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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주의 신학을 통하여 본 대신교단의 선교와 향후 전략에 대한 연구

        정재훈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2004 국내석사

        RANK : 249647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반드시 그 일을 시키신 자의 의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허다한 우리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이다. 대신 교단은 분명히 헌법에 표방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교단의 신학적 노선을 잘 말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적 선교의 기초와 방식을 통하여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선교의 정의와 의미를 잘 모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교라 말할 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육체를 고치는 의료선교와 봉사 등의 육신의 평안을 위로하는 방법들을 많이 찾아가고 그렇게 해 오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선교의 진정한 의미는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사람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니요, 교회의 보여주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선교에 앞서서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떤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할 때 진정한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전하고 바르게 선교하려면 선교사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파송한 교회와 교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교회와 교단과 선교사가 연합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적으로 선교사는 계속해서 파송되어 질 것이다. 파송된 선교사의 관리는 매우 중요함으로 교단 선교부는 체계적인 선교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교단의 전통과 자존심만 내세우기 보다는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타 교단과 비교 해보면 매우 부족한 실정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한 면 가운데에서도 대신교단 선교부는 21세기에 걸맞는 선교부가 되기 위해 부족한 면을 정비해가며 체계적인 선교부의 역할을 기대해 볼만하다. 단 파송된 선교사와 파송될 선교사를 위한 교육을 준비하여 파송된 선교사는 대신교단이 표방하고 있는 신학을 통하여 선교의 현장에서 하고 있는 모습만 보아야 교단의 이름을 나타낼 수 있고, 파송될 선교사는 교단의 교육을 통하여 교단의 신학의 대한 자부심과 함께 개혁주의 선교의 기초를 쌓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교사와 전달자이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선교사의 사명은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지와 교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오직성경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직 성경을 생각하며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인도함의 약속을 받을 것이다.

      • Thomas Cartwright의 교회정치에 관한 연구

        최성호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9647

        지금까지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교회정치원리를 중심으로 한 칼빈의 개혁신학 속에 나타난 장로교정치원리와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원리에 대해 살펴보았고 한국장로교회의 실정과 그에 따른 평가를 내려 보았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먼저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기초를 놓았던 장로교회정치원리가 그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칼빈의 종교개혁사상으로부터 아니, 고대교회로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교회정치원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장로교회정치의 원리가 되어지고 있는 것은 모든 신앙과 삶에 있어서 원리요, 규범으로서의 "오직 성경"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직 주님만이 왕이시고, 모든 것에 앞서서 그리고 모든 것 위에 그의 말을 들어야 되며 우리보다 높은 상전에게 복종하되 그분 밖에서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칼빈의 저항정신이 여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원리는 또한 토마스 카트라이트로 하여금 영국 땅에 장로교 정치의 기초를 놓게 했으며, 또 다른 많은 개혁자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신론에 앞서 개혁의 방편과 무기로서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 칼빈주의적 장로교회로서의 처음이요 마지막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정치와 예배모범을 고백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에 근거한 교회정치 원리는 회중교회도 감독교회도 아닌 장로교회정치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하겠다. 이와 함께, 장로교회정치의 귀중한 고백의 유산으로서 완전한 교회로서의 장로회인 노회의 개념과 "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치리회에 있어서 "의장의 개념과, 파회 개념"의 의미가 결코 단지 지엽적이거나 불필요한 논쟁이 결코 아님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 시대에 있어서 교회는 성경의 원리를 떠나 시대의 환경에 발맞추어 재빠른 적응을 해 나아감에 따라 순교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놓은 종교개혁의 유산들을 값없이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우리는 진정 개혁주의 신학(교회정치)이 무엇인가를 되물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는 개혁된 신학이다. 또한 개혁된 신학이란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혁된 것이 무엇이냐를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고난 받고 순교한 한 농부의 순교적 고집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자 하는 고집, 그리스도만을 왕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서 고백하고자 하는 고집,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진리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리고 가족들도 나를 버리며 가까운 신앙의 동지들도 나를 버려 진리 때문에 홀로 서 있고 하나님만이 그 증인으로 있을 때(solus primo eram, me unum fuisse, Deum ipsum testor), 인간의 의지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 되고, 루터처럼 성경과 더불어 아직 이성 혹은 양심으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 되며,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고집으로 홀로 서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독특한 고백 안에서 저항하는 자로서 그 안에서 오직 성경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정통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해야할 당위성이 있다 하겠다. 그러기에 우리는 활동과 조직에 있어서 헌법에 보증되지 않고, 그 헌법이 지향하고 있는 단순하고 바른 교회정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만한 틀이나 정신들은 우리 가운데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더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좋으면 좋을수록 무조건 수용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고, 자신이나 주변의 원인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못 본체 해서는 안 된다. 참된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헌법에 기초하여야 하고 언제든지 진리는 동조자가 없고 공인이 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빛으로 남아 있도록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장로교회란 이름을 붙이고 있고 계속 붙이길 원한다면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교회정치원리를 바탕으로 한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동시에 영국에서 일시적으로 그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에 따라 개혁해보고자 하는 영국 시민전쟁의 열매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남겼다면 그 장로교회의 종교개혁은 원고백서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 도르트회의 결정과정에서 나타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연구

