" 1980

      61 梅原末治, "上古初期の製鏡" 1 : 1959

      62 尹龍九, "三韓의 朝貢貿易에 대한 一考察" 歷史學會 162 : 1995

      63 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一朝閣 1984

      64 李尙律, "三韓時代의 展開" 釜山考古學硏究會·論叢刊行委員會 2006

      65 安在晧, "三韓時代嶺南地方과 北九州地方의 交涉史硏究-竝行關係를 中心으로" 釜山大學校韓國民族文化硏究所 1998

      66 申敬澈, "三韓·三國時代의 東萊 In 東萊區誌" 1995

      67 鄭仁盛, "‘瓦質土器樂浪影響說’의 검토" 47 : 2008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5-03 학회명변경 한글명 : 부산고고학연구회 -> 부산고고학회
      영문명 : 미등록 -> The Pusan Archaeological Society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KCI등재후보
      2010-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4 0.54 0.75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 0.77 1.732 0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