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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한운사의 광복절 특집드라마 <기다려도 기다려도> 해제

        정현경 한국극예술학회 2015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9

        한운사(본명은 한간남(韓看南), 1922~2009)의 방송극은 선택된 사실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인간의 삶과 역사의 속내를 허구라는 틀 속에 담아 그려내며 시청자로 하여금 가려진 역사 속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정현경,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24~26면 참조. 일제의 강점으로 시작된 20세기를 산 한국인들 모두가 그러하였듯이 한운사는 파란만장한 한국사를 그의 인생에서 현재로 살아왔다. 80여 편에 달하는 한운사의 방송극은 그의 인생 여정인 동시에 그가 살아온 질곡의 역사에 대한 미메시스(mimesis)라고 할 수 있다. 극작가로서의 한운사가 추동해내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그가 살아온 ‘한국사’에 맞닿아 있는 것은 그의 문학관과 관련이 깊다. 그는 문학이나 영화를 자기가 살아본 세상에 있었던 일,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느냐는 이야기, 그런 것을 재현해 내일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가를 상의해 보는 장으로 인식하였다. 한운사, 『구름의 역사』, 민음사, 2006, 112면. 더불어 그는 식민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트라우마(trauma)를 ‘소화’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건강도, 개인의 건강도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위의 책, 126면. . 한운사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았던 민족사는 같은 역사를 공유한 민족의 ‘트라우마’이자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독소’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운사가 끊임없이 ‘한국사’를 소환하고 있는 이유는 문학이 독자/시청자로 하여금 불행했던 역사로서의 민족적 ‘트라우마’를 직면하도록 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한운사의 극작은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한국전쟁 그리고 4.19혁명과 5.16쿠데타로 대표되는 정치적 갈등과 모순의 1960~1970년대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한운사의 작품 중, 「기다려도 기다려도」는 광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향한 노모(老母)의 기다림과 죽음을 통해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극화한 ‘광복절 특집드라마’이다. 1970년대에 8.15광복을 기념하는 특집극으로 방영된 한운사의 TV 방송극은 모두 4편이다.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극으로 방영된 「미싯가루」(TBC, 1975)를 비롯하여 「기다려도 기다려도」(MBC, 1977)와 같은 해인 197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3부작으로 제작되어 미니시리즈의 가능성을 보여준 「나루터 3대」(KBS, 1977) 그리고 「파도여 말하라」(TBC, 1978)가 그것이다. 1970년대에는 계몽과 선전선동의 목적극이 주류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특집극을 통해서 목적극의 실상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억압과 통제의 방송 현실에서도 소극적이나마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견지하고자 했던 작가 정신도 발견할 수 있다. 윤석진, 「광복 30주년 기념 특집극 <미싯가루> 해제」, 『한국극예술연구』 제37집, 한국극예술학회, 2012, 231면 참조. 한운사는 광복 기념 특집극들을 통해 일제강점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극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는 광복 이후 30여 년이 흐른 서울의 종로를 극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197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해 동시대성과 리얼리티(reality)를 획득하고 있다. 극의 전개는 교회의 교육관을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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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곤의한국적 연극지향과 극작술의 상관관계 연구

