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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稱義에 관한 칼빈의 견해와 트랜드신조의 비교

        임주훈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06 국내석사

        RANK : 251711

        우리는 이상 칭의에 관한 카톨릭의 트렌트신조와 종교개혁자 칼빈의 견해의 비교를 통해, 성경에 입각한 칭의의 올바른 개념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서론에서 전제(前提)하였듯이, 카톨릭의 칭의교리는 그릇된 것임을, 그리고 성경에 입각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견해와는 명백히 다른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카톨릭의 트렌트신조는 성경에서 상당히 거리가 먼 신학이라는 점이 지적된다. 그들은 이러한 비(非)성경적인 신학(unbiblical theology)을 지원하기 위해 오히려 성경을 역(易)으로 이용하였다. 이는 “오직 성경으로”를 외쳐 부르며 개혁을 단행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는 참으로 상반(相反)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카톨릭은 말씀이 계시하는 진리에서 너무나 밖으로 나가 있다. 이점은 칭의 교리야말로 기독교신앙의 핵심교리라고 가히 일컬어진다는 사실에서 그러한데, 그들은 성경에서 계시해주지 않는 교리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그럼에도 그들은 트렌트 이후 400년 이상이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마저도 이 교리에 대해 일체의 수정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중세로부터 오늘로 이어지는 카톨릭의 신학적 풍토(風土)가 이러하므로 카톨릭으로부터의 개혁은 불가피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시 중세 로마카톨릭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개혁이 없었다 하더라도, 작금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개혁은 분명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단행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성경 말씀에 입각한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이러한 까닭은 우리 구주 예수님의 승천 이후, 진리에 대한 고수(固守)는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과업이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여주신 말씀을 떠나서는 결코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바로 이처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에 입각한 신앙(信仰)과 신학(神學)은 상당히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을 따라 신앙하고 행동하였던 종교개혁신학을 유산으로 받았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른 신학, 달리 말하면 오직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신학에 앞으로 남겨진 과제는 명백하다: 첫째 로마카톨릭이 그랬던 것처럼 , , 오늘날 비(非)성경적인 수많은 공격들에 대항해 성경진리를 수호(守護)하는 일이다. 둘째, 칭의교리에 대한 강조를 교회 안팎에서 성실하게 수행하는 일이다. 앞서 거듭 말하였지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교리는 기독교의 교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그렇게 말하였고 루터 또한 그러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개혁신학자들의 한결같은 강조가 여기 있다고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강조해서 말하지만, 개혁신학의 전통과 그 유산은 참으로 귀중하고 소중하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삶의 최우선에 두고자 하는 정신이자, 태도요, 방식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오늘날 종교개혁자들의 이와 같은 정신에 비추어서 우리에게 위배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겸손히 허리를 동여 메고 오로지 주의 말씀에 착념해야 할 것이다. 오직 성경말씀이 가라는 데 까지 가고, 주의 말씀이 멈춰서라는 곳에 멈춰서는 말씀중심의 사람과 말씀중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진리를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확고한 말씀의 사람, 신실한 말씀의 종이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이와 같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념 그리고 확신으로 우리의 생각과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채워나갈 때에,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더욱 더 확고해지고, 뚜렷해지며, 커져갈 것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의 의로 인정해주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그날까지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만 오직 모든 영광이 돌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Sola Deo Gloria!

