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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실증주의 사학의 계보

            임종권(Lim, Jong-Gwon)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2

            이 논문은 한국 실증주의 사학의 형성과정과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먼저 일제 역사학자들과 이들에게서 배운 한국인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근대 역사학인 랑케 실증주의 사학이 한국 역사학계에 수용되었으며 이들이 한국 역사학계를 주도해 오면서 역사연구의 주류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연유로 인하여 한국 역사학은 끊임없이 식민사관의 논란을 야기해 왔다. 그러므로 한국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가 주장한 바와 다르게 민족의 역사를 개별적이고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일제 역사가들이 랑케 실증주의 사학의 수용 과정에서 자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치적 이념에 따라 창안해 낸 소위 식민주의 사학의 역사관과 일맥상통 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아시아에서 패권확장과 조선의 식민화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적 기초가 절실했으며 이러한 정치적의 요구에 부응하여 일제 역사가들은 역사의 객관성과 과학성이란 이름으로 랑케 실증주의 사학을 변형하여 소위 ‘일제식 실증주의 사학’을 창안했다. 따라서 일제 식민통치 시기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에게 역사를 배웠던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일제식 실증주의 사학’을 한국 역사학계에 뿌리를 내리게 한 주역들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류가 아니라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역사관을 특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This thesis is on the character and making of Positive History in Korea. First, Modern History, Ranke’s Positive History had been accepted by Korean historians, who had leaned from historians of Japan empire, as it were an imperialist. So, these historians have been the mainstream of history studies in Korea and have taken lead the academic word of history. Hence, Korea history studies have provoked many disputes of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Therefore, the Positive History of Korea maintain to have to study a history of nation on the universal point of view, not individual and special in contrast with Rank"e view. The view of history like this and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that historians of Japan empire had made to answer the purpose of a politic ideology of imperialism have something in common. Japan empire was urgently needed a historical basis to establish the justification of colonization of Korea and supremacy in Asia, meeting the politic demands like this, historians of Japan empire builded up ‘the Positive History of Japanese style’ by transshaping Ranke’s Positive History in mame of objectivity and scientific characteristic. So, Korean historians who had learned the historical studies from colonialist historians of Japan in the period of colonization are encountered criticism to be lead role of a making the Positive History of Japanese style’ put down roots in Korea. Thus, it is said that Positive History in Korea has a characteristic of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not Rank’s view.

          • 독립운동가의 고대사 인식

            임찬경(Im, Chan-kyoung)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2

            본고에서는 우선 독립운동가들이 연구 및 저술한 역사학의 성격을 분석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역사를 연구 및 저술한 목적은 전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을 특별히 ‘독립운동사학’으로 명명하였다. 본고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독립운동가의 역사 적폐 청산 노력에 대해 검토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이라는 두 가지의 역사 적폐를 동시에 청산하고, 우리의 역사를 정립(正立)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적폐 청산 시도는 철저하게 좌절되었다. 본고에서는 그 좌절의 원인도 살펴보았다. 본고의 세 번째 부분은 독립운동가 고대사 인식의 계승에 관한 논의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독립운동가의 역사 인식 중에 우리가 반드시 계승해야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 계승할 부분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역사 적폐 청산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2017년에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 사학계의 적폐 청산은 어떻게 시도되어야 할지, 그 적폐 청산의 과제와 방법을 간략하게 검토해보았다. In this paper, first, I analyzed the character of History that independent activists have studied and written. The purpose of the independence activists’ research and writing of History is entirely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refore, I named the History of independence activists as ‘Independent movement History(History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particular. In the second part of this paper, I reviewed the efforts of the independence activist to liquidate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Independent activists tried to liquidate both the historical view subordinated to Chineseism and the historical view subordinated to colonialism as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at the same time tried to establish our right history. But the independence activists’ attempt to liquidate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was thoroughly frustrated. In this paper, I also looked at the cause of the frustration. The third part of this paper is the discussion about the succession of the recognition of the ancient history of the independence activists. What we can say for sure is that there is a part of the history awareness of the independence activist that we must inherit. In this paper, it is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succession to be mentioned, and it refers to the liquidation of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Finally, in Moon Jae-in Government Established in 2017, briefly explained how to try to liquidate the cumulative evils of Korean historical academia, reviewed the tasks and methods of liquidating the cumulative evils briefly.

