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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남명학 연구기관 설립에 관한 회고와 전망

        강동욱 ( Dong Uk Kang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2 남명학연구 Vol.36 No.-

        본 논문은 우리나라 남명학 관련 연구기관의 설립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연구기관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우리나라 남명학 연구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 22주년을 기점으로 하는 글이니만큼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관련 연구기관을 살펴보고 또한 우리나라 유학 인물관련 연구소들의 설립과 활동 상황도 살펴보았다. 2001년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계기로 남명학 연구는 外延的으로 많은 확대를 꾀했다고 할 수 있다. 국제학술회의 등 다양한 학술 활동을 통해 연구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앞으로 남명학연구소는 그동안의 연구 성과물을 기반으로 남명학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역 거점대학인 경상대학교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남명학 연구기관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인력 양성과 다양한 학문 분야와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하겠다. This paper was written for examine the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research institutions related on the Korea Nammyeonghak, and present direction that this research institutions have to get on based on that reflection. Purpose is to be a boon to the development of Korea nammyeonghak research. Because this paper`s starting point is 22years anniversary of foundation of Nammyeonghak laboratory of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I searched related research institutions revolve around Nammyeonghak laboratory of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and also searched about foundation of Korea laboratory of Confucianism person and their activities. With 500years anniversary of birth of teacher Nammyeong on 2001 as a momentum, Nammyeonghak research could attempt a lot of extensivo expansion. Studier increased through various academic work including World Conference. In the future, Nammyeonghak laboratory should take considerable pains to popularization of Nammyeonghak based on products of study and should be located as represantative research institutions of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as university of regional hub. As well necessity that construct new paradigm through training a lot of manpower and multidisciplinary fusion is on the rise for positioning as Nammyeonghak research instituions that can offer theoretical basis of Korea Institute of classical scholar culture.

      • KCI등재

        기획논문 : 冥學硏究(명학연구)의 發展史(발전사)

        강동욱 ( Dong Uk Kang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2 남명학연구 Vol.35 No.-

        본 논문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개소 주년을 맞아 남명학연구소를 중 20심으로 지금까지의 남명학 연구에 대해 시기별로 발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준으로 1990년 이전과 남명학연구소 설립 후인 1990년부터 2011년까지를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2001년을 기점으로 삼아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다. 1980년대 후반 김충렬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남명학은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남명 중심의 연구에서 범위를 확대해 남명 제자들을 통해 남명사상의 계승 양상을 구명해 남명 정신이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본보기로 인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남명탄신 500주년을 맞아 남명학과 다른 학파와의 비교를 통해 16세기 유학사에서 남명학의 특징을 학계에 널리 알렸으며, 외국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남명학의 국제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껏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남명과 남명학파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남명학 연구의 발전 과제도 적지 않다. 20여년 동안 ‘남명’ 이란 주제로 수많은 연구 성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아직 남명 선생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지도는 적어도 경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굳이 퇴계선생과 비교하지 않더라고 남명의 정신과 학문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전 국민들이 인식할 때 까지 관계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In Korea, Nammyeong Josik teacher research began in earnest on the point is in the late 1980s. In the late 1980s, Nammyeonghak known in academia for the first time by Professor gimchungryeol has been a breakthrough, nammyeonghak Institute of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founded in 1990 to begin. Nammyeong center to broaden the scope of the study, so Succession patterns of Nammyeong thought revealed by his disciples, so the spirit nammyeong Korea as an example of the scholar to recognize the spirit which played a crucial role. In 2001, at 500 anniversary of the birth of nammyeong, nammyeonghak and by comparison with other schools in the 16th century, yuhaksa nammyeonghak widely in academia have been notified of the feature, through exchanges with foreign scholars contributed much to the internationalization of nammyeonghak. So far as R & D Center,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nammyeonghak nammyeonghak nammyeong and steps are being par for the study. Nammyeonghak development challenges, but also myriad of research. Over 20 years ``nammyeong`` as the subject of numerous research results released to the world, but still nammyeong teacher awareness of the general public does not seem to be at least in Gyeongnam is terrible. Compared with the teacher, even if you do not bother Toegye, nammyeong the spirit of the country, and leading academic scholars in the spirit of former officials until people recognize that you need constant attention and looks. Nammyeong for teachers identify academic efforts of the past 20 years has been recognized in academic circles. But for the disciples of nammyeong research, research on nammyeonghak par soon have a lot yet further support. A study of some of his disciples as revealed Naeam actively progressed, but, for many students, including suwoodang research is the beginning stage. Study of young researchers to improve conditions there is an urgent task. Nammyeonghak Institute, focusing on hanmunhak and their emissions, but many young researchers, nammyeonghak personnel involved in the research that is just a few. Different circumstances, but the active support of school authorities to create conditions through research and young researchers to concentrate on their studies nammyeonghak also think it`s important to create an atmosphere.

