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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代 文化形成과 人文學의 發展

        강길중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0 역사문화연구 Vol.35 No.-

        송대는 중국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선진(先秦)시대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이후 중국 사상문화의 제2 발전시기이며 황금시기이다. 송대는 전대(前代)의 풍부하고 다양한 학술사상을 종합하여 정밀하고 깊은 완전한 체계를 갖춘 송학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송대 학술문화는 중국문화의 정화(精華)이며, 중국문화사상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인류문화 발전에 걸출한 공헌을 하였다. 송대 문화는 위로는 한당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명청시대를 여는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당말오대의 전란과 분쟁은 기존의 사회질서체제에 엄중한 충격을 주었고, 송대는 새롭게 사회조직을 조정하였다. 세속화와 평민화 그리고 인문화 발전 추세가 명확해졌으며, 일련의 조정을 통하여 당중엽부터 시작된 사회구조의 변천은 송대에 이르러 기본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였다. 송대 토지제도, 부세제도, 정치조직, 사상문화, 풍속관념 등은 전대에 비해 현저하게 변화되었다. 특히 경제중심의 남천과 문화구조의 변천은 모두 이후 중국 봉건왕조시대 후반기의 특색이며, 중국 역사발전의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송대는 사회경제, 정치, 과기(科技), 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시기이다. 송대 문화는 풍부하고 깊은 연원(淵源)과 강개(慷慨)한 기세를 가지고 장차 중국 고대문화를 최고봉에 올려놓았다. 이후 천여년 이래 중국민족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주변국의 문명 발전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송대 문화정책은 초기에 수립되어 일관되게 진행되어 300여년간 지속되었다 그것은 당시대와 이후의 중국 고대사회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독특한 역사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한 요인 혹은 어떤 사람의 한 순간의 생각을 말한것이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여러 가지 역사조건의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또한 역사발전의 필연성과 우연성이 통일된 결과이다. 송대 문화 정책의 관용은 먼저 중구 다원화 문화 국면과 관명한 문화정책의 우수한 역사가 전승된 것에 있다. 송대는 사회경제, 정치, 학술 등 여러 방면에서 모두 전면고도발전의 시기를 실현하였다. 특히 황제권 강화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고도로 강화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과거를 통해 등장한 문신관료사대부계층을 기초로 전대의 세습문벌귀족제 사회를 대신하였다. 이러한 제 방면의 변화는 완전히 사회모습을 열었다. 이 체제는 자연히 송학의 발전과 학문경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송대 문화는 중국문화 발전사상 풍부한 내용과 현실성 등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 다. 그 형성배경 가운데 하나는 사회경제발전과 정부의 중문중교(重文重敎)의 정책을 들 수 잇으며, 이외에 송대가 제공하였던 문화 발전에 양호한 기회에 있다. 당송시기 사회변화는 문화발전에 강력한 활력을 주었으며, 국내외 민족융합과 문화교류는 발전에 충분히 문화발전의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정치경제와 사회적 배경아래 형성된 송 문화는 과도기성, 의리(義理)성, 무실(務實)성, 보급성, 수용(收用)성 그리고 정합(整合)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민계층을 중심으로 한 서민문화(世俗文化)가 크게 발전하였다. 서민문화의 실용성과 생동(生動)감이 풍부한 문화는 점차 송대 문화의 특징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송대 문화의 징은 사회생산력의 증가와 더불어 출판인쇄술 발전이 서적 보급의 확대 를 가져왔으며, 학문의 보편화를 조성하여 자연스럽게 학술문화 진흥의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또한 경제발전과 번영에 따라 농업, 수공업자 그리고 일련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자신의 문화적 요구를 갖고자 하였으며, 서민문화도 이러한 사회변화에 적응하며 발생하였다. 즉 문화의 보편화와 서민화에 대해 소홀히 할 수 없는 관건의 하나는, 송대가 후세문화발전의 기초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민문화가 송대 문화의 주체이며, 이후 중국문화발전의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송대 문화 보급원인의 하나는 정형화된 과거제도와 국가가 실시한 중문중교 등 기본정책을 들 수 있다. 송학의 흥기는 이성주의 학문의 발전을 촉진하였으며, 사회 전체에 인문학 연구의 풍조를 조성하였다. 송학은 자연, 사회, 인간을 일체(一體)로 융합하고, 고대 이래 중국 사상을 조화롭게 집대성하였으며, 정치, 사상, 인성(人性), 교육 등 각 영역을 광범위하게 언급하였다. 송학은 장구(章句)학에 구속되지 않고 의리지학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송대 문화특징의 형성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송대 문화의 이성화(理性化) 경향은 각 문화영역에 충분히 반영되어 인간성(人性) 연구의 표적이 되었으며, 송문화의 인간성(人間性)과 사회상 학문의 보편화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이 관리에 추천되어 선발될 기회가 크게 증가하였다. 宋代是繼先秦時代百家爭鳴之後, 中國思想文化的第二重要的發展時期和黃金時期.宋代綜合前代豊富多樣的學術思想, 形成了精深完備的宋學思想體系. 宋代學術文化可謂中國文化的精華, 在中國文化史上獨領風騷, 竝對人類文化發展做出了傑出貢獻. 宋代文化具有上承漢唐, 下啓明淸的時代特徵. 唐末五代的戰亂紛爭嚴重衝擊了旣存的社會秩序體制, 宋代重新調整社會組織. 明確表現出世俗化、平民化以及人文化發展趨勢. 經過一系列的調整, 自唐中葉開始的社會結構演變, 至宋代基本造成新的格局. 宋代土地制度、賦稅制度、政制結構、思想文化、風俗觀念等等, 明顯不同于前代. 尤其,經濟重心的南遷和文化結構的變遷, 都顯現出自此以後的中國封建時代後半期的特色,開啓了中國歷史發展的新階段. 宋代是社會經濟、政治、科技、文化高度發展的時期. 宋代文化以豊厚的底蘊、深遠的思想淵源、慷慨的氣勢, 將中國古代文化推進到了最高峰. 不僅給近千年來的中國文化帶來極其深刻的影響, 而且對周邊國家的文明發展都做出了巨大的貢獻. 宋代的文化政策自宋初確立, 一以貫之, 連續了是三百年, 對當時代以及此後的中國古代社會發展形成巨大影響. 這是一種獨特的歷史現象, 這一現象之産生, 當非偶然因素或者說某個人的一念之想能夠單獨促成的. 它必定是多種歷史條件交互作用的結果, 亦卽歷史發展的必然性與偶然性統一的結果. 宋代文化政策之寬明, 首要源於以前中國多元文化格局及寬明文化政策的優秀歷史傳承. 宋代是政治、經濟、學術思想、敎育文化等諸方面均實現全面高度發展的時期. 尤其是, 由以皇權强化爲中心的中央集權制. 這一體制以通過科擧考試出仕的文臣官僚士大夫階層爲基礎, 代替前代世襲門閥貴族的體制. 從而形成了全新的社會風貌. 這一體制自然影響到宋學的發展方向及學問傾向. 宋代文化是在中國文化發展史上, 包括豊富的內容含意和現實性等强烈的生命力. 其形成背景中之一, 爲社會經濟發展和政府的重文重敎的政策, 且有靠宋朝提供的各方面良好的政策. 就在唐宋時期的社會變化提供了對文化發展的强烈的活力, 且國內外民族融合和文化交流也充分地提供了文化發展的環境. 在這種政治經濟等歷史背景下生成的宋代文化, 就有過渡期性、義理性、務實性、普及性、兼用性和整合性等特點. 宋代社會文化是以庶民階層爲中心, 庶民文化的實用性和生動感逐漸發展成爲宋代文化的特徵. 宋代印刷術高度發展, 造成了書籍普及, 亦造成了學問的普遍化, 由此自然形成學術文化振興的風潮. 然伴社會經濟發展和繁榮, 無論農業、手工業還是商業群體必然有自己的文化需要, 庶民文化正是適應這樣的社會需要而發生竝發展的. 就文化的普遍化而庶民化而言, 不可疏忽的關鍵一點是, 宋代爲後文化建立發展奠定了基礎. 因此可以說, 庶民文化旣是宋代文化的主體, 也成爲以後中國文化發展的方向. 宋代文化普及的原因之一, 是定型化的科擧制度和國家重文重敎等基本政策. 宋學的興起, 促進了理性主義學問的發展, 造成社會整體硏究人文學的風氣. 宋學鎔鑄自然、社會、人間爲一體, 集古來中國思想之大成, 而廣泛涉及政治、思想、人性、敎育等各領域. 宋學不拘泥于章句之學, 而注重義理之學, 這對宋代文化特徵的確立起到了關鍵作用.宋代文化的理性化傾向, 充分反映各個文化領域, 硏究人性的目標, 促成了宋文化的人間性以及社會上學問的普遍化, 因之一般人推選爲官吏的機會大大增加, 這也促成使人們通過學問來追求提升自身的社會地位. 一般來講, 宋代理學家都重視哲理思辨. 他們以理說天, 把天人合一的思想推向了新次元的位置. 他們提倡通物格物致知、內省愼獨來發明人間本心, 主張嚴格的道德自律. 他們爲內省外王之學提供理論基礎. 內省無非明天理, 外王無非行天理.綜上可見, 宋代學術文化的理性化特徵, 在各個文化領域有着普遍的反映. 宋代是物質文明和情神文明所達到高度的地位, 在中國整個封建社會歷史時期之內, 可以說是空前絶後的. 這證明了宋朝文化在中國文化史上的重要地位. 宋代文化在傳統性文化特徵上具有兼用情神、創新思想、經世理念、理性態度、民族意識、平等觀念等時代的特徵,在中國文化史上有着承上啓下、繼往開來的歷史意識. 宋文化不對其後的中國歷史和文化産生了深遠的影響, 而且在當時北方遊牧民族國家和東亞細亞儒學文化圈國家發揮了主導作用, 竝極大左右了這些國家未來的文化方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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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rans-National Ties of Koryeoins in Russia to Korea

