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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하 조선 상업회의소의 철도부설운동(1910~1923)

          전성현 ( Sung Hyun Jeon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08 石堂論叢 Vol.0 No.40

          강제병합 직후 철도부설은 조선의 부원개발과 식민통치기반의 확보 및 지역 경제기반의 확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관설철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설철도는 각 지역 경편철도회사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고자 하는 조선 내 일본인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 자본가들의 지속적인 설립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지역의 일본인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철도부설요구와 이를 받아들인 조선총독부의 관설철도부설과 경편철도조사 및 보조정책은 경부·경의선의 부설이후 늘어나지 않던 철도 선로를 폭발적으로 늘려 1,000마일 시대로 접어들게 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재정독립계획으로 잠시 주춤하던 철도부설 등 조선의 산업개발은 1차 대전의 호황에 직면한 일본자본이 차츰 조선에 진출함에 따라 다시 본격화되었다. 더불어 상업회의소는 「조선상업회의소령」을 통해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하고,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를 조직하여 산업개발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조선 상업회의소는 특히 평원선의 부설과 지역 경제선인 사설철도의 부설 및 보조금지급을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상업회의소의 요구와 주장은 평원선 부설 및 사설철도회사의 설립과 면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곧이어 전후공황이 일본을 덮치자, 조선의 산업개발은 바로 침체에 빠졌다. 더군다나 3.1운동이라는 조선인들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통치행정비에 더 많은 예산을 투여하였다. 조선 상업회의소는 전후 공황과 3.1운동으로 인한 조선 산업개발의 지연·중지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그 대응책으로 조선철도망의 속성을 주장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 수립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산업조사위원회의 설치로 이루어졌고, 산업조사위원회의 개최로 조선철도망 속성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통치안정화를 위한 치안유지와 본국을 위한 산미증식계획에 몰두하였다. 조선 상업회의소가 요구하던 조선 산업개발은 점차 활기를 띄기는커녕 침체일로에 빠졌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철도부설계획을 기다릴 수 없었고, 직접 철도부설계획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산업개발을 둘러싼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조선 상업회의소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와 조선사설철도협회와의 논의를 거쳐 `4大 要項` 중 첫 번째인 `철도부설 10개년계획`을 수립하도록 추동하였다. 연합회의 `철도부설 10개년계획`은 남북을 연결하는 경부·경의선(복선)과 동해안선이라는 두 종관철도와 동서를 연결하는 평원선과 경릉선이라는 횡단철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이 계획은 관사철도의 부설과 개량을 주장했던 기존의 요구사항과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국유철도의 선로와 그 필요한 경비를 제시하는 한편, 사설철도의 경우 보급금의 한도를 2배로 증가시켜 제출하고 있는 점, 그리고 장차 부설할 새로운 철도까지 선정하여 구체적인 경비까지 제시한 점에서 진일보한 계획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상업회의소의 `철도부설 10개년계획`은 적극적인 `東上運動`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의 긴축재정과 관동대지진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후 `4大 要項` 중 철도부설에 그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들의 적극적이고 일관된 정치적 활동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정·재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향후 조선철도의 중심계획인 `朝鮮鐵道 12年計劃`이 수립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Immediately after Chosun`s annexation into Japan, Japanese capitalists began to request the construction of railroads in the colony. Accepting the reques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laid state-owned railroads and, through researching existing light railways and taking auxiliary policies, constructed the Gyeongbu Railroad Line. This explosively increased the total railroad length of Chosun to 1,000 miles.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Chosun, including railroad construction, had been stagnated for some period because of the financial independence schem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But it began to be driven in earnest as Japanese capitalists who benefited from economic booming brought by the 1st Word War rushed to Chosun. Under this circumstance, Chosun Chamber of Commerce was restructured with a majority of its members consisting of Japanese businessmen in accordance with 「the Ordinances of the Chosun Chamber of Commerce」. Then it organized Chosun Association of the Chmabers of Commerce which in turn actively made requests for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the colony. The regional chambers of commerce and the association insisted that the Pyeongwon Railroad Line and private railroads, which might contribute to regional economy, should be constructed and that government subsidies should be given to the construction. This greatly influenced the construction of the Pyeongwon Railroad Line and the establishment and licensing of private railroad companies. But then, Japan fell to the state of economic panic. In the aftermath of the situation,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Chosun was delayed again. After facing the resistance of the people of Chosun, especially,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invested more budgets to set stronger fundamentals for the sustainable ruling of the colony. The association discussed a possible measure against the delay or suspension of Chosun`s industrial development brought by the post-war economic panic of Japan and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and insisted the rapid construction of railroad networks around Chosun. In addition, it requested the Janapese colonial government to take a policy to fundamental solve problems related to the colonial industrial development. This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Industrial Research Committee. The meeting of the committee formed a consensus that railroad networks should be built up throughout Chosun as earliest as possible, an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started a preliminary survey for the network construction. But in fact,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devoted itself more to the stable ruling and public order maintenance of Chosun and implementing its plan for increasing rice production for the mainland Japan. This made more stagnated Chosun`s industrial development, requested by the association, rather than promoting it. The association couldn`t wait for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railroad construction plan any longer, so it made another railroad construction plan of its own. Seeking towards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Chosun, the association consulted with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and Chosun Association of Private Railroads and finally established `the 10 Years` Plan of Railroad Construction(鐵道敷設 10改年計劃)` as the first of `the 4 main principles(4大要項)` of the colonial industrial development. According to the plan, two south-north railroads, the Gyeongbu·Gyeongeui(double track) and the East Sea Railroad Lines and two east-south railroads, the Pyeongwon and the Gyeongreung Railroad Lines were scheduled to be constructed. Despite `the Dongsang Movement(東上運動)` was actively driven, `the 10 Years` Plan of Railroad Construction` by the association failed to be properly implemented because of the Japanese government`s budget cuts and Kanto Earthquake Disaster. Since then, however, the association put its focus on a few railroads that was most urgently needed according to `the 4 main principles` as above mentioned. Later, positive, consistent political activities by the association contributed to establishing `the 12 Years` Plan of Railroad Construction(朝鮮鐵道 12年計劃)` and considerably completing railroad networks of Chosun which had been driven by the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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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당(石堂) 정재환(鄭在煥)선생의 문화유산·기록유산에 대한 계승 노력과 인식

