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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회화는 조선후기의 회화적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서양회화에 영향을 입은 기초 하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회화는 서양회화의 영향을 받은 이래로 계속해서 충돌과 융합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한국회화의 발전적 전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본 논문은 20세기 한국 근 현대회화의 특정적인 역사와 문화적 조건과 현재까지의 동북아 예술배경의 입장에 근거하여 중국과 일본회화의 발전이 한국 근 현대회화의 연변과정에 미친 영향과 연계시켜 하나의 계통적 정리를 힘써 시도하였다. 이러한 연구가 한국회화 예술의 발전을 증진시키는데 있어서 유익한 가치가 있기를 기대한다. 아시아의 회화 예술사조에 있어서 한국회화예술의 충돌과 융합의 관점에서 탐구 토론하자면 두 가지 각도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동북아 근대회화의 거대한 예술 환경 하에서 한국의 근대회화를 연구하였다. 역사적 발전과정 중에서 서화동점이 동북아 회화에 조성된 영향을 탐구 토론하였다. 그로부터 한국 근대 회화적 연변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둘째는 한국의 현대회화가 서양 현대예술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가를 연구하였다. 문헌과 도판자료를 가지고 진일보 분석하여 중한 양국의 현대회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였다. 진일보하여 20세기 한국 현대회화가 직면한 충돌과 융합의 문제를 탐구 토론하였다. 서문에서는 본 논문의 연구의의 및 관점을 설명하였으며, 아울러 그것에 관계된 연구정보를 간략히 서술하였다. 본문의 제 1장은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서양회화가 어떻게 중국, 일본에 전래 하였는가 내지는 불러일으킨 변화는 무엇인가를 서술하였다. 제 2장은 서양화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를 탐구 토론하였는데, 기법, 사상 그리고 정체적 표현형식과 풍격이 한국 전통회화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제 3장은 한국이 근대에 진입하면서 서양과의 직접적인 교류 중 동서양 사상적 차이에서 오는 이유 때문에 누드화가 매우 큰 쟁의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바로 이런 과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발생한 정황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제 4장에서 토론한 내용은 일제강점기의 시작부터 한국 근대회화는 이미 서구화된 일본 아카데미즘 회화의 영향을 대량으로 받았다. 일본의 ‘문화정책’으로 인하여 한국의 초기 미술교육과 미술 전람의 모식은 모든 것이 당시 일본을 모방한 것이다. 제 5장은 한국 예술가의 부단한 경험과 창신 과정 중에서 부단하게 ‘본토화(토착화)’를 탐색했던 추세를 소개하였다. 이는 한국 현대회화의 건립시기이다. 제 6장은 해방시기의 상황을 묘사적으로 서술하였다. 제 7장은 서양의 현대미술사조가 어떻게 해서 현대 한국회화에 충격을 주었는가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한국 현대회화는 구상과 추상의 대립을 경험한 이후에 새로운 한국 회화적 개념을 확립하였다. 제 8장은 한국회화가 본토예술의 탐색을 통해서 현대예술 중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파악하는 과정을 논술하였다. 논문의 마지막 장의 “민족화와 세계화”라는 명제 중에서는 한국회화가 어떻게 해서 민족문화의 본질, 민중미술의 시대성 그리고 현대예술의 현실성이 새로운 예술 국면과 환경을 개창하였는지를 논술하였다. 그 외에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화가도 세계를 초월하여, 진일보한 한국적 현대회화를 세계를 향해 추진하려 함으로써 민족적 자신감을 수립하였다. 이번 장에서는 특별히 20세기 국제무대에서 지명도가 있는 한국화가 이응로와 백남준의 예술을 소개하였다. 종축선 상의 관점에서 한국 근 현대회화의 발전 그리고 연변과 탄생은 18세기 이래로 시작되어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중국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지리적 위치가 서로 가까웠기 때문에 문화 상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서양회화는 매우 빠르게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이식되었다. 전통적 한국회화에 새로운 충격이 따르게 되었다. 형식, 기법 혹은 사상에 있어서 어떻든지 간에 모두가 한국 전통회화에 새로운 영양소를 주입했던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일본의 미술교육, 미술활동이 전반적으로 서구화가 퇴진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외재적 자극으로 인하여 오히려 한국화가가 반대적인 사고로서 민족예술의 본질을 찾으려는 생각이 촉구되었다. 아울러 적극적으로 ‘본토화’의 심층적 의의를 탐구 토론하였다. 후에 다시 한국전쟁과 서양 현대예술의 직접적인 세례를 받고, 오늘날의 한국 현대회화는 이미 과거의 어둡던 그늘을 벗어났으며, 한국 현대 예술가들은 이미 세계 예술무대 위에서 자신 있게 한국민족의 특색을 갖추어 드러냈다, 또한 현대성과 시대성이 풍부한 높은 수준의 예술 창작을 보여주고 있다.