        임영상(Young-Sang YIM)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1 역사문화연구 Vol.38 No.-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고려인과 한국의 초국적 연계를 한인종교단체(제2장)와 NGO(제3장)와의 협력을 통해 살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내 많은 종교단체들이 CIS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필자는 종교단체의 경우, 3가지 종교집단을 살펴보았다: 1985년에 설립된 초교파적인 러시아(소련)선교회, 문화선교로 러시아 및 고려인사회에 기여해온 모스크바 삼일문화원, 그리고 원불교가 세운 모스크바 원광한국학교. 현재 구소련 14개 지역에 3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소련선교회(1984년 설립)는, ①노어성경 보급 및 문서선교, ②러시아어 강좌 및 선교사명자 훈련, ③선교사 파송 및 후원관리, ④선교사대회 개최 후원, ⑤CIS교회 지도자 초청훈련, 및 ⑥국내 체류 외국인 선교 등을 중요사역으로 시행하고 있다. 기독교 선교사로 목회활동과 함께 문화선교를 통해 고려인을 섬겨온 사례로 1995년 8월 15일 설립된 모스크바 삼일문화원이 있다. 그는 무료대여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인과 고려인들과 부단하게 만나는 한편, 『베라 이 지즈니(믿음과 삶)』 잡지를 한국어와 러시아어판으로 간행했다. 그는 한국학 전문가인 러시아인 학자들과 또 고려인 학자들에게 투고 기회를 제공하면서 친구관계를 맺어왔다. 이형근 원장은 이를 기반으로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의 러시아판 등 한국을 알릴 수 있는 학술서와 문학작품을 출판하고, 각종 기념일을 맞아 국제학술행사를 개최해왔다. 모스크바에서 한인선교사들의 개신교회 못지않게 고려인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원불교이다. 이는 1991년 12월에 활동을 시작한 원불교가 1993년 1월에 주말한글학교로 세운 원광한국학교 때문이다. 1993년 개교한 원광학교는 총 6학기 3년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학기 시험을 거쳐 다음 학기로 진급시키고 있다. 원광학교가 모스크바의 명물이 된 것은 연중 특별행사 때문이다: 한민족민속큰잔치(1994년 이래 개최), 한민족민속큰잔치, 어버이날 행사. 현재 러시아에는 고려인사회를 돕는 수많은 한인 NGO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필자는 학술단체이면서도 고려인사회를 위한 많은 실천적인 활동을 전개해온 (사)해외한민족연구소와 최근 연해주고려인사회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동북아평화연대의 활동을 간단하게 살펴본다. (사)해외한민족연구소는(1979년 창립) 1993년부터 학술지 『韓民族共同體』(처음에는 韓民族共榮體)를 연1회 발간했고 학술행사도 연1~2회 개최해왔다.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은 2009년 외교통상부장관 표창을 받았는데, 1910년 국권상실 이후 해외독립운동기지였던 연변의 용정과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외한인사회가 한민족의 동포애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한 역사적인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1994년 해외한민족연구소는 용정에서 구 대성중학교와 윤동주생가와 명동교회를 복원했으며, 1999년에는 신한촌 망명정부 수립 80돌을 맞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신한촌 자리에 신한촌기념탑을 건립한 것이다. (사)동북아평화연대는 1996년에 설립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내 재외동포사업국이 시행한 1997년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회상의 열차” 사업에서 출발했다. (사)동북아평화연대는 2002년 10월5-6일 제2회 고려인문화의날 행사를 개최, 후원하고는 10월15-28일 연해주 고려인 아리랑가무단을 한국에 초청하여 전국 12개 도시의 순회공연을 통해 연해주 고려인과 한국사회의 만남을 주선했다. (사)동북아평화연대가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과 한국사회를 연대시 킨 활동 가운데 최대 성과는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기념관의 개관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해외동포들을 위해 지원한 어떤 문화센터보다도 큰 규모인 〈고려인문화센터〉로 명명된 기념관은 동북아평화연대와 재외동포재단이 총 40억 원을 들여 1만㎡ 부지에 지상 2층, 연면적 4천㎡ 규모로 발해시대부터 현재까지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전시관을 비롯해 한국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교육문화센터, 치과. 내과. 한방. 외과 등을 갖춘 병원, 다목적 공연장, 고려인단체 사무실 등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The objective of this paper is to explain how Koryeoins in Russia have been developing the trans-national ties to Korea through collaboration with religious associations (chapter Ⅱ) and NGOs (chapter Ⅲ) since perestroika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Over the past 20 years, many Korean religious Associations have greatly been interested in spreading the Gospel in CIS countries. I wrote three religious Associations: the Soviet Missionary Association, a group transcending Christian religious bodies which was established in 1985, the Moscow Samil Cultural Center which has contributed to Russia and the Koryeoins’ commutniy and the Moscow Wonkwang Korean School founded by Won Buddhism. The Soviet Missionary Association(founded in 1984) currently has 38 missionaries in 14 former Soviet regions. The Association’s principal missions are: first, sending Russian bibles and spreading the Gospel through documents, second, giving Russian language classes and training missionaries, third, sending and supporting missionaries, fourth, organizing and sponsoring missionaries’ reunion, fifth, inviting and training CIS church leaders, sixth, evangelizing foreigners living in Korea. The Moscow Samil Cultural Center is another example of serving Koryeoins. The Center was founded on August 15, 1995 and its Christian missionaries have spread the Gospel through cultural activities. He went to Moscow with about 2,000 books on Korean history and culture. He opened a library which enabled him to meet Russians and Koryeoins interested in Korean history and culture. Moreover, he published a magazine entitled Faith and Life in Korean and Russian. He encouraged Russian and Koryeoin scholars specializing in Korean studies to write articles for the magazine, thus enhancing friendship with them. In this context, Mr. Lee also published academic books and literary works on Korea such as a Russian version of New Introduction to Korean History written by Professor Lee Gi-baek. He has also organized international academic events on occasions of a variety of anniversaries. Another religion who is as influential as Protestantism spread by Korean missionaries is Won Buddhism. Won Buddhism started its activities in this region in December 1991 and it established the Moscow Wonkwang Korean School, a weekend school teaching hangeul, the Korean alphabet. The Wonkwang Korean School which was opened in 1993 offers a six-semester (three-year) program. The Wonkwang Korean School’s special annual events have contributed to the School’s fame: the Korean People’s Folk Festival(since 1994), the Study Presentation, the Parents’ Event. A large number of Korean NGOs are engaging in a variety of activities designed to help Koryeoins in Russia. I would like to elaborated on the activities of the Institute of Overseas Korean Affairs and the Northeast Asia Peace Movement as examples of such NGOs. The Institute of Overseas Korean Affairs (founded in 1979) has published its academic periodical entitled The Community of Korean People once a year since in 1993 and it has also organized academic events once or twice a year. In 2009, Mr. Lee Yun-gi, director of the Institute received the prize from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Trade especially for historical achievement of helping overseas Korean communities (those in Longjing, Yanbian and Vladivostok, Maritime Province). In 1994, the Institute restored Daeseong Middle School, Yun Dong-ju’s house and Myeongdong Church in Longjing. For commemorating the 8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government in exile, the Institute built in 1999 the New Korean Village monument at the former New Korean Village in Vladivostok which had disappeared. The Northeast Asia Peace Movement was born with the project called the “Train of Memory” which was launched commemorating the 70th anniversary of Koryeoins’ forced emigration in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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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신화(耽羅神話)에 보이는 여성성(女性性)의 역사문화적 의미

