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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祿牌 연구

        임영현 한국학중앙연구원대학원 2014 국내석사

        RANK : 250639

        本論文では、朝鮮時代の禄牌制度と禄牌様式、そして頒禄籤紙を通じた禄俸制の 運用実態を通時的に研究した。禄牌は公文書として文武官員の禄俸受領資格を証明 する。また、禄俸を受領するときに証拠文書として活用され、禄俸を受領したとい う禄俸受領處証である頒禄籤紙が添付された複合的な性格の文書である。今日まで 禄牌研究は、禄牌様式を明らかにすることに集中していた。しかしながら禄牌の大 きさについての検討と頒禄籤紙の研究は不十分である。また禄俸制研究者は頒禄籤 紙を参考せずに、文献史料だけで朝鮮時代の禄俸制を検討した結果、朝鮮時代の禄 俸制の運用実態を把握するには限界を見せた。したがって、本研究では、朝鮮時代 禄俸の発給対象と手順の解明と共に頒禄手順を調べた。そして禄牌様式の検討と時 代や役所にしたがって禄科表記·発給官員·印章·外面表記を調べた。あわせて、禄牌 が大きさを異にする基準について究明した。最後に、正3品堂上官以上の正3品堂下 官以下に分けて頒禄籤紙の大きさと作成方法を確認した後、頒禄籤紙の記録と禄俸 制の禄科を比較·検討した。 朝鮮時代の禄牌制度は高麗時代の制度を受け継いだ。禄牌発給先は、禄官に任命 された役人に限定される。発給役所は、三司→司評府→吏曹と変更しており、1466 年(世祖12年)に王の伝教があって以来、吏曹と兵曹が文官と武官の禄牌発給をそれ ぞれ担当した。頒禄手順は、頒禄日に持参する文書の種類に従って『大典通編』施 行前後に分けて考察した。禄官は『大典通編』施行前には敎旨·禄牌·給禄所志を持 参し、『大典通編』施行後は敎旨と禄牌だけで禄俸を受領することができた。 朝鮮初期に発給された禄牌様式は、高麗時代のことを襲用した。『経国大典』で 禄牌式が法制化される以前では、始面と禄科表記、印章で変化を確認することがで きる。そして『経国大典』で禄牌式が法制化された以降に発給された禄牌は、『経 国大典』の禄牌式に遵守した。しかし、禄科表記·印章·発給官員·外面表記で変化が あった。 官職の正3品堂上官以上と正3品堂下官以下の禄牌は大きさを変えて発給された。堂上官以上の禄牌は、縦×横の長さの平均がそれぞれ112.4×79.2cmであり、堂下 官はそれぞれ45.5×14.4cmである。二種の縦×横の平均は50cm以上の差があり、 朝鮮時代を通じて官職の正3品堂上官と堂下官を基準に大きさを変えて発給され た。 堂下官に限り、18世紀後半から木版式禄牌が発給されており、吏曹と兵曹で は版に刻まれている文字が一部異なっていた。 頒禄籤紙も禄牌と同じように官職の正3品堂上官と堂下官でことなった大きさの ものが発給されていた。前期頒禄は監察と宏興倉役人が引き受けていたので、“分 臺之印”が押された。しかしながら18世紀後半から監察が頒禄業務から退いたた め、それ以降は“廣興倉印”が押された。 堂下官禄牌が木版式に変わった後に堂下 官の頒禄記録は手記で該当月だけを表記する方式に変わった。1851年(哲宗2年)に 発給された黃銑の禄牌に始めて頒賜印が押された以降は、この様式が続いた。 頒禄籤紙の頒禄記録を通じて、朝鮮時代の禄俸制の運用実態を把握することがで きる。朝鮮時代の禄俸制は、一年に2回(1·7月)支給する六朔頒禄制、一年に四回(1· 4·7·10月)支給する四孟朔頒禄制(1439)、そして毎月支給する月俸制(1701)に変化 した。六朔頒禄制は考証することができないが、 禄科の基準がなかったというこ とが分かる。しかし、現在まで調査された禄牌の中では1414年(太宗14年)から 1463年(世祖9年)までは品階を基準に支給しており、1467年(世祖13年)からは官職 を基準に支給された。四孟朔頒禄制は、1439年(世宗21年)に初めて実施された。施 行初期には禄科に基づいて禄俸を支給したが、壬辰倭乱を経て、実際の禄科より少 ない量を支給した。四孟朔頒禄制時期には、1647年(仁祖25年)と1670年(顯宗11 年)に頒禄品目と数量を減らす方向に禄科が改正されたが、実際の頒禄量は禄科に及 ばなかった。 四孟朔頒禄制時期に一時的に月俸を支給したが、実質的に月俸制が 施行されたのは1701年(肅宗27年)であった。四孟朔頒禄制時期より頒禄品目と数量 はさらに減ったが、この時期はまた禄科に準ずる頒禄が行われなかった。そして、 1721年(景宗元年)の改正で量はさらに減り、これは『続大典』に掲載された。18世 紀初期まで『続大典』の禄科に基づいて頒禄が行われたが、19世紀後期の頒禄は 『続大典』の禄科に従わない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본 논문은 조선시대 祿牌 제도와 양식, 그리고 頒祿 籤紙를 통한 녹봉제의 운용 실태를 통시적으로 연구하였다. 녹패는 공문서로서 문무관원의 녹봉 수령 자격을 증명하며, 祿官이 녹봉을 수령할 때 證憑 문서로 활용된다. 그리고 녹봉을 수령하였다는 녹봉 수령증인 반록 첨지가 첨부된 복합적인 성격의 문서이다. 현재까지 녹패 연구는 녹패 양식을 밝히는 데 집중하였다. 그렇지만 녹패의 크기에 대한 검토와 반록 첨지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며, 녹봉제 연구자들은 반록 첨지를 참고하지 않고 문헌 사료만으로 조선시대 녹봉제를 검토한 탓에 조선시대 녹봉제의 운용 실태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녹패의 발급 대상과 절차에 대한 규명과 더불어 반록 절차를 검토한 후, 녹패 양식 검토와 함께 시대 및 관청에 따라 달라지는 祿科 표기·발급 관원·인 장·외면 표기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녹패가 크기를 달리하는 기준에 대하여 규명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정3품 당하관 이하로 나누어 반록 첨지의 크기와 작성 방식을 검토한 후, 반록 첨지의 기록과 녹봉제의 녹과를 비교·검토하였다. 조선시대 녹패 발급 대상은 祿官에 임명된 관원으로 한정되며, 발급 기관은 三 司→司評府→吏曹로 변경되었는데 1466년(世祖 12) 전교 이후 吏曹와 兵曹에서 文官과 武官의 녹패 발급을 각각 담당하였다. 반록 절차는 반록 시 지참해야하는 문서에 따라 『大典通編』 시행 전후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大典通編』 시행 이전에 祿官이 녹봉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敎旨·祿牌·給祿所志를 지참했으며, 『大典通編』 시행 이후에는 교지와 녹패만으로 녹봉을 수령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발급된 녹패 양식은 고려시대의 것을 따랐는데, 『經國大典』에서 녹패식이 법제화되기 이전까지 始面·녹과 표기·인장에서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經國大典』에서 녹패식이 법제화된 이후 조선시대 녹패는 『經國大典』 녹패식을 준행하였으며, 법제화된 이후 녹과 표기·인장·발급 관원·外面 表記에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관직의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정3품 당하관 이하의 녹패는 크기를 달리하여 발급되었다. 당상관 녹패는 세로×가로의 평균 길이가 112.4×79.2cm이며, 당하관 녹패는 45.5×14.4cm로, 세로×가로의 평균이 50cm 이상씩 차이가 났다. 그리고 종친을 제외하고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관직의 정3품 당상관과 당하관을 기준으로 크기를 달리하여 발급된 것을 알 수 있다. 당하관 녹패에 한하여 18세기 후반부터 木版式 녹패가 등장하였으며, 이조와 병조는 版에 새기는 부분이 달랐다. 반록 첨지도 녹패와 마찬가지로 관직의 정3품 당상관과 당하관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조선 전기 반록에는 監察과 廣興倉 관원이 참여하였으며, 인장은 “分臺 之印”이 답인되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감찰이 반록 업무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廣興倉印”이 답인되었다. 당하관 녹패가 목판식으로 바뀐 이후, 당하관의 반록 기록은 해당 월만 手記로 작성하는 방식으로 변한 뒤, 조사된 녹패 가운데 1851년(哲宗 2) 黃銑 녹패부터 頒賜印으로 반록 기록을 표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녹봉제는 일 년에 두 차례(1·7월) 지급하는 六朔頒祿制, 일 년에 네차례(1·4·7·10월) 지급하는 四孟朔頒祿制(1439), 그리고 매월 지급하는 月俸制 (1701)로 변화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녹패에 첨부된 반록 첨지의 반록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녹봉제의 운용 실태 고찰해 보았다. 육삭반록제 시기에는 녹과에 일정한 기준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 초기 녹패를 통해 1414년(太宗 14)부터 1463년(世祖 9)까지는 품계를 기준으로 반록하였고, 1467 년(世祖 13)부터는 관직을 기준으로 반록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39년(世宗 21)에 처음 시행된 사맹삭반록제는 시행 초기에는 녹과에 준하여 녹봉을 지급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제 녹과보다 적은 수량을 지급하였다.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1647년(仁祖 25)과 1670년(顯宗 11)에는 반록 품목과 수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녹과를 개정하였지만, 실제 반록 수량은 녹과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시로 월봉을 지급하고, 반록 수량을 감하는 등의 조처를 하였다. 임시로 시행했던 월봉 지급은 1701년(肅宗 27)에 제도화되었다. 사맹삭반록제 시행 초기와 비교하면 반록 품목과 수량이 상당히 줄었고, 녹과에 준하는 반록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1721년(景宗 元年) 수량을 더 줄여 녹과를 개정하였고, 이는 『續大典』에 실렸다. 18세기 초반까지 『 續大典』 녹과가 준행된 것을 반록 첨지와 문헌 사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 반록은 『續大典』 녹과에 준하는 수량을 반록하지 못하였다.

