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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당 정인보의 양명학 연구와 다산 이해

            한정길(Han, Jeong-gil)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5 다산과현대 Vol.8 No.-

            이 글은 위당 정인보의 다산 이해의 특징과 의의를 규명하려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이 글의 주요 논지는 정인보의 양명학적 관점이 다산 이해의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인보는 강화학파 양명학의 중심인물인 난곡 이건방으로부터 양명학의 대의(大義)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그것은 양명학을 실심(實心)에 기반을 둔 실학(實學)으로 이해한 점, 양명학을 통하여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려고 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정인보는 이것을 지적 배경으로 하여 양명학의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정인보 양명학 이해의 특징은 우리의 본심이 타인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는 ‘감통(感通)"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 점이다. 정인보에 따르면 이 본심은 조선의 민중과 나라에 감통하여 그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데서 그 참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학술이 실학인지의 여부는 본심이 민중과 나라에 감통하여 그들을 애틋하게 여기는지에 달려 있다. 정인보는 이러한 관점에서 정약용의 인물과 학설을 조명한다. 정인보는 다산의 학문 동기를 백성과 국가를 구제하고자 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산의 모든 저술에 표현되었다고 본다. 다산의 저술 속에 양명학의 정신인 ‘백성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흐르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다산의 학문 목적을 국가와 민생의 실리 · 실익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찾는다. 이것은 다산 학문의 핵심을 백성과 국가를 구제하려는 경세사상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다산의 경학(經學)까지도 경세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같이 정인보는 다산실학이 실심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다산이 ‘국가와 민생의 실리실용'을 중시했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산 실학을 공리(功利)를 중시하는 실용실학(實用實學)으로 이해한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그동안의 실학 연구는 결과적인 공리를 중시하는 실용실학의 측면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정인보가 구상한 실심에 기반한 실학은 이제는 그 명맥을 찾아보기 어렵다. 앞으로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정인보가 제창했던 실심실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This thesis aims at clarifying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the understandings of Dasan accomplished by Jung In Bo. The main theme is that the standpoint of Jung In Bo's Yang-ming Studies has become the basis of understanding Dasan Studies. Jung In Bo learned the grand idea of Yang-ming Studies from Lee Gun Bang who was the main figure of the Yang-ming Studies of Ganghwa school. That Yang-ming Studies could be understood as a Practical learning based on Sincere mind and that it is possible to heal the social issues through Yang-ming Studies. The main characteristic of understanding Jung In Bo's Yang-ming Studies is that it is said that our Original mind has the ability of ‘being acted upon and penetrating things' that feels the pain of others as one's own pain. According to Jung In Bo, this original mind shows its true self by being acted upon and penetrating the people and country of Chosun and caring for them. Whether a certain academy is an authentic Practical learning or not totally depends on Sincere mind by which acts upon and penetrates the people and country. At such point, Jung In Bo looks into the character and academics of Jung Yak Yong. Jung In Bo finds the core motive of Dasan Studies in terms of the mind of sincerity to save the people and country. Also, that mind is said to be have been expressed in all books of Dasan, especially in his Confucian classical studies. It is said that in the books of Dasan, the ‘heart of caring people' which is the spirit of Yang-ming studies flows within. He finds the purpose of Dasan's studies in pursuing the true interest and welfare of the country and people. This means that the core of Dasan's academics lies in the spirit of saving the world which saves its people and country. It is understood that he thinks Dasan's Confucian classical studies pursues the spirit of ‘saving the world'. As such, Jung In Bo sees the Practical learning of Dasan as the basis of the Sincere mind. This shows its eminent difference among other Practical academies of Chosun dynasty in its standpoint of Practical learning based on Sincere mind. Owing to influence of Sincere mind inherited from Yang-ming studies, Dasan produced hundreds of books for Practical learning (실학) focused only on the ‘real interest and welfare of the country and people'