        전영준 ( Jeon Young-joon )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2016 동국사학 Vol.61 No.-

        제주의 문화자산으로서 신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재평가의 움직임은 다양한 탐라신화에 대한 선학들의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당연한 자연법칙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이라 할 만큼 탐라신화에는 지혜롭고 강인한 여성상이 등장하며, 이들에 대해 주목하는 최근의 연구는 제주 사회의 구성요소에 대한 본질적 탐구라 할 만하다. 제주도의 독특한 종교문화는 열악한 제주여성들의 삶의 정황에 기인한 것이다. 絶海孤島의 지리적 제한, 척박한 자연환경과 어려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제주여성들은 집안일, 밭일, 바닷일에 더해 사회적 역할까지 감내해야 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변화에서 생명 보존과 풍요에 대한 강한 염원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앙과 敬畏로 표현되었다. 다양한 성격의 신화와 공간이 창출되었고, 신앙 공간의 주된 행위자는 척박한 제주 사회를 이끌었던 여성이라는 점이다. 장기간에 걸친 여성 우월적인 문화패턴이 인류역사 초기에 존재했었음을 알리는 증거들은 여러 민족의 건국신화에 잘 드러난다. 性的인 역할과 능력에 대한 기대치가 근래에 들어 크게 달라지면서 우리의 각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여성우월적인 문화패턴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더욱이 그런 시대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인간생활의 총체적인 표현이 역사이며, 이것에는 생활습속을 포함한 신앙, 의식의 한 형식으로 신화를 품고 있다. 제주에 전승되고 있는 풍부한 내용의 신화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신화의 형성은 이성의 지배,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산업화 현상 등 합리주의의 근대적 요소들과는 공존하기 어려운 것인데, 제주인의 역사는 이 같은 反신화적인 요인들이 비교적 약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탐라신화의 형성과 전승과정에 잘 드러나는 여성적인 감성요소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제주의 역사가 전근대적인 단계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근대 유럽의 계몽적 합리정신이 추상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자연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기계문명과 산업사회를 일으켰던 역사는 남성적인 이성능력의 소산이었다. 반면, 합리주의와 산업문명에 의해 마멸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성의 온존상태와 같은 여성적인 감수성과 보호본능을 강하게 드러내는 탐라신화는 제주 역사문화의 전개과정에서 풍요를 담당하는 주체적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의 여러 건국신화가 전쟁과 투쟁으로 점철되는 영웅신화로 여기의 여성상이 객체 또는 매개체의 역할에 제한되어 있지만, 탐라신화에 보이는 여성상은 여성영웅으로서 천지와 국토를 창조하고 풍요를 가져다주는 주체로서의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미래의 제주사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가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이제까지 홀대받았던 탐라신화의 가치는 새롭게 인식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제주문화의 전승 기반으로서 탐라신화에 보이는 여성성의 역사문화적 이해는 제주문화의 외연을 확장하는 계기이면서도 탐라신화의 역사적·문화사적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일정한 방향성을 提高할 수 있을 것이다. A move to newly perceive and reevaluate Jeju Island`s myths as Jeju Island`s cultural asset is based on previous scholars` studies of various Tamra mythologies. Tamra mythologies show such wise and strong feminine images as can be shocking to those who see male dominance over women as natural law. Recent studies focusing on these images deserve to be considered as intrinsic explorations into the components of Jeju Island`s society. Jeju island`s unique religious culture is based on bad life situations of the Jeju Island women. In the remote and isolated island with geographic limitations, harsh natural environment and turbulent history, the women of Jeju Island had to go through hardships to play social roles as well as to work around the house, in fields and at sea. Their strong desire for survival and abundance in the changes in nature that poses a threat to life was expressed in faith and awe of supernatural beings. Different types of myth and space were created accordingly, and major leaders in the space of faith were women that led the Jeju Island`s harsh society. Many tribes` state-founding myths clearly show proofs that there was a long-term female-dominating culture pattern in the early stage of human society. As the expectation of gender role and capacity has changed greatly these days, people are currently paying keen attention to the facts that female-dominating culture pattern was natural in the early stage of human history and that such a stage lasted for a very long time. The comprehensive expression of human life is history, which contains myths as a form of faith and ceremony including manners and customs. Myths with rich contents inherited to the Jeju Island people have their sufficient historical backgrounds. The formation of a myth is difficult to coexist with modern factors of rationalism such as the rule of reason, the development of scientific technology or the phenomenon of industrialization. Nevertheless, these anti-mythical factors had relatively little influence on the history of the Jeju Island people. Feminine emotional factors revealed well in the process of formation and inheritance of Tamra mythologies are found a lot; this is attributed to the fact that the history of the Jeju Island was kept for a long time in the pre-modern stage. Enlightenment rationalism in modern Europe helped to discover abstract natural law and to develop machine civilization and industrial society using natural science and technologies. This history was the outcome of masculine reasoning ability. Meanwhile, Tamra mythologies clearly reveal feminine sensitivity and protective instinct such as the maintenance of simple humanity that is not destroyed by rationalism and industrial civilization. It is noteworthy that Tamra mythologies have been granted subjective roles in being responsible for abundance in the process of the Jeju Island people`s historico-cultural development. Many state-founding myths in the Korean Peninsula include heroic myths filled with wars and strifes. Although feminine images in these myths are limited to the roles of objects or intermediaries, feminine images seen in Tamra mythologies are characterized as heroines having been granted the roles of entities to create heaven and earth and to bring about abundance. In terms of the discovery of a new value to lead the future Jeju Island`s society, it is necessary to newly perceive and reevaluate the value of Tamra mythologies that have been neglected up to now. So, a historico-cultural understanding of femininity seen in Tamra mythologies as the foundation for the inheritance of the Jeju Island`s culture will be a trigger to expand the realm of the Jeju Island`s culture and also to improve the sense of direction for reestablishing the cultural-historical status of Tamra mytho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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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의 自國에 대한 인식과 중국관

