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구를 통해 구약성서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각 기자들이 이러한 인간 이해를 하게 된 상황들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이라는 측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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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학위논문(석사) --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 교역학 전공 , 2005. 2
2004
한국어
233.211 판사항(4)
전북특별자치도
ⅱ, 81p. ; 26cm.
참고문헌: p. 7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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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구를 통해 구약성서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각 기자들이 이러한 인간 이해를 하게 된 상황들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이라는 측면을 ...
지금까지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구를 통해 구약성서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각 기자들이 이러한 인간 이해를 하게 된 상황들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이라는 측면을 보아야할 것이다.
만약 학자들의 견해가 사실이라면, P 기자의 인간이해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나온 것이다. 바벨론 초로기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생활이라는 상황은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했고, 자신들의 점령국인 바벨론의 신 마르둑보다 강한 온 세상의 유일한 창조신이신 야웨를 생각하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자신들의 하나님 야웨가 힘이 업어서이거나 살아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반성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비록 지금은 이방 바벨론의 땅에서 낙심하고 절망한 존재와 같지만 올바른 제의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된다면 다시금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축복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자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에게 희망과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결단하시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1장의 구절에서 성서적 휴머니즘을 그 바탕에서 형성한다. 또한 이것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의미는 인간 자체에 대한 선포가 아니라 인간 창조에 대한 선포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이전 단계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창조 행위 이전에 정신적인 결단을 하는 단계에서 형상의 의미는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엄성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성서의 증언은 인간의 존재이유와 삶의 특권과 사명에 대한 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사건을 받게 되고 자기의 삶의 뜻이 분명하게 밝혀지게 된다.
반면에, J 기자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번영했던 솔로몬의 통치기간에 그러한 인간이해의 고백을 하고 있다. 지파동맹과의 단절 속에서 이스라엘은 왕정제도로 하나의 국가로 변모하면서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지만, 그 속에서 야웨 신앙은 다윗 왕조와 유다 국가를 지지하는 국가종교로 전략하는 시련을 맞게 되었다. 야웨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에 갇히게 되었고,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쌓은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악의 만연한 현실 속에서 J 기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교만함과 오만함에 대해 경고의 소리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흙에서 나온 존재요, 하나님의 생명의 입김에 의해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리고 산다 해도 하나님의 그의 생명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흙으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야웨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 자체가 생사고락을 넘어 땅과 하나로 얽혀 있는 것은 인간 창조 재료가 지상의 소재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이 물질적 근원으로 보아 얼마나 미소하고 허약한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특히 범죄 이전의 인간도 불멸의 존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맺었다. 그 생기로 말미암아 인간은 살도록 창조된 생명체가 되었다. 그렇기에 인간은 제한된 인간이면서 하나님의 숨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하나님의 숨과 삶의 터전이 있어야 하고 노동과 언어 그리고 동반자가 있어야 완전한 창조의 인간이 된다. 즉 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서로 공동체의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와 인간 서로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인의 사고에 <네페쉬 하야>(□□□ □□□)라는 인간의 표현은 인간의 피조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고백 내지는 명백한 신학이 전개되어 있다. 즉 인간은 그 자체가 결코 신일 수 없다는 신앙, 인간의 실체를 신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신앙,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자의 위치에 의하여 조성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앙을 견지한다. 또 인간-땅 주제는 명백한 신학적 의도 속에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 외에서 이해한 인간은 성서 속에서 신학적으로 발견될 수 없고 특히 창세기 2장에서 이해한 인간은 결코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서로 동반자의 위치에서 야웨 하나님이 정한 창조 질서 안에서 활동할 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 인간이 마음대로 주어진 환경을 제 마음대로 정복하는 것도 인간에게 위탁된 임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의 인간 이해에서 이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다. 서로 다른 기자에 의해, 서로 다른 목적과 다른 문학적 양식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간 이해를 통해 고백하고 있는 내용은 서로 상이한 면도 있지만 그 속에 공통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창조의 최고 존재로 하나님 다음으로 영화와 존귀한 위치에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인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서도 다른 피조물을 만드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표현으로 인간 창조를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며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에 의해 생명력을 부여받았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나약함을 발견할 수 있다. 존귀한 존재로서의 인간이지만 신과 같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오만을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경고,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또한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섭리로 피조된 존귀한 존재라는 이 두 기자의 소리를 통해 인간들이 스스로 균형을 이루어 나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사례들이 많음을 볼 때, 우리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인간을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존귀하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은 더 존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생명의 존귀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짐승을 도살하는 것도 제안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지상의 생명체에게 있는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짐승의 생명이라도 제멋대로 야만적인 행위로 죽이는 것은 살인이요 그 피의 대가를 하나님이 물어, 그러한 자는 백성에게서 끊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것이다(레 17:10-14). 짐승의 생명도 이렇게 취급되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천하 보다 귀하게 다루는 영원한 존재이다.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생명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자연과도 바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가꾸며 유지하는 사명을 형성해야 한다. 현 우리 사회의 생명 경시 풍조와 자연 경시 풍조는 하나서 끊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것이다(레 17:10-14). 짐승의 생명도 이렇게 취급하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천하 보다 귀하게 다루는 영원한 존재이다. 인간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생명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자연과도 바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가꾸며 유지하는 사명을 형성해야 한다. 현 우리 사회의 생명 경시 풍조와 자연 경시 풍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파괴시키고 하나님의 소유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의 무모한 행위요 무서운 범죄행위인 것이다. 인간은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요 가장 가치 있는 존재며, 자연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난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존귀함을 지닌 존귀한 존재인 동시에 흙으로 만들어진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이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말하는 것이며, 인간의 생명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이 가장 귀한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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