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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emen Unity

        Baeisa, Abdulaziz Ahmed 영남대학교 통일문제연구소 1994 統一問題硏究 Vol.16 No.-

        예멘의 통일은 수년동안의 분단과 분열 기간을 거치면서 공식적으로 1990년 5월 22일에 선언되었다. 이 시기는 내부적인 변화 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변화 즉 국제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예멘 통일의 결과와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통일이 이루어진 역사적 배경과 그 본질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가진 나라의 경우 같은 나라의 두 부분이 하나가 된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멘의 경우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때로는 유혈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1962년 9월 26일 평화적인 혁명의 성공속에서 북예멘은 중세의 이멤들(Imams: 회교국의 종교적 지도자)에 의해 수세기동안 받은 고독이라는 속박을 벗어버렸다. 5년 후 남예멘도 수년 동안의 무장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이때에 통일을 위한 적절한 시기가 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북쪽은 외부세력에 의해 내란속으로 빠져들어갔으며 반면에 남쪽은 혁명의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었다. 1972년과 1979년 사이에 남예멘과 북예멘은 소규모의 충돌들이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남북예멘간에 일련의 대화와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그 대화는 아랍연맹(Arab League)을 통해 또는 아랍의 여러 지역 카이로와 트리플리에서부터 쿠웨이트와 알제리-에 이어지면서 마침내 예멘의 자기 땅에서 해결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수월하게 진행되면서 1990년의 통일을 위한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도위급 예멘협의의(Higher Yemen Council)의 설립과 여러 분야에 걸친 공동위원회 및 교류활동 뿐만 아니라 총리회담 및 정상회담이라는 결실까지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결실은 정치적 책략처럼 보였으며, 양 쪽이 모두 시간을 끌어서 상대를 굴복시킬 기회를 엿보려는 다소 전술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내가 보기론 진전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관점이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지라도 나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려는 국민 대다수의 감정 표현이었다는 점은 최소한 믿는다. 1988년에 좀더 나아진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는데, 두 진영사이에 자유로운 왕래와 중요한 공동프로젝트(국경 분쟁지역에서의 석유탐사와 같은)수행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0년의 예멘 통일은 이러한 배경을 한 걸음 더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이전의 많은 협정과는 달리 1990년의 협정은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탄생되었으며, 처음으로 민주적인 조항이 가미되었는데 이는 아주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왜냐하면 1990년 협정은 전체주의 체제 혹은 준전체주의 체제 국가에서 정당과 단체의 자유를 보장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멘 통일 당시 북쪽과 남쪽은 각각 국민일반의회(Peoples' General Congress)와 예멘 사회주의정당(Yemen Sodalist Party)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두 진영의 통일에 대한 협정은 해당 공동위원회에서 마련한 헌법초안에 기초를 두었다. 공동위원회가 거의 10년이 걸려 마련한 이 초안은 1981년에 제출된 이후 다시 10년이나 미루어져 왔던 것이다. 1990년 협정은 30개월의 과도기간을 규정하고 있다. 그 협정은 새로운 통치를 위한 틀을 마련했다. 두 나라의 인구, 크기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은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권력의 분점에 있어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력에 대해 전적으로 동등하게 공유하였다. 그리고 모든 다른 기구와 단체, 심지어는 민간단체 분야에까지 점진적인 병합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과정이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행정상의 체계를 팽창시키고 새로 탄생한 통일예멘에게 짐을 지운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치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체계를 가진 두 나라가 아무런 어려움없이 합쳐질 수는 없다는 점을 상기하여야만 한다. 한편 그 어려움 속에 이루어진 예멘 통일의 근원은 예멘의 문화와 역사속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1. 예멘인들은 항상 정부의 형태와 관계없이 하나였다. 말하자면 통일은 사회속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다. 동서남북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예멘인들은 거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언어, 하나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로 그들 간에는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차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의 동질성이 존재하고, 사회의 관습과 전통이 이질적이지 않다. 2.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9월 20일과 10월 14일에 일어난 혁명은 두 지역의 통일을 다져 놓았다. 이 멤버들에 대항하는 혁명을 지원하기 위하여 수천명의 남예멘인들이 북쪽으로 몰려 들었으며, 한편 원래 북쪽 출신의 많은 예멘인들은 영국의 점령에 대항하는 남쪽의 형제들과 동참을 했다. 북예멘은 특히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주도하의 아랍 민족주의의 절정기에 남예멘 혁명의 기지였으며 주요 지원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3. 