          • 지리학과 역사학의 융합 관점에서 보는 역사학계의 문제점

            정암(Jung, Ahmg) 바른역사학술원 2020 역사와융합 Vol.- No.6

            최근 한사군 위치를 둘러싼 고대사 논쟁이 뜨겁다. 이 글에서는 『동북아역사지도』, 『국사교과서』, 『역사부도』, 『중국역사지도집』에 실려 있는 관련 지도를 선정해서 검토했다. 그 결과 한사군 위치가 한반도에 잘못 비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고조선 강역도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유는 일제의 일본인 어용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연역적 위치 비정을 역사학자들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이후 강단사학자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며, 나아가 카르텔로까지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극복한 사례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지리학자 김정호는 1차 사료에 입각해 갈석산 위치를 찾았고, 시아오 메이얀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고대요동)에 있음을 밝혔다. 이들은 한사군 문제에 접근하는 훌륭한 사례로 평가된다. Recently, the dispute over the location of Four Commanderies of Han, the colony of China in ancient Korean history is hot. In this article, we selected and reviewed the relevant maps in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atlas, history textbooks and its atlas. As a result, it became clear that the location of Four Commanderies of Han was incorrectly designated on the Korean peninsula, and that the territory of the Gojoseon was limited to Liaodong in China and northwestern regions in the Korean Penisula. The reason is because that Korean historians ignorantly accepted a position created deductively by Japanese scholars who toe the government line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and since then Korean university historians have followed it uncritically, and furthermore, it has developed into a cartel. However, there have been cases that have overcome this research attitude outside of history. Historical geographer Kim Jung-ho in Joseon Dynasty found the location of Galseok Mountain based on the first historic literature, and Xiao Meiyan revealed that Nagrang and Daebang Commanderies were located in Liaodong (ancient Liaodong in China), not on the Korean Peninsula. These are evaluated as excellent examples of approaching Four Commanderies of Han issue.

          • 단군신화 인식에 대한 역사적 고찰

            김명옥(Kim, Myung Ok)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3

            이 글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남 · 북한에서 단군신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식민지배이데올로기로서 일선동조론을 창안한다. 한편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 국체가 다른 나라의 영향 없이 유구한 존재로 형성되었다는 논리를 보증하기 위해 일선동조론을 비판하고 단군부정론을 만든다. 단군부정론은 두 가지다. 단군은 고려시대 불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신화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주몽전설의 이본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민족사학자들은 단군부정론을 비판하며 역사적 실체로서 단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북한은 1960년대 초에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단군신화도 연구되었다. 북한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단군신화를 인식했다. 그러나 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우리식 사회주의를 창안하면서 북한은 고조선의 중심을 평양으로, 고조선 건국시기를 30세기로 끌어올려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반면 남한의 강단사학계는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창안한 단군부정론을 그대로 계승했다. 단군신화가 주몽설화 이본이라는 설과 묘향산의 산신 연기설화 혹은 불교의 영향설을 그대로 추종한다. 한편 ‘단군의 역사성’이란 말로도 단군부정론을 호도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민족의 침략과 일제강점기처럼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단군을 중심으로 결집하는데, 이것이 단군의 역사성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단군신화가 국가의 위기 때마다 호명되어 전승되는 것을 ‘단군의 역사성’이라고 한다.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단군의 역사성’은 만들어진 단군신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즉 ‘단군신화 전승사’를 단군의 역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This paper investigated the awareness on the myth of Dangun in the South and North Korea during the colonial era and after the liberation. Pro-Japanese historians created the theory ‘common ancestry of Japanese and Koreans’ as the ideology of colonialization. Shiratori Kurakichi criticized the ‘common ancestry of Japanese and Koreans’ and created the Dangun denialism to support that the national constitution of Japan was formed as the immoral existence without any influence from other countries. Dangun denialism is classified into two assetions: assertion that Dangun was the myth made by the influence of Buddhism during Goryeo period; and assertion that Dangun was the different version of the Jumong tale. then, the nationalism historians criticized the Dangun denialism and started the research on Dangun as the historic existence. In early 1960s after liberation, the research on the hub and territory of Gojoseon started and in that process, the myth of Dangun was also investigated. North Korea recognized the myth of Dangun as the birth myth of Gojoseon. However, as the Korean-style socialism was generated with the collapse of socialistic bloc in 1990s, North Korea utilized the myth of Dangun for political purposes by insisting that the hub of Gojoseon was Pyeongyang and Gojoseon was founded in 30 A.D. On the contrary, the school historians in South Korea inherited the Dangun denialism created by Pro-Japanese historians without any reluctance. They followed the view that the myth of Dangun was the different version of the Jumong tale and the view that it was the guardian spirit tale of Myohyangsan mountain or influence of Buddhism. Meanwhile, Dangun denialism was mislead by the word ‘historicity of Dangun’. When Koreans were united around Dangun whenever the country and people came to a crisis including invasion by other countries during Goryeo and Joseon period and Japanese colonial rule, it was mislead as the ‘historicity of Dangun’. It was mentioned as ‘the historicity of Dangun’ that the myth of Dangun generated during the Goryeo period was summoned whenever the country was in danger and inherited. The ‘historicity of Dangun’ insisted by the school historians is the ‘transmission history of the myth of Dangun’, that is, ‘how the myth of Dangun created during the Goryeo period was recognized depending on the periods’.