      • 복음 선포와 교회 성장의 관계성에 관한 연구

        박동수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0 국내석사

        RANK : 251711

        A.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설교로 시작되었고, 또 그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마 4:23; 9:35; 눅 4:43). 또한 요한복음 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차례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치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교회시대에 와서는 다메섹 사건 이후 회심한 바울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은 로마의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순교를 감수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사도행전 6:2 이하에서 초대교회 열두 사도들은 그의 모든 제자들을 불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일곱 집사를 세워 교회를 맡기고, 그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다. 그러나 중세교회에 와서 말씀을 제쳐놓은 결과는 타락한 교회의 실상이 되어버렸고, 결국 종교개혁운동의 깃발이 세워지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따라서 목회자가 양을 먹이는 최대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곧 교회의 첫 번째 표지는 말씀 선포이다. 말씀 선포가 교회의 표지로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며, 그 성경을 가지고 성령이 역사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롬 10:17),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행 6:4). 나용화, 『기독교 신앙의 진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6.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지금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말씀의 생명력을 잃어가며 위기에 봉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교회의 역할이 구제사업, 선교사업, 교육 사업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지상과제로 생각하고 있거나 또는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들로 인해 기독교를 물질을 우선으로 하는 오해를 낳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오해와 또한 교회의 신실한 성장을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복음전파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요(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요 1:14).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복음은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말씀내용이었고, 그들의 설교가 선포될 때, 많은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였고 사회변혁이 뒤따랐던 것이다. 칼빈(J. Calvin)을 위시하여 당시의 많은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는데, 이것은 교회 강단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일천 년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가톨릭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 것이다. 참된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또 다른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이때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성경적인 설교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첨단의 전파의 시대를 가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많은 정보들을 통해 설교의 위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아픈 증언들을 듣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진단은 각기 다르며, 그것에 따른 처방도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처방들이 오늘의 설교 위기의 본질적 핵심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L. Jones)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에서 설교의 위기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그는 설교의 위치와 능력이 하향길을 걷게 된 것은 크게 세 가지 원인으로 본다. 하나는 일반적인 것으로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설교 경시풍조 같은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이다.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윤리적인 강연이나 훈계 그리고 도덕정신의 함양, 설교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대화로 자리바꿈을 하였으므로 퇴보하였다는 것이다. D. M. Lloyd-Jones, 『목사와 설교』, 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3~16. 둘째는 교회 자체 내의 원인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감 상실과 “설교자”(Preacher)가 아닌 “설교꾼”(Pulpiteer)들의 지나친 설교 쇼맨십이 많았고,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이 점들이 반감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즉 미사여구로 꾸미려는 지나친 수사학 구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리는 외면해 버리고 그저 슬쩍 넘겨버리고 중요한 것은 모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의 책, 16~18. 셋째, 참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다. 문학적인 재질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메시지의 진리성을 문학적 표현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설교란 영성이 결핍된 세속적인 것이며, 필요로 하는 것은 대화나 조용한 담화와 설화 등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강조점을 “예배의식”에 둠으로서 교독문과 더 많은 음악과 노래와 영창 등을 도입하여 말씀과 기도의 시간이 짧아져 “찬송 인도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다음은 특별한 사람들의 간증으로 흥미롭게 만든다. 심지어 그 간증들이 복음강해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까지 생각되게 한다고 말한다. 위의 책, 18~22. 존 스타트(J. Stott)도 그의 책 『현대교회와 설교』에서 “설교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고 단언하는 일부 과격한 사람들의 주장을 시인하면서,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반권위적인 분위기, John R. W. Stott, 『현대교회와 설교』, 정성구 역 (서울: 반석문화사, 1992), 59~74. 둘째는 인공두뇌학의 혁명, 위의 책, 74~94.. 그리고 셋째는 복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함 위의 책, 94~101.을 이야기 한다. 이 중에서 스타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확신의 상실이다. 그래서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먼저 회복하지 않고서는 설교를 회복할 기회가 없다” 위의 책, 96.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설교는 기교나 전달, 그리고 설교자의 인격이 아니다. 문제의 초점은 설교가 그것의 근거인 성경, 즉 그리스도를 상실했다는데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바로 이와 같이 복음이 상실해져가는 설교에 대한 문제를 재고하고, 이 문제를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하여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에 크게 영향을 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전파와 사도들과 고대교부들의 신학과 설교관을 연구한 다음, 이에 뿌리를 두고 “오직 성경”만을 외치며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에 대해 알아보고, 그리고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의 설교관을 중점으로 좀 더 깊이 연구함으로서 한국교회가 맞이한 설교의 위기를 재정립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의미의 성장과 발전을 기대함에 목적을 둔다. B. 연구범위 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천국복음의 성경적 배경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사도적 설교를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복음 선포와 교회성장의 관계의 중요성을 통해 2천년 교회의 역사는 교회가 그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말씀과 그 말씀의 선포로 인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특히 칼빈의 복음 선포적 설교를 신학적 기초로 지금의 한국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 따른 설교자의 자기개발의 중요성과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선포를 통해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적 과제와 해결 방안을 다루고자 한다. C. 전개방법 본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4장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제 Ⅰ장 서론에서는 본 연구에 있어서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그리고 연구범위와 전개과정을 제시하였다. 제 Ⅱ장은 복음 선포에 대한 성경적·역사적 배경을 다룰 것이다. 성경적 배경으로는 구약의 설교전통을 이어받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사도들의 대표로 바울과 베드로의 복음 선포를 중심하여 살펴볼 것이며 역사적 배경으로 교회사 전체에 걸쳐 흐르는 설교의 역사를 고대 중세기, 종교개혁시대, 근대 부흥기 순으로 점검할 것이며 여기에 칼빈의 설교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또한 2세기에 걸쳐 최고의 성장을 가져온 한국교회의 설교의 배경을 통해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대처해야 할 과제들을 점검해 볼 것이다. 제 Ⅲ장은 Ⅱ장에서 제시한 배경들을 통해 교회성장의 이해를 도와 교회의 가장 첫 사명인 말씀선포와 그 선포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이 교회성장에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고, 교회성장과 신학에 대해 고찰함으로 설교자들의 자기개발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임무인지를 깨닫고, 그런 자기개발을 통해 교회의 최종적인 본분이며 목표인 회심적인 교회성장이 이루어져야 됨이 얼마나 중요성한가를 제시할 것이다. 제 Ⅳ장인 논문의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정리 요약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복음 선포는 성경 중심이어야 함과 복음 선포의 목적은 구원이며, 이러한 복음 선포는 교회의 사명임을 다시 한 번 제시, 제언하고자 한다.