거의 모든 당과 사회조직들이 공개적으로든 비공개적으로든 그들의 규약에는 통일에 대한 항목을 가지고 있다. 4. 영국간에는, 서로를 부인할수도 혹은 없애버릴 수도 없으며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5. 거의 비슷한 환경이 양지역에 만연하고 있었다. 90년대초에 불균형적인 경제발전이 가져온 결과는 점차로 환멸감과 쓰라림을 반영하면서 국민들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평화 속에서 그들의 기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통일된 나라가 더 좋다는 것을 느꼈으며, 통일된 조국만이 삶의 질을 더 높일 수 있으며 그들 나라의 이름을 더 빛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은 1990년 5월의 통일협정이 양지역에서 어떻게 실시되었느냐는 것이다. 통일협정의 서명과 거의 동시에 각 분파별로 여러 공동위원회-사법, 계획, 외무, 에너지, 교육, 보건 등-가 조직되어 양국의 행정부를 서로 병합하거나 필요하다면 재구성하는 방법들을 검토하여 기초 법안을 마련해 나갔다. 마련된 기초 법안들 중 일부는 의회에 제출되거나 혹은 대통령자문회의에 회부되어졌다. 이와 병행하여 정당 문제에 있어서는, 두 진영의 정당인들을 포함한 조정위원회가 설치되어 양국 정당간의 견해 차이를 좁히려는 방안을 강구해 나갔는데, 이 방안에는 정당간 연합(alliance) 혹은 병합(merger)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양쪽정당에 대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또 하나 주목해야 될 사실은 통일 협상때 양국의 각 집권당의 위상에 관해서도 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는데, 그 대안들 중에는 두 집권당의 직접 병합, 각 집권당의 독자성을 보장한 현상유지, 또는 모든 정당을 폐지하는 대신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는 방안 등이 포함되었다. 그 중에서 현상유지안이 선택되었는데 그 이유는 한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절대주의 지배 체제로 후퇴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각 집권당의 현상유지안이 채택된 이후, 각 정당간 마찰을 사전에 방지하고 상호 조화로운 공존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협약과 행동규약들이 조인되었다. 이러한 방법은 세당의 연립정권이 등장하게 된 1993년 4월 선거 이후에도 나타났다. 통일협정의 서명시기에 모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기대가 컸고 열정 또한 높았다. 그러나 국외적인 다른 요인들에 의해 새로운 상황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예멘은 항상 아랍국가들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와 아랍권의 결속을 추구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 예멘의 두 우호국인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분쟁은 새로 탄생한 통일예멘의 입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예멘은 이라크 침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국인 예멘의 태도는 '親이라크'쪽으로 오해를 받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걸프 지역의 국가들과 서방 국가들로부터의 원조 중단 그리고 사우디로부터의 약 백만 예멘이주자들의 철수는 새 통일국가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특히 걸프지역에 거주하는 예멘 교포들은 조국을 위해 기부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바로 그 시기에 예멘은, 아프리카 혼(horn) 지역 내전으로 발생한 수만명의 소말리아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길도 강구해야만 했다. 여기에는 지리적인 근접성, 형제적인 유대관계, 그리고 인간적인 연대라는 여러 요인이 작용되었다. 이미 국내적으로는 두 행정부의 통합이 미칠 결과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왔으며, 또한 서로 다른 두 정부체제를 어떻게 하면 통일헌법하의 상위체제에 예속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대책을 강구해 왔다. 그 부담은 매우 컸다. 행정업무의 팽창과 제도적인 난관에 봉착했으며, 게다가 오래된 상호 적개심과 타성은 새로운 목표와 먼 미래의 비젼제시에 부정적으로 반영되었다. 1991년 12월 통일정부에 의해 채택된 전반적인 경제 및 행정 개혁프로그램들이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경제적인 축면에서, 예멘은 두개의 경제적으로 다른 체제를 통일했기 때문에 이 자체가 경제적 어려움을 낳지 않겠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예멘이 비교적 가난하기 때문에 더욱 더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북예멘은 주로 민간부분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자유 자본주의 정책을 따른 반면, 남예멘은 중앙 집중 계획과 엄격한 가격 통제 정책을 추구해 왔다. 새로 통일된 예멘은 기본적으로 자유시장 정책(경우에 따라 공동투자를 수반하는)을 선택했다. 그러나 남쪽은 이미 1986년 이래로 자유시장체제를 지향하면서 대부분의 통제와 규제를 폐지하였다. 환율 및 수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다. 새로운 투자를 장려할 목적으로 관세, 상업 및 산업세, 이윤의 해외 이전 등에 관한 면세를 규정하는 법안이 제정되었다. 수출지향산업에게는 특혜대우가 제공되었다. 또한 재산이 압류되었던 사람에게는 보상해 주었고 많은 상업적인 재산은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국외 아랍인과 외국인의 투자자들을 유치할 목적으로 아덴(Aden)지역에 대해 자유지대(Free Zones)라는 새 법안이 재정되었다. 그러나 통일예멘은 근로자에 관한 및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남예멘의 경우 이전에는 국영기업이었던 기업들에 대한 새로운 통제로 말미암아, 특히 관광업과 같은 분야에서는 실업을 우려하는 파업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났는데, 이 경우는 생활비의 증가에 기인하였다. 이에 대해 국가에서는 근로자에 대한 봉급을 인상시켜 주고 관련 법규를 조속히 매듭지음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나갔다. 