          • 이병도의 행적과 그의 역사관

            김삼웅(Kim, Sam-Woong) 바른역사학술원 2017 역사와융합 Vol.1 No.1

            이병도는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서 일종의 성역이 되었다. 이병도가 성역이 된 것은 그의 역사관이나 행적이 존경할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사회 각계에 포진한 그의 제자들이 그를 우상으로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관과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과연 한국 사회에 한 성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 후기 노론의 대표적 가문인 우봉이씨로 태어나서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들어갔다. 처음 서양사를 전공하려다가 요시다 도오고(吉田東伍))와 쓰다소우기치(津田左右吉)의 영향을 받아 조선사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후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의 관점에 맞춰 한국사 전체를 왜곡하는 작업에 종사했다. 이병도는 이런 친일전력 때문에 해방 후 진단학회에서 제명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반공정책을 추진하고 1950년 6 · 25 한국전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를 뒤덮으면서 기사회생해 학계의 원로로서 승승장구했다. 이병도는 반공을 명목으로 수많은 민주 인사까지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의 묘갈명을 썼다. 이 묘갈명에서 이병도는 “간첩오렬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라고 2만5천명의 사람을 죽인 것을 큰 업적인 것처럼 칭송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은 4 · 19혁명으로 붕괴되었지만 그 전리품은 보수정치인들이 차지하면서 이병도는 허정 과도정권에서 4개월간 교육부 장관을 맡았다. 이때 그는 학생들이 정치민주화와 친일파 청산으로 나가는 것을 극력 저지했고, 교원노조 활동을 극력 방해했다.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병도는『최고회의보』창간호에 「5 · 16군사혁명의 역사적 의의」라는 글을 기고하여 쿠데타를 합리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1977년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의 사주를 받아 사육신 유응부를 김문기로 대체하려 했고, 자신의 집안친척인 이완용의 관 뚜껑을 불살라 버리는 반 역사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20년 가까이 학술원 원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는 8년 동안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했다. 평생을 친일, 친독재로 일관한 이병도가 현재도 국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 국사학계가 왜 외국과 달리 국민들의 배척을 받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Lee Byung-do is treated as a sacred scholar in the Korean academe of history not by his scholastic achievements but by the idolization conducted by his academic descendents who formed a major influential lineup in diverse areas of Korean socie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valuate Lee Byungdo’s personal records and view of history to determine whether or not he is deserved for a sacred scholar. Lee was born as a scion of well known Woobong clan which was a representative family of Noron(老論), the central political force in late Joseon dynasty. He went on literature department of Waseda university. Although he intended to major in western history, he studied Joseon history due to influences from Yosida Dogo(吉田東伍) and Theuda Shogichi(津田左右吉). After graduation from the university he became a member of the Redaction Committee for History of Joseon which was under direct control of the Japanese vice-regal office, and participant in the projet to distort the history of Joseon in line with the guidelines made by the office. Lee was expelled from the Jindan Academic Association due to his pro- Japanese records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in 1945. However, he revived almost from death and made a long march flushed with senior scholar. His revival was attributable to overwhelmed anti-communism movement based on the policy of Lee Seung-man administration and the Korean war broken out in 1950. He admired Kim Chang-ryong who was the chief of counter intelligence corps of Korean army by writing epitaph for him. Kim was known to accuse many democratic figures of communists and massacred them. On the epitaph Lee praised Kim by stating that Kim eradicated 25,000 communists through arresting or killing suspects. Lee took the position of minister of education for four months in the Heo Jung’s interim government after the collapse of Lee Suung-man administration due to the April Revolution in 1960. During his tenure he blocked student movements toward political democratization and winding up pro-Japanese force, and interrupted activities of teacher’s union with an all-out effort. Lee contributed to justify the military coup d’tat in 1961 by writing an article under the title of ‘On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May military revolution’ on the first issue of 『Supreme Military Council Report』. He did not hesitate to conduct subversive activities contrary to historical facts: he attempted to replace Yoo Yeung-bu who is the one of four historic loyal subjects condemned to death with Kim Mun-gi, and burned the lid of his relative Lee Wan-yong’s coffin. He had been the chairman of the Council of Korean Academy for over twenty years, and a member of the Consultation Committee for State Affairs for eight years since Jeon Du-whan’s administration. The fact that Lee is treated as a luminary in Korean academic world of history in spite of his lifetime records of pro-Japanese and pro-dictatorship explains the reason why Korean people reject academic world of history contrary to foreign countries.

