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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학과 역사학의 융합 관점에서 보는 역사학계의 문제점

        정암 바른역사학술원 2020 역사와융합 Vol.- No.6

        최근 한사군 위치를 둘러싼 고대사 논쟁이 뜨겁다. 이 글에서는 『동북아역사지도』, 『국사교과서』, 『역사부도』, 『중국역사지도집』에 실려 있는 관련 지도를선정해서 검토했다. 그 결과 한사군 위치가 한반도에 잘못 비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고조선 강역도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유는 일제의 일본인 어용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연역적 위치 비정을 역사학자들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이후 강단사학자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따랐기 때문이며, 나아가 카르텔로까지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극복한 사례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지리학자 김정호는 1차 사료에 입각해 갈석산 위치를 찾았고, 시아오 메이얀은 낙랑군과 대방군이한반도가 아니라 요동(고대요동)에 있음을 밝혔다. 이들은 한사군 문제에 접근하는 훌륭한 사례로 평가된다.

      • KCI등재후보

        이병도의 행적과 그의 역사관

        김삼웅(Sam-Woong Kim) 바른역사학술원 2017 역사와융합 Vol.1 No.1

        이병도는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서 일종의 성역이 되었다. 이병도가 성역이 된것은 그의 역사관이나 행적이 존경할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사회 각계에 포진한 그의 제자들이 그를 우상으로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관과행적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과연 한국 사회에 한 성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땅한 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 후기 노론의 대표적 가문인 우봉이씨로 태어나서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들어갔다. 처음 서양사를 전공하려다가요시다 도오고(吉田東伍))와 쓰다소우기치(津田左右吉)의 영향을 받아 조선사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후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의 관점에 맞춰 한국사 전체를 왜곡하는 작업에 종사했다. 이병도는 이런 친일전력 때문에 해방 후 진단학회에서 제명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반공정책을 추진하고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를 뒤덮으면서 기사회생해 학계의 원로로서 승승장구했다. 이병도는 반공을 명목으로 수많은 민주 인사까지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의 묘갈명을 썼다. 이 묘갈명에서 이병도는 “간첩오렬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라고 2만5천명의 사람을 죽인 것을 큰 업적인 것처럼 칭송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붕괴되었지만 그 전리품은 보수정치인들이 차지하면서 이병도는 허정 과도정권에서 4개월간 교육부 장관을 맡았다. 이때 그는 학생들이 정치민주화와 친일파 청산으로 나가는 것을 극력 저지했고, 교원노조 활동을 극력 방해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병도는『최고회의보』창간호에 「5·16군사혁명의 역사적 의의」라는 글을 기고하여 쿠데타를 합리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1977년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김재규의 사주를 받아 사육신 유응부를 김문기로 대체하려 했고, 자신의 집안친척인 이완용의 관 뚜껑을 불살라 버리는 반 역사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20년 가까이 학술원 원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는 8년 동안 전두환 정권의국정자문위원을 역임했다. 평생을 친일, 친독재로 일관한 이병도가 현재도 국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 국사학계가 왜 외국과 달리 국민들의 배척을 받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Lee Byung-do is treated as a sacred scholar in the Korean academe of history not by his scholastic achievements but by the idolization conducted by his academic descendents who formed a major influential lineup in diverse areas of Korean socie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valuate Lee Byungdo’s personal records and view of history to determine whether or not he is deserved for a sacred scholar. Lee was born as a scion of well known Woobong clan which was a representative family of Noron(老論), the central political force in late Joseon dynasty. He went on literature department of Waseda university. Although he intended to major in western history, he studied Joseon history due to influences from Yosida Dogo(吉田東伍) and Theuda Shogichi(津田左右吉). After graduation from the university he became a member of the Redaction Committee for History of Joseon which was under direct control of the Japanese vice-regal office, and participant in the projet to distort the history of Joseon in line with the guidelines made by the office. Lee was expelled from the Jindan Academic Association due to his pro- Japanese records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in 1945. However, he revived almost from death and made a long march flushed with senior scholar. His revival was attributable to overwhelmed anti-communism movement based on the policy of Lee Seung-man administration and the Korean war broken out in 1950. He admired Kim Chang-ryong who was the chief of counter intelligence corps of Korean army by writing epitaph for him. Kim was known to accuse many democratic figures of communists and massacred them. On the epitaph Lee praised Kim by stating that Kim eradicated 25,000 communists through arresting or killing suspects. Lee took the position of minister of education for four months in the Heo Jung’s interim government after the collapse of Lee Suung-man administration due to the April Revolution in 1960. During his tenure he blocked student movements toward political democratization and winding up pro-Japanese force, and interrupted activities of teacher’s union with an all-out effort. Lee contributed to justify the military coup d’tat in 1961 by writing an article under the title of ‘On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May military revolution’ on the first issue of 『Supreme Military Council Report』. He did not hesitate to conduct subversive activities contrary to historical facts: he attempted to replace Yoo Yeung-bu who is the one of four historic loyal subjects condemned to death with Kim Mun-gi, and burned the lid of his relative Lee Wan-yong’s coffin. He had been the chairman of the Council of Korean Academy for over twenty years, and a member of the Consultation Committee for State Affairs for eight years since Jeon Du-whan’s administration. The fact that Lee is treated as a luminary in Korean academic world of history in spite of his lifetime records of pro-Japanese and pro-dictatorship explains the reason why Korean people reject academic world of history contrary to foreign countries.