          최영호 ( Choy Young-ho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7 石堂論叢 Vol.0 No.69

          이 글에서는 동아대학교 초대총장 石堂 鄭在煥의 우리민족 문화·기록유산에 대한 계승·발전노력과 인식·위상을 새롭게 진단하였다. 석당은 백과사전류에 법조인·교육자로 정의되고 있지만, 1970년대부터 전문연구자들에게 대표적인 文化愛護家로 평가받았다. 민족 문화·기록유산의 보존과 창조적인 계승·발전에 다양한 노력을 지속하였기 때문이다. 매장문화재의 발굴과 함께 유물의 기증·구입, 방치 유물의 수습, 해외 유출의 저지 및 입수 등과 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선사시대 이래 근현대에 이르는 문화·기록유산 등을 수집하였다. 수집·지원한 유물·유적 가운데는 국보·보물 및 국가 사적 등으로 지정된 국가문화재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동궐도」 및 「土器隆起紋鉢」 등의 경우에는 제3국으로 유출될 위기에 있던 문화유산이었다. 석당은 1955년부터 문화·기록유산을 발굴·수집·보존 및 교육·연구하고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구조적 기반으로 국문학과·사학과도 설립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고고학·고대사·중세사·근세사와 한문학·향가·민속학·한글·서지학 등에서 풍부한 연구·교육역량을 갖춘 저명 인력들도 영입하였다. 학생들의 고적순례·발굴·유물전시회 등과 같은 현장역량강화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석당은 문화·기록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관리·연구할 수 있는 도서관·박물관을 개관하고 1950·60년대에는 독립건물도 확보하였다. 이에 1966년에는 우리대학 박물관이 전국에서 으뜸되는 위상을 확보하였으며, 도서관 소장의 古書도 국내에서 손꼽힐 규모였다. 고서 가운데는 『고려사』, 해인사대장경판 및 諸경판의 인출본 완질 등 고려시대를 연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원천기록유산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박물관에는 국보·보물급의 문화재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었다. 석당은 석당학술원의 전신인 古典硏究所·韓國文化硏究所와 같은 전문연구기관도 1958·59년 각각 설립·운영하였다. 고전연구소에서는 1958년부터 남북한 최초로 『고려사』 역주사업을 착수하여 1973년까지 『譯註高麗史』 11책을 완간하였다. 이에 우리대학은 해당 분야에서 전국적인 인지도와 지명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석당이 이런 노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은 우리나라의 역사·문화에 대한 지식수준 및 관심과 함께 문화·기록유산에 대한 객관적인 식견과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漢學·서예와 함께 한국학에도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민족문화의 창달을 우리대학의 건학이념으로 채택·실천하는 등 문화·기록유산의 창조적 계승·발전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태도와 실천노력은 1959년 부산시문화상의 수상으로 객관적인 위상을 확보하였다. 특히 1970년대 鶴山 金廷鶴은 석당의 이러한 공적을 文化愛護家로 평가하였으며, 그 위상과 공적도 전국적인 인지도와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This paper attempts to newly analyze into the Succession―efforts and perception of Dr. Jeong Jae―Hwan's cultural heritage & recorded heritage. he has served as the first president of Dong-A(東亞) University from the 1950s to the 1970s, has called himself―name to the SeokDang(石堂). The SeokDang has been defined as a law professional & educator in the encyclopedias. However, he has already been evaluated as a lover of cultural heritage & recorded heritage by professional experts who has acted in the local community since the 1970s. because of, he had made the various efforts to preserve the cultural heritage & recorded heritage of the Korean nation that had been built from prehistoric times to modern times. he had continuously collected this heritage from the 1950s to the 1970s, had systematically preserved this heritage. in addition, he had creatively developed this heritage. his collections are currently included in the national treasures & treasures of Korea. The SeokDang has established the Department of History & Department of Korean Literature that can systematically learn about this heritage, has also established the GoJeon(古典) Research―Institute & the Korean culture Research―Institute that can research in depth. the two Research―Institute are the forerunner of the Seokdang―Academy. he has established the Museum(Seokdang Museum) & Library(Hamjinjae : 函珍齋) of Dong-A University that can systematically preserve this heritage, has invited a prominent expert to our university. as a result, the cultural & recorded heritage of Dong-A University's Library & Museum had become the prime scale in the 1960s. especially, he has supported the translation & annotation project of the Koryo-Dynasty's History (『高麗史』) that the nation should carry out. This effort of the SeokDang has grown from considerable insight & interest & perception about the Korean History & Culture. his cultural perception was in the creative succession and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 Culture. because of this, he has already been evaluated as a lover of cultural & recorded heritage by professional experts of poste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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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연구(area studies)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인류학적 성찰 : 호남 지역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홍석준 ( Seok Joon Hong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0 石堂論叢 Vol.0 No.46