          • 동은 김충식과 연세대세브란스병원

            박형우(Park, Hyoung Woo)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7 다산과현대 Vol.10 No.-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동은의학박물관(東隱醫學博物館)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발전을 위해 거액을 희사하여 재단을 설립했던 강진의 갑부 김충식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 재개관하였다. 그가 거액을 희사했던 세브란스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으로 시작했던 연합 기독교 기관으로 많은 한국인 의료진을 배출함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국민의 건강 증진에 온 힘을 다해 왔다. 하지만 1940년대 선교사들이 철수한 이래 심한 재정난에 빠졌고, 광복 이후 6년제 의과대학으로의 승격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때 김충식이 거액을 희사했던 것이다. 김충식은 30세 전후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운영하면서 재산을 늘리는데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상당한 부를 쌓았다. 그는 자산을 축적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사회 활동 및 교육 사업에도 눈을 돌렸는데, 세브란스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 법인 동은 학원은 그가 추진했던 교육 사업의 절정이었다. 1940년대 초 폐렴에 걸리고 2~3년 후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최동의 도움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김충식이 기증한 92만평의 토지를 토대로 1949년 5월 세브란스를 후원하기 위한 재단법인 동은학원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토지개혁과 화폐가치의 하락은 갓 출범한 동은학원에 큰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토지는 모두 지가증권으로 바뀌었고, 이것을 매각하여 귀속재산을 불하받는 과정에서 매매절차상의 하자로 학원 재산은 일부만 남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1975년 동은의학박물관을 설립하였다. 1980년 전후에 박물관은 활동 영역을 넓히려 노력하였으나 재원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80년 2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넘겨졌다. 재단마저도 1982년 4월 해산되었다. 동은 김충식이 기부했던 많은 자산 중에 현재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동은의학박물관이다. 하지만 현재의 박물관은 공간이 좁고 위치도 좋지 않으며, 시설과 인원의 확충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런 부족한 점들이 조속히 개선되어 김충식의 숭고한 뜻이 영원히 기록되기를 소망하며, 이를 바탕으로 강진군과 연세의 협력이 더욱 견고해 지기를 기대한다. Dong-Eun Medical Museum, College of Medicine, Yonsei University was reopened in 1999 to commemorate Mr. Choong Sik Kim(金忠植, 1889~1953), from Kang Jin(康津), who generously donated and established a foundation for the advance of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Severance hospital is a Union Christian Institution that roots from Korea's very first westernized hospital, Jejoongwon. Numerous Korean medical professionals were educated at the institution and operated under strong Christian faith and belief for promoting health for Koreans. However, the institution went under a serious financial difficulty when mission workers were pulled out in early 1940s and even after independence, it was not expected to be elevated to a 6 year medical college. At that time Mr. Choong Sik Kim willingly donated a large amount of fund. Mr. Kim was talented in expanding money and was able to accumulate wealth by investing in real estate around his 30s which was inherited by his father. He not only was interested in saving money but also in social activities and educational business, one of them being Dong-Eun Foundation which was established to support Severancel. When he got pneumonia in the early 1940s and collapsed from a stroke after 2-3 years, Dr. Paul Choi, who was a Professor of Severance, aided him and this event provided a cause for Mr. Kim to establish a Dong-Eun Foundation at May 1949, to support Severance hospital. However, due to land reform and depreciation the foundation had to be gone through hardship. The land became a stock by the law and during the process of selling it and securing the attributed property from the Government, only parts of property of foundation was left due to flaw in process, and it was decided to establish Dong-Eun Medical Museum in 1975. Around 1980, the museum tried to expand its activity area but faced shortage in basic fund and was handed over to College of Medicine, Yonsei University on February 1980. The remaining foundation was also dissolved on April 1982. The only legacy that Mr. Choong Sik Kim left that can be traced is Dong-Eun Medical Museum. The current museum is short of facility and labor support along with its physical issues such as being cramped and location. It is our hope that these issues be solved as soon as possible to honor Mr. Kim's noble work, and also wish for a stronger cooperation between Kang Jin County and Yonsei.

          • 병영상인 박세정의 기업경영과 상인정신

            주희춘(Hi Chun Ju)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7 다산과현대 Vol.10 No.-

