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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말려초 남한강 주변의 선종사원과 선사들의 활동 =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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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남한강 유역은 지금까지도 영남과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핵심축이다. 나말려초 남한강유역에의 역사적 쟁점은 이곳이 인적 물적 집결지로 경제적 여건이 풍부하였다는 점과 이곳은 신라의 변방지역으로서 822년 김헌창의란 이후 반신라적 세력들의 활동이 강하였고 그 결과 후삼국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에 따른 선종사원의 변화이다.
      나말려초 남한강 유역의 거점지역에는 어김없이 선종사원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기존의 사원에 선종승려들이 주석하면서 선종사원으로 변한 것으로 890년 이전까지는 신라왕실의 후원을 받은 선사들의 활동하였고 924년 이후 왕건에 의해 초치되어온 선사들에 의해 활성화된 사원으로 나눌수 있다. 전자는 여주 고달원의 현욱과 심희, 계립령을 넘어선 월광사의 대통, 영월 흥녕선원 절중, 원주 안락사의 도헌으로 이들은 도헌을 제외하고는 선사들이 먼저 주석한 다음 신라왕실에서 후원이 이루어졌다. 반면 후자 즉 원주 흥법선원의 충담, 충주 정토사의 현휘, 광주 천왕사의 찬유(고달원), 지평 보리사의 여엄등은 찬유를 제외하고는 왕건에 의해 중국 유학 후 왕사(忠湛) 국사(玄暉)로 승직을 받고 남한강 유역의 요지에 있는 기존의 사원에 파견되듯 주석하게 된 것으로 왕건의 정치적 적극적인 의도가 있었다.
      이렇게 후원자가 바뀌는 것은 남한강 유역의 정치세력이 바뀌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만큼 선종사원도 주석하는 선사들의 후원세력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는 후원자들의 정치적 의도, 즉 세력권 확보와 선사를 통한 그 지역의 간접적 지배라는 정치적 목적이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충주유씨는 영남지방에서 계립령을 내려와 남한강을 연결하는 충주의 요충지를 선점하고 새 왕조의 토목사업과 사원조성에 필요한 철광석의 생산지라는 이점을 가지고 일찍이 왕건에 귀부하여 왕실의 외가로서 득세를 할 수 있었다.
      남한강 유역의 선종사원이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은 사원과 고려 왕건에 의해 초치되어 경영된 사원으로 즉 890년 이전과 924년 이후로 활동이 극명하게 구분된다는 것 자체가 이들 지역 사원이 정치적 성향을 띄울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나말려초 남한강 유역의 사원이 갖는 역사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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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 유역은 지금까지도 영남과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핵심축이다. 나말려초 남한강유역에의 역사적 쟁점은 이곳이 인적 물적 집결지로 경제적 여건이 풍부하였다는 점과 이곳은 ...

