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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장각 소장 經部 자료 목록․해제 정리사업의 경과(1) - 2018년도 사업결과를 중심으로

        구슬아,우나영,김은슬,서진원,조성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9 규장각 Vol.54 No.-

        ‘규장각 소장 자료 목록․해제 정리사업’은 규장각 소장 經部 자료의 전수조사와 개별 상세서지조사카드 작성을 통해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수정판, 1994) 및 『규장각도서중국본종합목록』(1982)의 정보 오류, 중복․合帙․누락 사항 등을 전면 수정하고 가칭 『규장각 소장 經部 자료 종합목록』을 발간하는 데 1차 목표를 둔다. 동시에 수정을 긴급히 요하는 기해제도서에 대한 수정과 우선해제대상서에 대한 해제 작성을 통해 규장각 소장 경부 자료의 가치를 제고하고 이용과 관리 양측면에 정확성․전문성을 기하는 데 2차 목표를 둔다. 이 논문에서는 목록 오류 수정의 기준 등 주요 사업 방법을 소개하고 2018년도 사업대상인 詩類․春秋類․禮類․樂類․孝經類․四書類 도서 약 1,200여 건에 대한 상세서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오류 수정의 주요 성과를 제시하였다. 조사 결과 서명․편저자․판사항․발행사항․동판본 및 사부분류 등 주요 항목에서 未詳의 정보를 새롭게 밝혀내거나 정보 오류를 수정하였다. 나아가 규장각 소장 경부 자료의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심화조사를 새롭게 수행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요 성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규장각 자료에 국가나 官署 주도의 경서 향유 양상을 드러내는 정보가 많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자료에 기재된 口訣, 諺解 등의 항목을 ‘비고’란에 기술하고 관련 내용을 목록화 하는 한편, 經筵에서 교재로 활용되었음을 증명하는 標識는 심화 조사하여 내용 서지를 대폭 보완하였다. 둘째, 형태서지 및 내용서지에 대한 기술이 미비한 중국본 경부 자료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기술규칙을 수립하고 추후 목록집에 중복 수록을 방지할 수 있는 조사방법을 구체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古刊本, 희귀본 擧業書 등이 규장각에 다수 소장되어 있음을 새롭게 밝히고, 한국본 경부 자료의 底本이 된 중국본 경부 자료의 구체적 활용 양상을 실증하였다. 이와 같은 심화조사 및 목록화를 통해 이용자들을 위한 정확한 서지 정보 제공, 규장각 소장 자료의 효율적 보존 관리 및 활용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 KCI등재