      • KCI등재후보

        포스트(Post) 동북공정, 중국역사교과서 고대 한반도북부 속국 표기 고찰 -한반도 북부는 漢, 魏, 晉 영역인가? -

        이완영 바른역사학술원 2023 역사와융합 Vol.- No.16

        ‘통일적 다민족국가론(統一的 多民族國家論)’을 바탕으로 진행된 동북 3 성에 대한 동북공정은 단순한 고대 역사영역을 넘어 한국의 역사, 문화와 영토영역으로 확대되어 중화역사로의 속국사화(屬國史化)가 가속화 되고 있다. 이는 남북한과의 영토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동안 동북공정은 언론을 통해 주로 고구려나 발해, 부여 역사를 중국 속국사로 왜곡한 것 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2022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복과 김치가 중국의 문화로 소개되는 것을 동북공정의 일면으로 알고 있다. 최근 신중화주의(新中華 主義)에 의해 정립된 동북공정 역사논리는 중국의 국정역사교과서에 그대로반영되어 기술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중국 국정교과서는 고대 역사의 한반도북부는 한(漢), 위(魏), 진(晉)의 역사영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최근 중국의 국정 교과서에 기술된 한국의 고대역사에 한반도북부영역이 중국의 속국사 영역으로 표기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논리가 나온 배경을 살펴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고자 한다. 동북공정에 관한 기존의 국내의 연구는 외부로 도출된 문제점에 집중된 경향이 있다. 동북공정으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부여 영역을 중국의 속국으로 주장할 수 있는 중심논리는 “한반도 평양 낙랑군설”이다. 이는 한국학계에서그동안 주장해온 논리이다. 본고에서는 한(漢)의 낙랑군영역을 넘어 위(魏), 진(晉)의 역사영역으로 설정된 한반도 북부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바로 잡기위해서 한국정부와 사학계가 동북공정을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과제를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고수해온 “한사군, 낙랑군의 평양 위치 비정의 전면 재검토”와 동북공정 지도에 대응하여 올바른 한국사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한국 고대역사지도집 발간”, 그리고 일맥상통한 중국 동북공정과 일제조선사편수회의 반도사관을 제거한 “국사개정(國史改正)”안이 그것이다. Chinese Northeast Project for three Northeastern provinces on the basis of the unified multi-ethnic state theory was expanded to the history, culture and territory of Korea beyond the simple ancient history and has been accelerating the forgery of Chinese history that the territories around China were the subject countries of China. Such movement has high possibility to create the diplomatic issues on the territory against South and North Korea. It was widely known up to now that Northeast Project distorted mainly the history of Goguryeo, Balhae or Buyeo to the history of subject countries of China through media. Moreover, introduction of Hanbok and Kimchin in 2022 Beijing Olympics as a part of Chinese culture is also a part of Northeast Project. Reasoning of Northeast Project on the history established by the new Sinocentrism was reflected and described on the government designated history textbook of Korea as it was. The government designated textbook of China used in these days marked the northern region of Korean peninsula in the ancient history as the territory of Han, Wei and Jin dynasty. This study investigated the background of reasoning above by analyzing the contents of the government designated textboom of China describing the northern region of Korean peninsula in the ancient times as the territory of subject countries of China, and discussed the approach to solve the issue above. The existing researches on Northeast Project in Korea and abroad tended to focus on the clearly exposed issues. Reasoning for insisting the territories of Gojoseon, Goguryeo, Balhae and Buyeo as the subject countries through Northeast Project is the ‘insistence that Pyeongyang in Korean peninsula was Nakrang-gun’. It’s the reasoning that has been continuously insisted by the academic world of Korea. For correcting the history textbook of China describing the northern region of Korean peninsula as the territory of Nakrang-gun of Han dynasty and furthermore, the territory of Wei and Jin dynasty as the territory of Korean peninsula, this study suggested the practical tasks for Korean government and the historical studies world of Korea to solve the issues of Northeast Project. The suggestions are ‘complete review on the location of Hansagun and Nakrang-gun in Pyeongyang’, ‘publication of Korean ancient history map’ that can acknowledge the accurate Korean history to the world against the Northeast Project map, and ‘revision of national history book’ eliminating Northeast Project of China and the peninsula historical view by Korean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which have a thread of connection each other.