      • 개혁 신학의 관점에서 본 가정사역에 관한 연구 : 성경적 가정사역 정착을 중심으로

        양창국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8 국내박사

        RANK : 251711

        This dissertation dealt the solutions to the negative problems faced by the Korean church from the viewpoint that the family ministry can be one of the solutions to them. Methodologically, we prefer biblical and reformed theological principles to the theories based on psychology and humanistic world view in the study of the family ministry, This study seeks the reformed theological methodology for the family ministry and aims to develop it as a firmed methodology for christian family ministry. Family ministry is a ministry for christian individuals, families, and churches, which are to be healed and restored. Family ministry is an one of the intrinsic and holistic ministries of the church, such as worship, education, fellowship, service, and evangelism. Therefore, Family ministry should be based on the word of God and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hus, this study opts to use reformed theological methodology to achieve the purpose. This paper consists of Ⅵ chapters. In Chapter Ⅰ, dealt with the statement of the problem, the hypothesis of this study, the methodology used, the theological rationale, the aim of this study, the precedent research, and the terminology. In Chapter Ⅱ, the existential crisis and the context of the rapidly changing household of modern society which is the target of the family ministry were discussed. This study suggested the restoration of educational function in the family and the family ministry of the church. This study emphasized the family ministry based on the biblical principle and Reformed theology. In Chapter III, discusses the biblical and the reform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family. We examined the topics such as family, the human being as a member of the family, the origin of family in the Bible. In Chapter IV, the theories of family ministry were discussed comprehensively and this study examined them in the perspective of Reformed theology. First, this study surveyed the background, history, and theological nationale of family ministry. Secondly, this study examined the definition, justification, methodology, and tasks of the family ministry, and reviewed the family ministry and prospected its future. In chapter Ⅴ, after giving some suggestions for efficient family ministry, this presented an example of a new paradigm for the family ministry. This study expect that the local church and its families will grow and mature if it accommodate and practice the model for its family ministry. In chapter Ⅵ, summarizing and concluding all the researches, we made suggestions for follow-up study. 본 논문은 가정사역이 한국 교회가 가정적으로 직면해 있는 부정적인 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한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시도된 것이다. 이를 위해 가정사역을 논의함에 있어서 심리학이나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이론을 지양하고 성경과 개혁 신학적 원리로 접근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하고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성경적 가정사역의 정착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가정사역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위한 예방사역이고 치유사역이며 관계회복사역이다. 가정사역은 예배, 교육, 교제, 봉사, 전도와 같이 교회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사역이다. 따라서 가정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하고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힘입으며 개혁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본 논문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다. 제Ⅰ장은 서론으로서 문제 제기, 연구 목적과 논지, 연구 범위와 방법과 한계, 선행 연구, 그리고 용어 정리에 대해 서술하였다. 제Ⅱ장에서는 가정사역의 대상인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가정의 실존적 위기와 변화 상황(context)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 가정문제를 접근하면서 가정의 교육적 기능 회복에 대해서와 가정을 위한 교회의 사역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로써 가정사역의 필요성을 절감하되, 그 해결 방안이 성경과 개혁신학에 기반한 성경적 가정사역에 있음을 강조한다. 제Ⅲ장에서는 가정에 대한 성경적 이해(Text)와 개혁 신학적 기초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 가정과 개혁주의, 가정의 개혁 신학적 의미와 가정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Ⅳ장에서는 개혁 신학을 전제로 가정사역 이론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가정사역의 부정적인 내용들을 진단하였다. 먼저 가정사역의 배경, 역사 및 신학적 동향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가정사역의 정의, 당위성과 방법론 및 과제에 대해 살펴보고 가정사역을 반성하고 진단하였다. 제Ⅴ장에서는 가정사역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목회적 제언을 한 후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정사역 모델의 한 예를 제시하였다. 물론 이 모델은 연구자가 개발하여 제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모델 이론을 이해하고 바르게 차용 및 적용하여 가정사역을 실행한다면 가정과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제Ⅵ장에서는 모든 연구를 종합하면서 요약하고 결론을 내린 후, 후속 연구를 위한 제언을 하였다.

      •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성격에 관한 연구 : 필립 야콥 슈페너 경건주의운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용대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8 국내석사

        RANK : 251695

        이 연구의 목적은 평양 대부흥운동과 필립 야콥 슈페너의 경건주의운동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여, 독일의 필립 야콥 슈페너의 경건주의운동이 한국의 평양 대부흥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피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본고는 각 장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특징을 성경관 ․ 설교관 ․ 구원관 ․ 교회관 ․ 사회관 등 다섯 가지로 구분, 분석하여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평양 대부흥운동의 신학사상은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전수받은 것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평양 대부흥운동의 신학사상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는 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신자들을 죄인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의 자녀로 인도하기 위한 말씀 연설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철저히 믿었다는 점, 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본질적 사명이 있음을 알았다는 점, 그리고 사회는 대부흥운동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또한 필립 야콥 슈페너의 경건주의운동의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 그가 주도하였던 경건주의운동의 성격을 역사적 배경과 특징으로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결과적으로, 슈페너는 성경이 구체적 교리의 원천이고 규범이며, 절대적 권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설교는 성경의 문맥을 따라 성경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구원은 철저히 성령의 역사로 경험하는 회개에서 출발한다고 믿었다는 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로 보고 있었다는 점, 사회는 술 취함을 죄로 규정, 이로 인하여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슈페너의 경건주의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상호간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도회 및 새벽기도, 성경중심적 설교 및 개인 경건훈련, 그리고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슈페너의 경건주의운동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사경회는 개인적인 회개 운동인 반면, 슈페너의 경건의 모임은 교회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인 것으로 확인되어 상호간 불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토대로 앞서 논한 모든 내용을 고려하면서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실존적 위기 앞에서 그 대응방향을 모색하였다. 그 대응방안은 첫째, 성경관의 회복을 통해 성경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디지털시대에 익숙해진 현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싫으면 삭제하고 필요하면 다시 입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 둘째, 설교관의 회복을 통해 설교자가 성경 66권을 의심 없이 믿는 믿음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셋째, 교회관의 회복을 통해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을 통하여 예배공동체적 삶과 사랑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는 점, 넷째, 사회관의 회복을 통해 실천하는 믿음, 행함 있는 믿음으로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함을 절감하였다. 요컨대, 필립 야콥 슈페너의 독일 경건주의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은 300여 년의 시대적 간극은 존재하지만 각각의 운동의 목적과 실천적 지향점은 서로간 연속성이 있다. 이는 성경중심적 설교를 통한 말씀의 실천적 삶을 중시하고, 개인의 영적 성숙을 위해 기도회에 집중하며,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 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한편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은 말씀 중심의 회개 운동으로, 사경회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에 동참케 한 것은 물론, 삶에서의 개혁을 추구한 운동이었다면, 슈페너가 제창한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운동, 즉 경건의 모임은 말씀을 근거로 한 교회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슈페너의 독일 경건주의운동과 1907년 한국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성경관과 설교관과 구원관과 사회관을 갱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이를 실천하는 영역에서는 대상과 지향점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시대는 점점 하나님의 나라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차제에 본고가 다시 한번 이 땅에 영적 각성 및 부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그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일으키는 데 작은 물결이 되기를 갈망한다.