        박지훈(朴志焄)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3 역사문화연구 Vol.48 No.-

        10세기 중엽에서 12세기 초까지 중국역사에서 송과 요는 대치의 시기였다. 이 150여년 동안 송과 요는 두 개의 강대한 정권으로 서로 대결하였는데 전쟁과 평화가 교차되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중국역사 가운데 송이 대표적인 왕조로 되어있으나 이미 당시에도 남북조 說이 있었다. 요 왕조(907~1125년)가 북방을 통일한 것이 남방에 비해 반세기가 앞서 있었다. 영토면적만으로 보면 요는 송의 2배에 달한다. 요조는 尙武的이고 전투력이 강한 騎兵을 앞세우고 중국 동북, 북과 서북을 향해 진출하여 차지하였고, 전에 없는 효과를 거두었다. 전연의 맹약에 따라 요송 쌍방은 피차에 서로 승인한 ‘남조’, “북조” 라는 두 개의 독립적 왕조가 당시의 역사무대에 출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송에 관한 기술과 연구가 많이 있으나 요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던 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거란인 스스로 자신들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생각과 관점 및 중국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보았다. 당시 遼人의 著作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宋人과 蒙古人들의 기술이 대부분이므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중국 왕조의 입장에서 서술한 자료에는 요에 대한 왜곡된 시각과 평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가능한 한 요의 입장을 위주로 하여 해석하고 평가해 보고자 하였다. 북송과 마찬가지로 요 역시 스스로 중국을 대표한다고 인식하였고 또한 ‘正統’이라고 자처하였다. 상고시기에 유가들은 소위 ‘華夏’와 ‘夷狄’의 구별은 주로 문화에 의한 것이었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거란통치자들을 이러한 관념을 접수하였을 뿐 아니라 진일보시켰다. 그들은 요조가 이미 중원의 전통문화를 접수하였다고 하였으며 다시 ‘四夷’의 반열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고 마땅히 북송과 병렬한다고 보았다. 우선 중원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北面, 南面에 의한 이중적인 통치 구조를 채택하였다. 우선 북면관에 있어서는 고유성을 존중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남면관은 정복한 漢地와 漢人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요가 이원적인 제도에 의해 자신들의 부족의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연운십육주를 얻은 다음에 당의 제도를 도입하고 중국인들을 불러 모아서 등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자신들의 유목적인 통치방법이 중국에 비해서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족의 문화나 중국식 제왕의 성대한 시대를 요에서도 이루기 원했던 의지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先祖를 炎帝라고 한 점으로 보아 중국 민족과 同一視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를 해석하면 자존심과 열등감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하기 어려운 것은 현재 중국에서의 민족융합과 고대사 탐원공정 및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요사』서술은 중국적 왕조로서의 자신감과 동일시를 보여준다. 그 이외의 역사 서술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다. 거란 민족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예로는 두 차례에 걸친 거란문자 창제를 들 수 있다. 한편 요는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란을 건국한 야율아보기 이후 오대의 불안정한 정권교체에 개입하면서 때로는 중국왕조를 책봉하기도 하였고, 전연의 맹약에서 문서상으로도 북조와 남조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중국 대륙의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중화민족의 선진적인 문물을 도입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여러 정복국가의 예에서 보듯이 유목국가로부터 농업국가로 변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요의 후기는 한화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하는 추세로 옮겨가는데 이는 이미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한 중국인과 융합함으로써 또 하나의 중국으로 변신해 가고자 하는 추세의 한 면일 것이다 결국 요는 건국 초기부터 중원의 왕조와 남북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가, 전연의 맹약 단계에서는 공식적으로 남조와 북조로 천명하였고, 후기에 가면 ‘華夷同風’이라고 표현 것처럼 자신들도 夷狄의 나라가 아닌 중국과 동일시하며 요의 통치자가 요 역시 禮法을 갖추었기 때문에 중화와 같다는 자존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從10世紀中葉至12世紀是在中國歷史上的宋遼對峙時期. 在這150餘年間, 宋遼兩大政權戰•和不定. 在中國歷史上, 宋朝是代表當時的正統, 但是也有人提倡‘南•北朝說’. 遼王朝建立比南方的宋王朝早半世紀. 從領土面積來看, 遼朝比宋朝大一倍. 遼朝利用戰鬥力強悍的騎兵, 征服了中國東北•北方•西北的大片地區, 空前強大. 澶淵之盟以後, 宋遼雙方承認彼此, 而在歷史舞台上出現‘南朝’•‘北朝’兩個獨立的王朝. 本文要主題爲遼朝契丹人的民族意識•對漢文化的認同感•正統觀以及其對中原王朝的看法. 由於流傳至今的契丹文獻極少, 研究這一問題難度較大. 現在流傳的記載大部分是宋朝•蒙古人所做記載, 其中有不少對遼人的偏見. 這就造成了目前學界有 關宋朝的研究成果較多, 有關遼的研究成果卻較少, 而且以前對遼的評價大部分持‘非正統’觀點. 本文將以遼人的立場•視角爲中心, 重新做出評價, 以期能在一定程度上能扭轉這一狀況. 實際上, 翻檢史書, 不難發現遼朝在保有強烈的民族自豪感同時, 也表現出較爲強烈的對漢文化的認同感, 自認是中華文化的‘正統’, 能夠代表中國. 在上古時期, 儒家按照文化, 而非按照血統, 劃分所謂‘中華’與‘夷狄’的分別. 契丹統治者接受了這些觀念認爲, 他們已經接受中原傳統文化, 甚至宣稱自己爲炎帝後代, 所以自己不應該包括‘四夷’的範圍裏, 而應該與北宋並列. 這也今天中國進行的民族融合•探源工程•東北工程的歷史依據. 必須指出, 遼人這種行爲, 折射出了他們內心中自尊心和自卑感並存的複雜情緒. 遼人一直有自己與中國對等國家的想法. 建立契丹的耶律阿保機以後, 憑借強大軍事實力, 幹涉五代中原王朝, 有的是冊封中國王朝, 在澶淵之盟的文書上更是使用“北朝”和“南朝”的稱呼, 證明在中國大陸存在兩個國家. 但是, 在交往過程中, 遼不可避免受容中國的先進文化影響, 逐步從遊牧國家向農業國家發展. 遼朝在統治地區內, 實行的‘北面•南面’的二元統治體制就是一個體現. 北面官是保存遊牧民族的固有傳統, 南面官統治漢地與漢人. 遼朝在北部施行北面制保存自己部族的傳統, 同事在新征服的燕雲十六州, 接受唐朝的制度, 采用漢人統治漢人方式, 這就是反映了他們接受遊牧民族的統治方法比中國落後的現實. 在文化上, 遼人也有這種矛盾心態. 一方面, 契丹民族兩次創制契丹文字, 這就是證明契丹民族的固有性. 但在同時, 遼朝也實行漢化政策, 這表現他們接受中國文化•與中國人融合後自己的身份成爲中國文化代表的意願. 總之, 遼朝從建國初期已經有中原王朝和南北朝的認識. 在澶淵之盟時期闡明南朝與北朝, 到後期使用‘華夷同風’, 都證明他們並不認同自己爲夷狄國家, 而是中原的國家. 遼朝他們說他們也是用禮法, 因此他們應當跟中原王朝同等的地位, 這就是表達他們的自尊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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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적용한 디지털 고구려박물관 전시