      • 단군신화 인식에 대한 역사적 고찰

        김명옥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3

        이 글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남·북한에서 단군신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식민지배이데올로기로서 일선동조론을 창안한다. 한편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일본 국체가 다른 나라의 영향 없이 유구한 존재로 형성되었다는 논리를 보증하기 위해 일선동조론을 비판하고 단군부정론을 만든다. 단군부정론은 두 가지다. 단군은 고려시대 불교의 영향을 받아만들어진 신화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주몽전설의 이본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민족사학자들은 단군부정론을 비판하며 역사적 실체로서 단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북한은 1960년대 초에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단군신화도 연구되었다. 북한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단군신화를 인식했다. 그러나 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우리식 사회주의를 창안하면서 북한은 고조선의 중심을 평양으로, 고조선 건국시기를 30세기로 끌어올려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반면 남한의 강단사학계는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창안한 단군부정론을 그대로계승했다. 단군신화가 주몽설화 이본이라는 설과 묘향산의 산신 연기설화 혹은불교의 영향설을 그대로 추종한다. 한편 ‘단군의 역사성’이란 말로도 단군부정론을 호도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민족의 침략과 일제강점기처럼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단군을 중심으로 결집하는데, 이것이 단군의 역사성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단군신화가 국가의 위기 때마다 호명되어 전승되는 것을 ‘단군의 역사성’이라고 한다.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단군의 역사성’ 은 만들어진 단군신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즉 ‘단군신화 전승사’를 단군의 역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한국 실증주의 사학의 계보-식민사관과 상관성

        임종권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2

        이 논문은 한국 실증주의 사학의 형성과정과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먼저 일제역사학자들과 이들에게서 배운 한국인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근대 역사학인 랑케실증주의 사학이 한국 역사학계에 수용되었으며 이들이 한국 역사학계를 주도해오면서 역사연구의 주류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연유로 인하여 한국 역사학은끊임없이 식민사관의 논란을 야기해 왔다. 그러므로 한국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가 주장한 바와 다르게 민족의 역사를 개별적이고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일제 역사가들이 랑케 실증주의 사학의 수용 과정에서 자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치적 이념에 따라 창안해 낸 소위 식민주의 사학의 역사관과 일맥상통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아시아에서 패권확장과 조선의 식민화의 정당성을 확립하기위해 역사적 기초가 절실했으며 이러한 정치적의 요구에 부응하여 일제 역사가들은 역사의 객관성과 과학성이란 이름으로 랑케 실증주의 사학을 변형하여 소위 ‘일제식 실증주의 사학’을 창안했다. 따라서 일제 식민통치 시기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에게 역사를 배웠던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일제식 실증주의사학’을 한국 역사학계에 뿌리를 내리게 한 주역들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류가 아니라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역사관을 특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KCI등재후보