        오승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9647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어떤 이들은 희생의 종교로, 어떤 이들은 헌신과 봉사의 종교로 정의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기독교 종교의 가치 핵심은 구원에 있고, 그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중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흔들려 버리면 기독교의 모든 가치가 흔들려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모든 것이 허용되어 버렸다. 사회가 악을 책임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악의 문제를 그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들이 책임질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악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가? 물론 교회에도 악인(죄인)이 들어온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죄인들을 위해 문을 열어놓고 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책임질 수 없고, 인간 스스로가 책임질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죄인들을 위하여 문을 열어 놓는다고 했을 때에도 그 의미는 교회에 속한 죄인들이 변화(회개)와 성화의 단계가 지속되어야 함을 전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표현되어질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믿음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믿음이란 인간의 의지가 자유하기 때문에 스스로 취득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믿음으로 표현되어 질 때, 그것을 믿는 것 자체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는 것이요,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란 극히 제한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 주시는 은혜의 구조나 형식이다. 자유의지에는 은혜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구조화 된 것이다. 율법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는 것이 은혜를 주시는 어떤 틀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선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자유선택은 총체적 개방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폐쇄적인 상태(닫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지의 실태이다. 따라서 그런 자유선택의 행위가 자유의지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의지의 지향성이 어떤 것(대상)에 관계를 맺는 것으로 종결하였을 때, 선택이 이루어 졌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유선택의 행위가 자유의지의 본질이나 실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 실태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눈이 있다. 눈이 있기 때문에 본다는 것은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눈이라는 것은 본다는 것 이전에 이미 실제하고 있다. 그리고 눈이 있는 목적이 선행하고 있는데,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도 마찬가지다. 의지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선행하고 있는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목적은 주신 의지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를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으며, 악한 일 밖에 할 수 없으므로 선을 향한 움직임은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시초가 되며, 성경은 이 전향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돌린다고 칼빈은 말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로 선을 향하여 갈 수 있게 하는 이 과정을 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 근원은 하나님이 영원한 성정에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예정론을 통하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그런 예정론은 보이는 교회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이러므로 도르트회의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하여 화란 외에도 유럽 전체 칼빈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은 각국의 102명의 대표들이 모여서 항론파가 제기한 다섯 가지 논제들을 다양하게 다루어 93개의 조항을 채택한 도르트 신조를 작성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르트 총회록(ACTA)을 통하여 본 다양한 신학적 논의들은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르트회의를 통해 정립된 내용들에 대해서 이후 개혁교회가 벨직 신앙고백 및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까지 아울러 수용·채택하여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임을 재확인함으로서 명실 공히 이들의 도전을 꺾고 정통 기독교를 지킨 종교회의였으며 이후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교리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07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곳곳에서 1907년 원산 대부흥을 다시 재현하려는 노력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는 무엇을 회복해야 할 것인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도, 100년 전에 있었던 이 한국 땅의 부흥도 지나가는 현상일 뿐인데, 많은 교회와 사람들이 그 현상에만 몰두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교회의 현실과는 달리 세상을 더 이상 기독교회를 가만두려 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 종교일치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절대 신앙은 위협을 받고 있으며 무엇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저들과 화해를 할 것인가? 우리의 의지로 이겨낼 것인가? 이제 한국교회는 달라져야 한다. 어리석인 인생들이 스스로의 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바른 신앙의 내용을 잘 보존하고 우리의 신앙후손들에게 잘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시대도 변하고 세상도 변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으시며 세계를 섭리하실 것이다. 인류 역사 현장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께서 인생들로 하여금 주신 기회를 선용하며 살아야 하겠다.