        1915년 조선총독부의 고려대장경 인출 사업

        양혜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 규장각 Vol.62 No.-

        본고에서는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인출한 고려대장경 관련 자료를 두 가지 범주로 분류하여 그간 불분명하던 자료들의 성격과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명하였다. 자료의 첫 번째 분류는 규장각에 소장된 3종 자료로 ‘1915년 조선총독부 인출 고려대장경 관련 자료군’인 ‘『高麗板大藏經印刷顚末』(海士일10, 한은40) - 『大藏經綴本目錄』(奎26757) - 규장각 소장 고려대장경 인경본(奎15036)’이다. 두 번째는 ‘1915년 조선총독부 인출 고려대장경 3부’로, 규장각 소장 고려대장경과 그 동일 판본인 일본 東京 宮内庁 書陵部 소장본 및 일본 京都 泉涌寺 소장본이다. 『高麗板大藏經印刷顚末』은 1915년 고려대장경의 인쇄 경위와 인쇄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일본 천황가에 바치기 위해 조선 총독이던 寺内正毅가 해인사 대장경을 절본 1부, 철본 2부로 총 3부 인출하였다. 현재 규장각 소장 고려대장경은 그 중 ‘철본’ 대장경으로, 철본이란 선장본을 뜻한다. 『大藏經綴本目錄』은 규장각 소장 철본 고려대장경의 經名, 卷數, 張數, 冊次 등을 정리한 것으로, 그 내용은 규장각 소장 고려대장경의 현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여기 수록된 대장경의 경전 종수와 권수를 헤아리면 1,511종 6,805권이 되는데, 이는 『高麗板大藏經印刷顚末』 수록 小田幹治朗의 「大藏經印刷終了報告」에서 전체 경전이 1,511종 6,805권이라 언급한 것과 일치한다. 즉, 『大藏經綴本目錄』의 정리 결과를 근거로 『高麗板大藏經印刷顚末』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규장각 소장 고려대장경은 위 두 자료의 기록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으며, 『高麗板大藏經印刷顚末』에서 서술한 조선 전통의 대장경 제작 기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결국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이 세 자료는 서로가 서로를 설명해 주는 자료인 셈이다. 한편, 『大藏經綴本目錄』에서 고려대장경의 경전 종수와 권수를 각각 1,511종 6,805권으로 정리한 것은 현재 학계에서 통용되는 1,514종, 6,808권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大藏經綴本目錄』에서 「補遺目錄」, 『金剛頂瑜伽念珠經』, 『蓮華眼陀羅尼經』의 3종 3권을 별건으로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임을 밝혔다. 『高麗板大藏經印刷顚末』에서 언급한 1915년 조선총독부 인출 고려대장경 절본 1부, 철본 2부는 그 소장처가 불분명하였는데, 실물 조사를 통해 각각 일본 교토 泉涌寺,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 도쿄 궁내청 書陵部 소장 고려대장경을 가리킨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書陵部 소장 대장경 사이에서 나온 카드를 통해, 『高麗板大藏經印刷顚末』에서 말하는 갑본이 泉涌寺 대장경, 을본이 규장각 대장경, 병본이 書陵部 대장경임도 밝혔다.

      • KCI등재

        규장각 소장 집부(集部) 도서에 대한 조사와 그 결과 -1 -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1994)의 재정비를 중심으로 -

        오세현,김수진,김하라,이경근,유정열,김대중,최천식,박민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5 규장각 Vol.47 No.-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1994년에 발간한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이 소장 자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학계의 지적을 받아온 지 오래되었다. 2013년부터 시작된 규장각 소장 귀중본도서 조사사업의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목록의 재정비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목록집의 재정비 외에도 귀중본사업은 1980년대 이후 중단된 귀중본 도서의 선정과 관리, 결본목록에 의거한 규장각 자료의 체계적 확충, ‘선본(善本) 문집 총서’(가칭)의 발간, ‘규장각 장서인(藏書印) 자료집’(가칭)의 발간을 주된 사업 목표로 한다. 본 논문이 지향하는 목록의 재정비에 대한 큰 얼개는 첫째 서명(書名)과 저자(著者)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미상을 밝히는 것, 둘째 간사년(刊寫年) 추정, 셋째 분류체계의 재조정이다. 서명과 저자명은 단순 오류를 비롯해 주변 문헌들과의 연계를 통해 저자명 미상을 밝힐 수 있는 사례들인데, 특히 원전 자료에 대한 전수조사와 귀중본으로 분류된 도서에 대한 심층조사, 그리고 귀중본 해제 원고라는 여러 결과물을 토대로 가능했다. 간사년을 추정하는 작업은 서발문 정보에 대한 누락을 바로잡고, 이를 토대로 문집의 간사년을 추정하는 것으로서 문집의 성격을 밝혀줄 수 있는 매우 유의미할 뿐만 아니라 동일본과 이본의 구분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분류체계의 재조정은 특히 학문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경우 문집이 언제 간행된 것이냐에 따라 수록 내용이 다르고, 문집의 성격도 상당히 다르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동일본과 이본의 구분, 나아가 중국본(中國本)의 재편집과 누락 문헌 등록을 통해 더욱 정확한 규장각의 소장 자료에 대한 정보를 구축하는 일이 가능하다.