      • 비블리오드라마 연출자에 대한 연구

        홍동표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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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비블리오드라마 연출자에 대한 연구이다. 최근 한국 교회에 비블리오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데 과연 비블리오드라마가 교회와 목회 현장에서 유용한 것인지, 그의 장점과 제한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점에서 제한적이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고자 하였다. 국내의 비블리오드라마가 성경을 중심으로 사이코드라마의 심리극의 기법을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신학적 원리와 과정을 무시함으로 인하여 성경을 자기의 경험과 체험에 관련하여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출자는 자신의 신학적인 원리와 심리학적 배경을 가지고 이 둘의 통합이라는 시각을 견지해 왔다. 그리고 성경공부, 설교, 기독교 교육, 교회 내 심리치료의 영역에서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 왔다. 이러한 국내의 비블리오드라마에 대해 연구한 결과 국내의 현실은 어둡기만 하였다. 신학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험의 원칙으로 성경을 해석하였고 심리학적인 면에서 심리극을 활용한다지만 심리를 다루는 기법과 방법이 너무 초보적인 단계였고 극 조차도 연극적인 방법에서 기초적인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먼저, 비블리오드라마의 이해로 등장 배경과 목적, 특징 그리고 성경관에 대하여 정리하고 그리고 비블리오드라마의 실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연출자가 비블리오드라마의 진행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단계별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연출자의 역할이 신학적, 연극학적, 심리학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로서 본 연구자는 위의 세 가지 학문의 범주로 각 단계의 연출자 역할을 평가 한 후 장단점을 수정 보완하여 성경적이면서 개혁주의 전통의 입장을 계승하면서 비블리오드라마가 실연되어질 수 있도록 연출자의 역할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였다. 앞으로도 비블리오드라마 연출자에 대한 연구는 많은 보완과 연구가 필요하다. 제한적으로나마 본 연구를 통해 한국의 비블리오드라마가 성경적이면서 개혁주의 입장을 견지하여 종교 다원주의를 지향해 가는 포스트 모던시대에 자기의 경험을 성경보다 앞세우는 실수를 하지 않는 성경적이면서 개혁주의적인 비블리오드라마 연출자가 많이 세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 위르겐 몰트만의 '메시아적 교회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 :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정다운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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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방향제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본 논문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방향제시를 위해, 먼저 교회의 근거와 내적본질에 대해 살펴보고, 이러한 근거와 내적본질로 말미암은 교회의 미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한 후 이러한 자신의 근거와 미래로 말미암은 현재의 임무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도출하여, 현재의 한국교회를 교회 본연의 자태로 갱신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 하에 본 논문은 몰트만의 교회론 저서인,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메시아적 교회론』을 중심으로 면밀하게 정리·분석한 한 후, 그의 메시아적 교회론을 크게 2가지 차원으로 비판적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1) ‘메시아적 교회의 그리스도론적 차원,’ 2) ‘메시아적 교회의 성령론적 차원’. 몰트만은 그의 저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성령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은사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 두 가지 차원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자신이 살아가고 존재하는 시대와 세상 속에서 증시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메시아적 공동체’로 정의된다. 즉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능력 안에서 자신의 근거요 출발인 예수 그리스도에 정초되고, 나아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로 정향되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이해한 교회공동체는 ‘모이는 교회’요 ‘부름 받은 교회’로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요 ‘보냄 받은 교회’로서 세상과 일상 속에서 복음을 포괄적으로 ‘증거’하고, 자신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삶으로 ‘증명’하며,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 속에 ‘구현’해 내는 ‘메시아적 공동체’가 된다. 논자는 이러한 ‘메시아적 공동체’의 임무와 사명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내는 것을 포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시’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먼저 Ⅱ장에서 몰트만의 생애와 그의 신학에 있어서 교회론의 위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몰트만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시작되며, 그의 ‘교회에 관한 신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의 지평 위에서 개진된다고 할 수 있다. Ⅲ장에서는 몰트만의 ‘메시아적 교회론’에 대한 첫 번째 차원으로서의 ‘메시아적 교회의 그리스도론적 차원’에 대해 살펴본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정초된 메시아적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증시해 나갈 수 있는지에 관한 몰트만의 논의를 살펴본다. 몰트만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정하며,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메시아의 삼중직(선지자, 제사장, 왕) 임무를 위탁받은 ‘메시아적 공동체’임을 피력한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으로 말미암은 ‘십자가 정신’을 견지하며, 그리고 ‘부활의 희망’에 잇대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메시아적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관계 설정에 선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우정으로 말미암은 ‘친구의 관계’로 존재하는 ‘우정 혹은 형제애의 공동체’임을 피력한다. Ⅳ장에서는 몰트만의 ‘메시아적 교회론’에 대한 두 번째 차원으로서 ‘메시아적 교회의 성령론적 차원’에 대해 살펴본다. 여기서는 성령에 의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로 정향 된 메시아적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증시해 나가는 사명과 임무를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몰트만의 논의를 살펴본다. 여기서 교회는 자신을 ‘종말론적인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역사 속에 구현하는 ‘과정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성령의 종말론적인 은사로 말미암아 교회의 모든 요소들, 즉 말씀선포, 성찬과 세례 그리고 주일성수와 예배의 본래적 기능과 의미가 하나님 나라를 지시하고 구현해 내는 것임을 피력한다. 이렇게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모든 요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시해 나가는 공동체로 존재할 때, 교회는 자신을 ‘카리스마적 공동체’로 이해하게 된다. Ⅴ장에서는 이제까지 살펴본 몰트만의 ‘메시아적 교회론’ 구상의 신학적 맥락을 분석한 후, 몰트만의 ‘메시아적 교회론’의 함의를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논구한다. 몰트만의 ‘메시아적 교회론’은 다음과 같이 구상되어 있음을 밝힌다. 몰트만의 ‘교회에 관한 신학’은 1) ‘실천에 관한 신학 이론’으로서 철저히 ‘성경적 토대 위’에 구상되었다. 2) 이러한 ‘성경적 토대 위’에 구상 된 ‘교회론’은 자연스럽게 모든 신학을 아우르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을 이루었다. 3)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토대 위에 구상 된 ‘교회론’은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지평으로 귀결되었다. 4)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지평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성취’라는 도식 속에서 교회로 하여금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 속에서 드러내고 지시하며 구현하는 메시아적(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게 만든다. 이처럼 논자는 이미 다룬 두 가지의 차원으로 개진된 몰트만의 교회론이 상기와 같은 네 가지 요소로 구상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자는 이러한 몰트만의 ‘교회론’의 함의를 통해 한국교회의 현대적 과제를 크게 세 가지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살핀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전(全)역사를 교회된 자신의 전(全)생애 속에서 실천하는 ‘메시아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2) 성경적인 종말론을 정립하여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구현하는 ‘종말론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3) 삼위일체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숙고하고,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원리들을 반영하는 ‘삼위일체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 칼빈의 삼위일체론적 신인식 원리

