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항상 우리 삶의 주변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의 위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단지 당연하게 여기고, 인간은 동물의 생명과 처지에 관하여 무관심한 채 살아...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T13361500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학위논문(석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 신학과 , 2014. 2
2014
한국어
서울
ⅱ,53 p ; 26 cm
지도교수: 고재길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동물은 항상 우리 삶의 주변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의 위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단지 당연하게 여기고, 인간은 동물의 생명과 처지에 관하여 무관심한 채 살아...
동물은 항상 우리 삶의 주변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의 위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단지 당연하게 여기고, 인간은 동물의 생명과 처지에 관하여 무관심한 채 살아왔다.
역사의 많은 경우,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절대화하여 동물의 생명을 기계화 해왔음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런 관점은 특히 서구사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심지어 기독교도 이 시대적 흐름을 바꾸지 못하고 때로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다. 반면에 동양종교에서는 상대적으로 동물에 대한 존중이 나타났다. 교회는 동양종교의 모습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물론, 그들이 가진 믿음의 근거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동물을 보호하는 모습을 연구하여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잊혀진 동물에 대한 관점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본회퍼는 “섬김의 형태가 아닌 자신을 절대화 시키는 생명은 자신을 파괴한다.”라고 말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구별되는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별성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왔고, 여기에 인간의 이기심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동물에게 많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해왔다. 우리가 잘못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기계화는 계속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미래는 파괴적으로 변모할 위험성이 있다.
동물이 그들의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관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 생명 그 자체를 누릴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유사하게 자연적 생명을 가진 모든 동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섭리에 따라 살아갈 권리가 있다. 성경을 통해 동물이 왜 그들의 생명을 누릴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여러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생명은 하나님이 부여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 또, 동물이 땅에 충만한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며, 하나님은 동물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신다. 인간은 동물과 하나의 공동체로 함께 생과 사를 보내왔고, 동물을 통해 지혜와 아름다움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동물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일원이 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별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물에 비해 우월한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인간이 동물보다 계층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만 가진 독특함은 우리가 거룩한 소명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나타낸다. 곧, 피조세계를 향한 책임이다. 인간이 생명을 누리는 방식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섬기셨던 것처럼 피조물을 섬기는 방식을 포함한다.
먼저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피조세계사이의 제사장적 역할이 있다. 인간은 공감능력과 이성적 판단력을 활용하여 고통 받는 동물의 처지를 헤아리고 어려움으로부터 구해 주는 실천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또한, 동물과의 관계에서 왕으로써 섬기는 위치에 있다. 예수가 만물을 섬기듯이 동물의 필요를 고려하고 섬기는 모습은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동물의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는 태도는 동물의 생명을 절대시하는 “생명주의”와는 다르다. 본회퍼는 생명을 절대시하는 관점을 배격한다. 인간 세계에서 특정 집단의 생명을 절대화 했을 때 다른 집단의 생명을 기계화 했던 문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물의 생명을 절대시화 하는 일 역시 문제가 있다. 이는 인간이 동물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동물의 생명을 절대시하지는 않으면서도 동물의 자연적 생명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강조되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의 생명을 기계화하지도 않고, 절대화하지도 않으려는 갈등은 성경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9장의 갈등이다. 하나님께서 육식과 채식이 허락하신 본문은 조화로운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채식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며 육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양보적으로 허락하셨다는 의견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생명주의적 관점에서 채식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뜻이고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식을 요구하신다면 신구약을 아우르는 성경 전체의 지지가 필요하다. 또한, 채식만으로 충분하다는 의학적 근거도 보충되어야 한다. 채식이 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육식과 채식을 모두 허락하셨다고 보는 입장이 더욱 타당하다. 하지만 채식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동물의 생명을 기계화하는 관점이 지배적인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채식은 인간이 동물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피조세계를 살리는 일에 도움이 된다.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 육류를 섭취하고 채식을 적극 지향하는 삶의 습관은 환경 보전과 자원절약, 동물의 고통 감소, 기아 문제 해결, 인간의 건강 증진 등에도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동물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관점 속에서만 생각하는 사고의 범주를 넘어서서 온 피조세계가 화해와 회복,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라는 관점을 견지해야만 한다. 동물을 이용가치로만 파악하려는 관점을 배격하고, 필요한 만큼만 동물을 사용하며, 동물에게도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suum cuique)” 허락해 주려는 섬김과 배려의 태도가 인간에게 요청되는 책임 있는 삶의 모습이다.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