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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지방 횃불독립만세운동의 전개와 일제의 탄압

        김진호(Kim, Jin-ho)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8 충청문화연구 Vol.21 No.-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침탈당한지 8년 6개월, 3,107일인 1919년 3월 1일에 한민족은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민족 독립을 성취하여 민주 공화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3·1독립운동은 독립운동 방법으로 다양한 형태로 독립을 주창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만세운동과 야간에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 등의 형태로 전개됐다. 즉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거나 독립 관련 유인물과 격문들을 제작하여 배부하며 동지들을 규합하거나 군중들에게 권유하여 시장, 마을, 학교, 교회, 일제기관(면사무소, 주재소 등)에서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만세운동이 일반적인 독립운동의 형태였다. 반면에 야간에 산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중부지방, 특히 충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 독립운동은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반화됨에 따라 일제의 무력적 탄압도 잔혹성을 띠게 됐다. 따라서 누구나 주도 인사나 참여자로 독립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과 일제의 탄압을 피할수 있는 방안 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야간에 접근과 활동이 용이한 마을 주변의 산위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불을 피워 인접 마을과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독립만세 의지를 알렸다. 이 독립운동을 일제는 ‘篝火’, ‘焚火’ 등이나 ‘烽火’로 표기했고, 『매일신보』는 ‘불’, ‘화투불’, ‘봉화’, ‘거화’ 등으로 보도했다. 이를 독립만세운동과 대별하여 횃불독립만세운동이라 하고자 한다. 3월 23일 충북 청주의 강내면, 강외면, 옥산면 등지에서 주민들이 산위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어 충남 연기의 조치원 방면으로 이동했다. 이에 연기의 동면, 서면, 북면의 주민들이 호응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충남지방의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연기에서는 3월 26일부터 4월 2일까지 26곳(회), 미상 일에 1곳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천안에서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있기 수 일전부터 병천 주위의 산위에 봉화가 올랐고 3월 30일 풍세에서는 주민들이 20곳의 산위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쳤다. 아산에서는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80곳, 공주에서는 4월 1일부터 3일까지 13곳, 예산에서는 4월 3일부터 5일까지 27곳, 홍성에서는 4월 4일, 5일, 7일에 26곳, 당진에서는 4월 4일과 5일에 22곳, 청양에서는 4월 6일부터 8일까지 6곳, 서산에서는 3월 31일과 4월 5일, 8일, 10일에 7곳, 논산에서는 4월 1일, 3일, 7일에 5곳, 미상 일에 2곳, 대전에서는 3월 29일에 1곳, 보령에서는 4월 17일에 1곳에서 주민들이 마을 주위의 산 위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따라서 충남에서는 12개군 64개면에서 연216개 마을의 238곳(회)에서 가장 최소한으로약 13,000명이 참가하는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일경, 헌병, 수비대 보병 등을 출동시키고 일본인 민간인, 소방조, 재향군인 등까지 동원해 무력적 탄압을 했다. 현장 출동이 22차례나 하여 11곳에서 총기를 발포해 진압했다. 무력 진압으로 10명이 사망하고 13~4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장에서 체포 구금된 111명 이상의 인사들은 독립운동 이후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체포당한 인사들과 함께 주재소, 경찰서, 헌병분견소, 헌병분대에서 악형을 당하며 심문조사를 받았다. 검사국에 기소되어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인사가 48명이었다. 주도 인사나 참여자 대부분은 경찰서나 헌병분견소에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잔인한 태형을 당했다. 수형 관련 기록을 분석하면, 참가자에 대한 체포와 태형의 집행이 4월 초순부터 지속적으로 자행되었고, 면 단위의 체포와 태형이 마을 단위로 실시되었으며, 동일 태형의 처분(형량)은 대부분 동일 형량으로 처벌됐다. 