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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디외와 라투르의 대질과 수정: 사회과학 지식체계에서 장이론의 가능성과 한계

        김동일 ( Dong Il Kim )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0 社會科學硏究 Vol.18 No.2

        부르디외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비판적으로 종합함으로써, 동시대 사회과학의 지식생산과 축적과정에서 참조할 만한 중요한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장 개념은 그것의 성과와 장점뿐 아니라, 몇 가지 한계들을 노정하고 있으며, 사회과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연구자는 이점들에 대한 비판과 수정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장-아비튀스 개념을 사회과학의 지식생산체제에 적용하려는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의 가능성 역시 일종의 규범적인 요구(normative requirement)에 불과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첫째, 부르디외는 장의 자율성을 이념형적으로 규정하는 반면, 그것의 자율성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차별성에 관해서는 달리 고려하지 않고 있다. 둘째, 부르디외는 장의 자율성에 지나치게 경도한 나머지, 장과 장들, 장과 사회공간 사이의 상동성의 테제에 관해서는 차별적인 설명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셋째, 부르디외는 실천을 장내 위치와 관련시킴으로써, 장의 자율성에 상응하는 실천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연구자는 논문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튀스와 장 개념의 기본내용과 사회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적 함의를 검토하고, 그의 장이론이 갖는 몇 가지 한계들을 논증할 것이다. 아울러, 부르디외의 장 개념이 갖는 한계를 부르노 라투르의 `이해관계번역`(translation of interests) 개념과 대질시킴으로써 부르디외 뿐 아니라, 라투르의 이론에 내재된 한계 또한 우회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부르디외와 라투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정점에서 핵심적인 실천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사회과학 장 자체의 자율성을 제고하는 과정에도 나름의 긍정적인 함의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ierre Bourdieu, a French sociologist, brought meaningful, important outcome to which can be referred, by critically synthesizing subjectivism and objectivism in procedure of producing and accumulating knowledge of contemporary social science. But, I think that there are not only productive outcome and strength, but also some serious limitations in Bourdieu`s concept of `field`, and these could be obstacles in achieving autonomy of social science, if not treated carefully. I will argue in this paper that without criticizing and revising these limits in Bourdieu`s social theory, Bourdieu`s attempt of reflexive sociology that tries to apply the conceptual combination of field and habitus to system of production in social science could become no more than an `normative` requirement at most. First, almost every case, Bourdieu supposes autonomy of field as ideal level, but doesn`t consider the concrete differences among different sub fields. Second, Bourdieu does not develop further explanation on homology thesis between a certain field and other fields, and social spaces, but gives his theoretical energy excessively to explaining and investigating the autonomy of field. Third, Bourdieu does not develop theory of practice corresponding to autonomy of field by relating practice to the position of actors in field. I will examine the possibility of concepts habitus-field and reflexive sociology on social science itself, and argue there are some limitations in Bourdiue`s social theory. In this course, I will introduce another French sociologist of science Bruno Latour`s `translation of interests` and confront it with the limit of Bourdieu`s field theory. In doing so, I will try to find another way to detour the limitations of not only Bourdieu but also Latour. This attempt to examine critically and remodify mutually both Bourdieu and Latour can provide the positive possibility in the procedure of trying to increase the autonomy of social science field that is one of the key subjects in Bourdieu`s reflexive soci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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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효과, 그리고 글로벌 지식생산체계에서의 누적 이익: 한국 사회과학 저발전에 대한 함의

        전승봉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6 社會科學硏究 Vol.24 No.2

        본 논문의 주목적은 과학지식 생산성과 관련된 기존의 논의들의 살펴본 후, 과학지식 생산성이라는 요인에 대해 연구자들의 소속기관의 권위, 그리고 동료들의 이에 대한 인정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또한 이 결과가 한국 사회학에 주는 함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연구자가 속해 있는 기관의 권위가 과학지식 생산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는 주장에 따라서 실제로 사회학계에 마태효과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과학지식 생산성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또한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 사회과학이 저발전 상태에 놓여 있다’라고 하는 기존의 주장에 대한 보완을 시도하고자 한다. 마태효과에 대한 확인을 위해 미국 44개 대학 사회학과에 소속된 933명의 교수들의 h-index를 수집하여 이를 종속변수로 가정하고, 이 인용지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회귀모형을 통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서 미국 사회학자들의 과학지식 생산성과 그 학자가 속해 있는 대학의 순위와는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미국대학 사회학과에서 확인된 마태효과를 국제적인 차원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면 “한국 사회과학이 저발전의 상태에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이유를 사회학적 지식을 생산하는 조직(social organization of sociology in Korea) 및 연구방식(research practices)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아닐 것이다. 글로벌한 수준에서의 지식생산 체계 및 그 속에서 한국 사회학이 가지는 위상을 고려하면, 현재 한국 사회학의 문제점은 주변부 사회학자들이 가지는 불이익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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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政治資金 : 그 문제점과 처방…왜, 무엇이, 언제나 문제인가