        고영윤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4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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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칼빈의 신인식론을 삼위일체론적 원리를 따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칼빈의 신인식론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살펴보려는 이유는 첫째, 칼빈의『기독교 강요』가 삼위일체론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칼빈이 신앙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칼빈의 신인식론 역사에서 대두된 칼빈신학의 중심 구조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의 관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삼위일체론에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중첩한 시대의 인물이다. 그 시대는 유명론과 인문주의로 인한 회의주의의 대두로 인식론적 전환기였다. 그럼에도 칼빈은 중세 스콜라주의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와는 다른 인식론을 형성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의 영광, 성경의존사고에 의해 인식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적 호기심에 의한 사변적이거나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논하는 것을 비판하였으며, 신인식의 목적을 인간 구원과 경건에 두었다. 본 논문은 칼빈의 신인식론을 삼위일체론적 원리로 접근한다. 칼빈신학의 중심 원리와 구조를 따라 칼빈의 신인식론을 하나님과 인간의 지식으로 구분하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간은 타락 전 인간, 타락 후 인간, 회복된 인간의 관점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과 인간의 상응 관계로 파악하면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구속주 하나님의 계시와 중보 사역, 성령의 내적 증거와 신앙의 확신이라는 삼위일체론적 원리가 성립된다. 칼빈의 신인식론을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연구하기 위해서 먼저 그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해야 한다.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한 마디로 한 분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데 본질과 영광 그리고 권능에서 동등하시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 근거이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한 인식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상호 지향한다. 하나님 편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뜻과 경륜적 삼위일체의 사역은 일치하며 감춰지지 않는다. 인간 편에서 내재적 하나님의 뜻은 감춰지며, 인간은 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한 후 신앙을 통해 내재적 삼위일체를 이해한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뜻은 삼위가 공유하고, 경륜적 삼위일체 사역은 삼위가 공동으로 행사한다. 그러나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분석적이고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계시하고 인간은 인식한다. 따라서 인간이 신지식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인식과 신앙은 필수적이다. 칼빈의 신인식의 원리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중보, 성령의 내적 증거와 신앙의 유발 사역인 경륜적 삼위일체적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사 그 영혼에 신의식을 심어 놓으시고 자연과 섭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인간은 타락하여 자연과 섭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의 수준에 맞추시고 인간의 언어로 계시인 성경을 주셨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인 성경만으로 신지식에 이를 수 없고 성령의 내적 증거가 있어야 개인에게 인식이 일어난다. 객관적 진리인 성경과 성령의 역사로 인한 주관적 진리인 신앙 사이에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하다. 신자는 말씀을 신앙을 통해 수납함으로써 신인식을 한다. 신앙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생성되지만 신앙은 개인적 결단에 의해 발생하는 개인적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신인식은 성부, 성자, 성령의 주관적 사역과 인간의 신앙적 응답으로써 경험적 사건을 통해 발생한다.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한 이유는 첫째, 신앙을 통해 얻은 지식이 확실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앙의 확실성 때문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실재성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에 확실하다. 셋째, 믿음의 생명성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생명이요 구원이다. 성령께서 끝까지 성도를 책임지시는 것을 경험적으로 인식한다. 칼빈의 신인식론은 삼위일체론적이다. 삼위일체론적 신인식론은 삼위 하나님이 구원협약 하에 움직이고,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 속에서 유지되기 때문에 언약적이다. 삼위 하나님의 경륜 사역의 목적은 결국 구원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론적이다. 다른 인식론들과 비교를 통한 독특성은 철학적 인식론과 비교할 때 신학적 신인식론이며, 어거스틴의 인식론과 비교할 때 하향식 구조의 부정의 신인식론이며, 스콜라주의와 비교할 때 성경적이며,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신인식론이다. 개혁주의는 칼빈의 변증 태도를 따라 전제주의적 변증을 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만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민주적 정당성과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합리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언약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