          현대사회는 전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와 지역문화(local culture)가 공존하는, 복합적이면서도 다양한 문화적 현상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지역연구``(area studies)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이러한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기울여 온 인류학에서 지역에 대한 이론적 관심과 실천의 역사는 다른 학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인류학이 지역연구에 기여한 바는 지역에 대한 관심과 실천에 있어서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특정 지역의 문화 전반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온 문화인류학자들은 초창기부터 부족, 종족, 국가 단위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단위를 지역연구의 기준으로 사용할 것을 주창해 왔다. 그러나 지역연구가 활성화되고 발전함에 따라 부족이나 종족, 국가 단위의 분류는 지역연구의 대상과 영역을 사실상 협소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문화의 개념에 기초한 구분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여기서는 지역연구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작으로, 지역연구와 문화인류학의 관계를 살펴본 후, ``호남 지역문화`` 연구를 사례로 기존 연구 성과에 대한 평가를 거쳐 향후 호남 지역연구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나아가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지역연구로서의 호남 지역문화 연구의 방향성을 정립하고, 이를 위해선 어떠한 이론적, 방법론적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는 기존의 호남 지역문화 연구에 대한 비판적 해석과 재해석을 요하는 일로, 호남 지역문화 연구의 지평을 확장, 심화하기 위해선 지역문화를 다루는 다양한 학문 분야로부터의 다각적인 접근을 어떻게 통합 또는 융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theory and methodology of area studies critically. In doing so, I investigate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area studies and anthropology, estimate the outcomes of previous ``honam(호남)``(including Jellanam-do and Jellabuk-do provinces which are located in Southwestern area of Korea Peninsula) area studies, and propose the orientations towards the development of ``honam`` area studies in the future. For this purpose, I review some issues on the theoretical and methodological works to reflect and develop the ``honam`` area studies in Korea. And I think that this study is to (re)interpretate the outcomes of previous ``honam`` area studies, especially focused on ``honam`` culture and society, including cultures and societies of islanders` everyday of lives, urban history and culture of port cities, and maritime culture and history and folklore. Furthermore, I review how to integrate the various approaches of different disciplines and fields of ``honam`` area studies into a new academic area or an united knowledge system to provide the proper understanding of ``honam`` culture and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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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판 인쇄술이 동아시아 문화에 미친 영향

          ( Huai Yuan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4 石堂論叢 Vol.0 No.58