            병영상인은 전남 강진 지역에서 태동한 상인들이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출현하기 시작해 고려시대 고려청자 생산과 유통 기능을 담당하며 활동해 오다가 조선시대 전라병영의 설치와 함께 꽃을 피웠다. 박세정은(1917-2001)은 1958년 (주)대선제분을 창업했다. 대선제분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곡분회사다. 2017년 창립 59주년을 맞았고 밀가루에서부터 쌀 가공식품 등 곡분과 관련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박세정의 삶은 전남 강진군 작천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당시에는 생소했던 제분회사를 창업하기까지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에 충실했던 병영상인의 전형을 이룬다. 또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병영상인의 전통이 근세들어 어떤 형태로 변화 발전했는가를 보여주는 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강진 관련 인물을 통해 조선후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강진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는데 좋은 사례다. 병영상인이 강진에서 탄생한 이유는 강진군의 지리적 조건과 큰 관련이 있었다. 강진군은 한반도 서남해안 끝 지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이 만나는 곳이고,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의 항로에 위치해 오래전부터 국제무역의 중심지에 있었다. 병영상인들은 14세기 들어 청자의 쇠퇴와 함께 조선왕조의 설립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변혁기를 겪으며 또 한 번 생사의 갈림길에 섰지만 조선전기 전라병영성이 강진군 고군면(지금의 병영면)에 설치되면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박세정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구상마을에서 태어나 어릴적 부친과 함께 행상에 뛰어 들었고, 명태 도매업을 하면서 해방을 맞은 후, 6.25 발발과 함께 부산으로 건너가 계동산업을 창업했다. 또 종전 후 1958년 대선제분을 창업해 60, 70년대 경제 성장기 경영 일선에서 온몸을 바쳐 기업경영에 헌신 하는등 격변기 병영상인의 활동과정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인이다. 박세정은 기업경영 과정에서 신용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마음과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며 새로운 분야에 뛰어드는 도전정신을 잃지 않았다. 또 기업과 종업원, 지점과 본사가 함께 살아간다는 상생주의, 기업가로서 늘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고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일관적으로 유지했다. 이같은 박세정의 상인정신은 기업문화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의 대선재분을 있게 했다. 박세정의 도전정신은 힘들 때 오히려 기회를 찾아 나서고 위험을 감당하는 투자에 나서라는 경종을 울리고 있다. 박세정의 신용제일주의는 기업이 사회와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면 대외적인 신용 확보가 중요하고, 무엇보다 기업내부의 신뢰기반이 높은 수준으로 축적되어야 한다는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박세정의 상생주의는 기업이 주주이익의 극대화에 머물지 않고 종업원과 협력업체, 지역사회, 국가 등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세정의 근검절약정신과 겸손함은 기업인들이 정치 사회적 상황에 기업이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겸손하고 주변관리를 잘 해야 하며, 기업의 이미지 제고와 종업원의 결속을 위해서는 CEO가 생활 속에서 근검절약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오늘날 기업들에게 거세게 요구되고 있는 윤리경영, 신뢰경영, 공유가치경영 등에 대한 방법도 신용제일주의와 상생주의로 연결되는 박세정의 상인정신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Byeongyeong merchant originated from Gangjin area, Jeolla Province. During the unified Shilla dynasty, General Jang Bogo established a naval facility, Cheonghaejin, in Gangjin where after, Byeongyeong merchan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both 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Goryeo celadon in Goryeo dynasty and their business became flourish in Joseon dynasty because of installation of Jeolla Byeongyeong, military headquarters of Jeolla. Park Sejeong(1917-2001) established Daesun flour mill company in 1958. Daesun flour mill company was the first total grain flour company in Korea. Daesun flour mill company celebrated the golden jubilee of its founding in 2017 and the company products various grain flour such as wheat flour and rice flour. Like other Byeongyeong merchant, the life of Park Sejeong presents pioneer spirit and challenge spirit to people. The life of Park Sejeong also shows an example of inherit of traditional spirit of Byeongyeong merchant and reveals historic background of Byeongyeong merchant. The beginning of Byeongyeong merchant is related to geographic characteristics of Gangjin Gun area. Gangjin Gun area is located in southwestern coast of Korea peninsula where the south coast and the west coast meet. Gangjin area is also located in the mid-way between China and Japan so Gangjin has served as the central of international trade among Korea, China and Japan. However, during Joseon dynasty, Byeongyeong merchant became declined because of falling popularity of Goryeo celadon, but they revived after installation of Jeolla Byeongyeong. Park Sejong born in 1917 under Japanese colonial rules where Yongsang Ri, Jackcheon Myeon, Gangjin Gun area. He started peddling with his parents, became a Pollack wholesaler after Korea's liberation and found Kyedong company in Busan during the Korean War. After the Korean War, he found Daesun flour mill company and devoted to his passion to the company. Park Sejeong shows historical development of traditional merchant during radical economic change in Korea. He valued credibility above life and emphasized on challenge spirit to overcome obstacles. Park Sejeong also highlighted win-win principle that company and employee grows altogether and saving resources. His merchant spirit was inherited in Daesun flour mill company. Park Sejeong's challenge spirit gives a lesson to find an opportunity and take a chance. He suggests insight that gain credibility and accumulate it. His win-win principle means that company does not only focus on profit of shareholders but also focus on the profit of stakeholders such as employees, suppliers, communities, or countries. His frugal mind give us advices that humility is important and CEOs shows a good example to employees. Park Sejoeng's merchant spirit connects between traditional credibility and win-win principal and ethical management, trust based management and creating shared value of today.