        宋復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1992 社會科學硏究 Vol.1 No.-

        현실정치(real politics)에서 「정치와 돈」의 관계는 실물경제에서 「경제와 돈」의 관계만큼 깊다고 할 수 있다. 돈을 떠난 경제를 상상할 수 없듯이 돈과 분리된 정치 역시 현실세계에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돈의 흐름」을 보지 않고 정치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치의 實體는 보지 않고 정치의 虛象만 보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정치의 理想은 돈을 求하지 않지만 정치의 現實은 돈에 밀착되어 있다. 정치의 겉은 돈에 초연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의 속에는 언제나 돈이 요동치고 있다. 政治를 「正治」로 해서 정치의 이상주의一?治主義를 표방해 왔던 사회에서도 이 돈과 정치의 관계는 예외가 아니다. 정치의 체계를 가장 리얼하게 기록해간 司馬遷의 「史記」는 이 돈이 현실정치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로 점철되어 있다. 반면 플라톤의 「共和國」에는 돈의 作用이 없다. 돈을 論해도 司馬遷의 史記처럼 능동적 작용의 實體로 밝히지 않고, 피동적 皮作用의 분배대상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그의 共和國은 유토피아가 될 수 밖에 없고, 그의 政治論은 理想國論으로 轉化되고 만다. 특히 복수정당과 권력획득의 공개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에 있어 돈은 전체주의 사회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대다수의 경우 권력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 권력 그 자체가 바로 主體이고 독립변수다. 권력은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그 어떤 대상과의 상호작용에서도 결정권을 갖는다. 권력을 갖지 않고 권력을 점유하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만이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은 권력과 다름없이 主體이며 독립변수로 작용한다. 권력만이 권력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돈 역시 권력을 창출해 내고 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처럼 권력만이 권력을 창출해 내는 경우는 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확률적으로 아주 낮다. 가능성이 적은 것은 아니라 해도 경험적으로 그 실현성은 아주 낮다. 가능성이 적은 것은 아니라 해도 경험적으로 그 실현성은 아주 낮아 있다. 이 사회에서 권력은 거의 대다수의 경우 돈과 결합되어 나온다. 의례 말하듯이 돈이 권력을 만들어내는 유일·결정적 요소는 아니라 해도 이 권력을 만들어 내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대통령이 되는데, 국회의원이 되는데, 심지어는 명예직인 지방의원에 당선되는데도, 이 돈만 있으면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라해도, 이것을 갖지 않고는 거의 不可能하다. 가지고도 어렵다면 갖지 않을 경우 ?難할 것은 평범한 진리이다. 분명히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돈은 권력창출과 유지의 필수요건이다. 그러나 이 필수요건이 되는 돈(政治資金)의 作用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그 돈을 모으고 쓰는 데 넘어서는 안 되는 線이 있다. 그 線이 국경선처럼 자로 잰듯 누구의 눈에나 일치되게 그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 線 그 한계는 첫째로 그 돈(政治資金)의 모음이나 쓰임(政治費用)이 일정수준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 돈의 모음이나 쓰임이 다 같이 公開性과 公正性의 원칙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線, 이 한계를 벗어날 경우 정치는 거꾸로 쇠퇴하고 空洞化한다. 분명한 것은 돈이 정치의 필수요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필수요건을 지나치게 ?足시키려고 할 경우(과다 정치비용의 상태), 그 필수요건이 반대로 ?足되지 못한 경우(과소 정치비용의 상태)보다 정치는 治性化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空洞化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쇠퇴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社會的 行動에서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차원(過猶不反)에서 논의된다. 그런데 정치의 세계에선 지나친 것(자금의 과다)는 미치지 못한 것(資金의 과소)보다 훨씬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 결과는 정치발전은 물론 경제·사회체계 전체를 와해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글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되고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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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문화장과 사회공간의 환류 효과에 관한 연구: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김동일,지주형,김경만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5 社會科學硏究 Vol.23 No.2