      • 요한복음에 나타난 '물 이미지' 연구

        이상아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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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is study, I will see the important role of the ‘Image of Water’ in John’s Gospel concerning in it’s main theme ‘Life theology’ and ‘whole structure of John’s Gospel’. The reasons why I want to study of ‘Image of Water’ are these: it is the main stream going through the whole John’s gospel, and has the function to connect Old and New Testament, and implies to come new age that has come into this age through Jesus Christ, it begins in Creation and fulfills in Jesus Christ. The use of Hebrew ם����(mayim) in Old Testament has two aspects. It was shown regularly and has ambivalence: order and disorder, life and death, blessing and punishment. And it shows continually in New Testament. The usage of ὓδωρ(water) has same meaning, but can be distinguish that one is means and methods, and the other is life and changes. And ‘the Image of water’ appears in John’s Gospel intensively. First of all, ‘the Image of Water’ appears in John 2:11 shows ‘Christology of Water’ which is to come in this world as the real God and real human. And ‘the Image of Water’ appears in John 7:37-39 shows ‘Pneumatology of Water’ founded in ‘Christology of Water’. And ‘the Image of Water’ appears in John 19:31-37 has the intertextuality both John chapter 2 and chapter 7. They interacts analogically, and ‘the Image of Water’ in John 19:31-37 goes forward to the completion arrived in Revelation. ‘The Image of Water’ in John’s Gospel interacts analogically with ‘the Image of Water’ of 1 John and Revelation. And it has the intertextuality with the texts appearing ‘the Image of Water’ in Leviticus, Numbers, Psalms, Isaiah, Ezekiel, Joel, Zechariah of Old Testament. Furthermore it connects the river of Eden in Genesis 2 that was streaming the middle. These aspects go on the fulfillment of the Holy Spirit experiencing in the New Life and the New Age arrived in Jesus Christ. Therefore ‘the Image of Water’ of John’s Gospel implies ‘Christology of Water’ and ‘Pneumatology of Water’, and functions as the main stream to connect Genesis, Ezekiel, Gospel of John and Revelation. In conclusion, ‘the Image of Water’ in John chapter 2, 7, 19 symbolizes the New Life and New Age arrived in Jesus Christ, and implies ‘Christology of Water’ and ‘Pneumatology of Water’. The study of ‘the Image of Water’ is very important to understand John’s Gospel as well as the whole Bible. Also it is the very useful tool and aspect to translate not only John’s Gospel, but also whole Bible. It functions to connect the creation in the beginning and recreation in Jesus Christ. The New Age in Jesus Christ can be symbolized Life and abundance. ‘The Image of Water’ symbols the abundance of New Life given in Jesus Christ like as the blood of Jesus Christ gives the salvation. In short, in this study of ‘the Image of Water’ of chapter 2, 7, 19 of John’s Gospel, we can see that it is very important point of view to understand not only John’s Gospel but also whole Bible. ‘The Image of Water’ flows all through the Bible, and highlights in John’s Gosple and Revelation. It symbols New Life in Jesus Christ and abundance given through Jesus Christ. Especially, in John’s Gospel, John success to show two aspects through ‘the Image of Water’: one is darkness under the sin ruling the Evil, the other is recreation and recover under the salvation of Jesus Christ. There is no water means no life and abundance, there flows water means to arrive life and abundance. ‘The Image of Water’ in John’s Gospel shows these facts strongly through intertextuality with other Old Testament books of the Bible and forecasts the ultimate completion to lead us into Revelation. In his day we will see and participate the greatest abundance in Jesus Christ. In this point, ‘the Image of Water’ has the important position to understand not only John’s Gospel but also the whole Bible. 이 연구는 요한복음 2장, 7장, 19장에 나타나는 ‘물 이미지’(Image of Water)에 천착하여, 그것이 요한복음의 중심주제인 생명신학과 요한복음 전체구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살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물 이미지’가 요한복음 전체 내용을 받쳐주는 외연적 구조의 골계이면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연결하는 가교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태초의 창조 모티프(creation motif)에서부터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만물의 회복, 곧 재창조 모티프(recreation motif)를 아우르면서 ‘생명’과 그로 말미암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 사용된 ‘물’[ם����]의 용례는 규칙적이며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질서와 무질서(혼돈), 생명과 죽음, 복과 벌로 대분되며, 그 비교와 대조가 반복되는데, 신약에 사용된 ‘물’[ὓδωρ]의 용례 역시 동일한 개념을 지닌 채 수단 또는 방법으로써 사용된 것과, 생명과 변화를 나타내는 이미지로서 사용된 것으로 구별된다. 그중 ‘물 이미지’는 특히 요한복음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우선, 요한복음 2:1-11에 나타나는 ‘물 이미지’는 참하나님이시면서 참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기독론, 곧 ‘물의 기독론’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7:37-39의 ‘물 이미지’는 약속[구약성경]과 그것의 성취[신약성경]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근간으로 한, 즉, ‘물의 기독론’에 근거한 ‘물의 성령론’을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또한 19:31-37의 ‘물 이미지’는 7장 및 2장의 ‘물 이미지’와 상호텍스트성을 이루며 유비적(類比的)으로 작용하여, 전후좌우로 이어져있는 성경의 연결망을 통하여 창세기[창조 모티프]에서 요한계시록[재창조 모티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물 이미지’는 요한복음 3장, 4장, 6장 등을 비롯하여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내의 ‘물 이미지’가 등장하는 본문들과 유비적(類比的)으로 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레위기, 민수기, 시편, 이사야, 에스겔, 요엘, 스가랴 등에서 ‘물 이미지’가 나타나는 본문들과 연결되면서 상호텍스트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다시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에덴동산, 그 중앙을 흐르던 강과 연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약속과 성취의 개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영생]과 ‘새로운 시대’[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믿는 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성령 충만한 삶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물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한 ‘물의 기독론’과 ‘물의 성령론’을 함의하고 있으며, ‘창세기―에스겔―요한복음―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면서 성경의 맥(脈)으로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요한복음 2장, 7장, 19장에 나타난 ‘물 이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생명수이신 하나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을 상징하며, 그분을 만나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새 생명 ․ 새 시대[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에 나타난 ‘물 이미지’는 ‘물의 기독론’과 ‘물의 성령론’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내포는 그 때 거기 살던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물 이미지’에 차용된 명시 및 암시가 오늘 여기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드러내는 준거 틀로 기능하며, 요한복음뿐 아니라 성경전체를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자 구조적 장치로 위치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물 이미지’가 하나님의 창조현장, 즉, 구약성경이 증언하는바 하나님의 약속[언약]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신약성경이 증언하는바 그 약속[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영생]과 ‘새로운 시대’[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잇는 가교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2장, 7장, 19장에 나타난 ‘물 이미지’는 성경을 전후좌우로 연결 ․ 관류 ․ 관통하면서 하나의 맥으로 기능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 알고 “믿는 자”들을 ‘생명’[영생]과 ‘새로운 시대’[하나님 나라]에 초청하여 그것을 경험하게 이끄시며 변화시키셔서, ‘생명’[영생]과 ‘새로운 시대’[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면서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가도록, 완성의 길로 이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중보사역을 드러낸다. 요컨대, 요한복음의 ‘물 이미지’는, 성경의 전후좌우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또한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반영하며 그것과 유비(類比)한다는 점, 그리고 그 유비(類比)를 가능하게 한 성경의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태초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모든 피조계[‘창조 모티프’(creation motif)]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완전부패 ․ 완전오염의 상태, 즉 완전한 죽음의 상태 ․ 희망이 없는 상태에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알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믿을 때,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훼손의 소성(蘇醒), 소생(蘇生)을 경험하는 완전한 회복, 곧 ‘재창조 모티프’(recreation motif)를 담고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 교회 본질에 관한 고찰 : 재세례파와 칼빈의 교회관을 중심으로