          • 근 · 현대 한국의 실학연구와 다산

            정호훈(Jeong, Ho-Hun)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5 다산과현대 Vol.8 No.-

            연희전문-연세대학은 오랫동안 한국에서의 실학과 정약용 연구의 중심 공간이었다. 해방 후 초창기 연구에서는 현실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그 방도를 적극 모색한 ‘정치경제학'으로서 실학을 이해했다. 정약용의 정치경제 사상을 다룬 홍이섭 교수는 정약용이 조선 사회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와 같은 책을 저술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약용이 “민생을 중시하고 국법을 높이는”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파악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김용섭 교수는 근대적 · 농민적 사회개혁사상이자 한국형 근대화론으로서의 실학론을 제기했다. 이 시각은 주자학을 지주 · 양반층의 처지를 반영한 학문론으로 평가하고 또 주자학이 한말에 이르러서는 개화파의 개혁론으로 계승된다는 판단을 전제하며 이루어진 것으로, 학계의 일반적 이해와는 크게 달랐다. 이 같은 실학관은 정약용 이해와도 맞닿아 있었다. 김용섭 교수는 정약용의 농업경영론(農業經營論)에 보이는 정치경제적 사고가, 사회 제 계층의 평등화의 문제를 모색하는 초기의 농업론, 30대 후반의 공동농장(共同農場)적인 농업경영론, 유배기에 정립한 독립자영농(獨立自營農)적인 농업경영론 형태로 변화한다고 정리했다. 정약용의 구상이 단계적으로 변화했으며, 초기의 급진적인 방법론을 벗어나 온건하면서도 점진적인 방식을 택했다는 이해였다. 실학 연구의 역사는 끊임없이 연구의 시각이 확대되며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실학 연구는 분단 체제의 극복, 통일 국가의 실현을 전망하며 그에 필요한 지혜와 방법을 모색해 나가는 노력의 하나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The research of Silhak(實學) in the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at Yonsei University has been developed by a professor Hong I-seop and Kim Yong-seop. Hong I-seop understood Silhak as a political economy to reform social reality, and confirms it more concretely through Jeong yak-yong's thoughts. In the perspective of Hong I-seop, reformation proposal of Jeong Yak-yong(丁若鏞) aims to promote people's life and reinforce the national law. Kim Yong-seop comprehends Silhak as modern social reform thoughts and also the theory of Korean style modernization. Professor Kim thought Silhak reflects class interest of the peasants, in contrast Neo-Confucianism reflects social interest of the landowners, or the gentries. On the thought of Jeong Yak-yong, Kim esteems Jeong Yak-yong has the egalitarian orientation representing the pesant but this radical egalitarian orientation at the early period turned into rather moderate perspective as time passed. The history of the study on Silhak has been a process with constant extension and variation of a perspective regarding the research. The study of Silhak is expected to be progressed toward an Unification of the na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of Korean society.

          • 중앙과 지방의 학술 소통

            김용흠(Kim Yong-heum)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5 다산과현대 Vol.8 No.-

            다산이 강진에서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의 학술적 소통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다산은 이를 통해서 전근대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조선왕조 국가의 혁신을 모색하였다. 그는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북 아시아에서 장구한 기간 발전해 온 학문을 계승 · 발전시켰으며, 서로 다른 당색으로 분열되어 있던 학문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형성하였다. 다산과 그가 강진에서 양성한 다산학단은 중앙과 지방이라는 지역적 한계, 사족과 이족이라는 신분적 한계, 유교와 불교라는 사상적 차이, 다산학과 추사학이라는 학파간의 간격을 넘어서 학술적으로 소통한 역사적 사례를 남겼다. 다산 제자들의 학문과 저술은 다산 이후 다산의 방대한 학문체계를 보완하는 의미를 띠었으므로, 우리가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자 할 경우 우선적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After Dasan was exiled from central to Gangjin, he wrote huge amount of books with his disciples. This is scholarly product of communication between central and the region. In his written works, Dasan organized premodern East asian intellectual tradition critically, and sought the way to innovation of the Joseon dynasty. He promoted succession development of studies which had been advanced for ages in Northeast asia, including China and Korea. He also formed his own theory structure by integrating studies that had been divided by various factions. Dasan and his school, Dasakhandan, successfully overcame many difficulties such as regional limits between the central and the province, social discrimination between nobleman and commonner, ideology difference between Confucianism and Buddhism, and the gap between Dasan school and Chusa school. They also established a good historical precedent through communicating academically. Dasan school"s studies and written works supplied Dasan"s extensive system of studies, so we need to review these works first to interit Dasan"s thoughts.