          • 서양사와 일본사의 융합으로 보는 일제 식민사관의 탄생 - 식민사관과 랑케 실증주의 사학 -

            임종권(Lim, Jong-Gwon) 바른역사학술원 2019 역사와융합 Vol.- No.5

            일본제국은 랑케 실증주의 사학을 수용하면서 랑케가 『강국론』에서 설명한 프로이센처럼 강국의 조건으로 민족의 통합과 국민의 애국적 정신, 즉 ‘도덕적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오랫동안 지방 세력들에 의해 분열되어 온 일본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민족의 통합이 국가의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한 랑케의 『강국론』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확장하려 한 일본제국의 정책에 부합한 역사 논리였다. 특히 랑케는 강국이 약소국을 지배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힘에만 의존하기보다 보편적인 원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 점에 주목한 일제 역사가들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보편적 원리를 창안해 내는 데 주력했다. 제국주의 정치와 문화는 식민지 사람들을 미개한 종족으로 인식하여 이들을 개화시키기 위해 식민지배가 정당하다는 제국주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종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무엇보다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일본제국은 첫째, 일제는 제국의 패권을 확장하고 조선 식민화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조선 민족의 역사를 미성숙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조선이 문화적으로 중국 등 강국에 종속된 열등한 민족이고 또한 역사적 발전과정도 겪지 못했다고 주장하게 이르렀다. 일제가 조선의 우수한 역사의 발전단계를 인정하지 않고 아예 역사적 사실에서 제외시키거나 혹은 사실을 왜곡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둘째, 일제는 한반도가 고대로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를 왜곡해야 했다. 특히 조선의 식민통치를 존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원리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이나 혹은 ‘내선일체’, ‘대동아 공영’ 그리고 ‘신사참배’라는 정치적, 종교적 원리를 통해 식민지배정책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렇게 일제 역사가들은 랑케의 실증주의 사학의 개념을 제국주의 논리에 맞게 변형하여 이를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와 태평양 등 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의 확대정책을 위한 역사적 근거로 삼았다. 결국 왜곡된 랑케 실증주의 사학의 역사관은제국주의의 이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 인식 속에 수용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제식 실증주의 사학’ 이며 식민사관의 본질이다. This article is a study on the formation of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by historians of Imperial Japan. When The Imperial Japan accepted Ranke’s Empirical History, they had recognized to be necessary the Ethical energy as a condition of strong country like Prussia, as Ranke mentioned in『Die großen Mächte』and『Politisches Gespräch』. For long time, in historical situation of Japan that had been divided by local influences, Ranke had stressed That the combination of nations was a source of country power in『Die großen Mächte, it had a historical reasoning, so, this had coincided with imperial policy of Japan that had wanted to extend the hegemony. Ranke argued that strong country had to make an universal principle for a ruling a small and weak nation, not to rely on only power of country. So, Historians of Imperial Japan devoted themselves to make an universal principle to rule Chosun. The Imperial politics and culture has been based on the reason that the colonization was just, because Imperialism considered colonial people as an uncivilized race. Like this, The Imperialism basted on a culture and a historical sense of one´s superiority had got hung on a racial prejudice. Therefor, Imperial Japan had to created a wrong history that the history of Chosun had been undeveloped for a justification of the colonization of Chosun. And Imperial Japan had mentioned that Chosun had not a historical development and culturally, was a inferior nation to be subordinated on China. On context like this, Imperial Japan distorted historical facts not to concede the remarkable history of Chosun. Imperial Japan had to distort ancient history of Chosun because of proving to be ruled by Japan from ancient time. In particular, Imperial Japan had needed a political principle to continue to exist the colonial rule of Chosun. So, Imperial Japan had expanded the hegemony by the political and religious principles as 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the Naeseon Ilche or ‘Korea and Japan to be One’s policy and shinto worship. By doing like this, Historians of Imperial Japan got a historical base on a expansion policy of hegemony to Chosun, China, Asia and the Pacific, transforming the idea of world history of Ranke into a reasoning of Imperialism. Ranke’s idea of world history distorted by Imperial Japan, had became an ideology of the Imperialism of Japan, but also a historical recognition to understand the world. This was the essence of colonial view of history and the Empirical history of Japan style.