        김숙경 한국극예술학회 2008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27

        Many directors and play writers have pursued ‘Korean style theater’ since 1970'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Myung Kon Kim who has pursued ‘Korean style theater’. Myung Kon Kim is a playwriter and director and one of the representative writers who have created ‘Korean style theater’ since 1980's. I make, his early works, “Kabose Kabose”, “Jum-a Jum-a Konjum-a”, “Kyek-jung-man-ri” an objects of this study. His initial interests of ‘Korean style’ originated in the Ma-Dang-Kuek Movement. Ma-Dang-Kuek was handed down by the success of Tal-Chum(Mask play). He transformed Ma-Dang-Kuek into the style on the stage theater. The materials of his plays are basically focused to social subjects and historical matters of Korea like Dong-Hak revolution, Gyang-Ju demonstration, The Korean War, the division of Korean and 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and Korean theater history. He often applies the plot of epic theater and Ma-Dang-Kuek. In the aspects of plots, the quality is not so excellent, because the principles of theater on the stage and Ma-Dang-Kuek clashsed in his works. Moreover he intends to put too many materials, stories, and characters into a play. Therefore it is not easy to communicate the message of the play. He cares much for ‘theatrical ways’ in writing and directing, which are movement, song and dance, the participation of the audience, play within the play, masks and dress, and spectacle. He takes good ideas on theatrical ways from traditional drama and culture like the technique of traditional theater and play, Pan-So-ri and Korean folk songs, traditional dance, original korean objects and dress. The theatrical ways cover the problems of the writing in the performance and make the audience feel easy. However the misapplication and frequent insertion of theatrical ways make a paly worse and complicated. In this case, Myung Kon Kim may cause misunderstanding that he intends to depend on the formal and easygoing way in creating ‘Korean style theater’. 본 논문은 ‘한국적 연극’을 지향했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명곤의 초기 작품을 대상으로 ‘한국적 연극’을 지향하는 그의 연극관이 극작술에 어떻게 반영되고 실현되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대상 작품은 <갑오세 가보세>, <점아 점아 콩점아>, <격정만리>이다.김명곤은 마당극의 무대화를 통해 ‘한국적 연극’을 추구한다. 주로 동학농민혁명, 광주항쟁, 6.25전쟁, 분단과 통일, 한국연극사와 같은 당면한 사회문제나 민족수난사에서 극의 소재를 취해 리얼리즘적 현실 깨닫기를 지향한다. 김명곤은 민중 지향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에서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고 있다. 작품의 구성에 있어 연구 대상 작품들은 상호 공통된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다. 해설자를 등장시키는 서사극적 구조나 앞풀이-각 장-뒤풀이 식의 마당극적인 구조, 그리고 연대기적 구성은 두 작품 이상이 갖고 있는 공통된 구성 방식이다. 마당극과 무대극 모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창작의 방향을 표방하지만, 초기 극작품에서는 마당극의 영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며, 이는 이후까지도 김명곤의 극작술의 한 특성으로 지속된다. 초기 작품에서는 마당극의 구성원리와 무대극의 구성원리가 적절하지 않은 지점에서 충돌하기도 한다. 해설자 진행 방식이 극을 상투적이고 평범하게 만드는가 하면, 총체적 접근이라는 목적 하에 다수의 짧은 장면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시켜 극의 효과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한 내용과 구성방식이 유기적으로 관련 맺지 못하는 측면도 발견된다.이러한 구성의 문제는 일정 부분 ‘연극적 방식’의 활용으로 공연에서 보완될 가능성을 마련하고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연극적 방식’은 대부분 한국의 전통연희나 전통극, 판소리와 민요, 한국의 전통춤(몸짓), 한국 고유의 오브제나 의상 등 ‘한국적 연극’ 지향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한국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의 활용은 구성의 밋밋함이나 느슨함을 보완해주고, 대중적인 친근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잦은 삽입으로 표면상 ‘한국적’ 분위기를 내는 데에 그치기도 한다. 이런 경우 ‘한국적 연극’을 만드는 정형화되고 안이한 연출 방식에 기대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크다.‘마당극의 무대화’, 또는 ‘마당극과 무대극의 절충적 계승’은 김명곤의 ‘한국적 연극’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자, 김명곤의 연극미학을 결정짓는 주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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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철의 「하믈레트」 번역과 그 의의