      •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을 위한 데이터 아카이브 운용 사례 연구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바로알리기'사업을 중심으로

        하소라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3 국내석사

        RANK : 234303

        최근 디지털 환경을 토대로 하는 공공외교, 즉 ‘디지털 공공외교’가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공공외교의 디지털화와 디지털 전환이 엄밀히 구분되지 못하고 있고,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에 있어 공공기관의 역할에 주목한 사례연구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바로알리기’사업을 중심으로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 요건과 공공기관의 역할을 고찰했다. 서론인 제1장에서는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 현상을 고찰한 연구들을 검토하였다. 제2장은 ‘공공외교’에 대한 정의와, 공공외교 활동이 온라인에서 시스템화 되어 이뤄지는 공공외교의 ‘디지털 전환’ 개념을 검토했다. 제3장에서는 공공외교를 담당하는 여러 공공기관 중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바로알리기 사업의 디지털 전환 사례를 살핀다. 한국바로알리기 사업의 디지털 전환은 온톨로지 설계, 데이터 아카이빙 두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한국바로알리기 사업의 온톨로지와 아카이빙 데이터를 분석하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통해 이 아카이브의 확장과 공유를 촉진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제4장에서는 이 사례의 시사점을 토대로 공공기관이 디지털 아카이빙을 병행하는 업무 수행을 통해 투명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면서 고객과 공중의 참여를 촉진하여 공공외교의 주체와 활동을 다양화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In “public diplomacy,” one of the three elements of the Republic of Korea's diplomacy, “digital public diplomacy," which is based on the recent digital environment, has been attracting attention. Nonetheless, the digitalization and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are not strictly distinguished, and there are hardly any case studies focusing on the role of public institutions in the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This paper examined the current status and directions of digital public diplomacy, by analyzing the Understanding Korea Project carried out by the CEFIA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Chapter 1, which constitutes the introduction, reviewed research studies examining the digital transformation phenomenon of public diplomacy, and showed that there have been attempts to empirically analyze whether digital transformation contributes to a nation's innovation growth, as well as attempts to conceptualize such a phenomenon. Chapter 2 looked at the definition of “public diplomacy” proposed by the Edward Murrow Center for Public Diplomacy, and the concept of digital transformation in which activities of public diplomacy are systematized and conducted online. After dealing with the roles of many different public institutions responsible for public diplomacy, Chapter 3 analyzed the ontology of the Understanding Korea Project conducted by the CEFIA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from the perspective of digital transformation and then explored the possibility of public diplomacy on metaverse through Mozilla Hub, which emerged recently. On the basis of such analyses, Chapter 4 suggested that public institutions can improve the transparency and efficiency of information on diplomacy, simultaneously providing various content and diversifying the agents and aspects of public diplomacy. This study is theoretically significant in that it proposes a kind of 'road map' for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with public institutions assumed as its practitioners, and at the same time, it has limitations in that this study just points out the necessity of detailed studies of digital transformation of the sub-elements of public diplomacy, namely cultural public diplomacy, knowledge diplomacy, and policy public diplomacy. However, this study is evaluated to be of significance in that it examines the specific roles of public institutions in the process of digital transformation of public diplomacy in the information society.