          •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의 위치

            이덕일(Lee, Deok-Il) 바른역사학술원 2017 역사와융합 Vol.1 No.1

            한사군 중에서도 낙랑군의 위치는 오랜 쟁점이었다. 낙랑군 조선현을 어디로 비정하는가에 따라서 한국 고대사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낙랑군 조선현을 지금의 평양일대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 및 조선의 일부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주장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의 다른 유학자들은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역사학을 전공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두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하는 것은 낙랑군이 존재하던 시기에 쓰여진 당대의 역사서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낙랑군 조선현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게 된 것은 12세기 경 고려 후기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은나라 사람 기자가 주나라 무왕을 피해 간 곳을 지금의 평양으로 여긴데서 비롯되었다. 기자는 서기 전 12세기 사람이니 사후 2400여년 후에 평양에 온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기자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섰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인 현재의 통설이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는 기자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선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고, 위만 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선 것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군(郡) 자체가 다르다고 서술하고 있다. 중국의 여러 고대 사료들은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낙랑군 조선현은 명 · 청 때의 영평부, 즉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북쪽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 70리에 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북쪽에 있었고, 그 북쪽에 장성이 있었다.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평양에 있지 않았다. The location of Nakrang-gun(樂浪郡), one of four Han colonial districts, has been the center of controversy because the early Korean history is largely dependent on the true location of Joseon-hyoun(朝鮮縣) which was belonged to Nakrang-gun. China asserts that Joseon-hyoun was located near modern Pyoungyang of North Korea based on the writings of several toadfish confucianists of Joseon dynasty and the scenario which had been made by the vice-regal office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n force. Meanwhile other confucianists of late Joseon dynasty claimed that Nakrang-gun was a part of ancient Yodong(遼東). This view was succeeded by Korean patriots who were also historian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e truth of these two claims regarding the location of Joseon-hyoun should be resolved by history books written in the period when Nakrang-gun was existed. Modern Pyoungyang area was considered to be the location of Joseonhyoun of Nakrang-gun since the 12th century in Koryo dynasty by toadish confucianists. They regarded modern Pyoungyang as the place where Gija(箕子) of Eun(殷) dynasty had settled down to keep away from the king Mu(武) of Ju(周) dynasty. This recognition indicates that Gija was considered to arrive at Pyoungyang in 2400 years later since he had left his homeland in the BC 12th century, The common view among Korean historians maintains that the capital of Gija Joseon was replaced with the capital of Wiman(衛滿) Joseon. However, the geographical details of Hanseo(漢書) states that capitals of Gija and Wiman Joseon are two different places: the capital of Gija Joseon was located at Joseon-hyoun of Nakrang-gun and the capital of Wiman Joseon was located at Heomdog(險瀆)-hyoun of Yodong-gun. Chinese history books state with consistency that Nakrang-gun was located inancient Yodong area. These books specified further that the Youngpyoung(永平)-bu of Myoung(明) and Cheong(淸) dynasty, Norong(盧龍)-hyoun in modern China, was the Joseon-hyoun of Nakrang-gun. They also indicated that there is the Great Wall at 30km north to the Norong-hyoun. These records are clear evidence that the Joseon-hyoun of Nakrang-gun was not located at the modern Pyoungyang region.