        윤민주 한국극예술학회 2014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6

        현철의 번역희곡 「하믈레트」는 한국의 셰익스피어극 수용사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위치를 점한다. 우선 1920년대에 수용된 여타의 셰익스피어극과는 그 번역 양상과 번역의 목적이 가장 이질적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특이성을 보인다. 1920년대에 이루어졌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을 일별해 보면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띠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소설적 수용’이고 한 가지는 ‘연극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적 수용’은 주로 찰스 램(Charles Lamb)의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를 저본으로 하여 독서용으로 번역한 것이다. 찰스 램의 저작물 자체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작의 대사를 살린 산문체 형식으로 바꾸고 복잡한 구성을 간결하게 추림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작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가장 큰 목적은 셰익스피어극에 대한 한국인 독자들의 접근과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연극적 수용’은 현철의 「하믈레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당시의 주류적 경향이었던 ‘소설적 수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실질적인 공연을 의식한 공연용 대본으로서,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희곡을 문학의 하위 장르로서뿐만 아니라, 나아가 연극의 하위 장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는 실제적인 실례로 제공되었다. 이는 희곡 장르의 번역과 더불어 연극 대본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하게 표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번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적 수용’이 셰익스피어극의 내용에 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현철의 「하믈레트」가 보여주는 ‘연극적 수용’은 희곡의 번역을 한국의 근대극 수립을 위한 근대극 운동의 일환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현철의 「하믈레트」가 갖는 시대적 가치는 일본의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선명해 진다. 1920년대까지 일본 내에서 진행된 셰익스피어극 수용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가부키적 수용에서 신파극적 수용으로, 그리고 다시 신극적 수용을 거쳐 대학 강단의 학문적 수용으로 변모되어 나갔다. 그리고 1911년에 쓰보우치 쇼요의 ‘후기 문예협회’가 공연했던 <하무렛토(햄릿)>(1911.5)를 기점으로 셰익스피어극은 사실상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되었다. 셰익스피어극이 더 이상 공연되지 않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11년에 공연되었던 <하무렛토>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서구식 근대극의 연극적 성공과 일본 내에서의 영문학 위상의 제고 등과 같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함으로써 1920년대가 되면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고전극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바로 일본 내에서 셰익스피어극이 근대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시점에서, 그리고 마치 일본의 전통 연극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옛날의 연극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쓰보우치 쇼요의 <하무렛토> 공연에 사용되었던 번역본 『하무렛토』를 번역의 저본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아함을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는 한국의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는 시기로, 한국의 근대극이 일본의 근대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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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기 음반극: 대중극과 대중서사, 대중문화의 미디어극장