        동시대 사회학 연구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문화의 ‘상대적 자율성’의 발견이다. 문화는 경제나 사회구조의 일방적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 자율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문화와 사회구조는 서로 영향을 환류한다. 연구자는 이를 부르디외가 지적한 장과 사회공간 사이의 상동성의 관점에서 풀어내려 한다. 문화장은 외접하는 사회공간과의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자율성을 유지한다. 연구자는 사회공간을 국가, 자본, 시민사회 사이의 지배와 저항의 공간으로 가정하고, 문화장과 사회공간 사이에서 유발되는 환류효과를 살펴 볼 것이다. 이때 미술관은 문화장과 사회공간 사이의 상동성을 유발하는 중요한 환류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미술관 가운데서도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대안공간은 각각 국가, 삼성이라는 지배적 힘과 시민사회의 저항적 힘이 차별적인 예술개념의 규정이라는 문화적 형태로 서로 환류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른바 군사정권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문화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문화장 내로 국가의 권위를 도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규정해 왔다. 리움은 삼성이라는 사적자본의 영향을 바탕으로 예술작품의 소장과 전시에 있어서 선택적 전문성을 발휘하며 문화장의 지배 권력이 되었다. 반면 대안공간은 이른바 공공미술, 커뮤니티아트의 형태로 미학적 실천을 차별화하면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저항과 결합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풍경은 문화장과 사회공간의 역동적 환류를 통해 형성되어 왔고, 또 변화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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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화사회 통합을 위한 다문화사회의 개념적 확장- 다문화 인식전환과 중첩적 연대의 방식을 중심으로

        이용재 ( Young Jea Lee )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4 社會科學硏究 Vol.22 No.2

        세계화의 진전과 국제이주의 증가는 근대민족국가의 경계를 낮추고, 다양한 출신의 국민들로 구성된, 새로운 시민권에 기초한 국가 출현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와 함께 다문화사회 통합의 실패와 강경한 이주민 정책들 또한 진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의 다문화사회 통합정책은 이들을 타인으로 규정하고, 수동적 객체로 취급함으로써 삶의 주체로서 이들의 지위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개념 규정이 단일한 민족문화가 외부적 요소로 인해 훼손됨으로써 초래하는 다양성 개념에 기초하고, 이질적 요소를 극복함으로써 회복되어야 하는 순수성(단일성)에 대한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문화사회의 개념 확장을 시도하고자 한다. 단일성에 대한 재현으로서의 다양성이 아니라 단일성의 분기를 통한 다양성은 재현되어야 할 동일성을 부정하고, 지속적 융기의 동학을 통한 새로운 동일성 구현의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문화사회 통합의 방식으로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 주체와 주체로 만나는 차이의 연대와 연대의 중첩을 통한 통합의 방식을 제안한다. The intensification progress of globalization and the increased migration are lowering the boundaries of modern nation-states. The state which is consisting of people from various countries has emerged. Everywhere in the world, The multi-cultural society has failed social integration and the immigration policies are enforced for rigid. Today, the multi-cultural society integration for the immigrant declares these as the passive objects, as the Others. And denies the position as subject. That is, the concept of amulti-cultural society is based on the solid national culture, the diversity is defined as the phenomenon is contaminated by the external factors. It is required the identity which is emerged by overcoming difference. For new ways to incorporate multi-cultural society, the concept tries to expand. The diversity emerged by the branching denies the oneness is represented, presents the new identity by the continuous uplift. Thus, integration of multi-cultural society is based on not the way of pecking order as subject and object but the way of equivalent and overlapping solidarity on the difference,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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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화사회 갈등 해소를 위한 다문화개념의 전환: 분기하는 다양성과 동의형식의 문화개념

        이용재 ( Young Jea Lee )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1 社會科學硏究 Vol.19 No.2