          목판 인쇄의 역사는 우리에게 목판 인쇄술의 탄생과 발전이 사회 문화적 요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조판 인쇄술의 탄생에는 두 가지 기본 조건이 있다. 하나는 물질 기술적 조건이며 또 하나는 사회 문화적 조건이다. 일찍이 진(秦)·서한(西漢, BC 211-218년) 시기, 중국에는 이미 금속·대나무·벽돌에 새겨서 탁본하는 숙련된 기술이 있었다. 동한(東漢, 25-220년) 시기에 이르면 문자 기록 장치로 부드러우면서도 편리한 종이가 발명되었다. 이로써 목판 인쇄술이 탄생하는데 필요한 물질 기술적 조건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졌다. 그러나 물질 기술적 조건만으로 목판 인쇄술이 탄생할 수는 없다. 반드시 상응하는 사회 문화적 조건이 있어야만 한다. 대량의 ``지식 수요``와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독서 인구``가 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사용이 편리하면서도 원가는 저렴하며 많은 내용을 저장할 수 있어 사람들의 사상 문화적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목판 인쇄술을 발명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사회 문화적 요구는 기술 혁신과 발전을 가져왔고 기술 혁신과 발전은 사회 문화적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이 글은 목판 인쇄술의 발전 과정을 통하여 다섯 가지 측면에서 목판 인쇄술이 동아시아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첫째, 한자를 널리 보급시켰다. 둘째, 불교문화 전파를 촉진시켰다. 셋째, 유교문화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넷째, 사상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다. 다섯째, 동양 예술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 동아시아 문화권, 서구의 기독교 문화권, 그리스 정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인도 문화권 등 5대 문화권 중에서도 동아시아 문화권의 목판 인쇄술은 지역·인종·문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동아시아 문화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판 인쇄술은 탄생―발전―성숙―정점―쇠락에 이르기까지 1500여년이라는 세월을 거쳤다. 이 시기는 곧 동아시아 문화의 중요한 발전기이기도 하다. 목판 인쇄술은 끊임없는 자기완성의 과정을 통해 사회 문화적 요구에 부합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목판 인쇄술이 가지는 고유의 사회적 기능은 동양 문화의 전파, 문화 통합, 문화적 동질감, 문화 자정(資政) 등 네 가지 방면에서 커다란 작용을 발휘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탄생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이 깊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It may be firgure out from the history of block printing that the produce and developing of block printing are closely related to the requirement of socity and culture. There`re two essential conditions for the birth of block printing: technology and culture. As early as Qin and Xi Han dynasty, the technology of metal, bamboo even bricks printing has been mature. Until Dong Han dynasty, the soft and portable carrier of writing, which called paper, is invented, the produce of block printing had ingredient of necessary conditions of material. However, It is not certain of produce with which mentioned above, It needs appropriate culture conditions too, only a large number of requirments for knowledge and reading can inspire the produce of block printing, which is appling simply, cost inexpensive and high capacity. It also satisfied the need for thinking and culture. The requirments of culture and socity leads to the innovation of technology, and which satisfy the requirments in turn. The paper analysis the affect of east asia culture by block printing in five section through the developing of it: ⅰwhich spread the chinese characters, ⅱ which accelerate the accepted of buddhism, ⅲ which expands the affect of confucianism, ⅳ which promote the communication of ideology, ⅴwhich reveal the feature of east culture. In five cultural zones which consist of east asia cultural zone, west europe cultural zone, east europe cultural zone, middle east cultural zone and India cultural zone, the formation of east asia cultural zone effected by many factors such as region, ethnic group and culture. In this progress, the contribution of block printing should not be neglected. The block printing has gone through 1500 years from birth, developing, mature, glamour to decline, it is in accord with the period of important east asia culture expansion. The block printing was always trying hard to adapt and satisfy the needs of culture and socity in the progress of self-improvement, and it act as irreplaceable role in cultural spreading, cultural integration, cultural identity and bureaucracy forming and which ensures the characteristcs of east asia cultural zone directly. It worth to be studied by futu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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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당 정재환선생이 수집한 기록유산과 그 가치 - 특히 『고려사』 판본과 『고려대장경』 인경본의 가치를 중심으로 -

          김광철 ( Kim Gwang-cheol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7 石堂論叢 Vol.0 No.69