      • KCI등재

        기획논문 : <남명학고문헌시스템> 개발과 그 성과

        이정희 ( Jeong Hee Lee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2 남명학연구 Vol.36 No.-

        경상대학교 도서관은 1989년부터 고서실을 설치하여 운영해오다가 2001년 10월 지역민의 도움으로 대학 내에 南冥學館이 건립되자, 고서실을 남명학관으로 이관하고 ‘文泉閣’으로 명명하여 재개관하였다. 문천각에서는 남명학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는 경남지역 민간소장 고문헌을 다년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수집하였다. 문천각에서는 이렇게 수집된 고문헌의 원본은 영구보존하고 활용성은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고문헌 디지털화 계획을 수립하였다. 경상대학교 도서관은 2004년부터 행정안전부 <국가DB 구축사업>을 유치, 2011년 남명학 관련 고문헌을 디지털화한 <남명학고문헌시스템> 개발을 완료하였다. <남명학고문헌시스템>은 남명학 관련 문헌, 유학자 문집, 기록류, 고서 해제, 고문서, 책판 등을 디지털화여 인터넷을 통하여 대국민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남명학고문헌시스템>을 개발함으로써 남명학 연구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남명학 연구가 전국화·세계화 될 수 있는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경상대학교 도서관은 이 사업을 통하여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 대학 도서관 특성화 평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2011년 교수신문·국가브랜드위원회·교육과학기술부가 공동 주관한 <대학의 유산, 한국의 미래다>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Library has been collecting old books and local archival materials since 1989 when it established the Department of Archives and Special Collections, which was then housed in the university library building. In 2001, the department was renamed ``Moon Cheon Gak(文泉閣)`` and moved to Nammyong(南冥) Hall, a building newly erected in memory of a leading scholar of the Choseon Dynasty. Moon Cheon Gak consists of the Preservation Division and the General Division. The Preservation Division preserves old thread­bound books, engraved wood blocks, and archives. The General Division houses modern photocopies of old books, genealogical data, and has rooms for exhibitions. The Department of Archives and Special Collection, Moon Cheon Gak, has now started to digitalize various kinds of old materials as part of a nationwide data base digitalization project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Public Administration and Security. The aim is to promote the history and culture of Western Gyeongsang. The digitalized materials include collections of Confucian scholars` writings, documents, exhibition of important old books, and engraved wood blocks. The data base uses high resolution color imaging and replicates the experience of looking at the authentic document You can search the data base by using advanced search terms such as family name, last name, adult name, nom de plume, ancestral home, residential place, and birth date and year. Original images allow you to check or compare whether there are any missing letters or misprints in modern versions. The Nammyong collections are housed in Nammyong Hall and managed by Moon Cheon Gak. The books, documents, and archival materials made accessible online were selected among the materials in the Department. The collections form a unique research resource for the study of Master Jo Sik(1501-1527), whose most well-known nom de plume was ``Nammyong`` or ``the Great Southern Ocean``. Nammyong was a well-known scholar from the mid Joseon Dynasty, who had a profound influence in scholarly circles west of the Nakdong River in the Gyeongsang region.

      • KCI등재후보

        海州鄭氏 家門의 晉州 定着과 學問 性向 : 南冥學派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李相弼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2004 남명학연구 Vol.17 No.-