횃불독립만세운동은 3·1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전적 형태로 등장하여 3월말부터 급속히 확산되어 마을 단위로 군(郡), 면(面)내 일대에서 대규모로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또한 마을들이 연합하여 아산, 홍성, 예산 등도(道)내의 내륙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었던 충남지방의 대표적인 3·1독립운동의 형태이었다. The Korean people declared The Independence from the colonial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on March 1, 1919. This toke eight years and six months, namely, in 3,107 days since the Korean Empire was robbed of the national sovereignty to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Korean people yelled for Korean independence and waved the Korean flag. Therefore they achieved independence from the colonial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nd hoped to build the democratic republic natio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developed many various forms all across the country. Accordingly the Japanese imperialism thoroughly oppressed by force of arms to the Korean people who cried the hurrah for the independence. So they found the method which directly evaded the crackdown of the Japanese imperialism and freely yelled for Korean independence. It was a signal torch(Hwaetbul, 횃불) of the hurrah for independence movement. It yelled on March 23th in Yeongi-gun, Chungcheongnamdo. Since then, It lasted to early in April. It put in practice 27 locations in Yeongi-gun, more than 21 locations in Cheonan-gun, 80 locations in Asan-gun, 13 locations in Gongju-gun, 27 locations in Yesan-gun, 26 locations in Hongseong-gun, 22 locations in Dangjin-gun, 6 locations in Cheonhyang-gun, 7 locations in Seosan, 7 locations in Nonsan, 1 locations in Daejeon-gun and Boryeong. The Hwaetbul hurrah for independence movement yelled 238 locations(or times) in 12-gun(郡), 64-myeon(面), 216-village of the Chungcheongnamdo. The total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Hwaetbul Independent Harrish was the 13,000 person at the very least. They waved the Hwaetbul and yelled the Independent Harrish on the around mountain of the their village. But the Japanese imperialist and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ppressed the participant in Hwaetbul Independent Harrish Movement. The Japanese imperialist mobilized the police, the the military police(MP), the Japanese Army in Korea(朝鮮駐箚軍) and even the civilian Japanese(gownsman), the fire fighting service(消防組), the veteran(在鄕軍人) and so on. They dispatched 22 times on the spot and fired a gun in the 11 locations. So the Korean was killed the 10 persons, injured the 13~4 persons and arrested the more than 111 persons. Ever since the Hwaetbul Independent Harrish, The Japanese imperialist executed a wholesale arrest operations. The arrest were severely interrogated in the substation of the police–military police(警察,憲兵駐在所), the squad of military police(憲兵分隊) and the outsation of military police(憲兵分遣所). After this, they were charged with the violation of safety-code (保安法) by Japanese prosecutor. As a result, the Japanese judge panel sentenced the prison and flogging(Taehyeong, 笞刑) on the 48 persons. Most participants were oppressed the flogging in the substation of the police–military police(警察,憲兵駐在所), the squad of military police(憲兵分隊) and the outsation of military police(憲兵分遣所). The flogging was the immoral, inhumane and cruel punishment. It was practiced the 30~90 lash. Conclusionally, the Hwaetbul hurrah for independence movement was the developmental form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It was rapidly spread toward the end of March and practiced on the mountain of village in gun and myeon. It was carried out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intensive, large scale, short-term. It appeared in Asan, Hongseong, Yesan, namely, the mountainous regions of the interior in Chungcheongnamdo. And it was the representative independence movement in Chungcheongnamdo.