        우수진 한국극예술학회 2015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48

        The primary purpose of this paper first is an overview of the discography of the SP record drama which was published during 1920-30’s. For this purpose, this paper made up the SP record lists, checked the left lyrics and the sound source, and searched the names of the actors, writers, directors, etc. who participated in the record work. Also it investigated how the SP record drama, the popular narrative, the popular songs were interacting each other in the sphere of the popular culture. Therefore, The study of the SP record drama is very important for the study of the popular culture. The SP record was such a commodity that could not help considering the popular trends. There were so many ‘classic/traditional’ repertories as traditional novel or Pansori ­like Chunhyangjeon(春香傳), shimchungchen(沈靑傳), and etc.­, the famous Shinpakuk(新派劇, New Trend Drama) ­as like Changhanmong(長恨夢), Bulyugyu(不如歸)­, and the western classics –like The Resurrecton(by Tolstoy), Les Misérable(by Hugo), and etc. However, the most of the SP record drama was the new original works. The motifs and main characters of the SP record drama could be easily found in stage drama, movie, novel, and popular songs. And the famous and popular actors, singers, silent-film narrators were employed in the record recoding. Also the representative works of 1930’s such as Fooled by love, Hurt by Money(by Im Sungyu), The Power of Mother(by Lee Suhgyu), and even the works of Yu Chijin were sharing the motifs, main characters, and narrative with the SP record drama and the popular narratives. 이 논문은 남아있는 유성기음반들 중 음반극을 분류하고 그것의 음반번호와 표제, 제목, 가시지와 음원의 여부를 목록화 함으로써 그 내용과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유성기 음반극이 당시 무대극과 영화, 소설, 유행가 등과 같은 대중적 문화 형식들과 어떻게 적극적으로 교섭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데에도 중요한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이 논문에서는 1907년에서 1945년까지 발매되었던 음반들 중 현재 남아있는 ­음반정보가 파악되는­ 음반들을 전수조사(全數調査)하여 음반내용에 따라 크게 음악과 극, 서사 분야로 나누고, 그 중에서도 특히 ‘2인 이상의 대화적 상황이 포함된 연극적 구성물’을 ‘극’­다시 말해 ‘음반극’­으로 범주화 한다. 그리고 유성기 음반극은 다시 고전소설극 · 고전신파극 · 서양고전극 음반과 창작극 음반으로 분류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당시 고전소설극과· 고전신파극, 서양고전극 음반은 각각 6편․16종, 2편․14종, 10편․17종이었으며, 창작극 음반은 총 161편․167종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살펴볼 음반은 모두 214종으로 그 작품 수는 179편에 달한다. 유성기 음반극은 1920~30년대 연극과 문화의 장에서 무대극과 라디오극, 그리고 영화극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음반극 연구는 당시의 대중극과 대중문화 연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유성기음반 자체가 상업적인 판매상품이었던 까닭에 음반의 기획 및 제작단계에서부터 음반소비자 대중의 취향이나 유행 등이 고려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기 음반극의 경우에도 ‘고전’ 레퍼토리들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전들의 음반화는 말 그대로 고전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고전의 가변성, 즉 고전이 변용적으로 재/생산되거나 전유되면서 오히려 새로운 시대사회의 형식과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창작극 음반은 음반극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음반극에서뿐만 아니라 무대극과 영화, 소설, 가요 등에서 널리 인기 있는 소재들과 등장인물들을 토대로 하는 대중서사들이 조금씩 유사한 듯 다르게 변용적으로 차용되었으며, 잘 알려진 기존의 무대극 및 영화 배우들과 무성영화 변사, 가수들이 녹음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이서구의 <어머니의 힘>, 그리고 유치진의 <토막>과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등은 당시의 대중극 및 대중서사와 적극적으로 교섭, 수용한 결과였다. 음반극은 당시 대중극과 대중문화의 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극작가와 배우, 가수 등에 대한 새로운 지형도를 제시한다. 음반극 안에서 작사가와 극작가, 배우, 가수의 영역과 경계는 유동적인 것이었고, 이들의 활동은 영역과 경계를 넘나들며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음반극은 작가들뿐만 아니라 대중극 및 대중문화의 장에서 활동했던 배우들의 존재를 드러내준다. 여기에는 당시의 신문과 잡지 기사들, 그리고 기존의 근대연극사/희곡사 연구를 통해 이미 잘 알려진 배우들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수의 배우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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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유치진의 역사소재극과 민족극 구상

        이정숙 한국극예술학회 2011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4

        한국전쟁기에 유치진은 반공극과 함께 역사소재극 두 편을 집필한다. <처용의 노래>와 <가야금>은 처용과 우륵이라는 예술가를 소재로 선택하여 이를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로 풀어내고 있으며, 모든 갈등이 해결하는 것으로 예술의 힘을 배치하여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대사 위주의 화극에서 벗어나 춤과 노래를 활용하였고, 창극과 같은 전통극의 기법을 도입하여 극의 표현기법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전쟁기의 유치진 희곡은 국립극장 재개관에 대한 요구와 국립극장에 적합한 민족극 구상의 일환으로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립극장은 유치진의 오랜 바람이 실현된 형태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립극장의 기능이 정지되었고, 재개관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유치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어 국립극장 재개관의 당위성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전쟁기의 역사소재극은 국립극장에 적합한 민족극에 대한 모색의 결과였다. 유치진의 민족극 구상에서 전통극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기존의 사실주의극의 기법이 우리의 생활이라는 내용만 가져온 것이라면 전통극의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그릇에 우리의 생활을 담는 민족극 모색이 가능해지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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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세덕의 번안 희곡 <산적> 연구 -낙랑극회 공연 사례를 중심으로-