          •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 황제(黃帝) 및 전욱(顓頊)에 관해서

            이덕일(Lee, Deok-Il) 바른역사학술원 2020 역사와융합 Vol.- No.6

            중국 상고사는 대부분 동이족(東夷族)의 역사다.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동이족의 역사를 지우는 대신 하족(夏族), 즉 한족(漢族)의 중국사를 만들려고 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삼황(三皇)을 역사의 시조로 생각했는데, 이들이 모두 동이족이기 때문에 사마천은 삼황을 지우고 오제(五帝)로 시작하는 계보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오제의 시작을 황제(黃帝)로 삼았다. 황제도 원래는 동이족이었지만 동이족 수령인 치우(蚩尤)와 싸웠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면서 황제를 동이족과 싸운 하족(夏族)으로 변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의 역사 인식 속에 황제는 삼황의 세 번째 군주이고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가 오제의 첫 군주였는데, 황제를 하족으로 대체한 사마천은 동이족임이 너무 명확한 소호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제의 제위를 소호의 조카 전욱이 이은 것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역사를 조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기』 삼가주석(三家註釋)의 주석자들은 사마천이 삼황을 삭제한 사실이나 오제에서 소호를 배제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사기』만 잘 연구해도 사마천이 지우려고 했던 삼황과 오제가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찾을 수 있다. 오제의 마지막 순(舜)에 대해 맹자가 동이족이라고 명시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사기』를 통해 하족의 역사를 만들려고 했던 사마천의 의도는 오랫동안 성공을 거두어왔다. 그러나 이제 『사기』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사마천의 이런 의도는 무위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인류사의 중요한 자산이지만 정치적 목적에 의해 민족계보를 조작한 행위는 비판 받지 않을 수 없다. 사마천의 『사기』와 그 주석서 및 여러 사료를 통해 민족사의 계통을 다시 연구해야 할 시점이다. The ancient history of China is mainly about the history of Eastern barbarians. Sima Qian attempted to delete the history on Eastern barbarians but create the history of China around the Han Chinese in his book “Shiji(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Chinese considered three emperors as their progenitor in the ancient times. Since all of them were Eastern barbarians, Sima Qian deleted three emperors and created the genealogy started with five emperors. Then, he made Huang Ti as the first of five emperors. While Huang Ti originally came from the Eastern barbarian tribe, Sima Qian emphasized that Huang Ti fought against Chiyou(蚩尤), the head of Eastern barbarian tribe and tried to alter the origin of Huang Qi to Xiazu tribe(夏族) fighting against the Eastern barbarian tribe. In the historic awareness of ancient Chinese, Huang Ti was the third emperor among three emperors and his son Shaohao(少昊) was the first emperor of five emperors. Sima Qian who altered the origin of Huang Ti to Xiazu tribe couldn’t help deleting Shaohao whose origin was definitely the Eastern barbarian tribe. Then, he set up the circumstances that Huang Ti turned over his throne to the nephew of Shaohao “Zhuanxu.” However, it is not easy to manipulate the history. The commentators in Commentaries by Three Experts(三家註釋) in Shiji raised the objection against Sima Qian because of the deletion of three emperors or exclusion of Shaohao in five emperors. Moreover, only thorough analysis on Shiji enables everyone to recognize that three emperors and five emperors come from Eastern barbarian tribe, the fact which Sima Qian tried to delete. It is definitely identified by the description by Mencius who declared that Shun, the last emperor of five emperors, came from the Eastern barbarian tribe. The intention of Sima Qian who tried to create the history of Xiazu tribe through his book Shiji was successful for a long time. However, as his book Shiji was more thoroughly investigated, such intention of Sima Qian started to be meaningless. While Shiji by Sima Qianis the important asset in the human history, it can’t help being criticized the attempt to manipulate the ethnic genealogy for political purposes. Now, it’s time to investigate the stem of ethnic history on the basis of Shiji by Sima Qian, the commentaries on it and a wide range of historic documents.