      • 대전-충남 금강 문화권의 불교문화와 사상

        김방룡(Kim Bang-ryong)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22 충청문화연구 Vol.27 No.-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충북과 충남 그리고 전북을 관통하며, 장항과 군산을 거쳐 서해에 이르고, 다시 바닷길을 따라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진다. 본고에서는 차령산맥을 경계로 하여 충남 서북부의 내포문화권과 나뉘는 대전-충남 지역의 문화권을 금강문화권이라 명명하고서, 이 지역의 불교문화와 사상을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백제시대 웅진과 사비천도 이후 불교문화는 크게 발달하여, 사상적으로 미륵, 화엄, 열반, 법화, 선, 율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물론 인도에까지 들어가 구법활동을 하였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일본의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는 미륵사상과 화엄사상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미륵신앙은 왕조를 중심으로 국가불교적인 모습과 민간을 중심으로 한 저항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면, 화엄사상은 국가불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과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갑사 영규를 중심으로 한 의승군의 활약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구한말 경허와 만공 등이 동학사를 중심으로 선풍을 새롭게 떨친 사실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이 지역의 불교가 크게 공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Geumgang River originates from Jangsu-gun, Jeollabuk-do, passes through Chungbuk, Chungnam, and Jeonbuk, reaches to the West Sea via Janghang and Gunsan, and leads to China and Japan along the sea route. In this paper, the cultural area of Daejeon-Chungnam region, which is divided from the Naepo Cultural Area in northwest Chungcheongnam-do, was named Geumgang Cultural Area, and Buddhist culture and ideas of this region by period were considered. After moving the capital to Woongjin and Sabi in Baekje period, Buddhist culture has developed greatly, ideologically showing various aspects such as Maitreya, Hwaeom, Nirvana, Beophwa, Seon, and Yul. Baekje people entered India as well as China, did activities of seeking truth, and spread Buddhism to Japan, which greatly influenced Japans ancient culture. During the Unified Silla and Goryeo Dynasty, Maitreya thought and Huayan thought were prominent in this area. If the Maitreya faith has both a state Buddhist character centered on the dynasty and resistance character centered on layperson, it can be seen that Huayan thought has a state Buddhist character.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can be seen that loyalty and righteousness are important, and the performance of the righteous monks army centered on Gapsa Yeonggyu, is a representative example. In addition, the fact that monk Gyeongheo and monk Mangong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made a new sensation of Seon centered on Donghaksa Temple shows that Buddhism in this area contributes greatly to modern Korean Buddhism.

      • 일제강점기 호서지방의 형평운동

        김재영(Kim, Jae-young)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7 충청문화연구 Vol.18 No.-

        본 논문은 백정들의 차별철폐운동인 호서지방의 형평운동을 지분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이는 본사와 분사가 반드시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지분사는 충남 14군·충북 10군 공히 전 지역에 걸쳐 설치되었다. 충남은 특히 내포 지역의 중심인 홍성(3)을 중심으로 예산(2), 서산(3), 당진(2), 청양(3) 등지에 집중 설치되었고, 충남은 논산에서 충북은 청주에서 가장 먼저 분사가 창립되었다. 이들 지·분사의 활동을 정리하면 호서지방은 대체로 사회운동이 부진했으며 사회운동 단체의 연대활동 또한 없었다는 특징이 있다. 분사조직에 고문이 없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사회운동 단체의 지원이나 후원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영남지방이나 호남지방과는 다른 호서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주는 결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충남이 충북보다 활발했으며 충남은 내포지역이 활발하였다. 충남 내포지역은 일부 양반과 유학세력이 있었지만 차령 이남보다 그 세력이 약해 형평운동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충북은 충남보다 양반세력이 더 강해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호서지방에서는 형평운동의 본래 목적인 사원의 인권투쟁보다 교육운동과 경제적 권익수호 운동에 주력하였다. 교육운동은 예산·당진·서산·보령 등지를 포함하는 지역에서 활발하였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건피장과 피혁공장, 형평산업주식회사와 온천산업주식회사 설립에 관한 건이 논의되었으나 설립은 확인되지 않는다. 많은 자본과 근대적인 경영 문제를 생각할 때 설립 자체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응하고자 한 측면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끝으로 조선에서 두 번째로 넓은 평야지대로 일컬어지는 충남의 합덕은 당진의 경제적 중심지로 군내에서 제일가는 시장이 형성된 곳임에도 이곳의 활동을 전하는 일간지의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도 의문이다. This paper looked into butchers" movement to abolish discrimination which was the social equality movement of Hoseo on the actions of the branches. This begins with whether the head office and the branches necessarily kept homogeneity. The branches were installed throughout 14 guns of Chungnam and 10 guns of Chungbuk. They were intensively installed in Yesan (2), Seosan (3), Dangjin (2), Chongyang (3) and so on , especially in Hongseong (3) which was the center of the bay region in Chungnam. The first branches were installed in Nonsan, Chungnam and in Cheongju, Chungbuk. Examining the actions of the branches, usually Hoseo was slow in the social movement and had the characteristic of there being on the unified activities of the social movement groups. It was well known that there were no advisors in the branches, which proves that there were no supports of social movement groups, and shows the regional characteristic of Hoseo different from Youngnam and Honam which were active in social movements. In general, Chungnam was more active than Chungbuk, and Chungnam was active in the bay region. That was why the bay region of Chungnam had some forces of aristocrats and Confucian scholars, but the forces were weak and had a little hostility against the social equality movement. The forces of aristocrats in Chungbuk were stronger than Chungnam, and the activities were sure to slow down. Hoseo focused more on the education movement and the movement which protecting economic rights and interests than on the struggle for human rights of temples which was the original goal of the social equality movement. The education movement was active in the regions of Yesan, Dangjin, Seosan, Boryeong and so on. In terms of economics, the matter of establishing dried hide factories, leather factories, the social equality movement Inc and the hot spring Inc was discussed, but their establishment was not certain. Considering a lot of capital and the modern business matter, their establishment was seen to be difficult. However, it is worth of notice in that there was an aspect of coping with Japanese economic plunder. Finally, it is still doubtful that although Hapdeok, Chungnam referred to as the second largest plain in Joseon was the economic center of Dangjin and the place where the best market in Hapdeok-gun, articles of daily papers were not seen.