      • KCI등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冊板의 현황과 특징

        권기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7 규장각 Vol.50 No.-

        본고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책판의 현황과 특징을 더욱 상세히 파악하기 위해, 규장각 서고에 있는 책판 실물에 대한 조사와 아울러, 18~19세기 책판 목록들과 규장각 소장 책판을 활용한 인출본에 대한 분석 등을 병행하였다. 책판의 실물 조사 결과 간행기관(內閣, 春坊, 芸閣, 嶺營, 寧邊府 등) 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책판의 외형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일부 刊記의 미확인으로 부족했던 간행 정보에 대한 보완이 가능했다. 책판 목록과의 대조를 통해 규장각 소장 책판의 간행처들이 동일 서적의 책판들을 장기간에 걸쳐 보관해 왔음을 알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범위의 책판 관리 체계를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인출본에 대한 분석은 규장각 소장 도서에 국한하였는데, 인출본에서 확인되는 印記와 內賜記에 대한 분석을 병행하였다. 그 결과 중앙 관서에서 간행한 책판의 인출본은 주로 중앙정부에서 수집되어 활용된 도서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지방 책판의 인출본은 개인 소장본이 많았지만, 중앙 관서의 수요를 위해서 활용되는 비중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규장각 소장 책판은 여러 기준으로 분류하고 그에 따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19세기 순조~고종대와 18세기 영조대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대체로 경전, 성리서, 역사서, 학습서 등 중앙정부와 왕실의 講學을 위한 책들이고, 후자는 국왕의 정치적 의지나 교훈을 담은 御製書라는 점에서 내용상으로 구별된다. 규장각 소장 책판의 간행처와 시기는 매우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지만, 중앙과 外方 사이의 통합적인 체계 속에서 책판의 간행과 인출, 보급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 KCI등재후보

        조선시대 歷代君鑑 ㆍ 歷代臣鑑의 수용 양상과 특징

        조계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규장각 Vol.38 No.-

        조선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 ‘동아시아의 문헌 교류’에 대한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동아시아 지식의 유통’을 조감하기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현전하는 중국본과한국본 도서는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중국서책의 수용 경로와 추이를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문화유산이다. 본 논문은 명에서 편찬한 歷代君鑑과 歷代臣鑑이 조선에 수용되는 양상과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역대군감..과 ..역대신감..이 몇 차례에 걸쳐 조선에 수용된 계기는 使行으로 북경에 갔을 때 황제에게서 받은 것이다. 조선에 들어온 ..역대군감..과 ..역대신감..은 명의 官刻本 중에서 ‘內府刻本’이다. 조선에서 ..역대군감.....역대신감..을 교정하거나 간인한 것은 세조.성종. 숙종 연간이다. 조선에 수용된 ..역대군감.....역대신감..은 제왕학을 닦는 경연.서연에서 진강서책으로 활용되었으며, ..역대군감.....역대신감..의 체재를따른 감계류 서책들이 편찬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현전하고 있는 ‘규중4111.규중4120’의 ..역대군감..은 [廣運之寶]가 안보되어있다. 이는 명나라 황실에서 수장하였던 본으로 조선으로 들어온 후 비단으로 개장하여 귀중본으로 관리하였던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 KCI등재