        김남석 한국극예술학회 2012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8

        This paper reviews the Nacklang-kuckhoi(Nacklang theater company)'s play, The Robber. Nacklang-kuckhoi was organized in 1945 and worked Until 1947. In Korea history, This period is a part of the Liberation period. This paper arranges the aspect of Nacklang-kuckhoi‘s plays in 1945 to 1946 and finds out the special feature of it. This dissertation has been written with a purpose to examine and to understand the Nacklang-kuckhoi in 1945 and playwright intent of Hamsedeok in second half of 1940s. In conclusion, this paper checks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Robber in Nacklang-kuckhoi's palys and as Hamsedeok's masterpiece. Nacklang-kuckhoi was a dramatic company that was compositively coexisted with Sinkuck and Sinpakuck, the Right and the Leftism, an Intellectual player and a professional actor. This aspect is particular instance of the varied appearance and characteristic of Korean play in 1945 to 1950. 이 연구는 낙랑극회의 공연 대본인 <산적>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낙랑극회는 1945년에 발족하여 1947년까지 활동한 대중극단으로, 한국 역사에서 이 시기는 흔히 해방공간으로 불린다. 이 연구는 낙랑극회가 창립하여 <산적>을 공연하고, 그와 동시에 함세덕이 <기미년 3월 1일>을 집필 준비하는 기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자연스럽게 낙랑극회의 1945년부터 1946년까지의 공연사와, 해방공간에서 함세덕의 활동이 다루어질 것이다. 그 결과 낙랑극회의 의의뿐만 아니라, 극작가 함세덕의 특성 또한 분석될 것이다. 당시 낙랑극회는 신극과 신파극, 우익극과 좌익극, 지성 연극인과 전문 연극인의 틈바구니에서 활동하였고, 어떤 면에서는 양자의 특성을 지니는 극단이었다. 그로 인해 1945년부터 1950년에 이르는 해방공간에서 한국연극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극단으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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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하 전시체제기 이동연극 연구 - 이동연극 제1대와 극단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이덕기 한국극예술학회 2009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0

        The traveling theatre was core businesse of theatrical mobilization in wartime. Colonial authority used traveling theatre as the instrument of propaganda by presenting sound entertainment and enlightenment. Traveling theatre platoon 1 and Hyundai-gukjang's patriotic troupe were representative traveling theatre in this time, they played an active part as a model of national theatre. Traveling theatre platoon 1 was made up Joseon theatrical association's directly agency at 1941. In 1942 they digested superhuman performances schedule, but after this, their activity has declined by degrees. Hyundai-gukjang's patriotic troupe were formed in cooperation with Gukminchongryeocjoseonyeonmeng at 1941. Although ambitious conception, their activity didn't hold on, the result was poor. This two troupe had no regret for theatrical quality, and objectified the spectator with prejudice. For example Deachunamu and Heungbujeon, their repertory were inappropriate and low quality. As a result their ambitious conception fell through, their play ended in vulgar propaganda drama. 이동연극은 일제하 전시체제기 연극동원에 있어 핵심사업이다. 일제 당국은 농산어촌에 건전한 오락을 보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연극을 그들의 선전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연극협회를 결성, 이동연극대의 조직을 서둘렀다. 이동연극 제1대는 협회 직속의 이동연극대이자, ‘국민연극’의 전초부대로서 조직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들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관심을 보냈고, 조선연극협회는 협회의 조직적 역량을 총동원하였다. 1942년까지 그야말로 초인적인 공연일정을 소화하며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이동연극 제1대는 1943년부터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하여 1944년에 이르러서는 협회 직속 이동연극대로서의 위상을 거의 상실하였다. 극단 현대극장은 자체적으로 이동연극대를 조직하였다. 현대극장의 주요멤버인 유치진과 함대훈은 국민연극 실천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이동연극을 주장하였다. 1941년 10월 현대극장은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제휴하여 총력연맹 이동연극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주영섭 작 <흥부전>과 허남실 번안 <만석보>를 가지고 경남 지방을 순회 공연하였다. 1944년에는 이동연극보국대를 조직하여 황해도 광산지역을 순회 공연하였다. 현대극장은 이동연극을 통해 그들이 주장해 온 ‘국민연극론’을 실천하는 한편 ‘국민연극’을 주도하는 극단으로서 위상을 과시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의 이동연극 활동은 다만 일회성에 그쳤다. 이동연극 제1대와 현대극장은 전시체제기 이동연극의 한 전범을 보이고자 하였다. 일제 당국과 언론은 이들의 활약상을 과장하고 미화하였으나 정작 이들의 연극은 연극적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채 단순한 선전도구에 머물렀다. 이들의 연극적 실패는 이 시기 이동연극의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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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유럽 영유아극에 대한 안내서 ―강윤아, 『유럽 영유아극 예술가들과의 대화 : 영유아극 연구』(문사철, 2023)