          • 해배 이후 인적 교류를 통해 본 다산의 학문세계

            황병기(Hwang, Byong-Kee)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8 다산과현대 Vol.11 No.-

            이 글은 다산 정약용이 해배되어 1818년 9월 고향 마현으로 돌아온 뒤 1836년 여생을 마칠 때까지 약 18년간 인적 교류를 통해 지속된 다산의 학문적 성과를 검토한 논문이다. 현재 다산학이라고 명명하는 학적 시스템은 실상 강진 유배기에 완성되었다. 다산은 일반인의 지성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냉철함을 유지했던 인물로 보이는데, 폐족이 되어 쫓겨간 유형지에서 작심한 듯 저술작업에 몰두하였다. 첫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에 도착해서 훗날 「이담속찬(耳談續纂)」으로 수정․보완되는 「백언시(百諺詩)」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된 후 해배될 때 까지 그의 경학과 경세학의 체계가 완성되었다. 육경사서의 경학서와 일표이서로 대표되는 경세서가 이때에 완성되었다. 물론 일부 미완인 상태에서 해배되어 고향 마현에서 탈고한 것들이 있고, 이미 완성된 책들도 지속적으로 수정작업을 진행했지만, 그 골격은 강진에서 이루어졌다. 57세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이후의 행적과 자료들에 근거해 볼 때 대체로 강진에서만큼 치열한 연구와 저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잔병이 많고 백발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간의 성과를 수정 보완하는 정도로 남은 인생의 목표를 잡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근교를 유람하면서 소요유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 같다. 사실 그의 경학과 경세학 체계에 있어 그다지 남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성과에 대한 후인의 평가를 기다릴 뿐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여생에 만난 신작과 이재의, 김매순, 홍석주 형제 등은 다산의 성과들이 평가되는 과정에서 만난 행운이자 기쁨이었다. 신작과 김매순 등의 노소론계 학자들의 학문이 주자학을 부정적으로 계승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들이 한학을 긍정하면서 훈고학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자학을 부정하거나 긍정하거나 하는 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한학이든 송학이든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까운가 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산의 경학은 주자학의 연장인 면이 있지만 개념의 지시내용이 다르다는 점에서 반주자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송학의 경학적 지향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보면 주자학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다산이 한대 경학을 비판한 것은 그들의 근거없는 난삽한 주석들을 불신한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대 학자들이 주석을 위한 주석을 했을 뿐 세상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어떠한 지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비판의 초점이 있다. 훈고를 하기 위해 훈고를 하였을 뿐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초점인 것이다. This paper is designed to review the academic achievements of Jeong Yak-yong after returning to his hometown in September 1818, and until the end of his life in 1836. During this period, he did not pay much attention to fierce research and writings as in the case of Gangjin, based on his later works and materials. In fact, there would not have been much left in his studies. I guess he was just waiting for his evaluation of his performance. Shin Jak(申綽), Lee Jae-eui(李載毅), Kim Mae-soon(金邁淳), and Hong Seok-joo(洪奭周) he met in his life were good fortune and joy in the process of evaluating the achievements of him. He was not able to spend his old age desperately because of the geographical luck of proximity with the literati who reside near his hometown. They sometimes visited and exchanged letters. The controversial discussions with them were closely related to the his works of old age. His studies is an extension of the Zhu Xi's New Confucianism, but it can be called anti-Zhu Xi's in that the instructions of the concept are different. However, in terms of affirming the academic orientation of Zhu Xi's New Confucianism, it is clear that there is a Zhu Xi's aspect. He criticized the scholarship of the Han dynasty because he disbelieved at their unfounded commentary, but basically he pointed out that literati of the Han Dynasty commented on the comment and did not have any orientation to help the world.

          • 지역학의 대두와 ‘강진학'

            오영교(Oh, Yeong Gyo)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5 다산과현대 Vol.8 No.-