      •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신학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관계에 대한 연구

        김영구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2007 국내석사

        RANK : 249647

        이제 논자는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과 관련해서 전체 내용을 정리하면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먼저,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동일본질'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실체' 와 '위격'의 구별을 통해 과연 삼위일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한 우리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내의 '세 위격 상호간의 내적 관계'를 통해서, '본질'(οὐοία)과 '위격'(ὐποοτάοις)을 구분하며, 각 위격들을 구별하며, 아울러서 '동일본질'(ὁμοοὐοιος)의 성격을 확인하면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 사이에 '근원'과 '상호관계성'을 통한 '세 위격으로서 한 실체(본질)'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첫째, '동일본질'(ὁμοοὐοιος)의 개념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다른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로서 '한 하나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닌,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로서 '하나님이시다'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에게 '동일본질'의 개념은 더 확대되어서,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동일본질'로서 '하나님이신 것'과 신적본성에 있어서 '동등성'을 확인시켰다. 동방교부들은 보통 '본질'(οὑοἱα)과 '위격'(ύποοτάοις)을 구분없이 사용했었는데, (大)바질은 οὐοία 와 ὺποοτάοις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ὺποοτάοις의 개념을 '위격'의 의미로 정의하였고, 이런 정의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분리되거나, 나눠지거나, 가감이 되지 않는 존재로서 '한 본질'을 강조하였고, 더 나아가 '세 위격'의 존재방식이 '한 실체'로 존재함에 있어서 '본질의 통일성' (unity)과 '삼위일체성'(Trinity)을 설명할 수 있는 공식을 정립하였다.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을 대표했던 (大)바질은 하나님에 대해서, '위격'(ὑποοτάοις)은 '셋' 이며, '본질'(οὐοἰα)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공식으로서, μία οὐοία ἐν τριοίν ὑποοτάοϵοιν을 제시함으로서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위치를 마련해 주었다. 둘째, '위격의 구별'과 함께 '본질의 통일성'을 주장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입장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고 할 때, '수'(number)에 있어서 '하나'가 아니라, '본질' 혹은 '실체'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것은 신적본성을 언급할 때도 항상 '단수'로 말해야 하는 것으로서 '신적 실체'가 단순하며, 나누어질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는 성격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위격의 구별'에 있어서는 '하나'가 아니라, '상호관계'적인 면에서 '각 위격의 독특성'은 '근원'과 관련해서 '세 위격'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위격'으로 볼 때는 구별되나, '한 본질'로 볼 때는 '셋'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입장은, 서방신학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구조에 있어서 위격의 '상호 관계적'인 면에서 비교할 때, '동일한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근원(원인)과 관련해서 성부의 존재와 성자의 '발생' 과 성령의 '나오심'에 대한 존재방식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에게 있어서 특징적인 표현으로 설명된다. 먼저 (大)바질의 경우는 성부를 '아버지됨'(πατροτης) 성자를 '아들됨'(μιοτης, Filiatiο), 성령을 '성화하는 능력' 또는 '성화'(αΥιαοτικη ϭμναμις αΥιαομος)로 구별하였고, 다음으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각 위격의 특성에 대해서, 성부를 '비출생'(ἀΥϵvvηοία), 성자를 '발생'(Υἑvvης), 그리고 성령을 '발출'(ἔKπϵὐψις, ἐkπὁpϵuοις)로 구별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닛사의 그레고리는 성자에 대해서 '발생'(Υἑvvηοις, generatiο)보다는 '독생자'(μοvοΥϵvής) 또는 '하나님의 독생자'(μοvοΥϵvής, θϵός)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으며, 성령은 '발출'(ἐκπὁρϵυοις, prοcessio)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자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성부로부터 '발생'(Υἑννηοις)의 개념이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성자와 다른 존재방식, 즉 '발생'(Υἑννηοις)의 방식이 아니라, '나오심'(발출, ἐκπὁρϵυοις)의 방식으로 구별하고, 성령의 '나오심'은 서방신학과 다르게, 성령의 '나오심'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 고 고백하고 있다. 대부분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만 집중했던 반면에 (大)바질은 성령의 '위격'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아리우스 논쟁을 삼위일체 논쟁으로 바꾸어 놓았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성령의 신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세 위격'의 '상호관계'를 설명함으로서 '위격'의 '구별'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 위격의 '근원'과 '상호관계성'에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좀더 발전적인 개념을 밝혔다. 근원과 관련해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개념과 함께,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며, 성자로부터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성령의 '발출' 개념이 서방과 다소 다르지만, '이중발출'의 개념으로서 'Filioque'(성자로부터)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방신학의 아쉬운 점은 'Filiοque'개념이 아닌 'per Filium'(성자를 통하여)의 개념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과 관련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방식과 상호관계적 측면에서 각 위격의 구별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 큰 가르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세 위격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전치사'문제를 정리해보면, 동방신학의 독특한 전치사 사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방신학은 전치사를 사용을 할 때, '내적사역'과 '외적사역'에 있어서 '전치사'를 '본질적 순서'와 '개별적 각 위격'에 제한시켜서 사용한다. 즉 성부에 대해서 항상 'ἀπο'(from)의 개념을 사용해서 '성부가(ἀπο, from) 성자 안에서(δια, ϵν, ϵίς), 성령으로 말미암아(by)', 그리고 성자에 대해서 '성자가 성부로부터(ἀπο, from), 성령으로 말미암아(by)', 마지막으로 성령에 대해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ἀπο, from)라고 고백되고 있다. 그러나 (大)바질의 경우에는 어느 한 위격에 전치사를 제한시켜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역사(외부를 향한 사역)와 관련해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주체이기 때문에, 세 위격에게 'ἀπο'(from)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성자(성령)로부터 성자(성령)안에서 성자(성령)로 말미암아'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전치사의 사용문제에 있어서 동·서방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자체에 관한 것'과 '근원' 그리고 '상호관계성'에서는 분명 전치사 사용에 있어서 제한적인 성격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위격의 질서'에 있어서 '성자가 성부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세 위격'의 관계를 '보편성'과 '개별성'으로 이해하면서, 세 위격을 '개별성'으로서 이해하는 차원에서 '세 개별적 하나님'이라고 문제를 제시했던 대적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명확하게 '세 위격으로서 한 실체'를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닛사의 그레고리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던 'πϵριώρησις'의 개념이다. 'πϵριώρησις'의 개념은 '삼신론'과 '종속론'을 피하면서, '본질의 통일성', '속성의 동등성', '한 위격이 다른 위격을 포함할 수 있는 성격', 동일본질로서 '세 위격이 본질에 있어서 수적으로 단일하며, 유일한 성격으로서 하나의 동일한 본질, 혹은 실체라고 하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개념으로서 서방신학과 동방신학이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고히 하는 개념이라고 할 때,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이룩한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은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이루어 놓은 삼위일체의 교리적 내용은 결코 3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에게만 돌려져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보다 앞선 시대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이 다소 다르지만,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와 성령의 동일본질을 방어하는데 선두적인 역할을 해주었고, 또한 니케아 신경과 같은 신앙고백이 공교회에 분명하고 확고한 입장으로 증거될 수 있도록 교두보 역할을 잘 감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적 방법인 기독론과 구원론적 입장에서 해결하지 않고,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삼위일체적 개념을 기초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이단들을 적지 않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기본적으로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삼위일체론, 기독론, 성령론 이외에 다른 분야에서 당시의 유행했던 해석방법을 사용함으로 인해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시대에 정통적인 가르침이었고,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감당했다고 평가된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개정 과정과 신구약의 통일성의 관점에 있어서의 예정론의 위치

