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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두 純福音神學大學 1991 論文集 Vol.2 No.-
철학적 사유의 한계는 그것이 “존재”의 의미를 모르는 데 있다기 보다 기술한대로 그것을 모를 것 같으나 사실은 알고 있고 알고도 또 모른다는데 있다.우리가 예거한 Sokrates가 그것을 모르기만 했다면 그는 결코 참된 앎은 곧 바른 행동을 뜻한다는 지행합일설을 내세우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참된 진리의 지식을 전달해 주려고 평생토록 안간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가 확신하는 바 때문에 독배까지 마시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모른다고 한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그는 무엇인가 많이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고 한 그는 사실상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 한가지만은 모르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궁극적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철학적 사유의 주체인 인간이 이와 같이 알고도 모르며 모르고도 안다는 이 사실에서,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필연적으로 상술한 사유의 제반 선험적 구조와 조건부를 따라 형식적으로는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는 반면 내실적으로는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 사실에서 기독교철학은 비 기독교철학과의 dialog의 실마리를 찾는 동시에 거기에서 그것은 또한 후자에 대한 Antithese의 근거도 발견하게 된다.세속 철학이 올바른 형식을 통해서 내실적으로 그릇되게 사유한다는 이 점 때문에 기독교철학은 그것을 가까이 하는 동시에 멀리하며 그것과 유대의 관계를 맺는 동시에 그것을 도전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그것의 왜곡된 자아 이해를 위로부터 오는 “참 빛”으로 새롭게 된 기독교인의 자아이해와 대결시키는 방향으로 상술한 사유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기독교철학의 근본 과제는 물론 이러한 철학적 사유일반에 대한 transzendentale Kritik을 수행함으로 세속 철학 앞에서 자체를 정당화 시키고 후자에게 그것의 그릇된 존재 이해 및 자아이해를 일깨워 주는 변증적인 업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그것의 보다 더 중대한 과제는 인간이 원래부터 “피투”되어 있고 또 원래부터 이러한 혹은 저러한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하고 있는 세계라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들이 종합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급진적으로 갱신된 안목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며 그렇게 보는 바를 어떻게 학적 ·이론적으로 재구성 하느냐 하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