        奎章閣 소장 『從宦日記』의 저자 고증 및 사료적 가치

        곽지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 규장각 Vol.63 No.-

        본고에서는 道園 金弘集(1842-1896)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왔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從宦日記』의 저자를 約山 金炳德(1825-1892)으로 올바르게 고증하고, 『종환일기』의 내용과 그 사료적 가치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종환일기』는 책의 말미에 적혀 있던 ‘金弘集從宦錄’이라는 문구로 인해 긴 시간 동안 김홍집의 저서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종환일기』의 내용을 김홍집의 다른 일기인 『以政學齋日錄』, 『從政日記』와 함께 검토해 보았을 때, 이 일기들은 같은 저자의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承政院日記』와 비교한 결과 『종환일기』의 내용은 그 전체가 김병덕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종환일기』의 저자는 김홍집이 아닌 김병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책에 붙어있는 첨지로 보아 『종환일기』는 김병덕의 문집 간행을 위한 초기 자료이며, 1883년-1884년의 기록 이외에도 유실된 『종환일기』가 더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 김병덕은 親生子가 없었기에 사후에 문집 간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그 결과 저자와 관련된 자료가 다수 산일된 것으로 보인다. 『종환일기』의 저자가 잘못 알려진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자료들 간 교차검증이 어려웠던 과거의 상황에서 이 책이 성씨의 한자가 동일하고 유사한 시기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던 金弘集의 저술로 오인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작성된 여러 해제에서 잘못된 저자 정보를 답습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김병덕은 안동 김씨 출신으로 개항기 조선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던 인물이었으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으며 문집 역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종환일기』에는 1883년에서 1884년 사이 김병덕의 구체적인 행적 및 의론이 드러나 있으며, 당시의 시무에 대한 김병덕의 의견을 『승정원일기』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 향후 김병덕의 행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기대된다. 『종환일기』는 敦諭, 袖箚, 箚子, 筵說 등을 담은 본문과 외국 사신과의 회담, 행사 참석자 목록 등을 담은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종 대 『승정원일기』의 결락 부분을 보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승정원일기』와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해당 주제에 있어 김병덕의 시점에서 보충한 보다 미시적인 내용들이 등장하기도 하여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주석의 내용 중 외국 사신과 나눈 회담의 내용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중 상당수는 의례적 수사에 그치나 일부 대목에서 조례의 개정에 대한 조일 간 의견차 등을 확인할 수 있기에 개항기 외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In this paper, the author of Jonghwan Diary(宦從記日), which has been mistakenly known as the work of Kim Hong-jip(金弘集), will be properly verified. Also, the contents of Jonghwan Diary and its historical value will be discussed. Jonghwan Diary has been mistakenly known as Kim Hong-jip's book for a long time due to the phrase that written at the end of the book. When comparing the contents of Jonghwan Diary with Kim Hong-jip’s other diaries, however, it cannot be seen as the diary of the same author. In addition, as a result of comparing the contents of the Jonghwan Diary with the contents of the Seungjeongwon Diary(承政院日記), the whole contents deal with the Kim Byeong- deok(金炳德). Therefore, it is reasonable to regard the author of Jonghwan Diary as Kim Byung-deok. Considering the contents of the attachment to the book, Jonghwan Diary appears to be the initial publication material of Kim Byung-deok’s collection, and it is estimated that there will be more lost Jonghwan Diary in addition to the records from 1883 to 1884. Since the author Kim Byung-deok did not have any child, it is estimated that a large number of materials for the publication of the collection were scattered without the smooth publication of the collection after his death. It is not clear why the author of Jonghwan Diary is mistaken, but it can be assumed that the author’s collection began to be mistaken. Kim Byung-deok served as a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 in Joseon, but there are currently no collections of writings left, and his specific activities have not been relatively noted. It is expected that Jonghwan diary will be an important material for Kim Byung-deok’s personal research in the future, as it can confirm Kim Byung-deok’s specific activities and discussions between 1883 and 1884 and his opinion on pending issues not listed in the Jonghwan Diary. The Jonghwan Diary consists of a text containing many speeches, as well as notes containing meetings with foreign envoys and lists of participants in the event. In the case of the text, it is an important material to reinforce the missing part of Seungjeongwon Diary, and while dealing with topics such as Seungjeongwon Diary, more microscopic contents supplemented from Kim Byung-deok’s point of view appear, so it is of great historical value. Among the contents of the chairman, many of the talks with foreign envoys are also noteworthy, but some parts are important data for diplomatic research during the opening period as they can see differences in opinions between Japan and Joseon on the revision of the ordinance.