          동아대학교 고서 도서관 석당함진재에는 동아대학교 설립자 석당 정재환 총장이 수집한 고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 고서는 한국본, 중국본 등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주제별로는 경서를 비롯하여 『고려사』 등 사서, 해인사 팔만대장경 책판 등 불경, 법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서 그리고 문집 등 다양한 주제의 고서들이다. 그 수량은 經部 556종 2,312책, 史部 1,175종 7,331책, 子部 2,014종 8,118책, 集部 2,005종 4,409책 등 모두 5,750종 22,170책에 달한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동아대학교의 고전에 대한 연구와 역주 사업의 전개는 대학이 수집한 고서가 상당 수준에 올라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고서의 수집과 정리작업을 활성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석당선생의 수집한 기록유산의 가치를 『고려사』 판본과 『고려대장경』 인경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고려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나라 2대 정사의 하나이다. 동아대학교 소장 목판본 『고려사』는 보기드믄 완질의 판본으로, 『고려사』 139권을 75책으로 분책하여 15개 함으로 분류하고 있다. 책은 그 권 수를 일정량씩 묶은 것이기 때문에 책 수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량과 내용을 고려하면서 요령있게 묶을 때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 동아대본 『고려사』는 규장각 소장의 85책 태백산사고본과 대조해 본 결과, 그 광곽과 판심의 형태, 자형이 같은 모습이며, 오탈자가 동일하게 추출되고 있는 점도 동일한 판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함진재 소장 고려대장경 인경본은 1963년 4월부터 1968년 9월까지 인출한 13질 가운데 1질이다. 동아대학교 소장 고려대장경 인경본의 가치는 고려대장경판이 갖는 본래의 가치와 인경과정과 방식에서 비롯된 가치 두 측면에서 엿볼 수 있다. 고려대장경은 현존하는 대장경판 가운데 최고의 정확한 대장경이다. 함진재 소장의 고려대장경 인경본에는 인경 당시의 각수 자료가 상당 부분 원형대로 인경되어 있어 원천자료를 보다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들 각수 자료 가운데는 그들의 출신성분이나 발원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어 고려대장경의 역사·문화적 실체와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밝힐 수 있었다. There are many ancient books in the Hamjinjae(函珍齋) of Dong-A University. The volume of books is 22,170 books of 5,750 kinds. These ancient books have collected by Jeong Jae-Hwan, the founder of Dong-A University. These books are classified in the form of Siku Quanshu(四庫全書). The volume of Gyung-Bu(經部) is 2,312 books of 556 kinds, Sa-Bu(史部) is 7,331 books of 1,175 kinds, Ja-Bu(子部) is 8,118 books of 2,014 kinds, Jip-Bu(集部) is 4,409 books of 2,005 kinds. 『Goryosa(高麗史)』 is essential data for the study of the Goryeo period and is a precious cultural heritage of ours. There are 80 editions of 『Goryosa』 home and abroad these days. But most of them are missing volumes and only 5 complete sets of works exist including one owned by Dong-A University (hereinafter the DAU 『Goryosa』). The DAU 『Goryosa』 printed from woodblocks is compiled into 75 volumes, combining some of Ji(志) and Yeoljeon(列傳) into a book in one volume or a book in three volumes. The DAU 『Goryosa』 is the same book as one in 85 volumes owned by Gyujangkak(奎章閣), Seoul National University. It is confirmed that quite a few misprints and omitted words are found in 『Goryosa』 printed from woodblocks. This resulted from the fact that missing and omitted words had been increased in the process of publication from the first edition to Eulhae letter edition and to final carving edition in woodblocks. However quite a few misprints and omitted words there are found in 『Goryosa』 printed from woodblocks, they limit to only a small number among 800 thousand words in all. The 『Tripitaka Koreana(高麗大臧經)』 wooden printing blocks have been recognized as a priceless Korean cultural heritage since the 13th century. They represent the advanced level of Buddhist studies at that time and its printing technology. The 『Tripitaka Koreana』 also reflect the universal cultural values of 13th century East Asia. This study analyzed into the source-value of the 『Tripitaka Koreana』 in the Hamjinjae(函珍齋) of Dong-A University. This Tripitaka Koreana was printed from 1963 to 1968. This Tripitaka Koreana has been printed in a circular pattern, providing a rich source of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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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 창의성 계발을 위한 전통놀이 활동 모형

          박영태 ( Young Tar Park ), 하수연 ( Soo Yean Ha ), 임경순 ( Goung Soon Im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0 石堂論叢 Vol.0 No.48

          유아의 창의성 계발을 위한 전통놀이 활동 모형을 개발하는 것은 전통놀이의 교육적 활용에 크게 도움을 줄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본 연구는 창의성 의미 및 장애요인을 분석하고, 단순한 놀이 활동에서 벗어나 전통놀이 활용의 필요성을 분석하여 유아의 창의성 계발을 위한 전통놀이의 활동 모형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개발된 전통놀이 활동모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활동모형은 상황제시, 질문하기, 정보탐색하기, 상상하기, 준비하기, 놀이하기, 칭찬하기 등 7단계로 구성된다. 둘째, 상황제시 단계에서는 전통놀이에 관련된 그림이나 동영상을 보여줌으로서 유아의 흥미를 유발하고, 나아가 그 전통놀이와 관련된 학습을 시작한다. 셋째, 질문하기 단계에서는 유아들이 전통놀이에 관련된 그림이나 동영상을 보고 난 뒤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도록 한다. 넷째, 정보탐색하기 단계에서는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유아가 이야기 하고 교사가 정보를 제공한다. 필요하면 전문 인사, 책, 인터넷, 자연 속에서 탐색한다. 다섯째, 상상하기 단계에서는 탐색된 정보간의 관계 및 그 정보를 중심으로 연상되는 정보망을 만든다. 여섯째, 준비하기 단계에서는 그 전통 놀이를 실행하기 전에 필요한 준비물을 만든다. 일곱째, 놀이하기 단계에서는 준비하기 단계에서 구상한데로 놀이를 실행한다. 여덟째, 칭찬하기 단계에서는 놀이가 끝난 후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에 대해 토론을 한다. 각 단계에서 자신이 느낀점을 자유로이 발표하게 하고 관련되는 친구를 칭찬해 준다. Building activity models using traditional games for early childhood creativity development is considered to be largely effective to the usage of traditional games in educational purposes. Therefore, this research analyzes the meaning and the challenges of creativity, and takes a step further from simple game activities to traditional game activity models for early childhood creativity development by analyzing the necessity of such activities. The traditional game activity models are as follows: First, The activity model consists of seven steps: a situation suggestion, a questioning, a research, an imagining, a preparation, a play, and a complimenting. Second, in a situation suggestion step, we start by showing the children clips and photos relative to the traditional activity to draw their attention, and continue educating them with relative information. Third, in a questioning step, we lead them to ask questions from the clips and photos they have seen from the previous step. Fourth, in research step, we lead them to answer the questions from the previous step by giving them more information. If necessary, continue the research by consulting professionals, books, internet, or nature. Fifth, in an imagining step, build an information grid based on the input from the previous step by seeking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m. Sixth, in a preparation step, collect and build equipments needed for the traditional game activity. Seventh, in a play step, execute the play as imagined and prepared in previous steps. Eighth, in a complimenting step, discuss the whole process and express what each child have perceived through the activity and give a compliment to each other. This Model gives an overall structure and some of the steps can be extended or omitted depending on the given time. However, the preparation and playing step cannot be omitted, as they are the execution of the traditional activities themselves. When any other steps are omitted, it is recommended that the teacher should give an explanation relative to the st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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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컬리즘과 지역문화연구