      • 조선에 전래된 武英殿聚珍版書의 서지적 분석

        苗凱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8 국내박사

        RANK : 234303

        武英殿建於明朝樂年間(1403-1424),曾為政治權利的中心地。清朝康熙年間 (1662-1722)設立武英殿書局。康熙四十年(1701)以後,武英殿開始大量發行書籍。1772年將《永樂大典》的佚書,各省的採集本,武英殿刊本,匯為《四庫全書》。由於工程 量浩大久費時日,便從較為稀缺的宋元版本和《永樂大典》的佚書開始撰修。1773~1803 年共刊印了138種書籍,其中木版本4種,木活字本134種。這138種書稱為《武英殿聚珍 版書》。《武英殿聚珍版書》是清內府規模最大的一次木活字印刷活動。在中國木活字印 刷史和典籍史上具有重要意義。武英殿聚珍版書刊印完成後被發往東南五省并允許地方 翻刻,翻刻本為木版本。翻刻本與殿本在樣式上非常相似,也稱為《武英殿聚珍版書》。 由於時代的動蕩與變遷,現存的《武英殿聚珍版書》多為散本。國內足本該叢書有多少 部,並沒有具體的統計。此外,韓國,日本,美國等國家也有不同數量的相關書本。 本論文的主要研究對象為韓國現存的《武英殿聚珍版書》,研究目的在於調查韓國現 存該叢書的數量及內容,分析相關目錄,了解叢書的購買時期和東傳的過程,以及明確該叢書對韓國產生的影響和意義。 韓國該叢書的收藏機構主要集中在韓國學中央研究院藏書閣,首爾大學奎章閣韓國 學研究院,韓國國立中央圖書館,東亞大學圖書館,全南大學圖書館,高麗大學圖書 館。韓國的現存本按版本分為聚珍版和翻刻木版本,其中以木版本居多,聚珍本主要藏於首爾大學奎章閣韓國學研究院。從內容來看,集部書比經史子各部的書數量上略少,並且現存本多為頁數相對較少的著作,袖珍本也較多。這主要受印刷效率,製作成本, 便攜性等方面的影響。此外,韓國還藏有兩本相關目錄,用途分別為購書清單和點檢用。 韓國現存本的購入時間上限為1774~1781之間。18世紀的朝鮮重視文化,這無疑 是該叢書購入過程中的的催化劑。1773年朝鮮使臣嚴璹與中國文人關於《四庫全書》筆 談記錄可視為《武英殿聚珍版書》話題的開始。朝鮮對《四庫全書》一直具有濃厚的興趣, 正祖曾下令購買《四庫全書》,此後林濟遠, 李鼎運, 沈能翼等人不斷向朝鮮報告《四庫全書》的消息。此外,李德懋也向中國文人潘庭筠尋求過《武英殿聚珍版書》的目錄。 《武英殿聚珍版書》流傳到朝鮮后產生了重要影響。正祖下曾令按《武英殿聚珍版程 式》中的木活字製作方法製作生生字和整理字。此外,還有私人製作的金陵聚珍字等。與此同時韓國現存的兩本目錄也具有重要的意義,並且得益于該叢書的朝鮮東傳韓國的 藏書也更加豐富。 武英殿은 明代 永樂年間(1403-1424)에 설립되어 한 때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었던 기관이다. 清代 康熙年間(1662-1722)에 武英殿書局이 설립되어 문헌 간행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康熙四十年(1701)이후, 무영전에서 대량의 도서를 간인하기 시작 하였다. 乾隆三十七年(1772)에 『永樂大典』의 佚書, 각 省의 採集本, 무영전 간본을 수집하여 『四庫全書』를 편찬했다. 『사고전서』는 양이 방대해서 모두 撰修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판본이 드문 판본과 『영락대전』의 일서부터 먼저 간인하였다. 간인 작업은 乾隆三十八年(1773)에 시작하여 嘉慶八年(1803)까지 138종의 책(목판본 4종, 목활자본 134종)을 인출하게 되었다. 이 138종 책을 『무영전취진판서』라고 한다. 『무영전취진판서』는 淸內府에서 시행한 목활자 인쇄 중 규모가 제일 큰 인쇄활동의 결과물이다. 중국 목활자 인쇄사와 典籍 보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중국 일부 지방의 출판사에서도 번각하였으며, 모두 목판으로 인쇄했다. 번각본 총서와 무영전본 총서의 양식이 많이 닮아서 내부의 인쇄분이 內聚珍本, 번각인쇄본은 外聚珍本이라고 한다. 하지만 淸代의 멸망과 사회의 변동 때문에 『무영전취진판서』가 많이 흩어졌다. 지금까지 완질의 총서가 얼마나 현존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무영전취진판서』는 중국 외에도 한국, 미국, 일본 등 몇 몇 나라에서 확인된다. 본 연구는 한국에 현존하는 『무영전취진판서』를 대상으로 삼았다. 現存本의 내용과 수량 및 판본을 조사하고, 『무영전취진판서』 관련 서목의 역할과 총서의 구입 시기 및 전래 경로를 규명하며, 이 총서가 한국에 끼친 영향과 의의를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한국에 『무영전취진판서』의 주요 소장처로 확인된 곳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동아대학교 한림도서관,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이다. 현존본을 판본으로 분류하면 취진본과 목판본으로 나뉜다. 또 취진본은 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經·史·子·集部의 책은 다 있고, 集部 책의 수량은 經·史· 子 각 部의 책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또 現存本은 모두 冊數가 상대적으로 적은 책이고, 奎璧本도 많이 있다. 이유는 인쇄의 효율성, 제작비용, 편의성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는 『무영전취진판서』 관련 서목이 두 종 있다는 것을 확인되었다. 두 서목의 역할은 각각 購書單子와 點檢用이다. 한국에 현존하고 있는 『무영전취진판서』의 구입 시기 상한은 1774~1781 사이이 다. 18세기, 문화를 중시하는 사회배경은 『무영전취진판서』 구입하는 데의 촉매 역할을 했다. 1773년, 조선 사신 嚴璹가 중국문인과 한 『사고전서』 관련 筆談 기록은 조선 『무영전취진판서』 얘기의 시작으로 이후에도 조선은 『사고전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정조는 명을 내려 『사고전서』를 사게 했고, 林濟遠, 李鼎運, 沈能翼 등이 계속 『사고전서』의 편찬 소식을 전했다. 李德懋도 중국 문인 潘庭筠에게 해당 서목을 구한 적이 있었다. 『무영전취진판서』의 조선 전래 후에 『武英殿聚珍版程式』의 활자제작방식이 生生 字와 整理字의 제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개인이 활자를 제작할때 취진이라는 용어가 수용되기도 하였다. 또 장서각에 소장된 서목은 구서단자로써그 당시에 수입책의 가격을 파악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규장각 장본은 총서본의 판본, 완질인지 낙장본이지 확인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무영전취진판서』 의구입으로 인해 한국의 중국저술의 장서가 풍부하게 되었다.