        김영대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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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무엇일까? 로 시작된 논문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지금까지 두 개의 명제가 계속해서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 즉 본질과 존재 양식의 문제이다. 이 땅의 교회가 이 둘 중 어느 것 하나에만 치우칠 때 교회는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고 오늘날에도 이러한 문제로 인해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어렵게 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역할을 교회의 본질로 잘못 인식하기도 하고 교회의 본질을 마치 교회의 존재양식인 것 처럼 착각하기도 하였다. 이 땅의 교회는 사람의 노력으로 세워진 조직체가 아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우시고 운영하시며 인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은 초월적인신적 기초위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대부분의 세상 단체와는 달리 하나님이 지으시고 만드신 기관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제한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 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백성들은 그의 인도함을 받는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원론적 정의를 전제하여 이 땅에서의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어떻게 조직, 운영되어야 하는가라는 실제적인 문제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본질에 토대를 두고 양식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의 본질을 살펴보고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 휩쓸려 얽히며 역사 속에 자리 잡은 두 진영(재세례파와 Calvin)의 교회관을 보았다. 이 들의 교회에 대한 주장은 마치 교회본질에 대한 양대 교리사적 흐름을 대변한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두 사상은 교회사적으로 끊임없이 대립 또는 상호배타적인 모습으로 드러났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광의의 “교회의 본질”이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정의했고 이를 본 논문에서 드러내고자 시도하였다. 교회는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이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런 교회이기에 “거룩하고도 죄 많은 하나의 교회”로 정의한다. 이것은 “죄인 공동체”(communio peccatorum)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에 의하여 “성인 공동체”(communio Sanctorum)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를 죄 많은 인간편에서만 보면 교회를 감싸 주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인간적인 조직과 양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편 교회를 위로부터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의해서만 보면, 교회 내에는 항상 인간적인 위험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거룩한 성령의 전으로만 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역사적으로 교회분열의 비극을 초래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둘의 조화로움이 내재된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이 교회사적으로 끝없이 이어져 왔다. 이 ‘성인 공동체’를 생각하면 ‘거룩한 백성’의 재세례파적인 공동체가 가능하며, ‘죄인 공동체’를 생각하면 철저하게 제도화된 교회의 엄숙함이 필요할 것이다. 때로 지상의 교회들은 재세례파들과 같이 자신의 초췌한 영적인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초대교회를 흠모한다. 원색적인 성령의 역사, 그리고 생명력 넘치는 공동체의 모습을 닮으려 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여러 교회의 존재 유형들이 만대 교회의 규범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본질이 아닌 존재 양식, 즉 형태는 적응성을 가졌다. 교회를 평가하는 본질적인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포”이다.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이어져 가고 있는 교회를 참 교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칼빈과 재세례파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이 모습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교회는 관념 속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라, 구원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을 드러내고 있임에는 틀림없다. 오고 오는 교회의 절대적 규범은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 전체의 교훈 속에 있다. 성경 전체의 교훈 속에 있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속에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교회와 복음은 서로 넘어짐을 같이 한다. 교회를 정의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회 양식의 차이가 아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빌1:18) 사도 바울과 같이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영원한 규범을 따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되어 가는데 있다. 그래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semper reforma)는 경구는 교회론에 있어서 항상 유념해야할 성경적 진리임에는 틀림없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그 희생이 ‘고난 받는 교회’의 참 모습이라 신앙하며 묵묵히 순교자의 반열을 따랐던 재세례파의 순교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이 살아왔던 역사의 발자취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본질의 표출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로 이 땅에서 순전하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기에, 지금도 세계 각처에는 이러한 교회의 원형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개혁자인 Calvin의 그 날카로운 지식의 잣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왜곡되게 변형시키며 그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린시키고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거짓의 무리로부터 구별되게 보존하는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어째든 역사는 이 둘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포를 담고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만약의 경우이지만 이 두 진영이 좀 더 대승적 차원에서 이해의 폭을 넓혔었더라면, Calvin이 회심할 시기에 뮌스터의 폭동이 없었고, Calvin이 선입감 없이 재세례파의 교리를 만났었더라면 하는 역사의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이 두진영의 교회관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변치 않는 사실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자들이요 분리된 자들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속죄와 화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업을 하나님의 자녀들 즉 그의 백성을 위해서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 즉 일치의 의미는 택함을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치’를 염원하신 것이다. 무작정 연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 백성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다. 최근에 많은 외국의 교회들이 한국의 부흥된 교회 모습을 본 받기 위해서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교회들의 분열된 모습을 볼 때, 홍치모는 한국의 교회 분열에 대해서 “교리(敎理)는 교회의 분열을 초래 한다”는 말을 서구형적 분열이라고 부르고, “교권(敎權)은 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라는 말로 한국형 분열의 원인을 그의 저서 “교회의 일치란 무엇인가?”에서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 안의 분열을 ‘교회관’에 대한 신학적 교리의 부재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원형의 교회모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정확한 신학적 교회관을 정립하고 진정한 겸손함으로 교회의 교회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형식적인 연합운동이 아닌 진정한 교회 본질에 입각한 하나 됨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메이첸도 당시 교회를 보면서 “교회는 지금 혼돈 속에 있으며,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도저히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성경에 따라 판단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라고 말하면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자유주의의 물결에 맞서기 위해 성경을 선택했다. 예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성전 건물을 무효화시키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막 14:58)을 지으셨다. 교회는 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무리이다. 그리스도는 교회 전체에 현존한다. 그러나 특별히 두드러지게 예배의 모임에 현존한다. 여기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고, 여기에 세례를 통하여 받아들여졌으며, 여기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고, 여기서부터 다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하여 파견된다. 이 예배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고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특별한 모양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 말씀을 통하여 교회와 이야기하고 교회는 기도와 찬미의 응답에 의하여 하나님과 이야기 한다. 여기서 십자가에서 죽고 영광중에 부활한 주님이 당신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현존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주님께 바친다. 여기서 완전히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ἐκκλησία, 교회가 존재하고 발생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예배의 모임에 온전히 현존하므로, 세계 모든 교회의 모든 예배 집회는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교회는 함께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의 교회이며,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주님과의 친교, 일치(Koinonia, communio)를 통하여 서로의 친교, 일치를 이룬다. 교회가 그야말로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려면 단순히 과거만을 고수해서는 안된다. 역사성을 지닌 교회로서 항상 변하는 세계, 항상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사는 세계 속에서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스스로 변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사에는 과오와 퇴보도 있어 왔다. 원초적 증언이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변하는 역사 안에서 언제나 최고심(最高審)의 구실을 한다. 그것은 만대의 교회를 평가하는 규범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탕을 둔 근원에서 비롯하여 이미 교회의 본질을 충만히 지니고 있는 신약성경상의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본 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서 적용하여야 할 근원적 설계다. 신약성경상의 교회 이외에 교회의 근원적 설계가 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재세례파의 교회 회복의 운동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일정한 특징의 형식적인 보존이 아니라 그 사용과 실현이다. 참으로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고 듣고 따르는 것, 참으로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것, 그러니까 “교회의 특징들”을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특징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각 교회가 자신의 특징을 살리면서 동일한 신약성서의 메시지와 실질적으로 일치하려고 노력한다면, 다양성 속에서 단일한 교회의 현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만세 · 만방에 흩어진 만민을 한 하나님 백성으로 모으신다. 동일한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만민을 모아 성경을 통한 친교를 이룬다. 동일한 세례로 만인이 같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며, 동일한 성찬으로 만인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서로가 일치하기를 계속한다. 주 예수에 대한 동일한 신앙고백, 하나님 통치를 향한 같은 희망, 같은 사랑으로 만인이 한마음을, 세상에 대한 같은 봉사를 체험한다. 교회는 하나이다. 또 따라서 하나라야 한다. 이 교회는 주님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계속 지어져 갈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이 교회는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되어 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긴박한 기다림’으로 준비해야하는 오늘에 있다.