          홍순권 ( Soon Kwon Hong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0 石堂論叢 Vol.0 No.46

          최근 학계에서는 글로컬라이제이션을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한 보완적 또는 대안적 현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글로칼적인`` 세계화의 중요한 특징은 교류의 주체가 반드시 국가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지역단위 또는 개별 생산단위 주체간의 직접적인 교류가 확대된다는 데 있다. 이는 ``지역의 자립``과 ``지역과 지역간 네트워크``를 통한 새로운 차원 수평적 관계의 새로운 공동체간 관계의 형성이라는 이념적 지향을 담고 있다. 오늘날 글로컬리즘에 대한 관심의 고조 현상은 세계화에 대응한 지역(지방)의 자율성에 대한 인식의 확대와도 조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지역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해석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문화에 대한 관심은 산업화의 관점에 머물고 있을 뿐, 아직은 ``글로컬리즘`` 시대에 걸맞은 지역문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새로운 가치의 창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글로컬리즘에 의한 지역문화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글로컬리제이젼을 문화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면, ``글로컬리즘``이란 인간적 삶의 표현으로서의 문화가 생산되는 공동체로서의 지역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적 관계망을 의미하는 개념이 된다. 한마디로 ``세계적인 동시에 자국적인[지역적인] 공간``이 ``글로벌-로컬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의 발전이 바로 ``글로컬리즘 공간``이다. 이러한 문화 공간을 해석하는 문화이론이 곧 ``문화-글로컬리즘``이다. 지역문화는 중앙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생산과 소비, 그 양자를 매개하는 유통의 문화공간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즉, 글로컬리즘의 관점에서는 민족문화에 있어서 지역문화의 자립화와 국제간 교류(세계화)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며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민족문화의 범주를 뛰어넘어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현대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다각적으로 파악하고, 도시문화의 실상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중심으로 세계 여러 도시문화의 비교 연구를 통해 다문화주의 또는 글로컬리즘 시대의 도시화, 즉 지역문화의 이상적 모델을 탐구할 수 있다. 오늘날 도시문화의 특징적 현상인 이주문화, 다문화 또한 글로컬리즘의 해석이 요구되는 지역문화 연구의 주요한 과제이다. The concerns about the local culture have grown rapidly since the local autocracy system began in the early 1990s in Korea. As a reflection of such a phenomenon, the concept of the glocalization or glocalism has widely spreaded so far recently in the academical society of Korea. The ``glocalization`` is a newly-coined word which was combined with both words, globalization and localization. The glocalization or the glocalism means that the today`s world has inclination to develop both the globalization and the localization which are quite different and contradicted each other in appearance. The glocalization or the glocalism was used as a business terminology at least before 1990, but it is used now also as a cultural or sociological concept explaining the new phenomenon which happens between the regions(local communities) nowadays. The ``Hanlyu``(the spread of the Korean styles) is often incited as one of examples which support such a view. The glocalization does not mean the parallel phenomenon of both the globalizaion and localization. It expresses a will to make the new formation of the horizontal relation between the local communities through the various information networks. In other word, it could be translated into the inter-local relation, which is different from the inter-national relation. It is generalized more and more rapidly in a few decades. It is a cultural-social phenomenon internationally, but can not be identified with the cutural imperialism. Today the great concern about the glocalism demands the new recognition on the local culture. That is, we have to study and interpretate the local culture newl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glocalism. Because the local culture is not the sub-culture subjective to the national or global culture, but it belongs to its independent category of the local culture itself from the viewpoint of glocalism. In short, the space of glocal cuture explained as a local space and a global space at same time. This explanation of cutural space, so-called ``the culture glocalism`` is supported by the culture theorist such as Ramond Williams and other theorists on cultural science. There are many examples which explain the glocal phenomenon of culture in the past pre-modern society as well as in modern or post-modern society. Through all the times the best example of the glocal cultural space is the city. As we know, the city has been and is now the symbolic space of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 local communities. Especially, the open ports of the modern East Asia will be good examples of the research if we want to study the urban culture as a local culture at this time from the view of the glocalism. So, I suggest the joint research of culture, history, and the other social sciences about the he open ports of the modern East Asia, which will help us understand more deeply the phenomenon of the cultural glocalism in the 21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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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당 정재환선생의 건학이념과 동아대 구덕캠퍼스 계획 - 구덕캠퍼스 건축물의 근대문화유산 가치 -