      • 조선후기 중앙군영의 착호(捉虎) 활동과 의의

        배성열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2 국내석사

        RANK : 234287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the tiger hunting activities by the central military camp during the latter part of Joseon. In the past, disasters by tigers and leopards happened often in the Korean Peninsula. In Joseon, the government put in efforts to reduce such disasters upon the foundation of the state and continued these efforts into the latter part of Joseon, when tiger hunting activities were based on Chakhojeolmok. The number of tigers was reduced by the joint operation of the royal forces and local residents in local areas. In the capital city and its surrounding areas, the central military camp had the job of hunting tigers. The central military camp started its full-blown tiger hunting activities based on Chakhojeolmok, published in 1699 (25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According to the book, the central military camp had to deal with disasters around the Gyeonggi Province, but real issues restricted the principal scope of Samgunmun's activities to the capital city of Hanyang and the sites of royal tombs. In these areas, the central military camp reduced the number of harmful tigers through organized hunting by mobilizing dozens of hunters and by a few outstanding hunters over two centuries or so. Over 65% of the tiger hunting activities of the central military camp took place at royal tombs because the densely wooded sites of royal tombs became tiger habitats amid nationwide deforestation. With royal tombs as their base, tigers threatened human life and property across vast areas. Royal tombs became the origin of disasters by tigers in the capital city and Gyeonggi Province. During this period, kings made visits to the royal tombs frequently, which made it more important to accompany the kings during the management of royal mausoleums and their visits to royal tombs than in the previous period. Catching a tiger in these areas was an important activity to protect the people in Seoul and Gyeonggi, manage the royal mausoleums, and safeguard the kings. 본 논문은 조선후기 중앙군영에 수행된 착호(捉虎, 호랑이사냥) 활동에 관하여 다루고자한다. 과거 한반도에서 호랑이·표범에 의한 호환(虎患)은 흔하게 일어나는 재해 중 하나였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이러한 호환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조선후기에도 지속되었다. 조선후기 착호활동은 「착호절목(捉虎節目)」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지방에서는 관군과 지역민들의 협력 하에 호랑이를 줄여나갔으나 나라의 중심인 도성과 그 주변부에서는 중앙군영에 의하여 호랑이 사냥이 이루어졌다. 중앙군영의 착호활동은 1699년(숙종 25) 제정된 「착호절목」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르면 중앙군영은 경기도 전역에서 발생하는 호환에 대처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삼군문의 주요 활동지역은 사실상 한양 도성과 왕릉의 소재지를 중심으로 제한되었다. 해당 지역에서 중앙군영은 수십명의 포수들을 동원한 조직적 사냥이나 몇몇 우수한 소수의 포수들에 의한 사냥을 통하여 약 2세기 동안 해로운 호랑이(惡虎)들을 줄여왔다. 이러한 중앙군영의 착호활동은 65% 이상이 왕릉에서 행해졌다. 이는 전국적으로 산림이 황폐화되는 가운데, 수목(樹木)이 우거진 왕릉의 소재지는 호랑이들의 서식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랑이들은 왕릉을 거점으로 광범위한 영역에서 인간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다. 따라서 이곳은 도성과 경기지역에서 발생하는 호환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왕들의 능행(陵幸)이 잦은 시점이었다. 이 때문에 전시기와 비교할 때, 능소의 관리와 능행 시 왕의 수행 업무가 중요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호랑이를 잡는 것은 서울과 경기의 민인(民人)들을 지키고 동시에 능소의 관리와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활동이었다.