      • KCI등재

        조선 후기 印信 改造와 문서 행정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印信謄錄』을 중심으로 -

        노인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9 규장각 Vol.54 No.-

        본 연구는 조선 후기에 중앙과 지방 아문의 印信을 改造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문서 행정을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印信謄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인신등록』은 조선 후기 인신을 개조할 때에 예조에서 국왕에게 보고하는 문서와 새로 개조된 印文을 등록한 자료이다. 먼저 해당 아문에서 牒呈이나 關으로 예조에 인신 개조를 요청하면 예조에서 국왕에게 계목을 올린 후에 인신을 개조하였다. 그러나 1797년(정조 21)에 정조의 명령으로 개조된 印文을 확인하는 규정이 강화되었다. 인신 개조를 완료한 후에 예조는 국왕에게 인문을 後錄한 啓目을 올려 윤허를 받고 새로 개조된 인신을 내려 보냈다. 이러한 변화는 『인신등록』의 기재 방식에 영향을 주어 1797년 이후에는 인신 개조 계목과 인문을 踏印한 종이를 함께 수록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인신을 개조할 때에 문서 행정은 예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앙 아문은 품계에 따라 첩정이나 關을 통해 예조에 인신 개조를 요청하였고, 예조는 국왕에게 계목을 올려 개조된 印文을 보고하였다. 지방 아문은 관찰사․통제사가 關을, 수군절도사가 牒呈을 통해 인신 개조를 요청하였다. 지방 수령과 지휘관은 소속된 관찰사에게 첩정을 올려 인신 개조를 요청하였고, 해당 관찰사는 첩정을 점련한 關을 예조에 보내서 인신 개조를 요청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인신 개조를 통해 살펴본 중앙 아문과 지방 아문의 문서 행정 시스템은 『經國大典』 用文字式의 규정에 따라 시행되었다.

      • KCI등재후보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崇禎曆書』와 관련 사료 연구

        주핑이,이혜정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9 규장각 Vol.34 No.-

        본교에서는 규장각 소장『崇禎曆書』을 분석하여 明代의 판본임을 확정지었고 현전하는 본 가운데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이 명대 판본에서『曆引』은 가장 독특한 부분으로 다른 현전하는 『崇禎曆書』 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曆引』과『新法曆引』을 비교해보면, 아담샬 (Adarn Schall, 湯若望)이 청나라에 온 이후 어떻게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만든 역법을 합법화 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 규장각에는 이외에도 청대 역서와 관련된 자료가 소장되어 있어 조선인들 이 새로운 역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 KCI등재

        奎章閣所藏 中國本 書類와 그 가치

        이은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한국문화 Vol.73 No.-

        Kyujanggak(奎章閣) of Jungjo(正祖) was the Royal Institution which led the learning of the day. The chinese version’s the kind of The Book of history(中國本 書類) which is housed in Kyujangkak is the material which helps to confirm Jungjo's awareness of Shangshu(尙書). One of the most remarkable list of books(書目) among the Kyujangkak's The chinese version’s the kind of The Book of history are as below. First, it's the study of Chinese classics which completely denied GuwenShangshu(古文尙書) or doubted GuwenShangshu which is similar as WangYingLin(王應麟)’s Guwenshangshumazhengzhu(古文尙書馬鄭注, 奎5306) and Yanruoju(閻若璩)’s Shangshuguwenshuzheng(尙書古文疏證, 奎4844). Second, it is writings which double as annotation of The han․Song Dynasty(漢․宋) such as Qianshi(錢時)’s Rongtangshujie(融堂書解, 奎4643), Renqiyun(任啓運)’s Shangshuyuezhu(尙書約注, 奎3316) and Jinlüxiang(金履祥)’s Shangshubiaozhu(尙書表注, 奎3317). Third, the shangshu of Gyeongyeon(經筵, lecture for king) such as, Yuanhuang(袁黃)’s Shujingqimengjiejingxuanzhu(書經啓蒙捷徑選註, 奎4817), Zhangnai(張鼐)’s Shujingyan(書經演, 奎5206) and Zhangjuzheng(張居正)’s Shujingzhijie(書經直解, 奎4710) etc. are the valuable materials which are high in scarcity. Especially it is considered that Yuanhuang(袁黃) and Zhangnai(張鼐)’s the writings are valuables which is hardly seen even in the China. It is understandable that Jungjo read not only annotation of Caishen(蔡沈) but also ancient annotation(古注) of The han․Song Dynasty variously and aimed to figure out understanding of multiple about Shangshu by writing of doubting GuwenShangshu. The understanding of Jungjo about Shangshu is proved in Sangseogangyi(尙書講義) which deals with discussion with Chogemunsin(抄啟文臣, Kyujangkak Scholar).

