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원성왕의 종묘 개편과 서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종법제에 따르면 宗統은 宗子가계승하며, 나머지 아들은(別子, 支子) 小宗의 시조가 된다. 종자가 없으면 지자가 종통의 후사가 되어...
이 글은 원성왕의 종묘 개편과 서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종법제에 따르면 宗統은 宗子가계승하며, 나머지 아들은(別子, 支子) 小宗의 시조가 된다. 종자가 없으면 지자가 종통의 후사가 되어(爲人後者) 대종을 계승한다(入繼大統). 원성왕은 나물왕의 12세손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지자로서 대통을 계승한 것이 된다. 그는 선덕왕과 모계로 형제뻘이지만 재위한 왕의 아들, 손자, 증손, 사위, 외손에 해당하지 않는 방계였다. 원성왕은 만파식적의 수수를 통해 중대 왕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이는 원성왕이 나물왕계이자 태종무열왕계라는 중첩된 계보인식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前漢의 宣帝는 武帝의 증손으로 즉위하였는데, 아들이 천자이면 아버지를 천자로 제사한다는 예에 따라 아버지를 위한 皇考廟를 세웠다. 반면 後漢의 光武帝는 전한 고조의 9세손으로 즉위하였는데, 위인후자설에 따라 직계 4친을 私親廟로 격하하여 제사하였다. 원성왕과 관료들은 『한서』, 『예기』 등을 통해 위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원성왕은 지자로서 직계 4 친을 私親으로 대해야 했으나, 재위왕과 같은 대왕으로 추봉하였다. 또 선제와 같이 아버지만을 부묘해야 했으나, 직계 2친을 종묘에 부묘하였다. 이는 새로운 왕통의 개창을 표방하려는 원성왕의 의사가 어느정도 관철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원성왕은 즉위하며 赤烏를 받았는데, 적오는 이때 처음 등장하는 서상이다. 적오는 周 武王의 대업을 상징하는 서상으로 火德에 해당한다. 전한의 고조와 후한의 광무제도 화덕을표방하였다. 당시 패강진 두상인 김암은 오행설에 근거하여 적오를 헌상하였고, 원성왕은이를 통해 새 왕통의 확립을 선전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인 애장왕, 헌덕왕은 화덕을 표방하며 적오를 서상으로 삼아 왕위 계승의 정당화를 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