      •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 활용 방안에 관한 연구"

        고성실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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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초록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 활용 방안에 관한 연구”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2011년 12월) 고 성 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다. 위기는 어느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본 논문은 위기 상담자들이 위기의 대처 방법과 원리를 잘 습득, 훈련하여 피상담자들을 슬기롭게 대처하게 돕고, 같은 상황에서라도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목적뿐 아니라 내담자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구원받고, 변화하여 성화의 단계에 이르게 하는데 있다. 특별히 본 논문은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하여 고찰함으로 피상담자의 전체의 삶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의 사역으로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고 변화, 성장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 성경적인 전체적 구조화의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둔다. 본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Ⅲ장의 영역이 바로 본 논문의 주요 장으로서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이 제시된다. Ⅲ장에서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을 제시하기 위해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의 의미, 위기상담의 목적, 위기상담의 특성을 살펴보고, 위기상담의 활용 원리와 방법을 적용하여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의 단계와 위기상담자의 행동양식 그리고 위기상담의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6단계인데, 1단계는 경청과 격려로 신뢰관계 형성, 2단계는 소망과 문제의 신속한 진입, 3단계는 자료수집과 피상담자의 탐색, 4단계는 피상담자의 변화를 위한 직면, 5단계는 피상담자의 새 생활화, 6단계는 성령의 열매 맺는 생활이다. 위기상담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성경을 적용하며 성경의 원리와 방법으로 상담하는 특성이 있다. 왜냐하면 권면적 상담은 성경적인 상담이 되어야만 하며 권면적 상담은 성경의 원리와 방법으로 상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하는 특성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상담이란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과 성화시키시는 사역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시키는 특성이 있다. 권면적 상담은 내담자에게 죄에 직면하게 하여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유형의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넷째,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어느 부분적인 문제에만 치우치는 상담이 아니라 전체적 삶의 구조화에 관심을 갖는 특성이 있다. 왜냐하면 문제는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며 모든 영역이 하나님과 적절한 관계를 가질 때에는 그 문제가 언제나 해결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전체의 구조화를 위해 자료를 사용하는 특성이 있다. 왜냐하면 피상담자를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자료를 통하여 모든 요인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영혼을 구원시키는 복음전도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특성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를 상담할 때에도 복음을 전도해야 하는데 그것은 상담을 구원하는 사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여섯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에 근거한 위기상담은 피상담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변화, 성장하여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유형인 성경적인 습관으로서의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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