      • 계룡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활용과 호국보훈문화 센터 건립

        박경목(Park, Kyung-mo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3 충청문화연구 Vol.11 No.-

        This study examines these of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in Gyeryong-si, Chungcheongnam-do and establishment of patriots and veterans culture center for efficient utilization of historic sites and tourism resources. Located under Gyeryong Mountain, Gyeryongsi was called as ‘Sindoan’ by being selected as a new capital of Joseon right after the foundation by King Taejo Lee, Seong-gye. In fact, there was about a year of royal palace construction work, but the plan of relocation of capital was cancelled. Since 1910, many national religious leaders gathered to escape the colonial rule of the Japanese Imperialism. Accordingly, many independent movement activities carried out independent movements with this region as its center. After the liberation, the head quarters of Army, Navy and Air Force were installed in 1989 playing as a military city and urban and rural complex city. In 2003, the city was formally promoted as ‘Gyeryong-si.’ Currently, it is the smallest city in the country with 60.7㎢ in size and population of 41,550. Because of such historic reasons, there are many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of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and also many remains related on the capital relocation of Joseon, and shrines of Confucian scholars of Joseon. Representative sites include house site of Han, Hoon who organized Gwangbokdan, Gwangbokdan death-defying band monument, house site of Bae, Young-jik who carried out March 1st Independent Movement, Samsindang as the sphere of activity of Jeong, Won-kang, an national religious leader, and Sindoan foundation stone. Meanwhile, head quarters of Army, Navy and Air Force were installed in 1989 in Gyeryong-si, and ‘Gyeryongdae’ and ‘Gyeryongdae monument’ are used for national security tourism resources. Accordingly, it is necessary to use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historic remains and identity of current military city in order to activate the city. In connection with the above resources, it is also required to take partial restoration of some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storytelling of those sites, open of restricted remains in the military area and tourism merchandising on the patriotic experiences. And, ultimately, it is also recommended to have a certain facility that plays a role of land mark in the tourism of Gyeryong-si that integrated and managed resources of Gyeryong-si. It is tentatively called as patriots and veterans culture center to demonstrate regional identity and long-term urban activation.

