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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愚伏 鄭經世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현실대응 = Jeong Kyung-se's Political and Social Prestige during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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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56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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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Jeong Kyung-se was an excellent scholar and official in Youngnam district during the first half of 17th century. He was taught by Ryu Seong-ryong(柳成龍) who were Lee Hwang's best pupil. He was the leading pupil among Lee Hwang's school. Especially...

      Jeong Kyung-se was an excellent scholar and official in Youngnam district during the first half of 17th century. He was taught by Ryu Seong-ryong(柳成龍) who were Lee Hwang's best pupil. He was the leading pupil among Lee Hwang's school. Especially, he entered upon a political career as a member of deputations representing Youngnam(嶺南) Nam-in(Southern faction) during the King Injo's period and made the most of one's ability.
      During his tenure of office, he fulfilled his obligation with selfesteem and a sense of mission about his work. But he could not keep clear of engaging in party strife. Therefore he had ups and downs in his political path and public office by the party strife.
      He was disgraced with Nam-in(Southern faction) because of political attack of Buk-in(Northen faction) afte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had his best days again in the King Injo's time through a long period of an inactive political life. He helped and advised Kings using his knowledge and a noble character with all his hearts. During the process, he had been stripped from a government office because he advised King Kwanghaegun what somebody else hardly dared to advise to the king. For instance, he strongly advised bringing some new measures against current affairs and put the brakes on increasing King's own possessions. He also knew many things about the basic decencies of those civilized society and tried to apply the guidelines on upgrading the title of the King Wonjong, father of King Injo.
      Meanwhile he suffered two big wars in his life. He raised an army in the cause of loyalty when Japanese invaded Joseon in 1592. After that, he came back to Royal Court and provided support. He was appointed Youngnam hososa(嶺南號召使) in the Chinese Invasion of Joseon in 1627. He undertook tasks gathering provisions and army.
      Through such efforts we can make sure that he was a man of high prestige and confidence who could take the responsibility of the defense of the Youngnam distr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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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우복 정경세는 17세기 조선조 영남 남인 출신의 뛰어난 학자적 관료였다. 그는 퇴계의 수제자인 서애 류성룡에게 수학한 후 출중한 학문적 능력으로 퇴계 재전의 제자 중 선두의 위치를 점하...

      우복 정경세는 17세기 조선조 영남 남인 출신의 뛰어난 학자적 관료였다. 그는 퇴계의 수제자인 서애 류성룡에게 수학한 후 출중한 학문적 능력으로 퇴계 재전의 제자 중 선두의 위치를 점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다. 특히 정경세는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후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관료로 정계에 진출하여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었다. 그다지 많지 않는 퇴계학파 문과 출신 고위 관료의 처지를대표하는 존재로서 부각할 필요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정경세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그의 현실대응이라는 하나의 인식 틀 속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는 관료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관직생활에 임하였는데, 당쟁기를살아간 당인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행로와 사환도 당쟁의 추이에 따라 부침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이 북인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함께 실각하였다. 오랜 정체와 침체의 시간을 거쳐 인조대에 그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실력과 자질을바탕으로 군주를 계옥하는 데 정성을 다한 관료였다.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하여삭탈 관작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도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될 부분이다.
      수차에 걸쳐 시무책을 아뢴 바 있었으며, 궁중의 사사로운 재산 증식에 제동을 거는 발언도 수차례 올린 바 있었다. 예학에도 일가견을 가져 당시 원종 추숭을 둘러싸고 10년간 수차에 걸쳐 전개된 일련의 전례 논쟁에서 올바른 예의 적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편 그는 그의 생애에 큰 국난을 두 차례나 겪었다. 30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의병을 일으켜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면서 치열하게 대응한 바 있었다. 그 후에는 조정에 복귀하여 임난의 극복에 힘을 보태었으며, 임난의 막바지에는 경상도관찰사로서 마무리 업무를 담당하였다. 65세의 나이에 맞이한 정묘호란 때는 영남호소사에 임명되어 군량과 의병을 모우는 책임자로 활약한 바 있었다.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여 조정이 믿고 영남 한 지역을 맡길 수 있을정도의 높은 위상과 신망을 가진 존재였음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정경세는 이황의 적통을 류성룡을 통해 이어받은 학자적 관료로서 영남 남인의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높은 학문적 자질을 바탕으로 군주의 계옥에 힘쓴 관료였으며, 예학에 밝아 국가적 전례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한 예학자였다. 그리고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서는 자신의 한 몸을 던진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이로써 그는 영남을 대표하는 위상을 확보하였음은 물론 영남과 남인에 국한되지 않는 명성과 신망을 얻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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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禹仁秀, "立齋 鄭宗魯의 嶺南南人 學界內의 位相과 그의 現實對應" 동방한문학회 25 : 109-134, 2003

      2 우인수,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의 설립과 의료 기능" 대구사학회 104 : 99-13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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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우인수, "조선후기 산림세력연구" 일조각 1999

      5 우인수, "조선 인조대 정국의 동향과 산림의 역할" 41 : 112-114, 1991

      6 이영춘, "잠야 박지계의 예학과 원종추숭" 7 : 253-, 1990

      7 서인한, "인조초 복제논의에 대한 소고" 1 : 95-137, 1989

      8 이현진, "인조대 원종추숭론의 추이와 성격" 7 : 47-108, 2000

      9 유권종, "우복 정경세의 예학사상, In 안병주교수 정년기념논문집" 아세아문화사 377-404, 1998

      10 유권종, "우복 정경세의 예학 연구" 6 : 185-220,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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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인수, "조선후기 상주 존애원의 설립과 의료 기능" 대구사학회 104 : 99-13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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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유권종, "우복 정경세의 예학 연구" 6 : 185-220, 1995

      11 최재목, "우복 정경세와 상주지역의 퇴계학맥" 28 : 149-178, 2000

      12 우복선생기념사업회, "우복 정경세선생 연구" 태학사 1996

      13 최정묵, "우복 정경세 성리설의 기본입장과 율곡학 비판" 14 : 97-113, 2007

      14 김성윤, "영남의 유교문화권과 지역학파의 전개" 조선시대사학회 (37) : 141-179, 2006

      15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당의통략, 패림, 우복집, 국역우복집, 계암일록, 수암집, 동춘당집, 입재집, 계당집, 잠야집, 남계집"

      16 김호종,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학통" 31 : 135-164, 2003

      17 우인수, "동춘당 송준길의 영남인과의 접촉과 그 추이" 6 : 281-295, 2005

      18 우인수, "계당 류주목과 민산 류도수의 학통과 그 역사적 위상" 44 : 13-, 2009

      19 金鶴洙, "鄭經世의「愚伏先生諡狀」" 한국고문서학회 20 : 255-291, 2002

      20 설석규, "退溪學派의 分化와 屛虎是非(Ⅱ) - 廬江(虎溪)書院 置廢 顚末 -" 퇴계연구소 (45) : 311-372, 2009

      21 장세호, "元宗의 追崇問題" 한국사상문화학회 (50) : 399-423, 2009

      22 고영진, "17세기 전반 남인학자의 사상" 8 : 85-128, 1992

      23 이현진, "17세기 전반 계운궁 복제론" 49 : 87-126, 2003

      24 김학수, "17세기 영남학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25 김승영, "17세기 격물치지론에 대한 분석" 한국동서철학회 (36) : 315-33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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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3 통합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2-28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퇴계학과 한국문화 -> 퇴계학과 유교문화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8-23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퇴계학과 학국문화 -> 퇴계학과 한국문화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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