공공분야에 대해 일부는 비판적이지만 다른 일부는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이든 쓰러져가거나 파산하는 기업을 지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국가의 공통적인 방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예멘을 유지시켜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1993년 3월의 아랍 상공회의소(Arab Chambers of Commerce and Industry) 보고서에 의하면, 예멘은 1990년에 경제적인 성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멘은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를테면 걸프위기의 여파로 인한 예산 적자, 수지불균형, 심한 인플래이션, 35%로 추정되는 실업률 등이다. 1990년 예멘의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 기준으로 771억 5천 9백만 YR이었으며 1991년에는 971억 2천만 YR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현재 물가를 기준한 것이며 1990년에 34%로 추정되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지 않은 값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실질적으로 예멘의 경제는 1990년 이후 오히려 위축되고 있는 편이다. 국민총생산(GDP)은 약 3% 감소로 추정되었다. 그 해와 그 다음 해의 4.8% GNP 감소는 주로 걸프전과 그 여파에 기인한다. 예멘은 걸프전으로 인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20억불 이상의 손실을 입었으며 이는 GNP의 20%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지금까지 나는 예멘의 통합과정에 관해서 간략한 역사와 분석 그리고 결론을 언급하였다. 이에 덧붙여 예멘 통일이 내포하는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1. 새로 출범한 통일예멘은 새로운 헌법에 기초하며 그 헌법은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되었다.(대통령이 연임 회수 제한을 포함한 많은 개정안들이 지금 논의 중에 있다.) 2. 1993년 4월 27일의 선거가 세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였으며, 그 선거는 새 정당의 연립을 낳았다. 3. 몇 가지 중요한 기본적 원칙들이 점진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즉 평화적인 정권교체, 기본적 자유와 인권의 보호, 표면과 결사의 자유 등이다. 헌법 이외에도, 이러한 모든 것들이 협정과 연립정당간의 규약에서 부가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가에서 건전한 제도를 정착시키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익혀서 법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지고 민주화가 순조로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걸릴 지도 모른다. 예멘은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발전가능한 나라이다. 예멘이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도약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원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농업, 석유, 관광 등의 분야에서는 개발 중에 있다. 앞에서 강조한 통일예멘의 안정이 바로 번영과 발전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예멘처럼 한국은 오래된 위대한 문명을 가지고 있다. 사실 예멘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무역중심지로서 동아시아와 서쪽, 북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예멘처럼 한국도 외국의 점령과 분할을 경험했다. 현재 양국은 민족적인 화해, 개혁, 사회발전, 그리고 새로운 문명의 세계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양국은 내전을 경험한 후 이제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해결 방안을 선택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은 예멘과 다른점도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국은 여러 가지로 유리할 수 있다. 예멘은 알다시피 개발도상국 중의 하나이며, 실제로 UN기준에 따르면 l인당 소독이 약 $500에 불과한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저개발국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은 부유하고 번영한 나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역의 기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의 기준에 의해서도 그러하며, 이는 바로 한국 국민들의 자부심과 연결된다. 반드시 독일식 통합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한국의 여건은 문제를 완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지역의 평화 및 안보 요소와 비핵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음식 조리법처럼 명확한 시나리오를 제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흔히 그러하듯이 찬반양론, 그리고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 한국 국민들과 그 역사만이 통일을 위한 가장 좋은길을 제시할 수 있다. 이전의 예멘처럼 한국인들간에도 아마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들지 모른다. 어떤 경우이든, 완벽하면서도 신속한 통일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진심으로 성공과 희망을 바란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오랫동안 간직해온 통일에 대한 염원을 여러분들이 옳다고 보는 방법으로 곧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지 나의 바램은 한국과 예멘 양국 사이에 공통의 이익을 나눌 수 있는 분야에서 좀더 가깝고 좀더 나은 관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 韓半島 統一論議의 政治史的 接近

        李昶雨,金基澤,林暻熙 영남대학교 통일문제연구소 1986 統一問題硏究 Vol.12 No.-

