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篠田桃紅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1972 彩硏 Vol.- No.1
읽고 못읽는 문제만 하드라도 현대인에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앞으로 후대 어느 때까지의 사람이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기호로서의 문자는 수시로 변화한다. 아마도 현대에 읽을 수 있는 ㅅ라 하드라도 몇 년인가 후대에 사람들은 오늘날의 서를 「옛 조형예술의 하나」로 볼는지 모른다. 말(언어)을 기록하는 부호였던 「형해」로 볼 것이다. 실상 우리 들도 고대 각국의 문자를 이렇게 보고 있는 터이다. 외국인은 이미 동양의 서를 다만 순수하게 바라보고 있다. 현재 서냐 아니냐 하는 것 보다도 창작되는 작품이 엄격한 조형의 마음을 갖고 있느냐 않느냐 하는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秦弘燮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1978 彩硏 Vol.- No.3
현재에 남겨진 한국의 화적은 조선시대를 제외하고는 매우 드물다. 조선시대라 하더라도 그 전기의 화적은 그나마 드물다. 전시대인 고려시대에도 문헌으로는 상당수의 화가가 있었고 그들이 남긴 작품 또한 적지 않으나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화적은 대부분 일본에 건너가 있는 불교회화, 소수화원의 안향영정 그리고 벽화 등 1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이보다 앞서는 통일신라시대나 삼국시대의 화적이 지상에서 전하는 예는 전무하고 오직 지상에 간직되어온 고분벽화 뿐이다. 그것도 고구려 시대의 고분벽화를 제한다면 삼국기와 통일신라시대를 통하여 백제의 부여 능산리와 공주 송산리 제4호 분의 사신도와 연화운문도, 고신라의 영주 순흥의 연화도인 인물도, 가야의 고령 고아동의 연화운문도 등을 꼽을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지하에 있었던 고분 벽화로서 고구려 벽화는 본격적인 모사가 있어 일부나마 원상을 접할 수 있으나 능산리ㆍ송산리의 백제 벽화는 현재 크게 손상을 입어 현장에서는 원형을 볼 수 없고, 다만 모사에 의할 뿐이며 고신라ㆍ가야의 벽화는 발견시 이미 퇴락이 심하였다. 화제에 있어서도 고구려 벽화의 다양함에 비하면 백제ㆍ신라 벽화의 화제는 빈약하여 사신도, 연화운문도, 세부가 불분명한 인물상 등이 현재까지 알려진 전부이다. 다행히 최근에 이르러 백제 무령왕능이 공주에서 발견되고, 경주 황남리 제155호 분 발굴등으로 인하여 대작은 아니라 하더라도 매우 적막하였던 백제ㆍ신라 화적에 새로운 예가 첨가되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ㆍ신라 회화에 관한 새로운 지견을 얻게 되었다. 이들 새로운 화적은 부장유물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이므로 화면이 작아서 회화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 중에서도 충분히 고구려의 영향을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무령왕능 발견, 왕과 왕비의 두침에 그려진 그림, 경주 황남리 제155호 분 발견 백엽피제의 관모와 장니에 그려진 그림과 장식문양 등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수법과의 깊은 연관을 역력히 볼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백제ㆍ신라의 화적이 이상과 같이 극히 적어서 일반적인 경향이나 화풍, 혹은 화법을 파악하려면 더 많은 화적의 출현을 기다려야 하겠으나, 우선 현재까지 알려진 예만이라도 대상으로 삼아 백제나 신라의 회화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을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宋榮邦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1972 彩硏 Vol.- No.1
이상의 소론은 너무나 우리에게 엄청나고 방대한 동양문화권의 일부분인 동양의 회회(이조후의 수묵화)의 숭고한 사상적 연원에서 배치하여 발전을 거듭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옛것을 너무 양식상으로만 집착 골동화함은 진부하므로 초연한 예술정신자세로서 고전을 바로 터득하고 오늘날 내 혈맥에 그 전통의 정신이 융화 될 때 또한 거센 시류에 일시적 흥분이나 엽기로 현혹되는 것을 자경하면서 고인의 화격과 화기를 구고심론 옳게 계승 예지의 섬광이 번득이어 역사가 추진하는 공간적 창작자세를 갖고 신시대의 생기있는 미를 전통정신에 부합시켜 추구하고 수립하는 등 동양화학도들에게 할 의무는 많은 숙제로 남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