        다문화정책을 시행했던 국가들에게서 다문화정책의 실패가 이야기되고 있다. 이제 새롭게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문화정책의 유용성에 대한 논의에 앞서 다문화사회가 무엇이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이 연구는 문화의 다양성과 형식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분기하는 다양성과 동의형식으로서 문화개념을 통해 첫째, 다양한 문화의 모습이란 시·공간적으로 고립된 다수문화의 공존이 아니라 삶의 형식으로서 재현되고, 재해석되는 삶의 모습이 가지는 생성의 다양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둘째, 문화는 정치·경제·사회와 구분되는 고립된 영역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적영역의 개인의 기호가 산호에 대한 동의형식을 통해 정치적 갈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다문화사회는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사회갈등들의 장(場)이며, 사회갈등은 통합의 저해요인이 아니라 통합의 동력으로 이해되고, 해소의 대상이 아니라 생성관리의 대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Today these nations which had enforced the integration policies, declared the failure of the multicultural policies. The korea which will be the multicultural society recently have to begin by discussing about the mean of that, not to run after the failure. This thesis was written to answered what and how to understand. That is the interpretation by the divergency and consent frame. The first, these concepts will help the understand it, that is not the coexist of forgotten relics isolated the real but the represent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life style, that has the creation ability of divergency. The second, the culture has not the isolated the dimension separated with the political, economical and social dimension, and that is the consent formality which is the social approval of taste, preference, could happen the political conflict. So the multicultural society is treated as the field with creating continuous and various conflicts, and social conflicts are treated as the power of social integration, not obstacles, as something to arbitrate not to null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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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과 순수성의 정치: 사회학장의 자율성과 사회적 참여를 위한 사회학자의 이중적 상징투쟁

        김현준 ( Hyun Jun Kim ),김동일 ( Dong Il Kim )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1 社會科學硏究 Vol.19 No.2

        부르디외에 따르면, 사회공간은 이른바 상징공간으로 변환되고 있고, 이 상징공간의 역학은 자신의 사회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개인들 및 제도들 상호간의 인정투쟁이다. 이러한 인정투쟁의 공간 속에서 사회학자 역시 벗어날 수 없다. 사회학자들은 사회공간 내에 위치한 다른 참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징투쟁자로서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여기서 사회학자가 수행하는 인정투쟁을 ``이중적 상징투쟁``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사회학자의 이중적 상징투쟁이란, 첫째는 객관적 사회학 지식을 생산하기 위한 ``사회학자들 사이``의 투쟁이고, 둘째는 ``사회공간`` 속에서 사회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전자가 사회학적 연구의 차별성을 전제하는 자율적 소우주로서 사회학장 내 참여자들 간의 내부투쟁이라면, 후자는 사회학의 권위를 바탕으로 사회학장 밖의 사회공간에서 수행되는 외부투쟁이라 할 수 있다. 상징적으로 재편된 사회 속에서 사회학의 존재정당성은 사회학자들의 이중적 상징투쟁이 어떤 변화를 유발할 것인가에 따라 증명될 수 있다. 부르디와는 사회학장의 자율성을 위한 내부 투쟁이 사회공간 내에서 수행되는 사회학자의 비판적 외부투쟁과 분리되지 않는 이른바 ``순수성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공간에 대한 사회학자의 개입은 사회학적 자식의 객관성을 보증할 사회학장의 자율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부르디와에 따르면 사회공간은 이미 다양하게 분화된 개인과 집단, 제도들의 치열한 투쟁의 공간이다. 사회학장은 그러한 사회공간에서 사회학적 지식을 생산하기 위한 자율적 공간이며, 시회학자는 그 장에서 생산된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공간에 개입한다. 이 때 사회학자는 저널리즘과 같은 외부의 영향(상징자본)을 도입함으로써 권위를 얻으려는 ``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들(국가, 정당, 미디어, 기업)을 배제하고, 합법적 논쟁과 토론을 통해 보다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시회학자는 사회공간 내에서 자본과 권력의 지배를 폭로하고, 그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무기들을 제공할 수 있다. According to Pierre Bourdieu, social space has been rapidly transformed into symbolic space, and the mechanism of this symbolic space is so called the recognition struggle between individuals or institutions that try to impose the legitimacy to their social action. Sociology is not an exception from this symbolic struggle. Sociologists also exist as symbolic struggler like any other participants who posit themselves in social space. Here, we define the struggle performed by sociologist as ``double symbolic snuggle``. Double symbolic struggle of sociologists is made up of two different sub struggles. The fist is the snuggle between sociologists in autonomous sociological ``field`` and the second is the sociologist`s struggle to achieve and verify he social legitimacy of sociology in ``social space``. While the former is an inner struggle of sociologists who participate in the differentiated microcosmos of sociology, the latter can be defined as external struggle in social space in the basis of the authority of sociology produced by the inner struggle. In this paper, we argue that the existential legitimacy of sociology in the social space can be verified by the effect of double symbolic struggle of sociologists. Bourdieu insists the so called ``the politics of purity`` where the sociologist`s inner struggle for the autonomy of field can not be separated from critical external struggle. In this view, social engagement of sociologist can be possible only when the autonomy of field guarantees the objectivity of sociological knowledge produced in the field. According to Bourdieu, social space is the macro cosmos already differentiated with various individuals and groups, institutions. In this social space, sociological field is the autonomous space for producing sociological truth, and sociologists who are the participants of this space involve the social situation by means of their sociological knowledge. This means that sociologists should fight against ``the trojan horse`` who try to introduce the external power like the state, the political party, the media journalism, and the business into the field. They should achieve the more objective, professional knowledge through legitimate means anti inter surveillance. In this inner struggle of the field, sociologist can produce the effective weapons to resist and expose the domination of social evil.