      • 〈춘향전〉 이본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과 그 가치

        경일남(Kyung, Il-Nam)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21 충청문화연구 Vol.26 No.-

        이 논문은 〈춘향전〉 이본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과 그것이 지닌 가치를 고찰한 것이다. 〈춘향전〉 이본에는 충청지역의 지리·명소, 토산물, 지명, 기녀 등과 관련된 내용이 적잖이 개입되어 있다. 이런 양상은 〈춘향전〉 이본 중 필사본에서 더욱 두드러진 양상을 보여준다. 〈춘향전〉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은 작품 내에서 향토적 현실성을 강화시켜주는 문학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충청 관련 내용의 확대·변이와 추가적 수용은 주로 〈춘향전〉의 필사본에서 나타난다. 이 이본들의 필사자는 충청지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많은 자라고 보아지며, 이 이본들은 주로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춘향전〉에 수용된 충청 관련 내용은 이 작품이 전승되던 당시의 충청지역의 실상과 충청지역에 대한 당대인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충청학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This study examined the content and the value related Chungcheong appeared in a different version of 〈Chunhyangjeon〉. Some details involved geography, famous place, local produce, nomination and ginyeo are pretty implicated in this version of 〈Chunhyangjeon〉. This aspect is shown remarkably in the manuscript one among different versions. Substance on Chungcheong has made literary effect in the work, which stiffens indigenous reality. These additional acceptances and expansions, transitions about Chungcheong are usually appeared in the manuscript. The writer of the manuscript is seen as a person who has lots of interest in Chungcheong area. And it seemed quite probable that these different versions were distributed centering around Chungcheong. Because details on Chungcheong in 〈Chunhyangjeon〉 reflects the reality of area and the recognition, so these have value as a critical data of Chungcheong studies.

      • 대전 문화ㆍ예술 정책의 체계적인 수립을 위한 소고

        임기대(Lim, Gi-dae)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4 충청문화연구 Vol.12 No.-

        The cultural policy of Daejeon has changed significantly. With the newly elected mayor, many expect changes in cultural policies of Daejeon City for the better. However, with changes in policies, we are also afraid that cultural policies set before may disappear. One of the most serious problems of cultural policies of Daejeon City has been "the lack of a long-term road map as everything has been implemented in the context of economic revitalization. As a result, the cultural policy of Daejeon has not been able to maintain its continuity, but it has been nothing but a ephemeral ceremony. In this study, we have examined the development of cultural policies of Daejeon in general and have noticed increase in cultural and art programs as well as the various cultural programs in daily life. Especially in this case festivals held in Daejeon, it has always posed the problem of not having an idenity of Daejeon although Daejeon is a city of science. Finally, we"d like to make a few suggestions in an effort to improve the cultural policies of Daejeon.

      • 부여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현황과 기념관 건립

        박경목(Park, Kyung-mo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8 충청문화연구 Vol.20 No.-