        전호태(Hotae Jeo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23 역사문화연구 Vol.86 No.-

        가상공간을 활용한 박물관 전시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겪는 여러 가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큰 장점은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이든 아날로그 세계든 변함없이 진지하게 매달려야 하는 문제는 전시구성과 바탕에 흐르는 스토리텔링이다. 결국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 나갈 것인가가 전시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전시는 대상이 되는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주로 북한과 중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이런 까닭에 천년 왕국 신라나 해상 왕국 가야, 고대 동아시아 네트워크사회의 중심이던 백제처럼 역사의 현장에서 펼치는 오프-라인 전시의 효과를 누리기가 어렵다.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는 디지털 전시 기법과 전시 공간이 적극 도입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고구려박물관의 전시 공간은 고구려 역사의 전개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고 시기별 전시실을 둘, 또는 셋으로 나누어 관람객이 역사와 문화를 동시에 알 수 있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초기의 두 전시실은 각각 유화의 방, 온돌 위의 하루다. 관람객은 두 전시실을 통해 고구려 성립 초기의 신화적 사고 및 고구려 주거문화, 음식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중기의 두 전시실은 군마의 발굽, 색동치마다. 각각의 전시실은 영역 확장을 통해 고구려 문화의 영향권을 확대시킨 중기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고, 5세기 전성기 고구려의 화려한 문화를 복식문화와 함께 만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후기의 세 전시실은 각각 청룡과 백호, 천리장성, 하늘이다. 관람객은 사신 위주 고분벽화가 후기 정치 사회의 전개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천리장성 축조를 둘러싼 권력투쟁의 결과 연개소문의 독재 정권이 성립하여 당과 고구려의 갈등이 깊어진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전 시기를 관통하는 하늘에 대한 관념이 고구려의 천문 지식과 문명신들의 세계와 만나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임지는 君師로서 국왕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이다. Using virtual spaces for exhibitions can help a museum move beyond various restrictions of physical space. One of the biggest advantages is that it can use space more freely, However, whether in a digital or a physical space, one must always focus on telling the story underlying the exhibition. After all, the success of the exhibition relies on what story is chosen and how it is told. Most of the artifacts and sites related to Koguryo are located in North Korea and China, which means it is difficult to create an on-site physical exhibition like those for Silla, a millennial kingdom, Gaya, the maritime kingdom, or Baekje, the center of the East Asian trades. Thus, it would be beneficial to actively adopt digital exhibition methods and create virtual spaces to showcase the history and culture of Koguryo. The exhibition space of the Digital Koguryo Museum can be divided into early, medium and late stages according to the development of Koguryo history. It is a good idea to divide the exhibition rooms by time by two or three, allowing visitors to know history and culture at the same time. The two exhibition rooms of the early period are the day of Yuhwa room, the day above the ondol. Visitors can understand the mythical thinking, Koguryo residential culture, and food culture at the beginning of the establishment of Koguryo through the two exhibition rooms. The two exhibition rooms in the middle period are the hoof of the horse and color skirt. Each exhibition room will help to understand the development of Koguryo's history, which has expanded the influence of Koguryo culture through the expansion of the area and to meet the gorgeous culture of Koguryo with a costume culture.. The three exhibition rooms in the latter period are blue dragon & white tiger, Cheonlijangseong and sky. Visitors can see that the four Deities tomb murals are deep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the late political society. As a result of the power struggle over the construction of the Cheonlijiangseong, the dictatorship by Yeongaesomun was established, which deepened the conflict between the Chinese Tang Dynasty and Koguryo. The notion of Koguryo's sky can provide an opportunity to meet Koguryo's astronomical knowledge and the world of civ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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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중반~1980년대 중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언론, 공연, 문학 작품에 나타난 문화적 지향성 연구

        이혜승(Lee Hye Seung)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7 역사문화연구 Vol.26 No.-