        김병석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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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핵심이 무엇이냐의 문제를 다루는데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의 문제이다. 칼빈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만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그 뜻대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은 모든 교부들의 바른 신학으로 소급되고 바울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체 성경으로 가는 길을 집대성한 신학이다. 그러한 칼빈 신학의 핵심으로 예정론을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이 구원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론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뜻에 따라 정하신 것을 집행해 나가시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정론이 신구약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신학이다. 칼빈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신구약의 통일성의 입장을 견고히 하였고 예정론을 모든 성경을 푸는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구약의 통일성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이다. 즉 말씀하신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의 처음과 나중이라는 표현은 성부에게만 제한 된 표현이 아니다. 성부에게도 성령에게도 적용되는 표현이다. 둘째로 교리의 통일성이다. 말씀하신자가 한분이시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뜻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정하심의 순서에 있어서도 그의 뜻과 의논이 모든 것의 최고와 최종적인 원인이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신구약의 통일성은 교리의 통일성이다. 이것을 인간의 한계 안으로 끌어들여와서 해석해서는 않된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판명성과 지향성의 오류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셋째로 신구약의 통일성은 언약의 통일성이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시고 내가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시라면 당연히 처음 맺으셨던 언약도 불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인간이 언약을 파기하는 자로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와는 상관 없이 자신이 친히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이러한 주체와 교리와 언약이 통일된다면 그분이 만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던 대상에 있어서도 불변할 것이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방식에 있어서도 동일하실 것이다. 즉 언약의 대상이 신구약을 통해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 언약 백성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속죄를 받고 그의 전가를 통하여 의롭게 되며 같은 서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칼빈 혼자만의 사변도 아니며 성경을 배제한 교부들의 사변도 아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핵심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내용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개혁주의의 핵심인 오직성경과 전체성경의 의미가 더 가치있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서 신구약의 통일성과 예정론의 위치가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상관없이 불가분리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칼빈의 이러한 사상은 신론 중심사상이며 계시 중심사상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제목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개정 과정과 신구약의 통일성의 관점에 있어서의 예정론의 위치"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마땅히 신구약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중심을 둘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의 주체이시고 근원적인 원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거 하고는 올바른 신학을 구현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칼빈 신학에서 예정론의 위치는 단지 기독교 강요에서 어느 부분에서 다루어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정론은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모든 것이다. 실체의 통일성, 교리의 통일성, 언약의 통일성이 의미가 있는 이유도 하나님이 만세전에 모든 인류 가운데 그의 백성을 택하셨다는 것에 있고, 그들에게만 이러한 은택이 주어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에 나타난 초막절의 신학적 모티브 : '말씀'과 '성령'으로서의 '물'모티프