        진주의 해주정씨는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져 왔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晉州의 海州鄭氏는 農圃 鄭文孚(1565-1624)의 후손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1568-1639)의 후손을 말한다. 농포의 두 아들 鄭大榮(1586-1658)과 鄭大隆(1599-1661)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 등 三叔姪이 어떻게 해서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 되었으며, 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진주 지역에서 이들이 가진 학문의 성향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농포의 아우와두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이 처음 진주로 온 것은 避兵이 그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대의 혼인관계로 인해 상속받았던 田莊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도 또한 분명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서울 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것 또한 확인되는 바였다. 그러나 농포가 李适의 난 이후 昌原府使 시절에 지은 詠史詩로 인해 逆謀로 처형당하고, 遺言에 의해 그 아우와 아들들이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좀더 생각하게 하는 점이 없지 않다. 광해군 시대 창원부사 시절의 詠史詩로 인해 반정 이후 인조 시대에 역모로 처형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빙하기 곤란하지만, 이는 당시의 집권층이 농포가 광해군 시적 북인으로서 내암 정인홍과의 관련이 적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농포로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환멸을 느끼고 자손들에게 정치적 은둔을 유언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해주정씨가 진주에 정착한 초기에는 南冥學派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던 謙齋 河弘度의 지우를 입어 남인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하였으나, 1665년을 전후하여 농포의 신원에 앞 섰던 澤堂 李植의 아들 畏齋 李端夏에게 집지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노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경종 때 남인으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은 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에 대한 보복성 핍박을 남인에게 가함으로부터였다. 이 일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에 일어난 宗川書院 禍變의 주동자가 이 가문에서 나옴으로써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남인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고, 근기 지역의 노론 학자들로부터 학업을 전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남명학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주의 해주정씨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인과의 관계도 대체로 나빴다고 할 수 있고, 남명학파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지만, 문집이나 유고 등을 남겼다는 이가 58인이나 있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관심만큼 여타 가문에 뒤지지 않으려 하였던 결과로 보인다. 남명학파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해주정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aeju Jeongs is called representative family tree in Jinju since 17th century. This report is about the decendant of Haeju Jeong of Jeong Mun-bu and the younger brother Jeong Mun-ik. Jeong Dae-young, Jeong Dae-ryoung are the sons of Jeong Mun-bu. This shows how they reached in Jinju, how they became the representative family tree in Jinju and how is their scholarship character. Haeju Jeong in Jinju is orginated from two sons of Jeong Mun-bu. The fist purpose that they came in Jinju is for avoid dodging. But they had some fields inherited for their wife's ancestors because of marriage in Jinju. After In-jo(The one of Chosun kings) war happened, they tried to live in Seoul life. But Jeong Mun-bu was sentenced to death because of his poems included conspiracy during Gwang-hae's generation. At that time his position is the chief Changwon near Jinju. His will included many parts of the reason why they fixed in Jinju. Owing to lack of materials, we can't prove why he is sentenced to death. He is North part person(1t is the party in power), that is continuous with Jeong In-hong. He felt disillusion concerning of political situation. So he began to retire of the world. In the beginning of political changing, they fixed their willing as a South part person(the party in Chosun) because of Ha Hong-do, the leader of Nammyoung School. Before and after 1665, his party was changing slowly. Noron(the party in Chosun) concerning the son of Yi Sik. After he occupied a position as a Noron person, he was got stringent since Yong-jo(one of Chosun Kings) hold a coronation ceremony. Twenty had passed since this event happened, the leader in Jongcheon auditorium was born in this family tree. So this party became worse with South part person, it took the initiation of Nammyoung School. Lately they were handed down a Noron scholar. Their concerning was alienated from Nammyoung School. Like this, except a few person in Haeju Jeong family tree, most people were bad with South Part Person's relationship and they had little concerning. However 58 people in Haeju family tree left many collection of works and manuscripts. On the point of this fact, they played an important role fo scholarship development with a center of Jinju in west kyoung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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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남명학파(南冥學派)에 관한 연구(硏究)』의 성과(成果) 및 그에 대한 회고와 전망- 남명학파(南冥學派)의 거시적(巨視的) 동향(動向)에 관한 연구(硏究)를 중심(中心)으로-

        김익재 ( Ik Jae Kim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2 남명학연구 Vol.36 No.-