        After the Socialist revolution, all of the cultural institutions and organizations became nationalized. Ethnic Koreans' culture in Central Asia was made and inculcated by political power. The Soviet policy converted culture into a main instrument of ideological propaganda. The Otherness of Korean culture was, first of all, caused by material subordination to power . A worship of Soviet political heroes and aspiration toward construction of communism were the main issues of Soviet Koreans culture. On the contrary, critical issues like forcible deportation were not touched by Korean works. Specific forms of Korean national culture had been preserved by power in the Soviet period. But it can be interpreted as the means to keep exotic taste presenting socialism in diverse way and stuffed specimen eradicating cultural spirit. A Language problem turned out to be critical in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Korean ethnic culture. The number of Koreans who can speak national language was radically decreased. Ethnic Koreans' culture was produced, either by old generation born in Far East, or young generation like Sakhalin and North Korean immigrants who were considered as outsiders. In addition to that Korean language couldn't be understood by the majority of people born in Central Asia who assimilated in Russian culture and language. Ethnic Koreans' culture was remained as a culture of Others. First, it was a culture of minority which was excluded from mainstream Russian culture. Second, it reflected superficial ideological values instead of real history, life and identity of Koreans. Finally, it functioned as rather a pamphlet art and production of social order than a means for practical communication of Korean people. 1917년 혁명 이후 소비에트 문화의 물적 토대는 정치 권력에 전적으로 종속되었다. 문화는 체제 우호적인 호모 소비에트쿠스의 형상을 인민 대중에게 선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고려인 문화는 소비에트 문화의 큰 틀에 따라 외적 동기로 성립되고 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배양’된 까닭에 타자의 문화로 출발하게 되었다. 고려인 문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주제와 소재는 사회주의 혁명의 찬양, 노동의 숭배, 영웅의 찬미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이었다. 체제 지향적 가치의 형상화 뒤에는 고려인들 자신의 ‘역사’가 은폐되었다. 민족문화의 형식을 잘 보존한 작품들은 민족주의의 발현이라기보다 사회주의를 다양하게 포장하는 이국적 취향의 보존이며 정신을 거세한 ‘박제’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고려인 문화는 고려인들이 실제적으로 추구했던 가치와 문제 의식, 지향점들을 배제함으로써 고려인들 자신에게 타자화되었다. 생산과 소비 패턴의 경우, 민족어를 구사하는 고려인들의 수가 급감하면서 민족 문화의 명맥은 극동 원로 세대를 제외하고는 북한이나 사할린 등 외부 이민자들이 이어나갔다. 민족어로 쓰인 신문과 공연, 작품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소비자층 역시 극소수에 불과했다. 고려인 문화는 그 생산자들이 소비자 대중을 정서적으로 대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제 소통되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대다수 고려인들에게는 타자의 문화였다. 고려인 문화는 비주류 소수 민족의 문화인 까닭에 주류 사회인 소비에트 문화에는 ‘타자’의 문화였다. 그리고 고려인들의 역사와 고유한 가치, 고려인들 자신의 실제적인 정체성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려인들 자신에게도 ‘타자’의 문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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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요시기 민족융합론에 대한 시각과 비판

        박지훈(朴志焄)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0 역사문화연구 Vol.35 No.-

        假設宋遼時期生活在中國境內的所有民族都是中國民族的祖先,說他們互相融合的論稿基本都是在1990年代以後出刊的。我們沒法不注意這些表明中國符合多民族一體主義這一政治目標的研究成果。本稿想介紹近期的中國對宋遼時期民族融合的研究成果並指出一些問題點。隨之將關於民族融合的論稿分類爲民族移動、民族政策、宋遼南北朝論、文化交融等,並且對於在中國論議的民族融合究竟跟漢化有什麼關系問題提出批判。最近在中國關於民族融合的大部分論稿的焦點在於歷史上中國是一個統一的多民族國家,形成這樣的局面宋遼時期的歷史有重大貢獻。很難否定這些歷史研究沒有受到政治理念的指導,或者說被政治理念所主導。在中國議論的民族融合有著強調漢化的特徵。雖然也有論述其他民族對漢族的影響的文章,但這些的最終觀點是論證漢族的優越性。契丹人統一了北疆以及東北疆,擴大了中國的領土所以說他們偉大,但更多的是強調契丹人的發展是如何在與漢人融合並漢化的過程中達成的這一點上。對於究竟能不能把漢化看作是融合也有疑問的餘地。以管彥波爲舉例,落後的民族自發的實施漢化那叫民族融合,強制性人爲的那叫同化的觀點是作爲性較強的漢族爲主的解釋。不僅如此把這些概念定義在中國學界也很難定爲正說。有時還會有些把同化和融合混爲一談的現象。而且有一些人不稱遼宋,而是稱之爲宋遼,不僅如此不承認繼承漢王朝血脈的宋朝,將宋朝時期看作是南北朝或三國鼎立的也有之。但是把這個時期定義爲南北朝或三國鼎立的說法顯然有些牽強。怎麼看就算宋和遼是南北朝,把宋和遼合並並承認推出漢化,即融合和的觀點?不僅如此,在同一篇論稿中,即強調統一和民族融合,又強調宋和遼的特殊性,並高度評價遼的歷史貢獻的也有之,說明中國對宋遼時期民族融合的評價是不完全一致的。民族融合是歷史的必然趨勢。何況遼的契丹或是都已經消失的民族。這些民族的整體性早已當然無存,早已被漢族或是其他民族同化掉了。但在中國,民族融合論體現的是爲達到民族融合而采用的一種政策性手段。所以他不光只是單純的學問研究而是一種道具。因爲歷史學是解釋問題的,但隨著怎麼解釋、以什麼立場分析可能會歪曲事實。縱觀歷史,將漢族看成是單一血統的民族顯然有些牽強,可以說現在的漢族是融合了無數個民族的血統和文化的混合的一個民族。即使強調這單一民族性的韓民族也是與由多民族血統融合而成的,早些時候從北方民族到阿拉伯、印度、東南亞、中國。中國的這一民族帶有著“熔爐”的意味。我們有必要留意今天的美國雖然是由無數的人種構成的一個國家,但仍然使用“種族馬賽克”的表現。中國對藏自治區或維吾爾族自治區等有紛爭的地區,采取一些措施不讓這些民族從中國分離出去是衆所周知的事情。因此比起將其都視爲漢族的一員,承認民族的多樣性更顯合理。以整體來看,比起把漢王朝的宋規定爲正統,不如將其視作南北朝更加客觀。過分的把政治或現實的觀點投入到歷史中去解釋是不恰當的。根據筆者的宋代華夷論硏究,不可否認宋代有著很強烈的區分漢族和其他民族的華夷論觀點。但是忽視具體的歷史事實,斷定當時的兩個民族有著統一性的中華意識是不確定的。 송요 시기에 오늘날 중국 경내에 거주했던 민족들을 모두 중국민족의 조상이라고 전제하고 그들이 서로 융합되었다는 논고들이 특히 1990년대 이후로 다수 출간되었다. 중국에서의 다민족일체주의에 부합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표명하고 있는 이러한 연구들에 대하여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송요시기의 민족융합에 대한 최근 중국에서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민족융합에 대한 논고들을 민족이동, 민족정책, 송요남북조론, 문화교융 등으로 나누어 그 논점을 정리하고 중국에서 논의하는 민족융합은 과연 漢化와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비판해 본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민족융합을 다룬 대부분의 논고에서 역사적으로 중국은 하나의 통일적인 다민족국가이고, 송요 시기의 역사는 이러한 다민족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크게 기여했다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역사연구를 아예 정치적 이념에 맞추어 규정해 놓고 이에 따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배제하기 힘들다. 중국에서 민족융합을 논한 시각들이 결국 漢化를 강조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한족에게 미친 이민족의 영향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들 모두 한족의 우수성을 논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란족이 북강과 동북강을 통일하고, 중국의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위대하지만 그들은 발전되어 있던 한인과 융합하고 한화되었다고 강조한다. 또한 과연 한화를 융합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예를들어 管彦波의 경우 낙후한 민족이 자발적으로 한화를 실시한 것은 민족융합이고, 강제적이고 인위적으로 행해진 것은 동화라는 관점은 매우 작위적인 면이 강하고 한족 위주의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념정의는 중국학계에서도 아직 정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때로는 동화와 융합을 혼용해서 쓰는 경우까지도 있다. 또한 송요라고 지칭하지 않고 요송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한족왕조인 송의 정통을 인정하지 않고 남북조, 혹은 삼국정립의 시대라는 시각이 크게 확산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시기를 남북조나 삼국정립 시대라고 보는 것을 정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송과 요가 남북조라고 해서 요를 송과 병렬시키고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화, 즉 융합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동일한 논고에서 대일통과 민족융합을 강조하면서도 송과 요의 특수성 및 요의 역사적 공헌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현재 중국에서의 송요시기 민족융합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상이성과 모순성을 안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역사상 민족이 융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더욱이 요의 거란족이나 서하의 당항족 등은 오늘날 사라진 민족이다. 그 민족적 정체성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어떠한 형태로든지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과 융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의 민족융합론은 무엇보다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내재되어 있어 순수한 학문적인 연구라기보다는 도구적인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역사학은 해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는가, 어느입장에서 보는가에 따라서는 사실 왜곡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에서 漢族이라고 지칭하는 민족의 연원과 역사적 형성과정을 볼 때 혈통적인 단일성을 고집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수많은 민족들이 혈통과 문화적으로 혼합되어 오늘날의 漢族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민족은 “용광로”라는 표현에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오늘날 미국의 경우 수많은 인종들이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인종의 “모자이크”라는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경우 티벳이나 위그루족 등 현재 분쟁의 소지가 있는 민족들은 중국에서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여러 역사적인 공정을 진행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 여 역사적으로 모두 漢族의 일원으로 간주하려고 하지만 민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것이 더욱 합리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족왕조인 송을 정통으로 보는 것 보다는 남북조로 규정하는 것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치적, 현실적인 관점을 역사해석에 투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필자의 송대 華夷論연구에 의하면 송대 한족을 이민족과 구별하는 측면이 강조되는 화이론이 송대의 朝野에서 중요한 흐름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구체적인 史實을 외면하고 당시의 두 민족이 통일적인 중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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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이는 전근대 일본

