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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래진 한남대학교 박물관 2010 考古와 民俗 Vol.13 No.-
금강은 한반도의 서편 중앙을 통에서 서로 흐르는 5대강 가운데 세번째로 큰 유역을 가졌다. 선사시대 이래 유구한 역사가 금강 유역에서 영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의 왕도인 공주와 부여가 자리 잡았고 고려 이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서도 그 역할이 중요했던 중부권의 대표적인 강이다. 즉 금강은 한반도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역사·경제·문화의 큰 젖줄 인 셈이다. 이러한 금강 유역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분야별로 다양하였다. 먼저 서울이 아닌 지방포구에서의 상품유통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였고, 그 발전방향을 밝힌 연구가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금강의 수운 포구시장권·중계하항의 변천과정·각 하항 및 유역 일원의 성쇠과정에 대한 연구와 조선 후기 강경포의 입지조건·포구 설치의 배경, 상품 유통구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부여지역의 민간신앙과 규암리 민속에 대한 연구 등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또한 종합학술조사서로 1993년에 『금강지』 그 이후 『금강유역사연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연구들은 특정 지역· 주제를 다루는 전문연구이거나 종합학술조사, 금강의 개발에 따른 발굴보고서류 등이 대부분이다. 본 연구에서는 18세기 이후 발전한 생산력을 기초로 다양한 형태로 사회경제가 변화되고 있던 당시의 규암면 규암리에 대해 살펴보았다. 규암리는 금강의 중류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수가 규암까지 이르렀으며, 다른 곳과 달리 하폭의 변동이 큰 특정을 가지고 있어 연구 대상 지역으로 하였다. 또한 (재)금강문화유산연구원에서 2010년 6월 14일 ~8월 31일 일정으로 실시한 4대강 살리기 금강 부여지구 구교리·중리 유물산포지 문화재 발굴(표본시굴)조사지역에서 규암진과 관련한 목조 시설물이 발견되어 나루의 일부구조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899년 군산 개항 이후 강경포의 발전과 포구 상권의 변화 속에서 마을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지 추적해보았다. 이러한 과정은 충분한 자료와 심층적인 현지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본고는 많지 않은 자료와 짧은 면담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한 마을·지역의 결괴물이 모여서 더욱 섬도 있는 금강에 관련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규암리가 자리하고 있는 백마강의 지리적 환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금강중류 지역의 지리적 특정을 파악함으로써 규암진과 규암장의 성쇠盛훌)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금강 수운을 살펴봄으로써 금강의 포구 및 나루터의 발달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규암진의 역할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18세기 이후 금강의 수운기능 강화 속에서 발전한 강경포의 상권에서 규암리를 알아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규암진과 규암장의 성쇠 속에서 매년 베풀어진 마을신앙은 마을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살펴보았다.
송현강 韓南大學敎中央博物館 2010 考古와 民俗 Vol.13 No.-
영남 지역에는 모두 17군데 기독교 유적지에 31개의 개별 유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나누어 보면 부산·경남이 11군데 유적지에 17개 유적, 대구-경북은 6군데 유적지에 14개의 유적이 있다. 또 영남 지역 31개의 기독교 유적 가운데 약 30%에 해당하는 10개 유적이 현재 문화재로 지정·등록되어 문화재청과 지방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영남 지역 기독교 유적들의 문화재 지정·등록 상황을 보면 국가지정문화재는 없고, 시·도지정문화재로 기념물 1개, 유형문화재 7개, 문화재자료 1개가 있다. 그리고 1개의 기독교 유적이 등록문화재로 문화재청에 등록되어 있다. 그 외 나머지 유적들은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증축·변경되어 문화재청의 기준을 충족할 수 없거나 가시적인 건축물이 아니라서 아예 문화재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서흥석 韓南大學敎中央博物館 2010 考古와 民俗 Vol.13 No.-
충현서원은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서 보듯이 충남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17세기 초중반 충청지역 사림의 여론이 모이는 장소였고, 다른 서원의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서원이었다. 이번 『심원록』 분석은 필자로서도 매우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조사였다고 생각하지만 이 글을 통해 당시 충현서원의 위상을 조명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마음이다. 추후에 충현서원의 『심원록』과 함께 『청금록』의 분석이 상세히 이루어져 당시 충현서원의 위상과 역할이 어떠하였는지 연구되는 것을 숙제로 남 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