        본고는 지난 20여 년간 진행되어온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를 종합, 검토하는 논문이다. 지금까지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는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본고는 그 중에서도 특히 남명학파의 거시적 동향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논문을 모아서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 논문은 우선 통시적 연구와 시대별 연구로 나누었으며, 시대별 연구는 다시 남명학파의 형성 및 전성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몰락 및 쇠퇴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부흥기에 관한 연구 등 세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통시적 관점의 연구는 주로 남명학파의 동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인조반정의 가해자와 피해자 가운데 피해자에 해당하는 북인만 연구해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남명학파의 공(共)보다는 과(過)가 부각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가해자인 서인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입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시대별 연구도 자료의 한계성 때문에 더 이상 크게 진보할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 발굴은 물론 자료 해석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In this article, I put together several studies related to the Nam-myoung school which have been progressing for last twenty years. So far, the studies on the Nam-myoung school have been conducted in various aspects. I particularly collected data containing macroscopic movements of the Nam-myoung school and carried out an analysis of those papers. They were divided into diachronic study and periodic one, and the periodic study was divided into three parts: formation and golden age of the Nam-myoung school, collapse and decadence of the Nam-myoung school and rehabilitation of the Nam-myoung school. Actually, the macroscopic studies have been proceeded mainly with the movements of the Nam-myoung school. They were focused on only the North-party(北人) which was the victim of ‘The coup of Injo’ between the victim and the assailant. As a result, it is hard to deny that the fault of the Nam-myoung school was magnified rather than the contribution of theirs. If we study the West-party(西人), the offender in parallel with the North-party(北人), multilateral study will be made. It is hard to find the possibility of progress in the periodic study because of its limitation of data. To overcome this problem, we need not only to excavate materials but also to engage in the interpretation of data a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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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잠(箴) 작품에 나타난 수양론

        전병철 ( Byeong Cheol Jeon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남명학연구 Vol.45 No.-

        16-17세기 초반은 南冥曺植(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 및 재전제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학문적·정치적 활동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려웠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시기는 남명학파의 전성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6-17세기 초반에 창작된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작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수양론을 파악해보고자 시도했다. 箴의 효용성에 주목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분석하여 수양의 실천 양상을 분류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수양론의 핵심사상을 제기하여 그것에 따른 실천 의지를 촉구한 작품군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본질적 측면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규계하는 것이므로, 치료 방법중에서 原因治療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특정한 병폐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적시하여 그것에 따른 수양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어떤 증상에 대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對症治療의 명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는 어느 시기나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지어진 작품으로, 이것은 주위 환경이나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병을 호전시키는 改善治療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3가지 유형 가운데 편수가 가장 많은 것은 對症治療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총 10편이 여기에 속한다. 原因治療는 5편이 있으며, 改善治療는 4편이다. 곽재우의 「調息箴」은 호흡법에 관한 내용으로 다른 箴작품의 일반적인 성향과 구별되어 기타로 분류했다.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 학자들이 창작한 箴작품은 총 20편인데, 비슷한 시기에 지리산권의 서부인 호남지역에서는 箴작품의 수량이 6편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2편이 임금을 위해 지은 官箴이고 나머지 4편은 경전을 해석하거나 전대의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箴창작 양상과 대비해 보자면,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작품은 수양의 내용 및 방법을 서술한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따라서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의 箴작품은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From the 16th to early 17th century is the period that Nammyeong (南冥) Cho Sik (曺植, 1501-1572) formed a school and his disciples developed their activities aggressively. Considering the fact that Nammyeong School was seriously affected by Injobanjeong(仁祖反正) in 1623 and it could hardly take any initiative in academic·political activities, we can see that this period was the prime time of Nammyeong School. Accordingly, this article is intended to understand Suyangron(修養論) contained in Nammyeong scholars’ Jam(箴) works created during the 16th to early 17th century. According to the results of analyzing the topics and contents of those works focusing on Jam(箴)’s utility and classifying the aspects of practicing cultivation, it can be divided largely into three types. The first one is the works’ group that presents the nuclear idea of Suyangron and enhances the will of practice for it. Since this is to regulate oneself or others in more fundamental and essential aspects, it corresponds to causal treatment among many kinds of treatment. The second one is to point out particular ills or detailed virtue items of practice and figure out a way of cultivation for them, so this can be classified as symptom treatment that gives a direct prescription for a certain symptom. The third one is the works’ group written when there was a particular period or event and it formed a chance for a transition, and this can be regarded as improving treatment to better surrounding environment or habits and cure the disease. Among the three types, the one including the highest number of works is that of symptom treatment, and there are total 10 works corresponding to this. Causal treatment has five works, and improving treatment includes four. Gwak Jaewoo(郭再祐)’s 「Josikjam(調息箴)」is about respiration methods and its general tendency is different from other Jam works’, so it is classified into others. There were total 20 Jam works created by Nammyeong scholars from the 16th to early 17th century, and in the similar period, there were only six pieces of Jam in Honam(湖南) area, the west of Jiri Mountain sphere, and about the contents, two were Gwanjam(官箴) written for the king, and the rest four were the ones to interpret scriptures or quote previous works. Comparing it with the creation of Jam in Honam area, we can see that Nammyeong scholars’ Jam works are very concrete and practical in terms of describing the contents or directions of cultivation. Therefore, Nammyeong School’s Jam works in the 16th to early 17th century is, in brief, characterized by their strong tendency to suggest methods of cultivation and enhance the will of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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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월연(月淵) 이도추(李道樞)의 남명학(南冥學) 계승양상(繼乘樣相)과 방외시(方外詩)