            지방화시대의 전개에 따라 지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학문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각 지역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 변화하는 사회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지역학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각 지자체가 다른 집단과는 구별되는 독자의 개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거듭되면서 그 노력을 지원하여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는 학문적 지원 역시 절실해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 연구에 대한 관심은 비단 역사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그리고 한국사회와 문화를 재해석하려는 학문공동체의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새로운 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들에게 삶의 터전인 지역이 서울이나 광역 대도시에 대한 열등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도록 하는 것, 즉 ‘지역의 중심화'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정립하는데 기여하는 학문이 바로 지역학, 강진학이라 보고 싶다. 지역학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실로 막대하다. 우선 지역 애향심을 고취시키고 여론 형성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역 내의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데 있어 분명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지역 정주민의 가장 큰 불만사항인 문화생활 결핍에 대해 대단히 효과적인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또한 지역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게 함으로써 정주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지역발전에 대한 열의를 자극하여 경제적 교류를 촉진시키며 지역민들의 지역정치에 대한 참여열기를 높여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를 더욱 확고하게 다지는 초석을 놓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성과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투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학 연구의 생산성은 특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현재 지역을 다룬 여러 연구들은 비록 관찰영역이 다양하게 확대되었으나 대부분 과거와 단절된 채, 현상추수에만 급급해 하는 방식에 머물며 정책적인 대안에 그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나마도 각 학문분야에서 분산적으로 이루어져 강진의 상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지 못하다. 강진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조사도 대체로 관과 소수의 전문가 집단의 의견만이 반영되었을 뿐 실제로 연구 대상 지역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관점과 의견, 요구를 바탕으로 한 것은 거의 없었다. 지역학은 무엇보다 기능적으로 나뉘어진 여러 분야의 학문적인 입장에서 하나의 공통적인 대상을 놓고 연구하여 얻은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엮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강진학은 궁극적으로 ‘강진Studies'에 머무르지 않고 ‘강진logy', 즉 ‘-logy'를 지향하는 학문의 의지가 담겨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의 학문이 학문으로서의 모습, 즉 ‘강진학'이기 위해서는 연구대상을 확정해야 될 뿐 아니라 그 ‘강진학'을 지탱해주는 사상적 · 방법적 기초를 근간으로 하는 독특한 방법론, 연구진이 마련되어야 한다. A successful local self-government system is possible when people caring about a region live in the area happily over many generations. Residents should change their perception first. It is important to establish the ‘centralization of a region' concept, which means to treat our living area as it is, not an inferior area to Seoul or other metropolitans. I believe that Regional Studies or Kangjin Studies contribute to establish this concept. Regional Studies provide us magnificent outcome. It will inspire local patriotism and play a pivotal role in forming public opinions. It will also provide a foundation to create a reliable standard to resolve conflicts in interests of residents. It will also be an effective solution to solve the insufficient cultural opportunities, which is the biggest complaint of indigenous people. Moreover, it will inspire the pride of indigenous people by giving uniqueness of a region. It will also facilitate economic growth of a region by stimulating the passion for a regional growth. It will consequently create solid foundation of a democratic decision making structure by increasing the participation of local residents in local politics. The productivity of Regional Studies should be emphasized, because we can gain many achievements from relatively small investment. Most of current studies about Kangjin only provide political alternatives with accomplishing superficial achievements but being disconnected with the past, even though observation topics are variously expanded. These studies do not describe the full spectrum of Kangjin because each study only deals an aspect of each study field. Fundamental studies about Kangjin only reflect government and minor expert groups. Few studies are based on the viewpoints, opinions, and demands of local residents, who actually live in the region. Regional Studies aim to systematically combine the results of many studies on a same topic with different aspects. ‘Kangjin Studies' should show the desire to be ‘Kangjin-logy', not remaining in ‘Kangjin Studies'. To make ‘Kangjin Studies' as a solid study field, it should define a solid study topic and develop unique methodologies and a research team based on philosophical and methodological foundation, which supports ‘Kangjin Studies'.

          • 다산 예학의 학문적 위상 -『상례사전』을 중심으로-

            전성건(Jeon, Sung-kun)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9 다산과현대 Vol.12 No.-

            본 논문은 다산 예학의 학문적 위상을 『상례사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상례사전』은 다산의 경학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다산은 예치시스템의 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고례를 확보해야 했고, 그것의 산물이 바로 『상례사전』이다. 물론 『상례사전』이 사례(士禮)를 다룬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공(公)·경(卿)·대부(大夫)는 물론, 왕조의 의례(儀禮)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의 경학연구는 경세학저술의 토대가 되며, 그렇게 작성된 일표이서(一表二書)는 다산이 구상한 예치시스템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례사전』이 자리하고 있고, 『상례사전』은 다산의 경학저술과 경세학 저술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의 경학연구는 주희의 사서삼경중심의 학문체계를 육경사서중심으로 재편한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체계의 변화는 사사집주와 삼경집전을 중심으로 한 경학연구의 흐름을 십삼경주소를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재편하는 데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과도하게 해석하자면, 성리학 중심의 학문체계를 고증학중심의 그것으로 재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수양론(修養論) 중심의 세계관을 행사론(行事論) 중심의 그것으로 바꾼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요컨대, 다산의 『상례사전』은 경학연구의 시작점인 동시에 『경세유표』를 비롯한 일표이서의 경세학저술의 학문적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구상한 예치시스템의 기반이 바로 『상례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례를 비롯하여 향례와 방례를 아우르는 다산의 예치시스템을 위해 고제(古制)의 확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제를 확보하고 난 뒤에 현행제도인 금제(今制)를 참작하여 새로운 제도인 신제(新制)를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This paper intended to look at the status of Dasan's rituals focused on the funeral rites four recording paper. This book has a very important status in his study of confucian classics. Dasan had to be the first to secure rite-governed system, and its products were the funeral rites four recording paper. Of course, although this book deals with cases, it does not end up as a mere example, but it is based on the fact that it is preparing rituals for the dynasty as well as family rituals, village rituals, nation rituals and so on. Dasan's study of confucian classics is the basis of the books on statecraft learning and is meaningful in that it is the fruit of the rite-governed system envisioned by Dasan. And, as mentioned earlier, the funeral rites four recording paper is a very meaningful work in that it forms the basis of confucian classics and statecraft learning. The study on confucian classics by Dasan is inconsistent with that of intellectual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 that it reorganizes Zhu-xi's academic system centered on the history of four books and three classics. And this change in the academic system was reflected in the reinterpretation and reorganization of the current of the light-school study centered on four books and three classics. In other words, this is a shift from four books and three classics to six classics and four books. In short, Dasan's the funeral rites four recording paper is the starting point of the study and also the basis of the academic literature of the rite-governed system, including the funeral rites four recording paper. Dasan's planned rite-governed system is based on the precedent. Securing the ancient system is of great significance for the rite-governed system, which encompasses rituals, ceremonies, and methods, including examples. After securing tthe ancient system, the government took into account the current system, allowing the formation of a new system.