        본 논문은 충남 부여군에 소재한 독립운동사 사적지의 현황을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기념관 건립에 대한 타당성을 모색하는 한편 관련 콘텐츠 개발을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부여에서는 의병, 군자금 모집, 3.1운동, 중국방면 무장 항일투쟁, 농민운동, 학생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 다양한 방법론의 독립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 가운데 충화. 임천에서 펼쳐진 1919년 3월 6일 만세운동은 충남지역 최초의 3.1운동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최근 독립운동사는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까지 아우르는 문화원형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각 지역마다 이를 대리표상하는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보존과 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부여 내 독립운동 사적지는 23개소로 기념비와 생가 위주로 남아있으며 체계적인 안내 시스템이 미흡한 실정이다. 또한 대표적인 기념관도 부재하다. 부여 전역에서 다양한 계층의 참여로 다양한 방법론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만큼, 이제 부여 독립운동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기억과 기념을 가능케 하는 시설이 필요하다. 바로 독립운동 관련 기념관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념관의 명칭은 부여의 정체성과 지역을 포괄하는 동시에 부여 독립운동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일환으로 ‘부여 독립운동 기념관’이라는 명칭을 제안하고 타당성을 제시했다. 기념관의 위치는 접근성, 경제성, 효율성, 활용도 4가지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에 부합하는 곳으로 규암면 오수리 일대 ‘부여 노인복합단지’조성지역 제 1공구 내 유보지(미 계획 공간)를 제안했다. 이곳은 교통이 편리하여 주민과 관광객의 접근이 용이하다. 이미 기반 조성 작업이 되어 있고, 주변 시설 및 자원과의 연계가 가능한 최적의 위치이다. 기념관 건립은 사업조성기, 건립 추진기, 건립과 완공기로 나누어 2018~2021년까지 4개년 계획을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부여 시민들의 참여와 공유를 유도하고 민, 관, 학 협치로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충화와 임천의 3.1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방에 전개된 3.1운동 가운데 최초로 일제 헌병기관 앞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가치를 전승하기 위해서 우선 명칭을 확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부여 충화.임천 3.6독립만세운동’이라는 명칭을 제안 했다. 다음으로 현재 진행하고 있는 기념행사를 지역의 특화 축제로 육성하고, 학술, 선양, 체험, 문화 분야 등에서 관련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이는 부여 독립운동사를 주민들과 공유하고 외부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주요 소재가 될 것이다. 부여 독립운동 기념관 건립과 충화.임천 3.1운동 콘텐츠 개발을 통해 부여 지방정부의 위상이 높아지고 지역민 삶의 품격이 제고되기를 기대한다. This study listed the historical sites of independence movements in Buyeo-gun, Chungnam and discussed the feasibility of constructing a memorial.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carried out in various forms in Buyeo during the Japanese Imperial Rule, including the justice army, the 3.1 Movement, fund-raising for military purposes, and labor movement. There needs to be a certain facility to symbolize Buyeo"s independent movement and for commemoration and celebration of its history. We are in need of an independent movement memorial at this point. "Buyeo Independent Movement Memorial Hall" has been suggested as the name of the memorial to represent Buyeo"s independent movement. Accessibility, economic value, efficiency, and usability were considered for the location. The empty lot within the property for "Buyeo Senior Complex" around Osu-ri, Gyuam-myeon was proposed. This place is the best location considering traffic, infrastructure, and surrounding amenities. The 3.1 Movement of Chunghwa/Imcheon is historically significant as it was the first unarmed protest in front of a Japanese military police facility in the rural areas. The proposed title of the movement is ‘Buyeo Chunghwa/Imcheon 3.6 Independence Manse Movement.’ It is also important to develop related contents related to localized festivals, academics, enlightenment, experience, and culture to attract attention of local people and outside visitors. It is expected that the memorial brings honor to Buyeo"s local government and enhance the quality of life for the local people.

      • 충청지역 구석기 유적의 다양성

        유용욱(Yoo, Yongwoo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8 충청문화연구 Vol.21 No.-

        충청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다수의 지점에서 구석기가 확인되었고 대부분 금강 하계망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본고는 금강유역 제4기퇴적층의 형성 과정을 복원하고 이 지역 고인류의 점거 양상에 대한 초보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금강유역은 상류, 중류, 하류 각 세 지역이 지형적으로 독특하게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금강유역이 관통하는 충청지역의 구석기 유적 입지 유형은 1) 금강 중·하류 지역과 2) 충남·전북 접경 지역의 충적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각 지역의 대표적 유적들은 금강 중·하류역의 본 하계망과 지류의 유역 형성 과정을 반영한다. 또한 퇴적층 내에서 발견되는 석기는 대부분 후기 홍적세에 해당한다. 충청지역 구석기시대 고인류는 현재 청원군, 대전 일대의 남한강과 미호천이 마주보는 지역을 기점으로 해서 금강유역을 상류역과 하류역의 두 갈래 방향으로 점거해 나가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현재까지 축적된 절대 연대 자료와 석기군의 변천상을 볼 때 후기 홍적세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Chungcheong area, especially around the Geum River Area(the GRA hereafter), has yielded many palaeolithic localities until now. In spite of numerous studies on individual sites and lithic assemblages, their general formation processes are yet to be understood in a larger scale concentrating on the terrain and landscape of the Geum River channels. This article attempts to observe the principal process of hominid occupation during the Pleistocene era on a macroscopic scale. The GRA is characterized by uniquely distinguished terrains from upstream, midstream to downstream area respectively and this can be one of major factors responsible for the different geomorphological formation processes of palaeolithic sites across this area. The sub-area of the GRA can be suggested two territories: 1) mid-and downstream territory of Chungcheong province; and 2) floodplain territory at the border between Chungcheong and Jeolla province. Each territory assumes unique depositional environment reflecting the influence of different terrains and river channel energies, of both main Geum River and tributary channels; lithic artifacts discovered in situ are generally dated Upper Pleistocene(mostly from MIS 3 to 2). Given the available chronometric dates and lithic assemblage characteristics, the hominid occupation might have initiated at least during the later phase of Upper Pleistocene and continued to the MIS 2.