        윤호진 ( Ho Jin Yun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1 남명학연구 Vol.32 No.-

        한말의 학자 이도추(李道樞: 1948-1921)는 牲齋 許傳의 문하에 적을 두었고, 남명의 학행을 사모하였다. 면우 곽종석과는 같은 고을에 태어나 매우 절친 하였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郭鐘錫이 고향을 떠나 퇴계의 학맥인 寒洲 李震相 문하에 들어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도추는 고향을 지키며 고향에서 강학하던 허전에게 배웠고, 자신의 고장의 학장인 남명을 존숭하였다. 곽종석이 큰 학자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반면에, 이도추는 세상을 피해 시골에 은거하며 시를 짓는 낙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삶은 화려하지 않고 그의 학문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어떠한 삶을 살며 무엇을 시로 읊었던가 하는 것은 흥미 있는 연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글은 이도추의 생애와 한시를 살펴본 것이다. 그의 생애를 정리한 전기자료가 전하는 것이 없으나, 몇몇 문헌을 참고하여 간략한 생평을 구성하자면, 그는 당시의 진주 남사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인근에서 살았다.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주변의 산수를 음상하고, 때로는 벗들과 멀리 유람을 나서기도 하였다. 곽종석, 하용제, 박규호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던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학문적인 저술이나 논쟁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자로서 학문에 몰두하기 보다는 문사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특히 시를 짓는 데에 특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사물과 인사에 대해 시를 읊기도 하고, 여행을 다닐 때의 여정과 감회를 시로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학문 성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남명학을 계승한 측면이며, 이러한 성향은 그가 남긴 시문 가운데 많이 드러나 보인다. 그의 시 가운데에는 특히 자연에 묻혀 세상과 떨어져 지내는 즐거움과 그 양 상을 읊은 시 들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난다. 하나는 물외, 세외, 상외로 나타나 보이는 물외시이며, 다른 하나는 유선, 방호로 나타나 보이는 신선시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읊은 방외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 시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진짜 세상과는 다른 별세계를 다룬 것이 아니고, 그가 사는 공간을 그저 방외로 인식한 것이며, 신선세계로 인식한 것도 인간세계와는 다른 가상의 세계에서 관념적 유희를 즐기는 여느 유선시와는 다른 것이라 하겠다. In this writing, 1 looked through the life Lee Do-chu(李道樞) and his poetry. A biography arranging his life has not been inherited, but I constructed his life through several documents, and examined the meaning of his life. He was born in Chinju Namsa and lived there for his entire life. He gave up gwageo(科學) early and appreciated scenery nearby. Sometimes he made a journey with his friends. The most well-known trip was to Kumkang mountian(金剛山) with Kuck Zhong-seck(郭鐘錫), Ha Yong-jae(河龍濟), Park Kue-ho(朴圭浩). Although he left some academic writings and disputing documents, he mainly concentrated on creative writings and he was exceptionally gifted in writing poetry. Subjects of his poems were about surrounding things and people, and about his feelings through his journeys. The most eminent point through his academical tendency was that he succeeded Nammyung study(南冥學) and this tendency was well represented in his poetry. In his poetry, especially, there were a lot of themes about the living far away from secular world to nature. These poems can be categorized in two ways, One is to look these poems as Mulwue(物外) poems which describe Mulwue, Saewue(世外), Sangwue(象外), and the other is to look these poems as Sinseon Poems which describe Yuseon(遊仙), Bangho(方壺). These were all kinds of Bangwue which sung the different world from himself. However, when we specifically inquire his poems, we could find that he just discerned his world as Bangwue, so it is different from existing Yuseon poems having a conceptional play other than poet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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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남명학(南冥學) 연구저술(硏究著述)에 관한 간고(簡考)- 철학사상(哲學思想)을 중심으로-