        This thesis is written with the intention of reviewing all the discussions on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raised by both North and South Koreas in a chronological order on the basis of the political development for the past 35 years from 1945, the year of Korea's independence from the Japanese rule to 1979. The discussion on the korean peninsula unification right after the Korea's division appeared in such forms as elimination of the 38th parallel, collaborating movement between the right and left, and North-South negotiation, all of which were led under the leadership of political parties, social organizations, and national leaders. As North and South Korean governments were formed respectively in August and September, 1948, however, those movements failed to gain any results and consequently the division into two parts of North and South Koreas between two systems has become fixed gradually. After the division was fixed, the discussion on the Korean peninsula unification in South Korea was developed on the basis of such ideas as "northward advancement unification" during the period of the first Republic, "first construction and afterwards unification" in response to the radical "self-unification" or "neutral unification" by a group of revolutionary forces during the period of the second Republic, and then "unification by overcoming the communism" under the slogan of "first construction and then unification"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third Republic. In North Korea, the idea has been developed as "unification by force" in the early period, "peaceful unification" in the 1950s and "unification under Federal System" since 1960s. Right after the division was fixed, unification by northward advancement by the South or unification by force by the North were presented because political leaders in the North and South all wanted to end the divison immediately; they believed the only way to the national survival is unification of the divided peninsula, and had a belief that they would dare to employ even forces to achieve this purpose. North and South Koreas have alleged that only their side is representing the legitimate government. South Korea considers the nothern part of the peninsula as a lost land illegally taken over by an anti-state group, and perceives the unification as recovering the lost territory. North Korea on their part, on the other hand, defines Seoul as the capital of unified Chosun, and has considered the unification identical to the liberation of South Korea. Thus North and South Koreas have tried to grasp the issue of unification in the context of conflicting ideological systems, and the discussions on unification have found no other ways than ideological arguments or argument over the systems. It cannot be overlooked, however, that both the changes within the systems of the North, and South and the change of international situation have played a vital role as a fairly big variable. Beginning the occasion of the 1960 April 19th revolution, therefore, the discussion on unification by North and South Koreas has undergone gradual change, and the North and South seem to have approached to the idea of peaceful unification on the surface. And during this period, South Korea has put emphasis on "first economic construction" and has acquired a superior position over the North in all areas of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affairs. Entering 1970s the unification discussion has gone into the direction of groping for negotiations of their own problems on the basis of mutual recognition of the two systems. And this approach in reality required of us the will for unification as follows; that is, what is required first of all is the will to approach to unification by forming with initiative the subjective conditons for unification rather than passively waiting for the objective conditions to get mature. Along with this, the political leaders from both sides should get rid of their own animosity against each other, and they need to perceive the importance of the fact that both communism and democracy are changing even though the coexistence of the two systems is denied. They also need to have the will to effect in advance the overall participation and tolerance for the sake of unification. By doing so, both sides of the North and South will come to resolve their own particular conditions one by one, and by subjectively adjusting themselves to the variables of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they will be able to make it more realistic-the unification of the divided land which has been the supreme national goal for the past 40 years of the divsion of the country.