      • 충청지역 신종교와 그 문화적 특징

        김탁(Kim, Ta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7 충청문화연구 Vol.18 No.-

        계룡산은 조선(朝鮮)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 후보지의 하나로 선택했던 곳이다. 조선의 태조는 즉위 2년(1393)에 계룡산(鷄龍山)으로 행차하여 새로운 도읍 후보지로 삼는다. 이 일이 후대에 이씨(李氏) 조선을 대신할 새 왕조가 계룡산에 건국될 것이라는 {정감록}류의 예언으로 흡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선조(宣祖)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이 계룡산이 새 왕조가 세워질 중심지라고 주장했다. 인조(仁祖) 때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에서 계룡산에서 새 임금이 등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권대진의 역모사건에도 계룡산이 새 도읍지로 부각되었다. 영조 때에는 {정감록}이 등장하는데, 계룡산이 진인(眞人)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울 곳이라고 주장되었다. 정조 때 이경래와 문인방 등이 계룡산을 중심으로 새 왕조가 세워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후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에도 계룡산이 언급된다. 그리고 동학(東學)에서도 계룡산 중심의 왕조건설이 믿어졌고, 전봉준과 최시형도 계룡산을 신성시했다. 일제강점기에도 계룡산은 새 왕조가 건설될 중심지로 믿어졌으며,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천교에서도 계룡산을 신성시했고, 많은 신종교 교단이 계룡산을 정씨 진인의 새 도읍지로 믿었다. 해방 이후에도 천진교, 동학회, 천지대안도, 금강대도, 삼령교, 삼신당, 무량천도, 정도교 등의 교단에서 계룡산에 새 왕조가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고, 계룡산을 교단의 중심지로 삼고 이곳에서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교단에서도 계룡산은 성스러운 지역으로 이해되었다. Gyeryongsan is the place where Taejo Lee Sung-gye, the founder of Joseon, selected as one candidate of new capitals. Taejo in Joseon visited Gyeryongsan and took it as a new candidate of the capital in the second year of enthronement. This became a crucial clue to the prophets like Jeonggamrok that a new dynasty to replace Joseon of the Lees would be founded in Gyeryongsan. Later, Chung Yeo-rip in Seonjo insisted that Gyeryongsan be the center where a new dynasty would be founded. It was also argued that a new king would be made in Gyeryongsan at Yu Hyo-rip"s conspiracy in Injo. And Gyeryongsan stood out as a new capital at Gweon Dae-jin"s conspiracy. In Youngjo, Jeonggamrok appeared, where it was said that Gyeryongsan would be a new country by a true man of Chung. Later, Gyeryongsan was referred to in 10 beautiful places of Jeonggamrok. Also in Donghak, the dynasty founding in the center of Gyeryongsan was believed. Jeon Bong-jun and Choe Si-young also took Gyeryongsan as holy. Also in the Japanese occupation, Gyeryongsan was believed to be the center of a new dynasty being founded, and people gathered there. Bocheon-gyo took Gyeryongsan as holy, and a lot of new religions believed Gyeryongsan to be a new capital of a true man of Chung. Also after the liberation, in the religions of Cheonjin-gyo, Donghak-hoe, Cheonjidaean-do, Geumgangdae-do, Samryeong-gyo, Samshin-dang, Mooryangcheon-gyo, Jungdo-gyo, and so on, it was believed that a new dynasty would be founded in Gyeryongsan, which was regarded as the center of the religions and their followers prayed earnestly there. Also in the new religions of Christianity, Gyeryongsan was regarded as a holy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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