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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효행표창 현황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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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2056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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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은 효행을 표창하면서 백성을 교화시키고 이를 근간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 효행표창의 현황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효행표창기관의 변화, 일제강점기 효행표창현황, 효행 유형을 분석하였다.
      첫 번째로 한말 관제개혁 이후 효행표창기관의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본래 효행표창은 예조에서 담당하였는데, 1894년 관제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종백부로 예조의 업무가 이관되었다. 그러나 종백부는 설치된 지 8개월만에 혁파되었으며, 궁내부 내 장례원으로 담당 사무가 분장되었다. 이후 1905년 궁내부 관제가 개정됨에 따라 장례원이 폐지되고 예식원으로 이관되었으며, 1년 여 만에 예식원이 폐지되고 다시 장례원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3월에는 궁내부 장례원에서 내부로 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효행표창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일제강점기 효행표창 현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사회단체와 심지어 개인까지도 전국 각지에서 효행을 표창하는 독특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표창 주체별로 나눠 이를 살펴보았다. 일제는 조선 병합 직후 조선인들의 반감을 해소시킬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때 일제가 주목한 것은 전통적으로 조선인들에게 강조되어 왔던 유교사상이었고, 그 일환으로 효행의 표창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1920년대에는 유교단체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교를 기치로 유림들을 앞에 내세워 조선인의 사상을 통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 초기 조선인들의 사상통제에 이용되었던 효행표창은 일제말기 조선총독부의 정책 방향이 전시체제로 바뀜에 따라 그 필요성이 이전보다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효행표창이 일본 제국주의의 시책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효행 유형을 분석하였다. 1910년대 효행 유형은 조선시대의 효행 유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효행 유형의 대부분이 정절과 봉양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1910년대의 효행 유형이 단지·할고·여묘가 중점이 되는 것과 대비된다. 더불어 표창자명감에 소개된 효자·절부는 정절・봉양을 하기 위해 저축, 근검·근면장려, 잠업교사 등을 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사회정책으로 저축, 근검・근면장려, 잠업 등이 강조되는 상황이었다. 일제는 정책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들을 표창함으로써 일반민들에게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으며, 정책을 충실히 따른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짐을 선전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유교를 이용하여 인의충효를 활용한 정책을 전개했으며, 그 중 하나가 효행표창이었다. 일제강점 초기의 효행표창은 이러한 일환에서 볼 수 있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 말기로 갈수록 전시체제가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효행표창은 더 이상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적절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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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효행을 표창하면서 백성을 교화시키고 이를 근간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 효행표창의 현황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효행표창기관의 변화, 일제강...

      조선은 효행을 표창하면서 백성을 교화시키고 이를 근간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 효행표창의 현황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효행표창기관의 변화, 일제강점기 효행표창현황, 효행 유형을 분석하였다.
      첫 번째로 한말 관제개혁 이후 효행표창기관의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본래 효행표창은 예조에서 담당하였는데, 1894년 관제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종백부로 예조의 업무가 이관되었다. 그러나 종백부는 설치된 지 8개월만에 혁파되었으며, 궁내부 내 장례원으로 담당 사무가 분장되었다. 이후 1905년 궁내부 관제가 개정됨에 따라 장례원이 폐지되고 예식원으로 이관되었으며, 1년 여 만에 예식원이 폐지되고 다시 장례원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3월에는 궁내부 장례원에서 내부로 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효행표창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일제강점기 효행표창 현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사회단체와 심지어 개인까지도 전국 각지에서 효행을 표창하는 독특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표창 주체별로 나눠 이를 살펴보았다. 일제는 조선 병합 직후 조선인들의 반감을 해소시킬 방법이 필요하였다. 이때 일제가 주목한 것은 전통적으로 조선인들에게 강조되어 왔던 유교사상이었고, 그 일환으로 효행의 표창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1920년대에는 유교단체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교를 기치로 유림들을 앞에 내세워 조선인의 사상을 통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 초기 조선인들의 사상통제에 이용되었던 효행표창은 일제말기 조선총독부의 정책 방향이 전시체제로 바뀜에 따라 그 필요성이 이전보다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효행표창이 일본 제국주의의 시책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효행 유형을 분석하였다. 1910년대 효행 유형은 조선시대의 효행 유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효행 유형의 대부분이 정절과 봉양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1910년대의 효행 유형이 단지·할고·여묘가 중점이 되는 것과 대비된다. 더불어 표창자명감에 소개된 효자·절부는 정절・봉양을 하기 위해 저축, 근검·근면장려, 잠업교사 등을 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사회정책으로 저축, 근검・근면장려, 잠업 등이 강조되는 상황이었다. 일제는 정책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들을 표창함으로써 일반민들에게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으며, 정책을 충실히 따른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짐을 선전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유교를 이용하여 인의충효를 활용한 정책을 전개했으며, 그 중 하나가 효행표창이었다. 일제강점 초기의 효행표창은 이러한 일환에서 볼 수 있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 말기로 갈수록 전시체제가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효행표창은 더 이상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적절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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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서론
      • 2. 효행표창기관의 변화
      • 3. 일제강점기 효행표창 현황
      • 4. 효행 유형 분석
      • 【국문초록】
      • 1. 서론
      • 2. 효행표창기관의 변화
      • 3. 일제강점기 효행표창 현황
      • 4. 효행 유형 분석
      • 5. 결론
      • 참고문헌
      •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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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황성신문"

      2 "호남기록문화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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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Ⅲ-일제의 식민통치정책과 협력조선인(1919~1937)-" 도서출판 선인 2008

      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Ⅰ-조약과 법령-" 도서출판 선인 2007

      9 "중외일보"

      10 이명화, "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1910~1920년대)" 7 : 1993

      1 "황성신문"

      2 "호남기록문화시스템"

      3 금장태, "현대 한국유교와 전통"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4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0" 2000

      7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Ⅲ-일제의 식민통치정책과 협력조선인(1919~1937)-" 도서출판 선인 2008

      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Ⅰ-조약과 법령-" 도서출판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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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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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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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3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한일관계사학회 -> 한일관계사연구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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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5 1.5 1.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17 1.09 1.872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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