        조재선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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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요한복음의 유대적 배경은 무시된 채 헬라 세계의 종교적 전통들과의 관련성만을 고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요한복음이 헬라 사상보다는 오히려 구약 사상 혹은 유대 사상에 더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최근 요한복음 연구의 일반적인 경향은 유대적 배경이 요한복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틀(framework)임을 인정하고 있다. 비록 구약의 직접적인 인용이 실제로 다른 복음서들에서보다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구약 사상의 흐름이 다른 어떤 복음서에서보다 요한복음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대적 배경 가운데서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신약의 다른 책들보다 이스라엘 절기들에 대한 언급과 그에 대한 신학적 모티프들이 매우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이방인이나 이방 지역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명절'들을 중심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과 그것에 관련된 관심이 더 크다. 이스라엘의 절기로서 신약과 다른 복음서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초막절(Tabernacles, 7장)과 수전절(Dedication, 10장)이 요한복음에서만 직접 언급되고 있다.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초막절의 모티프와 그중에서도 ‘물’에 대한 모티프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면서 요한복음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 따라서 '물'의 모티프에 대한 해석은 전체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예배와 신앙은 주로 그들의 절기를 중심으로 지켜지고 형성되어 왔다. 특히 요한복음에 나타고 있는 이러한 ‘물’의 모티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절기로서 초막절이 가지는 의미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명 초막절은 농사의 기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출애굽과 광야 생활이라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나안의 농경 문화적 배경에서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가진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다른 어떤 명절들 보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지켜진 절기였다. 한 해가 마감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교차적인 시점에서 지켜졌던 초막절은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는 절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초막절의 상징적 의미는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종말적 신앙과 관련하여 그 중요성을 더욱 지니게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좌절 속에서 오히려 열린 미래에 대한 소망을 전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지켜졌던 절기로서의 초막절은 그들의 예배와 신앙을 표현하는 중요한 형태이었다. 그러한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지켜지고 있는 한 절기가 종말론적인 예언의 메시지 자체가 되고 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체계를 형성하는 틀을 마련해 주고 있다하겠다. 그중 초막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종말론적 경향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매우 신학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초막절 절기와 ‘물’의 모티프가 신학적 메시지와 상징으로 강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 7장에서 일어나는 일련이 사건들은 매우 중요하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이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한다. 이때 예수는 자신을 믿는 자들은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나올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야’임을 나타내기 위해 초막절의 모티프를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주와 메시아로 단언하고 있는데, 이를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는 구약에서 주(????)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물에 대한 신적인 힘을 예수께서 똑같이 소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요한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예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흘러나온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요 4:14). 특히 7장에서 ‘물’이 표면적으로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령의 사역에 대해 가장 완전하게 설명된 곳은 예수의 고별 설교(farewell discourse)인 요 14~16장이다. 성령은 말씀의 증거자이며, 요한은 예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밝힌다(요 3:34; 14:10, 24; 17:8, 14).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말씀은 종종 생명의 물로 표현된다. 그의 말씀은 영생을 주는 물과 같이 영원히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로서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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