          • 요서 홍산문화와 환웅 조이족의 귀속관계

            이찬구(Lee, Chan Goo)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3

            이 글은 홍산 문화의 창조주체가 어느 종족인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흔히 홍산 문화를 대표하는 옥기玉器는 온 인류의 보배라고 한다. B.C. 3~4000년 전홍산 옥기를 지금도 우리가 원형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옥문화가 지닌 위대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필자는 옥기를 분석함에 있어서 홍산문화 중에서 우하량牛河梁 유적에 주목했다. 여기에서 나온 옥기는 시기적으로 우리역사에서 단군이전인 환웅시대에 해당한다. 필자는 우하량유적 등 최소한 5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부엉이(玉鴞)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시에 토템으로 숭배된 것에 주목하였다. 이 부엉이는 『산해경』에서 말한 그 수리부엉이(雒)로 해석해 보았다. 또 『단군세기』에는 『산해경』의 웅상雄常을 환웅의 웅상나무로 보고 있다. 일찍이 중국학자 고힐강顧詰剛이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큰 종족大族’이란 환웅의 새토템족인 조이족鳥夷族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이민李民도 홍산문화는 동북의 선민先民인 조이 문화로 보았다. 오늘날 한국의 솟대나 서양의 토템폴에서 그러한 새토템의 잔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이족은 새토템의 동이족이란 뜻을 지닌다. 따라서 홍산옥기의 부엉이가 곧 환웅의 ‘웅새’라고 보려는 것이다. 환웅은 수리부엉이 새를 토템으로 삼은 ‘태양숭배를 계승한 조이족’이었다. 환웅 자신이 요서遼西의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친 조이족의 최고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홍산문화는 환웅의 조이족에 부분적으로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환웅을 수리부엉이 새를 토템으로 한 종족의 지도자로 새롭게 이해할 때 한국의 상고사上古史가 확장되라고 본다. 종전의 서자부 환웅, 또는 막연한 천신天神 환웅, 곰족 웅녀의 상대방인 환웅에서 탈피하여 더 넓고 독립적인 환웅상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The study is to elucidate what clan created Hungshan(Hongsan) Culture(紅山文化) in reality. Jade tools(玉器), the treasure of all history, is widely said to represent Hungshan Culture. The Jade Culture which originated around at B.C. 3000 through B. C. 4000 has such a integrity that we can now appreciate the Hungshan Jade as it was and as it has been. This article focused on Niuheliang(牛河梁) historic sites among Hungshan Culture in the process of analyzing Jade tools. The times of Niuheliang Jade represents those of Hwanung(桓雄) antecedent to Dangun(檀君) in Korean history. The researcher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y worshiped Owl(玉鴞) as totem which was simultaneously excavated at least five regions including Niuheliang historic sites. The Owl can be interpreted as the Bubo bubo in Shanhaijing(山海經). Dan-gun segi(檀君世紀) says Ungsang(雄常) in Shanhaijing stands for Hwangung tree(雄常樹). At an early time Chinese historian Gu Jiegang(顧詰剛) pointed out that ‘Great-clan’ vanished from history is Hwangung’s Bird-totem group, Jo-Yi. Li min(李民) from China also believed that Hungshan Culture is Jo-Yi Culture(鳥夷文化) of ancient people in northeastern Asia. Bird-toem traces can be caught at both Korea Sot-Dae and occidental Totem Pole. It is repeatedly said that Jo-Yi clan(鳥夷族) means Bird-Totem of Dong-Yi(東夷). Accordingly the owl of Hungshan Jade can be regarded as the ‘Ung-Bird’ of Hwanung. Hwanung was Sunworship-successor Jo-Yi Clan that took Bubo bubo Bird as their Totem. It can be accepted that Hwanung was a Jo-Yi supreme leader who exerted wide influence on the whole Liaoxi. Consequently Hungshan Culture belongs to Hwanung’s Jo-Yi. Korea Ancient History can widen and deepen itself after it is understood that Hwanung or the great clan leader, took Bubo bubo Bird as their Totem. The study can be expected to accelearte to pave the way for more comprehensive and more independent Hwanung, apart from the images of previous Seoja-Bu Hwanung, inexplicit God Hwanung, the counterpart of Bear-totem group Ungnye(熊女).