      • KCI등재

        고종대 궁궐 내 현왕 어진봉안처의 변화와 ‘규장각’ 계승

        이민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1 한국문화 Vol.- No.95

        King Sukjong(肅宗) was the first king to build the King’s portrait house. After that, the tradition of erecting the King’s portrait house continued with King Gojong(高宗). King Gojong wanted to rule directly against Heungseon Daewongun(興宣大院君). In the process, Geoncheonggung(乾淸宮) was built to enshrine the portraits of the king. Geoncheonggung was a building that advocated the succession of ‘Kyujanggak(奎章閣)’. ‘Kyujanggak’ was a building built by King Jeongjo(正祖) in the backyard of Changdeokgung(昌德宮) Palace to enshrine the records of the previous kings. King Jeongjo enshrined his portrait here. And the Kyujanggakshin(奎章閣臣) took care of them. ‘Kyujanggak’ also served as a king’s library. For this reason, King Jeongjo kept the latest books in Kyujanggak. Since then, Kyujanggak has grown into an organization for the reformation of King Jeongjo. King Gojong continued to build houses with the same characteristics as ‘Kyujanggak’ in Changdeokgung(昌德宮) Palace and Gyeongbokgung(景福宮) Palace. Gwanmungak(觀文閣) and Jibokjae(集玉齋) were all houses that kept the portraits of the king. Also, these were the libraries that kept the latest books. King Gojong built Gwanmungak, a Western-style building, and Jibokjae, a Chinese- style building. This showed King Gojong’s will to enlighten. In this way, the foreign- style building that inherited ‘Kyujanggak’ connected the authority of the previous kings with the political orientation of King Gojong. Built during the Korean Empire(大韓帝國), Suokheon(漱玉軒) was the first Western- style building in Gyeongungung(慶運宮) Palace. This was also the building that succeeded ‘Kyujanggak’. Since then, many Western-style buildings have been built within Gyeongungung Palace. In addition, King Gojong enshrined a portrait of the emperor at the Punggyeonggung(豐慶宮) Palace in Pyongyang. The portrait of the emperor, produced in a traditional way, was enshrined in Pyongyang, a space that reveals the uniqueness of Korea through the history of Giza Joseon(箕子朝鮮). Through this, King Gojong wanted to have two capitals just like the modern western countries. In this way, King Gojong accepted the external form of Western civilization based on the tradition represented by the ‘Seonwang(先王)’. In this way, King Gojong wanted to show absolute imperial power. The king’s portrait and the building for the portrait symbolizes the king itself. From the time when King Gojong himself began to rule, he erected a building to enshrine his portraits. Through this, King Gojong showed his will to lead the operation of the state and for enlightenment. Eve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Empire, Gojong built the emperor’s portrait house. Through this, it was intended to show that the Korean Empire was equal to the modern Western state. At the same time, the people of the Korean Empire could see the divine emperor. However, fires continued to occur, politics was chaotic,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was unstable. However, Gojong built new buildings within the palace and built a new palace. Gojong continued to carry out civil works.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is was an appropriate response to the crisis. Excessive attention and expense for the emperor's status only fueled national chaos in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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