      • 正祖의 御製統治文書 硏究

        문보미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7 국내박사

        RANK : 234287

        본고에서는 정조가 국왕의 자리에 올라 統治를 목적으로 御製한 문서와 公文書 制度 개편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정조가 재위 기간 중 국정 운영을 위해 지배의 장치로서 문서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살펴보았다. 국왕이 지향한 국정 운영 이념이나 의지는 그 뜻을 담은 문서가 연쇄적으로 생성되고 전달됨으로써 조선 사회에 실현될 수 있었다. 국왕의 통치와 문서 사이 긴요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선시대 국왕 통치의 특성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 국왕의 문서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 이에 정조가 국정 운영에 활용한 綸音, 傳敎, 諭書, 敦諭, 封書, 批答, 判付 7종 류의 御製文書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Ⅱ장은 정조가 구축한 문서 체제에 대한 이해의 장이다. 조선시대 公文書 운영의 흐름에서 정조의 독특한 문서 운영 양상을 포착하였다. 조선의 공문서 운영 제도는 『經國大典』에 문서 행정과 문서 서식의 두 분야로 나뉘어 규정되었다. 조선의 국왕들은 이 문서 운영의 대원칙을 대체로 유지하였다. 정조대 편찬한 『大典通編』과 『典律通補』에서 문서 행정 규정이 추가되고 서식을 규정한 문서 종류도 두 배로 증가하였으나, 대부분 정조 이전의 역대 국왕 때 발생한 변화를 정조가 종합적으로 법전에 명시한 결과이다. 주목할 것은 정조가 추가한 문서 행정 관련 법조항이다. 자신이 신설한 奎 章閣에서 중앙과 지방 기관에 보내거나 받는 문서 종류를 규장각 아문 급보다 높여 특정하였다. 이미 정조는 지방에 대한 규장각의 직접적인 문서 운영이 가능하도록 명한 바 있어 규장각을 통해 기존 공문서 운영 체계에 변화를 도모하려한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조항으로 풀이된다. 정조는 문서에 관한 법제도 차원의 정비보다 수시로 지침을 내려 문서 체제 조정에 개입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節目과 같은 시행 세칙 마련을 주문 하고 기관의 문서 운영 원칙을 官署志에 수록하여 제도화하는 작업이 잦았다. 또한 단호한 처벌을 통해서라도 국왕의 명령이 관원들에 의해 적합한 격식을 갖춘 문서로서 차질 없이 구현될 수 있는 문서 체제를 기대하였다. 정조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체계적인 문서 행정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국가의 체모와 기강을 바로잡는 길이라 여겼다. Ⅲ장에서는 정조가 문서 제도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축해 가는 한편, 통치를 위해 각 수취자에게 지어 보낸 적합한 격의 御製文書에 대해 살펴보았 다. 관료 기관에 대해 직접적인 행정 행위를 유발시킨 문서로 傳敎와 判付 가 있다. 傳敎는 정조가 해당 수취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명령·지시·고지·선포 등의 내용이 이행되도록 행정 조직의 수장으로서 명할 때 사용하였으며 判 付는 기관에서 올린 보고 문서에 대한 허가 여부를 승인할 때 사용하였다. 이들 문서에는 국왕의 명령 이후 제대로 문서화하여 발급하지 않을 경우 처벌되는 행정 강제력이 있었다. 한편 기관이 아닌 개별 신료나 백성에게 보낸 문서들은 국정 운영의 동반 자로서 신료를 우대하거나 백성의 의사까지도 수용하려는 君父로서 정조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직하려는 신하를 만류하기 위해 특별히 御製하여 보낸 諭書, 敦諭, 批答은 자신을 보필할 신하를 설득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綸音은 정조의 정책 방향이나 국정 운영 의지를 자신의 언어로 지어 해당 신료나 전국에 공표하는 데 사용하였다. 封書는 자신을 대신하여 각 지방의 백성들을 찾아가 慰撫하고 민정을 살피도록 御史에게 내린 문서이다. 기관의 보고 문서에 대한 응답을 判付로 하였듯 신료가 의견을 진달한 문서에 대해서는 批答으로 응하였는데 단순 가부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료 의견에 대한 국왕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알려 주는 데 사용하였다. 정조가 백성에게는 특히 諺解綸音이나 문서 형태의 綸音을 대량으로 간행 하고 배포하여 민생에 대한 정책과 열의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국정에 대한 지방민의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지방에서는 上疏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였고 정조는 그들에게 批答을 御製하여 보냈다. 관료 조직, 신료와 백성까지 각 구성원들과 직접적인 소통매체로서 御製文書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신료나 백성에게 보낸 御製文書는 기관에 내린 문서와 달리 수취자가 국왕의 의지대로 시행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정조의 의사에 반하여 신료가 사직 의사를 재차 피력하거나 수취자가 문서로 호응하지 않더라도 처벌이 따르지는 않았다. 일방적 명령이 아닌 설득용이나 포고용 성격을 가진 행정 강제력이 약한 이러한 문서를 정조가 골몰하여 직접 짓고 지속적으로 보낸 것은 신료를 禮로써 존중하고 국정 운영에 백성을 배제하지 않는 포용적인 정책 방향을 전한 메시지로서 이해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정조가 御製文書를 활용하기 위한 핵심 기구로서 운영한 奎章 閣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동안 규장각은 문화교육기관으로서 주로 주목받아 왔는데, 규장각 업무 중에는 상시적으로 정조의 御製를 정리하는 일도 포함 되었다. 閣臣들은 諭書나 祭文 등을 代撰하였고, 綸音을 편찬하고 간행한뒤 ‘奎章之寶’를 날인하여 지방까지 반포하고 그 결과를 보고 받아 御製의 생산과 사후 관리에 규장각이 거점 기관으로서 작동하였다. 그 배경은 閣臣이 중앙의 고위 기관에서 직접 국왕에게 아뢰는 啓辭를 포함한 중앙기관에서 사용하는 행정 보고 문서는 물론 지방을 관할하는 監司 가 사용하는 狀啓까지 폭넓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규장각의 閣臣은 告身과 敎書의 문서 서식을 섞어 정조가 새롭게 만든 閣臣敎旨를 받아 임명 되었고, 정조의 각종 우대를 받으며 주요 국책 사업을 주도적으로 맡아 수행 하였다. 閣僚들은 정조의 御製文書를 받아 각 지역으로 慰諭使나 暗行御史 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정조는 抄啓文臣도 직접 선발하여 양성하였는데, 국왕의 국정 운영 방향을 숙지한 그들도 御製文書를 받아 御史로 파견되어 정조의 국정 의지를 실질적으로 구현시켰다. Ⅴ장에서는 정조가 신설한 군사 조직 壯勇營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어제문 서에 대해 살펴보았다. 1793년 壯勇內營과 壯勇外營으로 분리하고 水原府를 留守府로 승격시켰으며 같은 날 外營을 水原留守府에 주둔시켰다. 壯勇外使 는 水原留守가 겸임하게 하여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조직이 한 사람에 의해 통솔되도록 하였다. 정조는 이후 傳敎를 내리고 관련 節目을 제정하게 하여 留守 임명 절차, 水原留守와 壯勇外使가 문서에 사용하는 인장, 壯勇內營과 外營이 주고받는 문서, 水原留守府와 대내외 부처 간 사용 문서, 水原留守가 중앙에 대해 보고할 때 사용하는 문서 등을 규정하였다. 내용에 따르면 수원부에서는 중앙에 狀啓로 보고하도록 하여 문서 체계상 지방의 監司 급에 해당하는 문서 행정을 할 수 있었다. 동시에 수원유수의 품계에 따라 중앙과 지방의 문서 체계 지형에서 壯勇外營의 위상에 변동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壯勇外使를 임명할 때 정조가 직접 手決을 하고 ‘施命之寶’라는 御寶를 날인한 傳令을 사용하였다. 전례 없이 독특한 양식의 任命傳令으로서 閣臣 敎旨처럼 정조의 특별한 관심에서 생성된 임명 문서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수원유수는 수원부의 행정 조직 장관이자 行宮整理使와 壯勇外使를 겸임하 였고, 지방 조직의 수장인 京畿道觀察使와 중앙의 핵심 아문인 備邊司 堂上 을 겸하여 京官職 업무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막강한 지위에 정조대부터 고종대까지도 규장각 閣臣을 역임한 인물을 상당수 임명하였다. 수원유수로서 정조에게 아뢰는 경우 巡營을 거치지 않고 狀啓를 올릴 수있는 권한이 있었고 국왕의 지시는 有旨로 발급받았다. 규정과 운영상 수원 유수의 문서 활동은 정조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京官職이 아닌 外官職이 사용하는 문서였다. 반면 壯勇外使로서는 중앙 아문에서 사용하는 啓辭와 草 記와 같은 문서로 아뢰었고 정조는 諭書를 내렸는데 두 경우 모두 別諭로서 시행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정조의 국정운영 방식은 주로 朋黨政治, 蕩平政治 혹은 문예군 주나 학자군주 면모를 강조한 學問政治, 文化政治와 같은 개념에서 추상적 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번 연구를 통해 국왕의 통치에서 문서의 중요성이 환기되고 문서의 다양한 효력과 기능을 조명하는 연구가 지속되어 문서 자체에 대한 이해는 물론 국왕의 국정 운영 방식과 실질적인 양상을 이해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 바란다. This paper studies Eoje(御製) written by King Jeongjo(正祖) of Joseon Dynasty. Despite the important relationship between the king’s rule and the documents, the king’s documents has not been analyzed in earnest. Thus, I focus on seven types of King’s Writing Imperial written by Jeongjo himself : Yuneum(綸音), Jeongyo(傳敎), Yuseo(諭書), Donyu(敦諭), Bongseo(封書), Bidap(批答), Panbu(判付). First, I look at the document system that Jeong-jo had maintained. Jeongjo generally abided by the offical document regulations in the code used until the previous King. However, only the regulations related to the offical document used by the Kyujanggak(奎章閣) newly established by Jeongjo changed in the code. Based on the new document system, Jeongjo actively used King’s writing Imperial(御製文書) to operate the state. He sent Jeongyo and Panbu to the bureaucracy to show the king’s strictness as the head of administration. He also sent Yuneum, Yuseo, Donyu, Bongseo, and Bidap to the individual vassals and people. Jeongjo actively used Kyujanggak to utilize King’s writing Imperial. When Jeongjo informed his idea to Kyujanggak, Kyujanggak made King’s writing Imperial and informed it to the public institution and local people. Jeongjo created a military organization called Jangyongyoung(壯勇營) in Suwon(水原). Jeongjo allowed Jangyong -young to use the documents which used by senior officials to report to him. Eventually, Jeongjo ruled the kingdom based on the official document system and sent King’s writing Imperial to the bureaucracy, the vassal, and the people. This study shows that Jeongjo had sufficiently informed his opinions and accepted opinions of various members of society by using King’s writing Imperial. This is Jeongjo’s unique style of governance.