      • 김정일의 權力基盤 : 軍部를 中心으로

        정영태 영남대학교 통일문제연구소 1995 統一問題硏究 Vol.17 No.-

        북한인민군은 혁명을 위한 무장력으로서의 군대, 당을 위한 군대라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혁명무장력으로서의 인민군은 김일성 정권의 정치적 목적 즉 '남조선 해방'을 실현키 위한 수단으로서, 당(수령)을 위한 인민군대는 김일성 정권의 강화수단으로서 각각 기능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당조직을 통하여 인민군을 통제·감시하고 중요한 군사사항의 결정에 당이 적극 개입함으로써 군부의 당 또는 수령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거나 이에 대한 적대행위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결국 북한 당국은 당우위의 당·군 2원화체계를 유지하여 김일성·김정일 유일지배정권의 안정을 도모해오고 있다 할 수 있겠다. 김정일은 김일성과는 달리 실질적인 군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60∼1970년대의 조성기, 1980년대의 강화기, l990년대의 완료기를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군사부문의 지도권을 장악해 왔다. 그결과 김정일은 현재 인민군최고사령관, 원수,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군사부문 최고지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김정일의 이러한 군사권력기반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김정일의 군사부문 지도권 형성과정에서 드러난 것으로서 김정일의 군사권력은 정통성을 결여한 군사지도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같이 항일무장투쟁을 바탕으로 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군경력을 쌓음이 없이 당조직·선전부문 및 당의 군사관련 부문을 발판으로 군지휘 중심이 아니라 군통제(정치)중심의 지도권을 우선적으로 조성해 왔다. 둘째, 조직적 차원에서는 김정일의 군사권력이 거의 완벽한 통제체제를 중심으로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일의 군사권력 기반은 조직·기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의 4개 군사권력기구 즉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사회안전부, 호위총국을 수평적으로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 기구의 상층에서부터 기층까지를 수직적으로 포괄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 4개 군사권력기구들은 상호 수평적으로 기능하면서 당(김정일)에 의해서 종합적이고도 전면적인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으며 각 기구의 조직 그 자체도 수직적으로 당에 의한 통제를 받고 있다. 셋째, 인사적인 관점에서 북한은 군사권력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기관에 김정일 자신의 최측근인 혁명 1·2세대 인사들을 배치시켜 조직의 안정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경쟁적으로 유도함으로써 김정일은 그만큼 안정적인 군사권력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을 살펴볼 때 김정일의 군사권력 기반은 전반적으로 안정적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앞에서 지적된 김정일의 군사권력 기반에 대한 정통성 결여문제는 어느 정도 그 안정성을 해치는 일요소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그 안전성 자체를 깨뜨리는 요소로까지 작용할 정도로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이 군사와 관련한 제도적인 권한 및 직위를 단계적으로 취득함에 따라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군사지도조직의 새로운 구축 또는 정비 그리고 김정일의 명의 또는 지도하의 각종 '운동'(3대혁명소조운동, 김중흡 따라배우기 운동 등) 등을 발기해 왔다. 특히 김정일이 군최고사령관, 원수,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고 난 이후부터는 북한은 김정일의 군사지도권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을 김일성의 정통성 승계라는 자원에서 도출하는 노력을 펴왔으며, 동시에 보다 노골적으로 최고군사지도자로서의 김정일의 자질에 대한 과장선전과 이에 대한 직접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제조치(김정일 군최고사령관 지지결의대회, 김정일에 대한 군충성 가요 보급등)들을 강화해 오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조치들이 지속될 경우 김정일의 군사지도권의 정통성 결여문제는 어느 정도 희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의 군경력과 군사적 자질문제를 중심으로 야기되는 군내의 불평·불만들은 집단적으로 표출될 만큼 조직적이지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김정일의 군사지도권과 관련한 군내의 이러한 불평·불만들은 북한의 군사력을 떨어뜨리게 하는 사기력 저하요인은 될수 있을지언정 김정일의 군사권력기반 자체를 총체적으로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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