          • 다산 사서학 연구의 새로운 시야

            함영대(Ham, Young-dae)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9 다산과현대 Vol.12 No.-

            다산의 사서학은 다산 경학 연구 분야에서 가장 폭넓게 연구된 분야이다. 최근 들어 그 열기가 다소 주춤해졌지만 연구의 성과만을 놓고 본다면 다산의 사서학은 다산 경학에 대한 연구를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다산의 사서학을 포함하여 경학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의 진행 성과 만큼이나 꾸준히 재정리되고 그 때마다 새로운 연구 시야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충실한 연구사의 정리로 인해 근래까지의 다산 경학 연구의 주요한 성과들이 검토되어 다시 그 의미를 덧붙이는 것보다는 이후에 진행된 평가 이후의 논의에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향후의 연구에 전략적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기존 연구사가 정리된 2012년 이후의 쟁점에 대한 지적에서 향후의 연구과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나 다시 논의할 만한 것에 대해서 짚어보고, 다산의 사서학 연구의 새로운 연구시야를 열기 위해 어떠한 관점을 확보할 것인가에 대해 검토했다. 다산의 저작연대에 대한 성찰과 육경사서학을 강조한 다산의 사서학 체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산의 경학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학계에 호명될 때부터 그 자체로서의 성격규명보다는 다산학이 가진 다양한 측면으로서의 활용에 의해 호출된 점이 없지 않다. 1960년대 다산 경학의 개척자였던 이을호 선생의 다산 경학의 본질적 해석에 대한 강조는 그런 점에서 오히려 새로운 점이 있다 결론적으로 다산이 그토록 지망했던 육경사서학으로서의 경학연구는 진행되고 있는가? 그럼 점에서 우리는 다산의 사서학에 앞서 그의 육경학이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학문적 요구를 절감한다. 다산은 십삼경의 시야 속에서 육경 사서학의 학적 체계를 세웠는데 정작 연구자들은 여전히 사서삼경의 학문 방법론적 시야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의 사서학을 점검하면서 그의 육경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성찰이 정말 새삼스럽다. The Dasan Saseohak (Study of Four Books) is the academic field the most broadly studies in the Dasan's Gyeonghak (Writing of Confucianism) study fields. In the recent period, the fever has subsided somewhat, but looking only at the outcome of the study, the Dasan Saseohak would be the landmark aspect on the study of Dasan's Gyeonghak. For this reason, studies on the Gyeonghak (Writing of Confucianism), including the Dasan Saseohak have been steadily summarized as much as the outcome of the study progress, and the discussion on the new research insight has been proposed for each occasion. Because of the clearance of substantive research history, main outcomes of the Dasan's Gyeonghak study has been reviewed to this point that it would make more strategic sense to have more interests in the discussion after the evaluation thereafter rather than rendering the implication. Therefore, it reiterates the ones raised as the research project in the future from the point on the issues after 2012 when the existing research history was summarized or the ones to be discussed again, and it discusses what point of view has to be secured in order to open up the horizon of new studies on the Dasan Saseohak. It is emphasized for paying attention more to the bibliographic system of Dasan that emphasized the Yukgyeong Saseohak and the contemplation on the production period of Dasan. From the 1930s when it was called to the academic circle as part of the Joseon Studies movement, the Dasan's Gyeonghak was born with the academic destiny closer to the facilitation of various aspects retained in the Dasan Studies rather than its intrinsic characteristics. During the 1960s, the emphasize on the intrinsic interpretation of Dasan's Gyeonghak of Lee Eul-ho who was the pioneer of the Dasan's Gyeonghak rather displayed a new point in this aspect In conclusion, how has the study on Writing of Confucianism as the Yukgyeong Saseohak that Dasan longed for so long? In this aspect, we dearly feel for the inevitable academic demand that his Yukgyeong Studies has to be clarified before the Dasan Saseohak. Dasan established the academic system of the Yukgyeong Saseohak under the insight of Sipsamgyeong(十三經) and the scholars still consider the academic methodological view on Saseosamgyeong (Four Books and Three Scriptures), which calls for reflection for its attributes. While revising the Dasan Saseohak, it is refreshing to learn that the insight is contemplated for learning the Yukgyeong Studies all over again.