      • 조선후기 洑분쟁 연구 : 고문서 사례를 중심으로

        남은별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0 국내석사

        RANK : 234287

        Reservoir (Bo, 洑) is an aquatic facility that brings water from streams to rice fields to store it. In addition, this facility has been used together with dams (堤堰) and waterwheels (水車) by abiding by geographical landscape since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Compared to dam needed to employ workforce and building technique, simply-structured reservoir, together with rice planting, were disseminated across the nation. As this simple water-facility is vulnerable to natural disasters such as flood and torrents, it needed routine maintenance every year. There was a growing controversy over reservoir in rural areas amid increased use of this facility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Despite such rising disputes, little has been known about various causes and process of resolution. This paper thus analyzed the process of controversy and resolution in the course of maintaining and utilizing reservoirs that demonstrate the example of aquatic facilities in the Joseon Dynasty. With an aim to examine the reality of reservoir controversy, causes of controversy and resolution process, this paper collected and investigated historical manuscripts such as Gomunseojibseong published by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s well as the Center for Korean Studies. Throughout research, the author identified 70 historical manuscripts on this dispute and conducted research based on such documents. First, reservoir controversy is classified into one on varying quantity depending on the location of reservoirs and the other one. The former disputes can be divided into two types: one controversy triggered by the distance and location between a new one (新洑) and old one (舊洑) amid building reservoirs, and the other controversy over changed locations of reservoirs to other places, not the original place in the midst of maintenance. Other causes include conflicts over cultivating submerged lands (浦落地) near reservoirs, over woods and workforce used for public service in the process of maintaining reservoirs and over water price or tax imposed by a person who had bought and monopolized reservoirs in advance. In addition, terms shown in the historical manuscripts were arranged in a list. By doing so, it was indicated that terms such as Cheongbang (川防), Bangcheon (防川), Bangchuk (防築) and Geo (渠) referring to reservoir were actually used in the remaining historical manuscripts. Other terms such as “Bo {Gu+Tol}” (洑{口+㐋}) not presented in government documents and family (門中) records as well as Bomin (洑 民) and Daebohoe (大洑會) typically referring to a group of farmers were arranged for making a list. Lastly, documents as well as administrative records used in reservoir controversy were thoroughly examined so as to analyze the process of controversy between the accused and plaintiff, the roles of leaders and governors in the cases and their attitude. 洑는 물을 하천에서 논으로 직접 인수하는 水利施設로 삼국시대부터 입지 조건에 맞게 堤堰, 水車 등과 사용되었다. 다수의 인력과 축조기술이 필요했던 堤堰에 비해 비교적 구조가 단순한 洑는 이앙법의 보급과 함께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쉬운 구조의 水利施設이었던 만큼 홍수, 급류 등의 자연재해에 취약한 단점이 있었고 매년 잦은 수리 등의 관리가 필요했다. 조선후기 洑 사용의 증가와 더불어 농촌에서는 洑 를 둘러싼 분쟁이 증가하였다. 하지만 분쟁의 다양한 원인과 분쟁 해결 과정에 대한 실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조선시대 수리시설인 洑의 修築 과 이용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의 양상과 해결과정을 고문서 사례를 통해 분석하였다. 洑분쟁의 실제를 확인하고 분쟁의 원인과 해결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 한국학중앙 연구원에서 발간한 『古文書集成』과 한국학자료센터 등에서 확인 가능한 고문서를 수집·분석한 결과 洑분쟁과 관련된 고문서 70건을 확인하였고 이를 통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洑분쟁은 洑의 위치에 따른 水量의 변동에 관한 분쟁과 그 외로 나눌 수 있다. 水量의 변동에 관한 분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존의 洑가 존재하는데 새로운 洑를 新築하는 과정에서 新洑와 舊洑 사이의 거리와 위치를 때문에 발생한 新舊洑분쟁과 수리가 필요한 洑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洑의 원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에 洑를 쌓아 洑의 위치가 변동 된 것에 대한 분쟁으로 나뉜다. 그 외 원인으로는 洑 주변 浦落地의 개간에 따라 생긴 분쟁, 洑의 修築과정에서 공역에 쓰이는 목재나 인력에 대한 분쟁, 洑를 私占한 개인이 부과한 水價에 대한 분쟁 등의 양상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고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용어에 대한 정리를 실시하여 洑를 뜻하는 川 防, 防川, 防築, 渠 등의 용어가 현존하는 고문서에서 사용된 실제를 확인하였다. 또한 관찬사료와 門中자료에서는 볼 수 없었던 ‘洑{口+㐋}’의 의미와 洑에 소속된 농민들이 본인들의 집합을 지칭하는 용어인 洑民, 大洑會 등을 정리하였다. 다음으로는 洑분쟁에서 사용되었던 문서들을 종합적으로 살펴 洑분쟁의 문서 행정에 대해 살펴 분쟁의 당사자들인 元隻의 분쟁 진행과정과 관할 수령 및 관찰사의 진행방식과 취하는 태도 등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였다.