        손증상 한국극예술학회 2023 한국극예술연구 Vol.- No.80

        『유럽 영유아극 예술가들과의 대화』는 강윤아가 유럽 영유아극사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남긴 예술가들 10팀과의 대화를 기록하고 대화를 통해 발견한 영유아극의 특성을 정리한 것이다. 유럽이 영유아극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유럽 영유아극계를 이끌고 있는 예술가들이 영유아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들의 작업 과정 및 공연 경험 등을 읽는다는 것은, 곧 영유아극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유럽 영유아극의 역사 및 이론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대신 예술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영유아극의 매력을 전달한다. 인터뷰에서 핵심 질문은 “영유아극 예술가의 관점에서 영유아는 누구인가”로, 저자는 예술가들의 영유아관을 통해 영유아극을 탐색하고 영유아극 장르의 특성을 발견한다. 영유아극이 다소 신화화된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남지만, 영유아극이 낯선 독자들에게 영유아극의 의의와 가치를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영유아극의 중요한 분기점이라 하겠다.

      • KCI등재

        유치진의 도쿄 구상 실천과 극예술연구회의 <포기>(Porgy)

        김재석 한국극예술학회 2017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55

        This report is aimed at analyzing the process and result of performance of Porgy by Gukyesulyeonguheo, the theatrical group in colonized Chosun in 1937, relating it with Yoo Chijin’s practicing his theatrical ideas in Tokyo. Yoo Chijin embodied his theatrical ideas in Tokyo, namely the ways to develop modern drama in colonized Chosun while he had stayed in Tokyo from May in 1934 until he came back home next April. The core of his ideas can be summarized three points ; first the theme of drama should never be revealed on stage directly, dealing with the real problems in colonized Chosun, secondly the dramas with comic mood should mainly be created to catch the audience’s interest, and last the foreign dramas which are interpreted in the way of Chosun should be performed. Yoo Chijin who had come back home from Japan began to practice his ideas, managing the performances as the executive secretary of practice department of Gukyesulyeonguheo. His trials including the performance of So, the first creative drama based on his ideas in Tokyo were cut off by Japanese censorship of performance which was strengthened at that time. To practice his theatrical ideas well, he had to search the way to cope with two conditions (the reflection of reality in colonized Chosun and passing Japanese censorship) at the same time. After thinking over two ways to find the subject matter of drama from history and to create satirical dramas, he chose historical dramas and the result of such pursuit was the performance of Chunhyangjeon. In the performance of Chunhyangjeon, he perceived the possibility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tried to find foreign dramas with such tendency and finally selected Porgy. In Porgy there are the romantic love and the criticism of reality in the story and the stage with many thing to see, consisting of songs and dances like Chunhyangjeon. Through the performance of Porgy, he believed firmly that performing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in big theater would be the future of modern drama of colonized Chosun. It is also very important that Yoo Chijin suggested Porgy, the drama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as substance of performing foreign dramas centered on audiences. Nevertheless it is his limitation that he could not practice continuously the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hardened through the performance of Porgy. The reason is outlined as two causes. First he could not afford to apply himself to creating works, owing to the reality of theatrical world much more worsened like Gukyesulyeonguheo’s being broken up. Second he explained three conditions such as the performance in big theater, romantic dramas and the criticism of reality as a matter of course, but had not enough creative discussion on how to structure them. So the ambiguity of methodology appeared and this ambiguity caused Resurrection, the work having little to do with Gukyesulyeonguheo to be performed by Seo Hangseok’s direction in 1937. To Yoo Chijin, Porgy is one of ideal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So he tried to perform it repeatedly after the 1945 liberation, which showed that he did not give up practicing dramas of “romanticism based on realism” and tried to keep on practicing them continuously. 이 논문에서는 1937년에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포기>를 유치진의 도쿄 구상 실천과 연관시켜서, 공연의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였다. 1934년 3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도쿄에 머물면서 유치진은 식민지조선 근대극 발전의 방안, 즉 도쿄 구상을 마련하였다. 식민지조선의 현실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무대상에 직접 노출되는 것을 피하여야 하며, 관객의 흥미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희극적 정조를 주로 하는 극을 창작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적으로 해석된 외국극 공연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도쿄 구상의 핵심이다. 귀국한 유치진은 실천부 책임간사로 극예술연구회의 공연을 주관하면서, 그의 도쿄 구상을 실천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도쿄 구상에 입각한 최초의 창작극인 <소>를 필두로 한 그의 시도는 그 무렵에 강화된 일제의 공연 검열에 막혀버렸다. 유치진이 도쿄 구상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조선의 현실 반영’과 ‘검열에 대한 대응’이라는 두 조건을 동시에 넘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치진은 작품의 소재를 역사에서 취하는 방법과 풍자극 창작이라는 두 가지 방안 중에서 역사극을 선택하였다. 그러한 모색의 결과가 <춘향전> 공연이었다. <춘향전>에서 시도했던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발전적 모습이 <포기>이다. 낭만적 사랑 이야기에 담긴 현실 비판, 그리고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진 볼거리 많은 무대(spectacle stage)를 가진 <포기> 공연을 통하여, 유치진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식민지조선 근대극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었다. 유치진은 <포기> 공연에서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 극의 대극장 공연이 식민지조선 근대극의 미래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주장했던 ‘관중본위’의 외국극 공연에 대한 실체로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포기>를 제시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 공연을 통해 확고해진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 극을 그 후에도 계속 실천해나가지는 못한 것이 그의 한계이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1938년 3월에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크게 악화된 연극계의 현실로 인하여 그가 창작극에 전념할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는 대극장 공연과 낭만주의적 작품, 그리고 현실 비판이라는 세 조건이 당위적으로 설명되고 있을 뿐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창작적 논의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애매함이다. 극예술연구회의 목표와 거리가 먼 듯이 보이는 <카추샤>가 1937년에 서항석의 연출로 공연된 것도 유치진 방법론의 애매성에 그 원인이 있다. 유치진에게 있어서 <포기>는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이상적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가 해방 후에 거듭하여 <포기>의 공연에 애를 쓴 것에서 “리알리즘을 토대로 한 로만틔시즘”의 실천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수행하려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 KCI등재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2011 한국극예술연구 Vol.0 No.34