          김기수 ( Kim Ki-soo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7 石堂論叢 Vol.0 No.69

          1946년 11월 1일 개교한 동아대학교는 1951년 10월 5일 교사를 현재의 구덕캠퍼스 위치인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3가 1번지로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제2관(1953년 9월)을 시작으로 본관(1954년 11월), 제3관(1955년 9월), 제5관(1955.10), 제2학생회관(1956.8), 과학관(1957년 12월), 중앙도서관(1957년 12월)을 차례로 준공하여 1959년 2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다. 1985년 승학캠퍼스 준공으로 대학본부를 이전하였으며, 1990년 구덕캠퍼스에 부속병원을 준공, 인문학 중심의 부민캠퍼스가 건립하였다. 본 논고는 동아대학교 설립자인 정재환 선생의 철학과 건학이념이 담겨있는 대신동 캠퍼스를 대상으로 캠퍼스 구상계획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을 정리하였으며, 나아가 주요 건축물이 갖는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여 이들 건축물이 갖는 근대문화유산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해방직후인 1946년 11월 자주적 근대교육과 함께 시작된 동아대학교의 교사시설과 구덕캠퍼스는 근대기 부산지역 교육시설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가치를 갖고 있으며, 특히 중앙도서관(현 석당기념관 1957.12), 제 2학생회관(구 과학관 1957.12), 박물관(구 소강당, 특수교실 1957.2)에서는 근대기 건축이 갖는 조형적 특성과 함께 지역건축의 건설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사학교육기관으로서 설립자의 건학이념에 따른 건축적 영향이 구덕캠퍼스 계획과 구상에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중앙도서관 건물은 근대문화유산 가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The Dong-A University is one of private comprehensive educational institutions in South Korea with rich history and tradition, and we celebrated the 70th year of the establishment of the Academy in 2016. The history of Dong-A University dates back to 1946 when JaeHwan Chung an eminent statesman of modern South Korea, founded “Dong-A” as a private academy on the site of the Busan. In 1951, he started established Guduck Campus in Busan, South Korea. The plan of Guduck Campus was applied to the School Spirit and Educational Philosophy, justice and truth and freedom, pursued by Jae-Hwan Jeong. This thesis is results summarizing the factors that JaeHwan Chung's School Spirit and Educational Philosophy have influenced the Guduck Campus plan. Also, I wanted to research the historical and Modern Cultural Heritage value of the building in Guduck Campus. Through the facility and building of Guduck Campus Founded in November 1946, I could have the opportunity to check the transition process of educational institutions in modern times. In particular, I was able to identify various materials to understand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and the construction process in the central library(1957.12), the second student council(1957.12), and the museum(1957.2). In addition, it is confirmed that the School Spirit and Educational Philosophy are implemented in various ways. In particular, the Central Library building has historical value of the Modern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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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의 누정자료 조사연구와 그 콘텐츠의 활용 방안에 관한 연구

          정용수 ( Yong Su Jeong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06 石堂論叢 Vol.36 No.-