        손흥철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2 남명학연구 Vol.36 No.-

        이 글의 주제는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에 대한 연구저술의 성과에 관한 분석”이다. 이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남명집』과 譯註本의 종류와 그 특징. 둘째, 초기 남명학연구의 문제형성과 관련된 저술. 셋째, 남명학연구의 다양화와 심화정도. 넷째, 퇴계학과의 비교연구의 내용과 의미. 다섯째, 南冥學의 傳承에 관한 두 유형에 관한 분석이다. 이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 첫째, 『남명집』에 대한 판본정리와 定本化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남명학의 학문적 사상적 특성을 정리할 때 틀에 박힌 類型化를 지양해야 한다. 셋째, 단순한 비교보다는 남명학의 독창적 성격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 넷째, 南冥評傳의 저술이 꼭 필요하다. 다섯째, 남명학파와 門人 등 남명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남명학 연구저술은 대부분 개인이 이미 발표하였던 연구논문을 주제별로 엮어서 출판하였거나, 기획된 목적에 따라 전문연구자들의 개별적 연구논문을 모아서 편집한 책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의 정확한 정체성을 밝히거나, 남명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미흡함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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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19세기 하동 지역 성재(性齋) 문인(門人)의 학문 성향 -간취당(澗翠堂) 정우윤(鄭瑀贇)과 니곡(尼谷) 하응로(河應魯)를 중심으로-

        전병철 ( Byeol Cheol Jeon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1 남명학연구 Vol.32 No.-

        19세기 河東 지역 性齋門人 澗翠堂 鄭瑀贇과 谷河 河應魯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家學을 통해 南冥學派의 학문을 이어받고 謙齋 河弘度 의 강학처인 慕寒齋를 중심으로 인근 학자들과 강학하였는데, 이것은 南冥學에 연원을 두고 있는 측면이다. 그리고 명망과 학식이 뛰어난 당대의 스승을 찾아 性齋 許傳에게 나아가 배웅을 청한 것은 남명학의 연원을 지켜나가는 가운데 학문적 외연을 확장해 나간 것이다. 특히 성재 허전의 가계적 배경과 학문적 연원이 남명학파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점으로 본다면, 이들이 성재를 찾아간 까닭은 성재의 명망과 학식 외에도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간취당 정우빈과 니곡 하응로에게 나타나는 남명학의 연원과 사승의 학맥이라는 학문 성향을 생각할 때, 이들에 대한 학파적 분류를 단순히 사승으로만 제한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나무의 가지를 가리키면서 다른 나무라고 말할 수 없듯이, 같은 학문적 연원에 뿌리를 두고서 각기 다른 사승의 학맥을 계승한 19세기 강우지역 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은 남명학파의 역사적 배경과 깊은 연관을 가진 이채로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Ganchuidang Jeong Wu-yun and Nigok Ha Eung-ro, both Seongjae literary men in the Hadong area during the 19th century, inherited the learning of the Nammyeong Hakpa (school) that was handed down within the family (lineal learning) and pursued studies with nearby scholars centering on Mohanjae, which was the place pursuing studies of Gyeomjae Ha Hong-do. This aspect originated from Nammyeonghak. Also, the fact that they visited Seongjae Heo Jeon and asked for teaching while seeking the greatest teacher with an excellent reputation and learning of the times was an academic extension while keeping the origin of Nammyeonghak. In particular, given that the lineal background of Seongjae Heo Jeon is closely related to Nammyeong Hakpa, the reason that they visited Seongjae might have been inevitable and unavoidable aside from the reputation and learning of Seongjae. Therefore, considering the origin of Namrnyeonghak and the academic propensity that is the academic legacy of their private teacher (**사승) shown by Ganchuidang Jeong Wu-bin and Nigok Ha Eung-ro, it is concluded that their classification in terms of school cannot be limited simply by their private tacher (**사승). As we are unable to say that one tree can be a different tree while looking at its branches spreading to several offshoots. the academic characteristics of scholars in the Gangwu area during the 19th century, who inherited the academic legacy of different teachers (**사승) rooted on the same academic origin, can be an unusual phenomenon deeply associated with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Nammyeong Hak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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