        고영진(Koh,Young-Ji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6 역사문화연구 Vol.25 No.-

        2001년 일본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검정통과와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동북아시아 역사 갈등은, 3국의 양식 있는 학자와 교사, 시민단체들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과정 개편 작업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사회교과에 통합되어 있던 역사과목이 다시 독립하게 되고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 교육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강화와 더불어 고려해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역사교과서의 내용이다. 동북아시아 역사 갈등은 기본적으로 중국과 일본 역사교과서의 자민족중심주의와 국가주의적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역시 여기서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도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도 자민족 중심의 일국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제8차 교육과정에 의해 새로 만들어질 역사교과서는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주변국들에 대한 서술이 인류의 보편된 가치를 지향하며 상호 이해와 협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중국과 일본등 주변국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기존의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전근대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전체적으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보이는 전근대 일본의 모습은 문화후진국으로서 선진문화의 수혜자, 침략자, 약탈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근현대의 식민지수탈론으로 그대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수혜자, 침략자, 약탈자로서의 전근대 일본의 모습은 일면 타당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러한 일본의 이미지가 교과서 발행과 서술제도 등 우리 내부의 잘못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을 하나의 관계 주체로 보지 않는 『국사』교과서의 일방향적인 인식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현재진행되고 있는 난제들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어 나가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바람직한 한일 관계 서술은 과거 역사의 전개가 그랬듯이 일국사가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넒은 시각에서 관계사적인 측면에서 서술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경계의 역사학’이 아닌 ‘관계의 역사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서양의 국제 역사교과서 협력 운동을 모범으로 삼아 한·중·일 3국의 양식 있는 학자와 교사, 시민단체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교과서의 교류와 협력 활동은 앞으로도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This paper is the observation of the image of Japan portrayed in the 6th edition and 7th edition of the high school course book『Korean History』, mainly during the in the premodern era. Compared to the 6th edition, the 7th edition of the high school textbook『Korean History』has less nationalistic factors in the narration, subjectivity has diminished in the word selections, and the narration has become more objective. Likewise, this is true for the relationship narrations with Japan. However, the narrations of the relationships with Japan have been in many circumstances, referenced fragmentarily in the process of narrating the Korean history. To be exact, they are being narrated as objects, rather than as equal subjects. Accordingly, even though the quantity of narrations is not small, in the Korean History books, the recognition of the two countries is superficial most of the time. In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the image of Japan is simple. For most of the periods, Japan is acknowledged as a culturally underdeveloped nation that was accepting Korea's advanced culture, a cultural beneficiary, a looter who was continuously plundering Korea, and invader. Overall it can be observed that in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China is positively acknowledged and Japan is absolutely acknowledged in a negative way. This can be easily seen through the fact that, even if they were same invasions, in the case of China, our conflicts were emphasized rather than the invasions, however, in the case of Japan; the plunderous parts were emphasized for the invasions. It can be said that, cultural exchange can not be one-sided, but it goes underway because it is mutually necessary and it is a reciprocal thing. Therefore, there is a problem when narrating a cultural exchange from the perspective of a superior and benefactor. An example is that in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China's culture acceptance is emphasized in the subjective perspective; however, Japan is emphasized in the perspective of a one-sided beneficiary. This kind of one-sided acknowledgement is not only narrated for the cultural exchanges but it appears in the narrations for Japan's invasions, and the plundering process. It is because there are only explanations about the disputes and invasions, there are almost no explanations on the domestic and foreign circumstances, organic relationship with the political status, causes or characteristics for the outbreak of wars. These kind of one-sided and superficial acknowledgements of nearby nations are hindrances in solving the difficult problems surrounding the Korean peninsula. For a desirable Korea-Japan relationship there is a need for the narration of the past to be narrated in the view of the entire Southeast Asia in a relational point of view rather than as one nation's history. In other words, it should be the ‘history of relationships’ rather than the ‘history of bound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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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역사, 게임과 미디어를 만나다 : 연구자와 기업의 협업을 중심으로

        김태현(Kim, Tae-hyun),김재원(Kim, Jae-won)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20 동국사학 Vol.68 No.-