        <P>이 논문은 한국 근대극 형성기에 있어 「토월회」의 위치를 재고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 근대극 형성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로 「극예술연구회」를 꼽고 있으나, 「토월회」의 역할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토월회」가 공연한 전체 작품을 모아보면, 전근대적인 작품과 근대적인 작품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근대적 작품 때문에 「토월회」를 상업성이 강한 극단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검열을 통과하고 대중성을 확보한 작품으로 극의 교화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공연을 추구했던 「토월회」의 근대극 지향점에서 그 점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P><P> 「토월회」의 1기와 2기 공연에서는 일본의 근대극운동을 동류화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골라 공연함으로써 교화의 대상인 관객도 확보하고, 공연 수익도 높이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도한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식민지조선의 관객들이 정서적으로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깝다는 사실과 서양 근대극의 번안으로 관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P><P> 「토월회」의 3기와 4기는 근대극운동의 고유화를 추구하였다. 「광무대」를 전용극장으로 임대하여 의욕적으로 출발하였으나, 극단과 극장의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대중성이 강한 작품을 계속해서 공연해야하는 모순에 빠졌다. 결국 「조선극장」에 전속극단으로 활동해야 할 만큼 세력이 위축되지만, 그동안 공연 경험을 통해 ‘조선정조가 넘쳐흐르는 의미심장한 시대극’에 이르게 된다. 「토월회」의 <아리랑고개>는 한국 근대극 형성기에 아주 중요한 작품인데,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 긍정적 인식이 돋보인다. 서양 근대극의 번역 공연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치하에서 공연 가능한 근대극의 실체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근대극 형성에 미친 「토월회」의 영향을 높게 평가하여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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