      남한강 유역은 지금까지도 영남과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핵심축이다. 나말려초 남한강유역에의 역사적 쟁점은 이곳이 인적 물적 집결지로 경제적 여건이 풍부하였다는 점과 이곳은 신라의 변방지역으로서 822년 김헌창의란 이후 반신라적 세력들의 활동이 강하였고 그 결과 후삼국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에 따른 선종사원의 변화이다.
      나말려초 남한강 유역의 거점지역에는 어김없이 선종사원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기존의 사원에 선종승려들이 주석하면서 선종사원으로 변한 것으로 890년 이전까지는 신라왕실의 후원을 받은 선사들의 활동하였고 924년 이후 왕건에 의해 초치되어온 선사들에 의해 활성화된 사원으로 나눌수 있다. 전자는 여주 고달원의 현욱과 심희, 계립령을 넘어선 월광사의 대통, 영월 흥녕선원 절중, 원주 안락사의 도헌으로 이들은 도헌을 제외하고는 선사들이 먼저 주석한 다음 신라왕실에서 후원이 이루어졌다. 반면 후자 즉 원주 흥법선원의 충담, 충주 정토사의 현휘, 광주 천왕사의 찬유(고달원), 지평 보리사의 여엄등은 찬유를 제외하고는 왕건에 의해 중국 유학 후 왕사(忠湛) 국사(玄暉)로 승직을 받고 남한강 유역의 요지에 있는 기존의 사원에 파견되듯 주석하게 된 것으로 왕건의 정치적 적극적인 의도가 있었다.
      이렇게 후원자가 바뀌는 것은 남한강 유역의 정치세력이 바뀌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만큼 선종사원도 주석하는 선사들의 후원세력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는 후원자들의 정치적 의도, 즉 세력권 확보와 선사를 통한 그 지역의 간접적 지배라는 정치적 목적이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충주유씨는 영남지방에서 계립령을 내려와 남한강을 연결하는 충주의 요충지를 선점하고 새 왕조의 토목사업과 사원조성에 필요한 철광석의 생산지라는 이점을 가지고 일찍이 왕건에 귀부하여 왕실의 외가로서 득세를 할 수 있었다.
      남한강 유역의 선종사원이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은 사원과 고려 왕건에 의해 초치되어 경영된 사원으로 즉 890년 이전과 924년 이후로 활동이 극명하게 구분된다는 것 자체가 이들 지역 사원이 정치적 성향을 띄울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나말려초 남한강 유역의 사원이 갖는 역사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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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s still a core axis of transportation that relates the Yeongnam area and the Mid-Korean area. Historical issues concerning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include the fact that this area abounded with economic resources as a trading center for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that this area, as a remote region of Silla, had strengthened activities by anti-Sill powers after Kim Heon-chang's rebel in 822, and as a result, it became the center of post-Three-Nations powers' competitions, and that Zen Buddhist temples underwent changes accordingly.
      There were Zen Buddhist temples in stronghold regions around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without fail. Most of them had been general temples, but were changed into Zen Buddhist temples while Zen masters inhabited there. These temples can be divided into two categories: ones in which Zen masters supported by Silla's Royal family served before 890, and others that were activated by those Zen masters invited by Wang Geon since 924.
      The Chungju Yu Family, having supported Hyeon Hwi of Jeongto Temple at Chungju, played a leading role in connecting to Wang Geon the Zen masters who had led activities some Zen Buddhist Temples around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The Chungju Yu Family was able to get powers as a maternal relative of the Royal Family due to early subordination to Wang Geon when it moved downward to Gyerip-ryeong in the Yeongnam are to preoccupy the important position linked to the Namhan River, which was a place for iron ore production necessary for civil engineering projects and temple constructions by the new dynasty.
      In fact, though it could be conjectured that those Zen Buddhist temples seemed rich since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were superior to other areas in economic conditions, I have not been able to explicate the concrete states of affairs. However, the fact that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were places for post-Three Nations powers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due to such geographical conditions, and that those temples supported by Silla's Royal Family and those managed by masters invited by Goryeo's Wang Geon showed a clear distinction in activities before 890 and after 924, suggests that the temples around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had political propensities, and symbolically represents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the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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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s still a core axis of transportation that relates the Yeongnam area and the Mid-Korean area. Historical issues concerning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include the fact that this are...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s still a core axis of transportation that relates the Yeongnam area and the Mid-Korean area. Historical issues concerning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include the fact that this area abounded with economic resources as a trading center for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that this area, as a remote region of Silla, had strengthened activities by anti-Sill powers after Kim Heon-chang's rebel in 822, and as a result, it became the center of post-Three-Nations powers' competitions, and that Zen Buddhist temples underwent changes accordingly.
      There were Zen Buddhist temples in stronghold regions around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without fail. Most of them had been general temples, but were changed into Zen Buddhist temples while Zen masters inhabited there. These temples can be divided into two categories: ones in which Zen masters supported by Silla's Royal family served before 890, and others that were activated by those Zen masters invited by Wang Geon since 924.
      The Chungju Yu Family, having supported Hyeon Hwi of Jeongto Temple at Chungju, played a leading role in connecting to Wang Geon the Zen masters who had led activities some Zen Buddhist Temples around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The Chungju Yu Family was able to get powers as a maternal relative of the Royal Family due to early subordination to Wang Geon when it moved downward to Gyerip-ryeong in the Yeongnam are to preoccupy the important position linked to the Namhan River, which was a place for iron ore production necessary for civil engineering projects and temple constructions by the new dynasty.
      In fact, though it could be conjectured that those Zen Buddhist temples seemed rich since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were superior to other areas in economic conditions, I have not been able to explicate the concrete states of affairs. However, the fact that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were places for post-Three Nations powers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due to such geographical conditions, and that those temples supported by Silla's Royal Family and those managed by masters invited by Goryeo's Wang Geon showed a clear distinction in activities before 890 and after 924, suggests that the temples around the reaches of the Namhan River in Late Silla and Early Goryeo had political propensities, and symbolically represents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the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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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나말려초 남한강 유역의 지정학적 조건과 지배세력의 변천
      • Ⅲ. 남한강 유역의 선종사원의 형성과 동향
      • Ⅳ. 고려 초기 남한강 유역 선종사원과 충주유씨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나말려초 남한강 유역의 지정학적 조건과 지배세력의 변천
      • Ⅲ. 남한강 유역의 선종사원의 형성과 동향
      • Ⅳ. 고려 초기 남한강 유역 선종사원과 충주유씨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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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최인표, "羅末麗初 禪宗政策 硏究" 한국학술정보 2007