        독립운동가의 고대사 인식

        임찬경(Chan-kyoung Im)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2

        본고에서는 우선 독립운동가들이 연구 및 저술한 역사학의 성격을 분석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역사를 연구 및 저술한 목적은 전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한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을 특별히 ‘독립운동사학’으로명명하였다. 본고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독립운동가의 역사 적폐 청산 노력에 대해 검토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이라는 두 가지의 역사 적폐를 동시에 청산하고, 우리의 역사를 정립(正立)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적폐 청산 시도는 철저하게 좌절되었다. 본고에서는 그 좌절의 원인도 살펴보았다. 본고의 세 번째 부분은 독립운동가 고대사 인식의 계승에 관한 논의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독립운동가의 역사 인식 중에 우리가 반드시 계승해야할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 계승할 부분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역사 적폐 청산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2017년에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사학계의 적폐 청산은 어떻게 시도되어야 할지, 그 적폐 청산의 과제와 방법을간략하게 검토해보았다. In this paper, first, I analyzed the character of History that independent activists have studied and written. The purpose of the independence activists’ research and writing of History is entirely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refore, I named the History of independence activists as ‘Independent movement History(History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particular. In the second part of this paper, I reviewed the efforts of the independence activist to liquidate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Independent activists tried to liquidate both the historical view subordinated to Chineseism and the historical view subordinated to colonialism as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at the same time tried to establish our right history. But the independence activists’ attempt to liquidate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was thoroughly frustrated. In this paper, I also looked at the cause of the frustration. The third part of this paper is the discussion about the succession of the recognition of the ancient history of the independence activists. What we can say for sure is that there is a part of the history awareness of the independence activist that we must inherit. In this paper, it is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succession to be mentioned, and it refers to the liquidation of the cumulative evils in History. Finally, in Moon Jae-in Government Established in 2017, briefly explained how to try to liquidate the cumulative evils of Korean historical academia, reviewed the tasks and methods of liquidating the cumulative evils briefly.

      • KCI등재후보

        이능화의 ‘친일 반민족 상세 행적’에 관한 연구 - 「 『조선해어화사』를 통한 기생 역사왜곡의 확립자」 이능화의 구체적 친일 행적 -

        이정남,미즈타니 사야카 바른역사학술원 2021 역사와융합 Vol.- No.9

        본 연구는 이이화, 반민족문제연구소,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미즈타니 사야카, 이정남 등에 의한 ‘이능화의 친일 행적 및 역사왜곡’에 관한 기존의 연구성과들과 이능화와 관련된 기록 및 사료들을 최대한 총망라하여 대한제국기 및 일제강점기에 있어서 ‘이능화의 친일 반민족 행적’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조목조목 밝히는 것을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이능화의 친일 반민족 활동’은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능화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의조선 식민통치에 현저히 협력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고위관직과 다양한 포상 및훈장들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사편수회, 친일 불교단체, 친일 학회, 친일 조직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조선사(朝鮮史) 왜곡’과 ‘식민사관(植民史觀) 전파’ 에 앞장섰으며, 심지어는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神武 天皇)을 시작으로, 조선의 강제 일본 식민지화의 원흉이었던 메이지 천황(明治 天皇), 다이쇼 천황(大正 天皇), 쇼와 천황(昭和 天皇) 등 일본 천황들을 찬양하는 한시(漢詩)인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을 지어 바치며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正當化)시키기까지 하였다. 즉 이능화는 ‘단순히 왜곡된 『조선사』 편찬에 참여한정도’가 아니라 다방면에서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해 간 대한제국기 및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 반민족 행위자’이자 우리나라 근대 사학계의 대표적인 ‘친일 어용학자’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이능화의 학술적 성과물들이 모두 친일(親日)· 매국(賣國)과 맞바꾼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능화와 같이 이미 사망한‘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이제 와서 직접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친일(親日)·매국(賣國), 그리고 ‘소수의 자극적인 특정기록만을 근거로 한 무리한일반화의 오류’를 통한 어설픈 ‘역사왜곡(歷史歪曲) 행위’는 이능화처럼 이렇게‘기록’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친일파(親日派)·매국노(賣國奴)·역사왜곡자(歷史歪曲者)라는 오명(汚名)의 꼬리표가 달려 영원히 후세에 낙인(烙印)될수 있음을 매우 신중하게 자각하고, 일반화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해당 역사에 대한 논조를 펼쳐야 할 것이다.