          • 조선의 상업과 강진

            김덕진(Kim, Deok-Jin)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5 다산과현대 Vol.8 No.-

            조선 안에서 호남(湖南) 사람들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는데, 그 안에서도 강진(康津) 사람들이 가장 돋보였다. 그것은 좋은 조건의 포구, 제주도(濟州道)와의 가까운 거리, 부속 도서의 보유, 그리고 청해진(淸海鎭) 경영과 같은 역사적 경험 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진의 포구는 서남해 도서를 오가는 유배객 · 지방관 · 사신이 거처 가는 곳이었다. 이들은 바람을 기다리느라 심지어 한 달 이상을 체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연히 상품의 소비나 공급이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남당포(南塘浦)는 제주도의 문호로써 제주 특산품의 집산지였다. 강진 상인은 제주에 없는 면포와 담배 및 누룩 등을 가지고 제주에 들어가서 양대(凉臺)와 귤 및 미역 등 제주 특산품을 사가지고 나왔다. 강진과 제주를 오가는 선박은 매일 줄을 잇고 있었다. 그래서 강진 상인들은 손쉽게 제주를 드나들며 제주 물건을 사와 강진에서 직접 팔거나 아니면 다시 각지로 다니며 판매하였다. 나오는 제주 상인에 의해서도 제주 특산품은 강진에 집산되었다. 이를 매입하기 위해 서울이나 개성(開城) 기타 지역 상인들이 강진에 운집했고, 그들 중에는 아예 제주로 들어가 매입해 나오기도 했다. 이래저래 강진땅에는 제주 물산뿐만 아니라 전국 특산품이 넘쳐났다. 이것을 강진 상인들은 다시 가지고 경상도 지역으로 나가서 팔고 대신 어물과 소금 등을 가지고 왔다. 결국 조선 상업에서 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다. 남북으로 제주와 서울을 연결하고, 동서로 서남해와 동남해를 연결하는 매개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In Joseon dynasty, merchants from Honam area were active in seaborne commerce, and particularly their commercial activities were most prominent at Gangjin, Honam. They could be active in commerce thanks to good conditions like ports suitable for commercial activities, geographical location near Jeju-do, annexed islands, and the historical experiences of operating Cheonghaejin. Exiles, local governors, and envoys could not help visiting a port at Gangjin to go to islands in the southwestern sea, and sometimes they stayed at Gangjin more than 30 days to wait till the wind calmed down. Accordingly, the consumption and supply of goods had increased at Gangjin. First of all, Namdangpo (a port at Gangjin) was a collecting and distributing center for Jeju-do"s local specialities, while it took a role in opening the door to Jeju-do. In Jeju-do, Gangjin merchants had sold cotton, tobacco, and Nuruk (Korean rice-wine starter), which were not produced in Jeju-do, and they had bought Jeju-do"s local specialities like Yangdae, tangerine, and sea mustard. Ships from Gangjin to Jeju-do were lined up everyday, so it was easy for Gangjin merchants to buy the goods in Jeju-do and then to sell them at Gangjin or in all parts of the country. Jeju-do"s local specialities were also collected at Gangjin by Jeju merchants. To buy Jeju-do"s local specialities, many merchants came to Gangjin from Seoul, Gaeseong, and other regions. Among them, some merchants went to Jeju-do to buy the goods directly there, and then came back to Gangjin. Anyway, Gangjing was full of the whole country"s specialities as well as Jeju-do"s goods. Gangjin merchants had sold the goods in Gyeongsang-do and had bought fishes and salt there. In conclusion, Gangjin had played a major role for commerce in Joseon dynasty, because it acted as an intermediary between Seoul and Jeju from north to south and the one between the southeastern sea and the southwestern sea from east to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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