      • 門中古文書 디지털 아카이브 구현 연구

        김하영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5 국내석사

        RANK : 234287

        This study looked at the historical document and knowledge information approaches and utilization plans in order to enhance the use of digitalized historical document materials and accelerate the expansion of knowledge through association of various konwledge elements. The ‘historical document,’ objects of this study, are the data investigated and collected from the families scattered around the country for about thirty years by Jangseogak (藏書閣) Archiv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s the lives of kinsfolk are recorded in these documents, members of the kinsfolk are the subject in producing the documents and also has status as the object. In the first place, I analyzed the composition of ‘Korean Historical Document Center(韓國學資料센터)’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which is our representative digital archive of historical documents, in order to present new approaches to historical document studies that might be used to reach the truth of the life of kinsfolk by unfolding the contents of historical document more clearly. Based on this, this study set individual kinsfolk as unit of service model for presenting the correlation between members of kinsfolk and historical document data. For the purpose of studey, I chose ‘Bunjaegi(Property Records or Records of Property Inheritance)’ document which is very closely associated with personal information of pedigree among various genres of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to the kinsfolk as primary data of this study. And more specifically, this study set the historical document from the 'Ocheon family'(烏川家) of ‘Gwangsan Kim Clan'(光山金氏) which occupied the most in Bunjaegi documents. I made an intensive analysis of 27 documents from Kim Mu(金務) to Kim Gwanggye(金光繼), grandson of Kim Hyoro(金孝盧) - eight generations - and drew database design plans for linking the information of members of kinsfolk with historical documents. As a result, the ontology consisted of six classes such as person, official institutes, historical document, inheritance, slave, and land -content factors appearing in historical document. And as semantic elements that are the connecting nodes of semantic relation network, five node data - person, official institutes, historical document, inheritance, and slave, - were set and the connection relation between individual nodes, for example, between persons, between documents, and between slaves was expressed with previously defined relation. Furthermore, the relations between document-person, between person-inheritance, between inheritance-document, between slave-inheritance, and between slave-person were also defined depending on the rule and systematically organized into appropriate database for implementing semantic web. And then, in order to verify the contents, relation network database was implemented using the graph database management software (Neo4j). The visualization data presented as a result of a series of the database compilation suggests that the knowledge information from various resources can be linked and expanded, revealing new meaning in the data relation network without limiting to media in which it was originally contained. 이 연구는 문중 소장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의 발전적인 모델을 보이기기 위한 것이다. 종래의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는 고문서의 디지털 사본을 온라인 상에서 제공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고문서의 외형을 보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을 분석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할 수 있도록 하는 지식 정보 아카이브의 실험적인 모델이다. 연구의 대상자료인 ‘고문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이 30여 년에 걸쳐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門中으로부터 조사·수집해 온 자료들로, 고문서 안에 문중의 삶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문중 구성원들은 고문서 생산의 주체이자 객체의 지위를 갖게 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본 연구에서는 고문서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문중의 삶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는 고문서 연구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먼저 대표적인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고문서자료관’의 구성을 분석하였다. 대상자료로는 다양한 장르의 문중 고문서 중에서도 가장 밀도 있게 가계(家系)의 인적 정보와 결부되어 있는 문서인 ‘분재기류’를 선정였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문중 고문서 가운데 분재기류의 비중이 큰 ‘광산 김씨 오천가’의 고문서와 그 문중 가계 정보의 기록인 ‘光山金氏族譜’를 연구 대상으로 하되, 분재기류 문서 중 김무(金務)로부터 김효로의 손자 김광계(金光繼)대까지 8대에 걸친 27편의 문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문중 구성원의 가계 정보와 고문서의 연계를 위한 데이터베이스 설계안을 도출하였다. 그 결과 인물, 관부, 문서, 재산, 노비, 토지로 구분된 6개의 클래스(Class)와 그 클래스에 속하는 개체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할 수 있는 관계(Relation) 서술어, 개별 개체의 성격을 보이기 위한 데이터 속성(Attribute), 관계성의 성격을 보충해서 설명하는 데 필요한 관계 속성(Relation Attribute) 등을 설계하였다. 이와 같이 설계된 문중 고문서 디지털 아카이브의 온톨로지에 따라 광산 김씨 오천가 고문서와 족보의 내용을 디지털 지식 정보 데이터로 편찬하고, 이를 통해 이 데이터 모델의 실효성을 검증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제시한 문중 고문서 온톨로지는 광산 김씨 오천가 문중 고문서뿐 아니라 유사한 성격의 문중 고문서를 정보화 할 때에도 데이터 모델로서 활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체계화된 데이터는 시각화 기능을 지원하는 소트웨어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그래프로 전환될 수 있고, 그러한 방법으로 데이터 관계망 속에 담긴 의미를 더욱 용이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고문서를 중심으로 전통시대 문화 연구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訓鍊都監習陣圖》 연구