          •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 考)」 번역 및 비판

            이덕일(Lee, Deok-Il)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2

            조선총독부는 한국 강점 후 한국사를 반도사의 틀로 가두는 역사 왜곡에 나섰다. 한국사에서 대륙사와 해양사를 삭제해서 반도사로 축소한 후 그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사군=한반도설’의 핵심은 ‘낙랑군=평양설’이었는데, 일본인 학자들은 이를 위해서 여러 논문을 쓰고 고고 유적·유물을 조작했다.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한 주요 논문의 하나가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 考:1910년)」이다. 이나바는 이 논문에서 낙 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논리는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로 불렸던 이병도의 『한국고대사 연구(1976)』에 그대로 채용되었다. 또한 동북아역사재단은 국고 47억원을 들여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하면서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표기했다. 2015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동북아역사재단에 그 근거를 물었을 때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의 148쪽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나바 이와기치는 위 논문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황해도 수안군이고, 진(秦)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군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이나바는 이런 사실이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志)』에 나오니 ‘의심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한서 지리지』에는 황해도 수안군은커녕 한반도에 대한 기술 자체가 없다. 모두 이나바 이와기치가 한사군을 한반도에 있던 것으로 왜곡하기 위해서 만든 창작인데, 일체의 사료적 근거가 없는 가짜 역사가 지금까지도 한국 고대사학계에 그대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started to distort the history restricting the Korean history only to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forcible occupation of Korean peninsula.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restricted the Korean history into the Korean peninsula by deleting the history of Korea in the continent and the ocean and insisted that there were Four Commanderies of Han, the colory of China, on the north and the Japanese Headquarter in Imna, the colony of Japan on the south. The core of the insistence ‘Four Commanderies of Han were the Korean peninsula’ was that Nakrang-gun was Pyeongyang. For such insistence, Japanese scholars produced several theses and manipulated historic sites and relics from the ancient times. One of major theses insisting that ‘Nakrang-gun was Pyeongyang’ was the “Study on the Eastern End of Jinjangseong Fortress and Wangheomseong Fortrss” by Inaba Iwakichi(1910). In his study, Inaba insisted that Suseong-hyeon, Nakrang-gun was the Suangun, Hwanghae-do. His theory was adopted in the “Study on the Ancient History of Korea(1976)“ by Lee Byung-do who was mentioned as the authority in the Korean history as it was. Furthermor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marked ‘Suseong-hyeon, Nakrang-gun’ as ‘Suan-gun, Hwanghae-do’ as producing the ‘Northeast Asian History Map’ with the national treasury of 4.7 Billion KRW. When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asked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to present the reason on such marking on the map in 2015, the Foundation pointed out the page 148 in the ‘Study on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by Lee Byung-do as the proof. In the thesis, Inaba Iwakichi insisted that Suseong-hyeon, Nakrang-gun was Suan-gun, Hwanghae-do and the eastern end of the Great Wall made during the Qin dynasty started from Suan-gun, Hwanghae-do. Inaba argued that his thesis admitted no doubt because it was written on the “Geography” section in the Book of Han. However, the “Geography” section in the Book of Han never describe anything about the Korean peninsula as well as Suan-gun, Hwanghaedo. Inaba created the story in his thesis to distort the history as if Four Commanderies of Han were on the Korean peninsula. The false history without any historical basis at all has been accepted as it was in the academic circle on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even until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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