      • 자유주의적 인간론 서설

        박호성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2 社會科學硏究 Vol.10 No.-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모순의 하나는, 한편에서는 평등 및 인간적인 정(情)으로 진하게 어우러진 공동체의식과 다른 한편에서는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상하관계로 잘 길들여진 위계질서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위계질서는 국가의 관료 제도뿐만 아니라, 기업, 교육기관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속속들이 그 뿌리를 드리우고 있다. 이 완강한 위계질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고 공동체적 단합을 뿌리째 뒤흔들어놓는 병원체로 암약한다. 무엇보다 공산권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의 전제적 세계 지배가 관철되었다. 그에 편승하여 현재 '세계화'의 폭풍이 또한 이 세계를 횝쓸고 있다. 그리하여 자유경쟁과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까지 세계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가 예찬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소리 높이 절규된다. 그 와중에 신 자유주의가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계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개인주의'와 개인에 대한 개입을 통해 공동체적 결속을 지향하는 '집단주의'의 대결로 점철될 것이라고 나는 전망한다. 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자본가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대부분의 강제적·규범적 사회통제 수단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원주의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는 자유주의적 정치구조는 결국 자본가를 중심으로하는 지배계층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반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주의 하에서는 계급적 불평등이 선천적이다. '자유경쟁'과 '기회균등'의 자유 민주주의적 구호 가장자리에는 인재나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음습하게 공생하고있다. 그를 치유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사유재산, 곧 '개인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곧잘 저지된다. 아울러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 사회의 다른 분야, 예컨대 사회조직, 경제구조 등에서의 민주화 노력도 시장경제의 원칙을 위배한다는 이름 밑에 흔히 억눌림 당한다. '개인'의 개렴은 본질적으로 보편적이고 평등주의적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모두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가치를 지닌 평등한 존재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은 '거인'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힘'의 논리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경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균등한 기회'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힘은 자본에서 나온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결국 '거인주의 '로 귀결된다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근대 이후의 역사는 '평등 없는 자유'(자유주의)에서 출발하여, 한편으로는 '자유 없는 평등'(국가 사회주의)의 실험적 거역(拒逆)을 거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속에서의 평등'(자유민주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단계로 항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비약적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우리 시대의 가장 실현 가능한 최고이상은 자유의 기본전제 하에서 최대한의 평등을 현실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한 자유', 즉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를 쟁취하기 위한 길에 보다 완강히 나서야 한 다. 오늘날 '혁명'이 유실된 틈새를 헤집고 신자유주의의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세계에서 그래도 실현 가능한 사회적 평등의 구현 수단으로 과연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복지국가 체제 정도가 아닐까 한다. In der koreanischen Gesellschaft herrschen das GemeinschaftsbewuΒtsein und die Rangordnung gleichzeitig. Vor allem seit dem Verfall des kommnistischen Systems herrscht die Willku¨rherrschaft des Kapitalismus. In diesem Zusammenhang schreitet das Gespenst des Neo Liberalismus einher. In der Zukunft wird der die Freiheit des Individuums bewahrende Individualismus und der durch die Intervention auf das Individuum die Solidarita¨t der Massen beabsichtigende Kollektivismus sich einander in konflikt geraten. Das liberlistische Individuum sei der Gigant, zumal der Liberalismus sich auf die Gewalt fuΒt. Deshalb sei der Individualismus des Liberalismus der Gigantismus. Um den Konflikt der gesellschaftlichen Ungleichheit zu beseitigen, wu¨rde das System des Wohlfahrtesstaates eine zuku¨nftige Alternative 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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