      2 최인표, "羅末麗初 師子山門의 動向" 11 : 1996

      3 최영준, "한국의 옛길 영남대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4

      4 蔡尙植, "정토사지 법경대사비 음기의 분석-고려초 지방사회와 선문의 구조와 관련하여-" 32 : 1982

      5 최성은, "전환기의 불교조각: 나말려초 불상의 새로운 경향" 33 : 2006

      6 김두진, "신라하대 선종산문의 사회경제적 기반" 21 : 1998

      7 조범환, "신라하대 智證道憲과 曦陽山門의 성립" 4 : 2005

      8 한기문, "신라말 선종사원의 형성과 구조" 2 : 2001

      9 조범환, "성주산문과 신라왕실.신라선종 연구" 一潮閣 2001

      10 李仁在, "선사(禪師) 긍양(兢讓;878~956)의 생애와 대장경(大藏經)" 한국사연구회 131 (131): 165-190, 2005

      1 최인표, "羅末麗初 禪宗政策 硏究" 한국학술정보 2007

      2 최인표, "羅末麗初 師子山門의 動向" 11 : 1996

      3 최영준, "한국의 옛길 영남대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4

      4 蔡尙植, "정토사지 법경대사비 음기의 분석-고려초 지방사회와 선문의 구조와 관련하여-" 32 : 1982

      5 최성은, "전환기의 불교조각: 나말려초 불상의 새로운 경향" 33 : 2006

      6 김두진, "신라하대 선종산문의 사회경제적 기반" 21 : 1998

      7 조범환, "신라하대 智證道憲과 曦陽山門의 성립" 4 : 2005

      8 한기문, "신라말 선종사원의 형성과 구조" 2 : 2001

      9 조범환, "성주산문과 신라왕실.신라선종 연구" 一潮閣 2001

      10 李仁在, "선사(禪師) 긍양(兢讓;878~956)의 생애와 대장경(大藏經)" 한국사연구회 131 (131): 165-190, 2005

      11 김혜완, "보원사 철불의 조상-고려초 원주철불과 관련하여-" 14 : 2000

      12 최영준, "남한강 수운연구" 35 : 1987

      13 서영일, "남한강 수로의 물자유통과 흥원창" 37 : 2005

      14 이인재, "나말여초 북원경의 정치세력 재편과 불교계의 동향" 한국고대사학회 31 : 295-322, 2003

      15 최성은, "나말려초 중부지역 석불조각에 대한 고찰 -궁예 태봉(901~918)지역 미술에 대한 시고 -" 한국역사연구회 44 (44): 29-64, 2002

      16 최병헌, "나말려초 선종의 사회적 성격" 25 : 1975

      17 추만호, "나말려초 선종사상사 연구" 이론과 실천 1992

      18 한기문, "고려태조의 불교정책-창건사원을 중심으로-"

      19 李仁在, "고려초기 원주지방의 역사와 문화" 32 : 2005

      20 김수태, "고려초 충주지방의 호족-충주 유씨를 중심으로-" 1 : 1989

      21 김혜완, "고달사의 불교사적 고찰.高達寺Ⅰ" 경기도 박물관 2002

      22 최성은,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연구-새로운 통일왕조고려의 출현과 불교조각-.미술사논단』16·17합집"

      23 서진교, "高麗太祖의 禪僧包攝과 主持派遣.고려태조의 국가경영" 서울대출판부 1996

      24 沈在明, "高麗太祖와 四無畏大師.고려태조의 국가경영" 서울대출판부 1996

      25 金龍善, "高麗 前期의 法眼宗과 智宗.江原佛敎史硏究.小花"

      26 김용선, "玄昱ㆍ審希ㆍ璨幽와 여주 고달사" 한국중세사학회 21 (21): 111-139, 2006

      27 朴貞柱, "新羅末·高麗初 獅子山門과 정치세력" 77 : 1994

      28 조범환, "新羅下代 西南地域의 禪宗山門 形成과 發展" 100 : 2005

      29 조범환, "新羅下代 禪僧와 王室" 26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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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7-07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Korean Ancient Historical Association -> The Society for Ancient Korean History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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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69 1.69 1.8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64 1.57 3.463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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