        김창규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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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訓鍊都監習陣圖》의 소장 경위, 제목, 제작 배경, 구성, 내용, 양식적 특징, 제작 시기를 고찰한 종합 연구를 시행하였다. 《훈련도감습진도》는 조선 후기 도성을 방어하는 중앙군 중 하나인 訓鍊都監의 군사들이 교장에서 조련 절차에 따라 진법을 행하는 과정을 6장면에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작품은 배접되지 않은 제1장면 〈入敎場圖〉, 제2장면 〈小開門圖〉, 제3장면 〈官旗聽掌號笛引出馬路圖〉, 제4장면 〈分三路行營圖〉, 제5장면 〈後層殺手出戰圖〉, 제6장면 〈方營一面操圖〉 등으로 전해진다. 각 장면에는 진법 훈련인 習陣 절차와 군사 의례에 관한 풍부한 시각 요소를 담고 있어 연구할 가치가 있다. 조선 후기의 군사 조련도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훈련도감습진도》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아직 시행되지 않았고, 일부 소개 차원에서 간략히 다루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훈련도감습진도》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소장 경위와 제목에 대해 알아보고, 작품과 조선 후기의 정치 배경, 군사적 내용, 회화 양식을 살펴보는 방향을 통해 제작 배경, 구성과 내용, 양식적 특징, 제작 시기를 분석하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진열품 자료를 통해 《훈련도감습진도》의 소장 경위를 살펴보았다. 작품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식민 지배 정당화를 위해 구입한 진열품 중 하나였으며, 이는 유맹이라는 인물이 매도하여 해당 기관에 소장된 것이었다. 이후 《훈련도감습진도》는 해방을 통해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구입 문서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통해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작품의 제목은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습진하는 과정을 그린 ‘훈련도감습진도’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제목과 관련하여 작품에는 김홍도의 관서가 있으나, 이는 제작자의 필치가 아님을 확인했다. 또한 《훈련도감습진도》의 관서에 적힌 초본이라는 내용과 각 장면의 채색이 완비된 점을 통해 작품이 병풍 제작 시 탄생된 초본일 가능성과 완성작일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훈련도감습진도》의 주제인 습진과 훈련도감의 지휘관인 訓鍊大將의 정치적 위상 배경을 정리하여 작품의 제작 배경을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도성 방어 체제가 확립되면서 습진 점검이 강화되었고, 훈련대장은 훈련도감 창설 이래 왕권과 신권을 위한 주요 위치로 부각되었다. 이를 통해 《훈련도감습진도》는 습진 절차의 숙지에 필요한 실무 참고 자료와 훈련대장의 정치적 위상을 시각화한 그림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훈련도감습진도》에 묘사된 전반적인 군사 배치를 분석하여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았다. 《훈련도감습진도》는 숙종 대 부터 이어진 훈련도감 군사 체제에 따라 구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작품의 구성 가운데 哨의 모습을 통해 인원을 줄이는 축약 방식에 따라 그려진 특징도 파악된다. 또한 조선 후기 조련 병서인 『병학통』을 비롯한 군사 관련 자료를 참고하여 《훈련도감습진도》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작품은 『병학통』의 조련 절차를 토대로 내용을 도해하였고, 이 밖에도 각 장면에는 조선 후기 병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군사 의례의 내용도 첨가하여 이를 구사한 특징을 보인다. 《훈련도감습진도》의 대표적인 요소인 기치, 살수의 무기, 말, 기화와 대포, 인물을 통해 양식적 특징을 분석한 결과, 작품에는 조선 후기 병서의 도식과 화원 화풍의 양식을 두루 갖춘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훈련도감습진도》의 인물 표현은 작품의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작품의 인물 표현 가운데 보군·군뢰·무관과 비슷한 양식이 19세기 중반 화원 화풍의 작품에도 발견된다. 이를 통해 《훈련도감습진도》는 이와 같은 시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된다. 《훈련도감습진도》의 제작과 관련된 문헌과 도상 자료를 토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정리하였다. 《훈련도감습진도》와 같은 작품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대에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정조 대를 기점으로 군사 훈련을 하나의 예제로 중시한 경향에 따라 회화 요소가 첨가된 병풍 유형으로 활발히 제작되었다. 이후 《훈련도감습진도》는 군영에서 시행된 지속적인 병풍 보수를 통해 19세기 후반까지 제작을 이어나갔다. 본 연구는 《훈련도감습진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종합 연구를 시행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본 연구를 통해 《훈련도감습진도》가 단순히 교장에서 훈련도감 군사들의 진법 장면을 그린 그림일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정치·군사·미술을 살펴볼 수 있는 종합적 결과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This thesis conducted a comprehensive study looking at how, history of possession, title, production background, composition, content, stylistic features, and time period of its making of the《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from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Training paintig of Hunryeondogam》 is a artwork drawn by dividing the training process of the soldiers of Hunryeondogam(訓鍊都監), one of the central forces defending the capital ci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 the training camp into 6 scenes. The artwork is remained in individual forms, such as the first scene〈Ib gyo jang do(入敎場圖)〉, the second scene〈So gae mun do(小開門圖)〉,the third scene〈Gwan gi cheong jang ho jeog in chul ma lo do(官旗聽掌號笛引出馬路圖)〉, the fourth scene〈Bun sam lo haeng yeong do(分三路行營圖)〉, the fifth scene〈Hu cheung sal su chul jeon do(後層殺手出戰圖)〉, and the sixth scene 〈Bang yeong il myeon jo do(方營一面操圖)〉, without a cover. Each scene contains a wealth of visual elements related to military ceremonies and seubjin(習陣) procedures, which are battle exercises, and are worth studying. Although the study of military train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actively conducted, a general study on the《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has not yet been carried out, and has been briefly dealt with for some introductory purposes. In this study, in order to examine the overall contents of the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the history of possession and title were investigated. And analyzed production background, composition and content, stylistic characteristics, production period of 《Training paintig of Hunryeondogam》through the direction of examining the work and the political background, military content, painting style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 history of the collection of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has examined through the exhibits data of Museum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in Korea. The work was one of the exhibits purchased from the Museum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justify colonial rule, which was sold by a person named Yu Maeng and kept in the institution. After the liberation, the《Training paintig of Hunryeondogam》was moved to the present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title of the artwork has reviewed through various materials, including purchase documents from Museum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in Korea. Through this, it has judged that the title of the work should be called ‘Training paintig of Hunryeondogam’, which depicts the training process by soldiers in the training camp. Regarding the title, there is a reference to Kim Hong-do’s signature in the artwork, but it is confirmed that this is not the handwriting of the producer. Also through the signature and complete coloring of the work, the possibility of being an original or a finished work was also asserted. The background of the production of the artwork has examined by arranging the background of eczema, which is the subject of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and the political status of hunryeondaejang(訓鍊大將), the commander of the Hunryeondogam. Through this, it is thought that the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was created to be used as a practical reference material necessary for familiarization with the eczema procedure and as a picture that visualizes the political status of the hunryeondaejang. The composition of the artwork was examined by analyzing the overall military arrangement described in the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It is confirmed that the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is structured according to the military system of the training book that has been passed down from the time of King Sukjong. In addition, the characteristics drawn according to the abbreviation method of reducing the number of people through the shape of the Cho(哨) in the composition of the work were also identified. By referring to military-related materials such as Byeonghaktong(兵學通), a training book written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contents of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has examined. The artwork depicts the contents based on the training procedure of Byeonghaktong, and in addition to this, each scene is characterized by adding content of military ceremonies that are not found in the military ceremonies of the late Joseon Dynasty.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stylistic characteristics through the flags, weapons of sprinkling, horses, firearms and cannons, and figures, which are the representative elements of the《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It can be seen that the artwork has the style of a painting by a soldier and a painter of the lat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he expression of the characters in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provides a clue to the timing of the work. In particular, among the character expressions in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styles similar to infantry, military police, and military officers are found in the works of court painters in the mid-19th century. Through this, it is considered that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is a work of the same period. Based on the literature and graphic materials related to the production of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the time when the work was produced is arranged. Artworks such as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 began to be produced during the Seonjo perio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were actively produced as a folding screen type with painting elements added according to the trend that emphasized military training as an example starting from the Jeongjo period. After that, production continued until the late 19th century through the continuous maintenance of the folding screens implemented in the military camp. This study is meaningful in that it conducted a comprehensive study that can look at the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as a whole. Through this study made it possible to know that the 《Training painting of Hunryeondogam》is not only a picture depicting the training scenes of the soldiers in the training camp at the principal, but also a comprehensive result that can examine the politics, military, and art of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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