          본고는 우리의 누정문화를 통해서, 현재 남아있는 영남루, 촉석루, 함벽루 등 영남3루 누정시문의 콘텐츠 활용 방안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그 연장선에서 최근 지상매체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울산의 태화루를 오히려 새로운 시각에서 고층으로 차별화할 필요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 우리 산업에 불고 있는 문화콘텐츠 활용방안에는 인문학도로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기술이 선도할 수밖에 없는 현대문명사회에서 IT 기술이나 그 실용성에 있어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오늘날 문화콘텐츠를 논의하는데 있어 앞서가는 기술을 뒤에서나마 바르게 가게 하는 것이 인문학적 접근의 가장 중요한 요목이란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나라 현대 도시건축물의 타워 문화와 가든 문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우리의 누정문화를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탄탄하고 찬란한 우리의 전통적 기반을 보여주며,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것이다. 가든은 수평적이고 타워는 수직적 세계이다. 우리의 누정문화에 이미 이러한 전통이 내재하고 있기에, 우리식 누정문화가 콘텐츠화 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을 파편화해서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을 결합하고 이것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현대 도시건축물이 수직적 건축물과 기술력을 결합한 것이라면, 전통에 기반한 우리의 정자문화는 그것 자체로써 콘텐츠가 될 수 있고 이웃 나라와 변별력을 갖출 수 있다. 다만 이것을 소개하거나 우리식 새로운 타워를 지을 때는 그 속에 우리에게 맞는 콘텐츠를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할 때 현대 도시건축물을 짓는 지자체에서는 도시 타워나 도시 가든의 콘텐츠로써 누정문화를 참고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 구체적인 활용방안을 본고에서 하나하나 제시하였지만, 앞으로의 논의과정을 통해서 더욱 새로운 시각과 콘텐츠의 개발이 가능하리라 본다. 이런 연구가 보다 개방적으로 논의되면 더 많은 콘텐츠 개발이 가능하리라 믿고 있다. 단편 연작시, 팔경시, 십경시와 같이 문학적 향유 전통을 콘텐츠화 하여 지방화 시대를 맞은 우리 도시에 `새로운` 타워와 가든을 건립한다면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관광명소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his paper will attempt to investigate the data of towers and pavilions in Milyang and discuss a couple of related issues about how to use the data. The poems inscribed on Youngnamru, Chogseogru, and Hambyougru are so well-preserved that they can be utilized as cultural contents. Taehwaru, however, does not currently remain, so a new point of view is needed-for instance, using the area for a multistoried building. The tower and pavilion culture presents us a way to combine the tower culture and the garden culture in modern urban constructions. If the tower and pavilion culture can be developed into cultural contents, our glorious traditional foundation can be spread out to the world and our culture can be globalized. Modern urban buildings are to integrate vertical art and modern technology. Those cultural features are already imminent in our tower and pavilion culture. For the differentiation of a culture from another, the culture should be contentualized. Therefore, in trying to introduce new contents and build a genuine Korean new town, we should discover or create our own contents to be able to show the Korean tower and pavilion culture. It is also recommended that the municipalities refer to the traditional tower and pavilion culture for urban tower and garden contents when they build modern urban buildings. The paper has suggested some concrete ways of using the contents for modern urban architecture. A further discussion is to ensure us to be in a better position for a newer perspective and contents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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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夏家店上層文化在東北亞靑銅文化中的重要地位

          오은악사도 ( Enyuesitu Wu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07 石堂論叢 Vol.0 No.38

          하가점 상층문화는 동북아지역에서 가장 발달된 청동기시대 후기 문화로서 연대는 상주시대에서 춘추시대 초기(기원전 11세기~기원전 7세기)에 해당된다. 이 문화는 발달된 靑銅器 冶鑄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 문화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어서 자체 생성된 器類와 어떤 동물문양들은 東린의 靑銅器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 어떤 종류의 器類 등은 하가점 상층문화를 경유하여 동북지역 및 한반도에까지 전파되었다. 하가점 상층문화 지대가 위치한 곳은 農牧교착지대로서 이 지역의 거주민들은 동남부와 동부의 농경민족들과 빈번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북방과 서방의 초원지대에 거주하는 초기유목민들과의 사이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가점 상층문화의 거주민들은 농업생산 공구들의 출토를 통해 정착생활을 하면서 일정한 농업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 목축이나 수렵도 그들의 경제생활 중에서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병기나 마구, 그리고 동물문양은 그들 문화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문화가 초기 유목문명의 맹아기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하가점 상층문화가 번영시기에 있었을 때 대외적 교류는 상당히 활동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주변지역 청동기 문화의 어떤 중요한 요소들을 흡수하였으며 또한 인접하고 있는 다른 지역의 청동기문화에도 직접적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이 문화는 동북아 내지는 유우라시아 초원지대 동부지역의 청동기시대 후기 문화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was the most developed culture of the Bronze Age in Northeast Asia. It was chronologically between the Shang Zhou period and the early Warring States Period(11 B.C.~7 B.C.). The culture had its own developed industry of the metallurgical casting of bronze ware. In this relation, some kinds of wares and animal patterns the culture initially had influenced the bronze age culture of its eastern neighbor. While, other kinds of wares were introduced to Northeast Asia and even the Korean peninsular via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Geographically,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covered a crossed region of farming and stock raising. Inhabitants of the region made frequent exchanges with agricultural peoples in the southeastern and eastern regions of Asia. They also maintained close relations with people of the early nomadic culture who resided in the northern and western regions of the continent. Those inhabitants lived in a settlement while they engaged in agricultural production by using farm instruments. Stock raising and hunting were also important parts of the residents` economic life. Certain weapons, harnesses and animal patterns were unique characteristics of the upper class culture. They indicate that the culture was in a germinal state of the earlier nomadic civilization.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developed foreign exchanges very actively when they were in prosperity. Through the exchanges, the class absorbed key elements of bronze age cultures of its neighbors. It also directly or indirectly affected such cultures of other neighboring regions. In conclusion, it is clear that the upper Xiajiadian culture had a very important position in the late Bronze Age of Northeast Asia or the Eurasian p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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