        Since the 1990s, critical public opinion has emerged about “popular history.” The same was true in academia. The “criticism“ of history researchers has also made it difficult for history researchers to inroads into areas where they can make contact to the public. As a result, those called “knowledge retailers” dominate “popular history” by leading various broadcasting and public lectures. The researcher’s position in public history is passive rather than active, such as bystanders, critics, and following the public. So where should the researcher be located? Shouldn’t history researchers be “creators” who can lead the high quality history consumption? Public lectures, introductions through media, active participation and planning of history-related programs, entry into social media and calls for the establishment of institutional devices at the government level are also necessary measures. Therefore, researchers also need to consider their activities as producers beyond mediators and critics. Of course, I’m not saying that all researchers should participate. Even if you participate indirectly, you should know the truth to make a proper comment. In order to do so, it is necessary to share and check the “historical popularization” and “public history” experienced by each person. The gap between academia and ‘popular history’ is great. The reason for this is that researchers have not been very interested in or only have criticized about the history reproduced in the media and society. It is a step that requires mature consideration of how to connect with researchers to the public sector. Of course, the spread of research results should be continued. Meanwhile, in order for a historian to act as a “creator,” he first needs space to express his own point of view independently. Social media has shown its potential as a representative space. However, the limit of contents produced by a group of researchers only is clear. It would be amateurish to do the entire planning and production process of content by themselves, and the quality of content would not be high enough compared efforts. Therefore, collaboration is necessary. This paper focuses on corporations as a target for collaboration. The primary process here is to choose a company that sympathizes with researchers’ perspectives and problem-consciousness. Through this, companies should reproduce content that can contribute to the public domain, and researchers should create a structure that intervenes in society through specialized content in the public domain. In other words, rather than being dragged by the market, it is necessary to actively participate to lead the market and establish researchers’ activities in the public domain. 1990년대 이후부터 ‘대중 역사’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등장했다. 학계에서도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역사연구자들의 ‘비평가’적 대응은 역사연구자가 대중과 접점을 이룰 수 있는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미진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지식소매상’이라 불리는 이들이 각종 방송과 대중강연을 주도하며 ‘대중 역사’를 장악하고 있다. 공공역사, ‘대중 역사’ 속에서 연구자의 위치는 방관자, 비평가, 대중 추수적 등으로 주체적이기보다는 수동적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연구자는 어디에 위치해야하는가. 역사의 질 높은 ‘소비’를 위해 역사연구자가 ‘소비’를 주도할 수 있는 ‘창조자’여야 하지 않을까? 강의실을 벗어나서 대중강연, 미디어를 통한 소개, 역사 관련 프로그램의 적극적 참여와 기획, 소셜미디어 진출, 그리고 정부 차원의 제도적 장치 수립요구 등도 필요한 조치다. 따라서 연구자 또한 중재자, 비평가를 넘어서 생산자로서의 활동까지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연구자가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간접적으로 참여한다고 할지라도, 실상을 알아야 제대로 된 비평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경험한 ‘역사 대중화’, ‘공공역사’를 공유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학계와 ‘대중 역사’의 간극은 크다. 그 이유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미디어와 사회에서 재현되는 역사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거나 비평가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연구자와 공공영역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을지 성숙한 고민이 필요한 단계이다. 물론 연구성과의 전파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분야이다. 한편 역사학자가 ‘창조자’로 역할하기 위해서는 우선 독립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피력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소셜미디어가 대표적인 공간으로서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다만 연구자집단만으로 제작하는 콘텐츠는 한계가 명확하다. 콘텐츠의 기획 및 제작 전 과정을 연구자가 직접한다는 것 자체가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고, 시간 대비 콘텐츠 질도 높다고 할수 없다. 따라서 협업이 필요하다. 본고는 협업의 대상으로 기업을 주목한다. 여기서 연구자의 관점과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기업을 선택하는 것이 일차 과정이며, 이를 통해 기업은 공공영역에 기여할 수 있는 콘텐츠를 재생산하고, 연구자는 공공영역에 전문화된 콘텐츠를 통해 사회에 개입하는 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즉 시장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해 시장을 주도하며, 공공영역에서 연구자의 활동을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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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 조선족 무형문화유산의 전승실태와 발전방안연구

        Song, Xu-ri(宋旭日),Piao, Jin-hai(朴今海)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4 역사문화연구 Vol.51 No.-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내 조선족의 고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단지 연변이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와 잇대어 있고 또한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라는 요인 외에도 더 중요하게는 이곳에 조선족의 언어, 풍속, 가무, 예의 등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민족적 정서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민으로부터 오늘의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장장 한 세기반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연변의 조선족은 두만강 북안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거주지역과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고유의 전통문화를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문화와의 접변 속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창출하면서 그 속에서 민족공동체의 연대와 결속을 다져왔다. 연변으로 이주한 이주민의 절대 대부분이 땅을 찾아 한반도를 떠난 농민층으로, 그들이 생산의 주체였고 놀이의 주체였다. 따라서 그들 중에서 생성되고 전승된 문화는 주로 생산문화와 공동체문화로, 농경문화의 색채가 비교적 짙다. 또한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이면서도 중국의 국민이라는 특정된 신분으로 그들의 문화에는 한반도문화의 유전자가 깊이 낙인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다른 나름대로의 새로운 특징들이 생성되었다. 이와 같은 이중적 혹은 복합적 문화성격 및 짙은 민족적 색채로 조선족의 무형문화는 연변지역은 물론, 길림성 심지어는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중국의 무형문화유산발굴을 계기로 세계급의 무형문화유산 1개,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16개, 성급 무형문화유산 58개를 보유함으로써 문화민족으로서의 이름을 만방에 떨쳤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 후 급속한 산업화 및 조선족 인구의 초국적 이동으로 전통적 거주지가 위축되고 공동화되면서 많은 전통적인 문화유산, 특히는 무형문화유산이 소실되고 그와 더불어 민족적 정체성도 곤혹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문화는 민족의 아이덴티티와 그 시대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내포하고 또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영혼이 없는 민족과 다름없다.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찾는 일로 가장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전통문화유산의 전승보존과 활성화를 통한 문화의 자각이며 특히 전통문화 중에서도 한번 소실되면 재생이 불가능한 무형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이 절실하다. 정부차원에서 조선족 무형문화유산의 보호와 전승을 위한 제도적, 정책적 장치, 사회전면에 걸쳐 현대문명과 다문화시대에 맞는 다양한 계승방안의 개발과 재창조, 대중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방안 및 한반도와의 협력방안 등이 모색되어야 한다. Connected with the Korean Peninsula, 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is the largest community of Korean Chinese in China. What is more to the point, this is the place where carries the Korean Chinese traditional culture including language, custom, songs, dances and rituals. In the long course of history from the 19thcentury to present, Korean migrants who left home country became one of the 56 minority nationalities in China. Centered in the north of Tumen River and based on traditional farming culture, Korean Chinese of Yanbian has not only kept quite intact intrinsic culture of the Korean Peninsula, but also has formed his own unique culture in the process of contact with Chinese society and culture, which go further strengthening the tie and belongings of its national community. With the identity of diaspora of Korean nation and Chinese nationality, the culture of Korean Chinese is branded with Korean Peninsula and Chinese new characteristics. This kind of dual or multiple cultural natures make the non-material cultural heritages of Korean Chinese grab the attention not only in Yanbian Area, but also in Jilin Province, and even nationwide. Grasping the opportunity of China's non-material cultural heritages development, Yanbian Area has possessed one world-class non-material cultural heritage, six nation-class non-material cultural heritages, fifty eight provincial-level non-material cultural heritages. However, with the rapid industrialization and large-scale trans-national migration by Korean Chinese, traditional settlement has begun to shrink and hollow out, many traditional cultural heritages especially non-material cultural heritages have begun to disappear, by which national identity of Korean Chinese disordered and confused. Culture is the connotation and representation of national identity. A nation without culture is one without soul. The way out to firm the national identity is to preserve, protect and activate the traditional heritage, especially the non-material cultural heritage, which once disappeared, could not regen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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