      • 요서 홍산문화와 환웅 조이족의 귀속관계

        이찬구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3

        이 글은 홍산 문화의 창조주체가 어느 종족인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흔히홍산 문화를 대표하는 옥기玉器는 온 인류의 보배라고 한다. B.C. 3~4000년 전홍산 옥기를 지금도 우리가 원형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옥문화가 지닌 위대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필자는 옥기를 분석함에 있어서 홍산문화 중에서 우하량牛河梁 유적에 주목했다. 여기에서 나온 옥기는 시기적으로 우리역사에서 단군이전인 환웅시대에 해당한다. 필자는 우하량유적 등 최소한 5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부엉이(玉鴞) 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시에 토템으로 숭배된 것에 주목하였다. 이 부엉이는 『산해경』에서 말한 그 수리부엉이(雒)로 해석해 보았다. 또 『단군세기』에는 『산해경』의 웅상雄常을 환웅의 웅상나무로 보고 있다. 일찍이 중국학자 고힐강顧詰剛이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큰 종족大族’이란 환웅의 새토템족인 조이족鳥夷族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이민李民도홍산문화는 동북의 선민先民인 조이 문화로 보았다. 오늘날 한국의 솟대나 서양의 토템폴에서 그러한 새토템의 잔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이족은 새토템의 동이족이란 뜻을 지닌다. 따라서 홍산옥기의 부엉이가 곧 환웅의 ‘웅새’라고 보려는 것이다. 환웅은 수리부엉이 새를 토템으로 삼은 ‘태양숭배를 계승한 조이족’이었다. 환웅 자신이요서遼西의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친 조이족의 최고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홍산문화는 환웅의 조이족에 부분적으로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환웅을 수리부엉이 새를 토템으로 한 종족의 지도자로 새롭게 이해할 때 한국의 상고사上古史가 확장되라고 본다. 종전의 서자부 환웅, 또는 막연한 천신天神 환웅, 곰족 웅녀의 상대방인 환웅에서 탈피하여 더 넓고독립적인 환웅상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 하왕조 강역과 우공구주 고찰

        정암,최원태 바른역사학술원 2019 역사와융합 Vol.- No.4

        최근 중국 역사학계의 성과에 따르면 하왕조는 실존하는 역사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그 연대를 서기전 2070년에서 서기전 1600년까지라고 특정하기까지 했다. 『서경』이나 『사기』 등의 고대 문헌에는 하왕조의 시조인 우(禹)가 중국천하에 9주를 개척하여 변방의 이민족들에게 조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우공구주(禹公九州) 이야기는 우가 황하 유역뿐만 아니라 장강·회수 등을 다스리고, 견산·기산·형산 등 9산을 개발해 소통시켰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공구주의 강역은 중국의 최초 통일제국인 진(秦)나라 강역보다 크고, 나아가 전한 때의 무제(武帝)가 넓힌 그것에 버금가고 있다. 고대 사서에 우공구주의 강역이 이렇게 넓게 묘사된 것은 먼 옛날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우공구주 강역을 후대의 선현이나 사가들이 왜곡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리두 유적에 의거하고, 또 우공구주에 나타난 지명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하나라의 강역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하나라의 세력권은 이리두 문화가 존재하는 일대, 즉 황하를 중심으로 한 하남성 북부와 산서성 남부 일대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 考)」1) 번역 및 비판

        이덕일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2

        조선총독부는 한국 강점 후 한국사를 반도사의 틀로 가두는 역사 왜곡에 나섰다. 한국사에서 대륙사와 해양사를 삭제해서 반도사로 축소한 후 그 북부에는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사군=한반도설’의 핵심은 ‘낙랑군=평양설’이었는데, 일본인학자들은 이를 위해서 여러 논문을 쓰고 고고 유적·유물을 조작했다.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한 주요 논문의 하나가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 考:1910년)」이다. 이나바는 이 논문에서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논리는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로 불렸던 이병도의 『한국고대사 연구(1976)』에 그대로 채용되었다. 또한 동북아역사재단은 국고 47억원을 들여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하면서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표기했다. 2015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동북아역사재단에 그 근거를 물었을 때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의 148쪽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나바 이와기치는 위 논문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황해도 수안군이고, 진(秦) 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군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이나바는이런 사실이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志)』에 나오니 ‘의심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한서 지리지』에는 황해도 수안군은커녕 한반도에 대한 기술 자체가 없다. 모두 이나바 이와기치가 한사군을 한반도에 있던 것으로 왜곡하기 위해서 만든창작인데, 일체의 사료적 근거가 없는 가짜 역사가 지금까지도 한국 고대사학계에 그대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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