수륙법회의 전칭(全稱)은 《법계성범수륙보도대재성회(法界聖凡水陸普度大 齋腥會)》이나 약칭하여 〈수륙회〉, 〈수륙도장〉 혹은 〈수륙대회〉라고도 하는데 이는 죽은 이들을 천도하기 위해 성대하게 치러졌던 불교의식의 하나 이다. 《불설구면연아귀다라니신주경(佛說救面然餓鬼다羅尼神주經)》 등의 불교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생존시 그의 제자 아난이 어느 날밤 꿈속에서 아귀왕 면연을 본 후 각종 아귀와 바라문 및 선인들의 지옥에서의 고난을 면하게 하 기 위해 먹을 것을 시식(施食)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어, 고대 인도에서 미리 수륙법회와 같은 활동이 있었다고 생각되어지나 〈수륙〉이라는 명칭은 아직 출현하고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남조의 양나라 무제 때에 수륙법회가 최초로 행해졌는데 《釋門正統》이나 《佛祖統紀》등의 불교문헌자료가 전하 는 바로는 양무제는 자신이 직접 수륙의문(儀文)을 만들어 서기 505년 윤주( 潤州, 지금의 강소성 진강(鎭江) 금산사(金山寺)에서 처음으로 의식을 거행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양무제의 수륙의문은 후세에 전해 내려오지 않다가 당 나라 고종이후에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송.오대이래로 수륙법회는황실이나 민간에 극히 유행하게 되고 여러종류의 수륙의문이 출현하게 된다. 수륙법회의 의식은 내단(內壇)과 외단(外壇)으로 나눠 거행되고, 대부분의 중요한 활동은 내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내단의 의식과정중 불교, 도교 등의 많은 신들과 귀신 또는 죽은 영혼들을 상당.하당(上堂.下堂)으로 청하여제사를 지낸다. 이때, 육도 중생을 천도할 수 있는 법력을 지닌 불교의 주불. 주보살. 명왕. 이십사천 등과 도교의 신분이 높은 신들은 상당(上堂)에 속 하게 되고 기타 하급 신들이나 각종의 영혼구제를 받고자 하는 귀신들은 하당(下堂)에 속한다. 수륙법회가 거행되는 동안 법당이나 수륙전에 수많은 불.도교신들 모습을 그린 종교화를 거는데, 걸 수 있는 그림의 폭 수에 대한 제한은 없으며 적게 는 수십 폭에서 많게는 이백여 폭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화들을 수륙법회도 혹은 수륙화라고 한다. 양무제가 최초로 수륙법회를 열 당시 수륙법 회도를 걸어놓고 의식을 거행하였는지는 확실한 문헌상의 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다만 문헌에 의하면 당나라 때 오도자(吳道子)가 수륙화 백이십 폭을 그 려 산서평양성(山西平陽城)에 있던 수륙사(水陸社)에 걸었다고 하고, 당회종 때는 사천(四川)이 장남본(張南本)이 성도(成都)에 있는 보력사(寶歷寺)에서 수륙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수륙법회도의 내용과 도상은 만당(晩唐)시기에 비로소 대략의 체계를 이루 게 되고 당.오대.송을 거치면서 비교적 완전한 체계를 형성한다. 원. 명에 이르면 상.하당의 신령(神靈)의 종류가 많아짐에 따라 체계가 상당히 방대한 종교화로 발전하게 된다. 수륙화에 나타내고자 하는 불교내용으로는 인과응 보. 윤회사상이 위주가 되며 도상에서는 불.도교적 도상이 주가 되며 유교적 내용을 다룬 도상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는 원래 순수한 불교적 의식으 로 행해졌던 수륙법회가 불교사상과 의식을 널리 민간에 전하기 위해 당이후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도교를 흡수하였던 것으로 당시 사회에 유행하던 유.불.도 삼교합일사상이 깊이 반영되었음을 볼 수 있다. 수륙화의 형식은 수륙권축화(卷軸畵)와 수륙벽화(壁畵)로 나뉘는데 현존하 는 대부분의 수륙화는 원명이후의 것으로 가장 완전하게 남아있는 것으로는 산서성직산(稷山) 청룡사(靑龍寺)벽화. 하북성석가장시(石家莊市) 비로사(毗 盧寺)벽화. 산서혼원현(渾源縣) 永安寺벽화. 산서성(번치현)繁峙縣 公主寺벽 화가 있고 수륙권축화로는 산서성우옥현(右玉縣)寶寧寺의 수륙화가 유명하다. 이러한 수륙화는 주로 민간의 화공들에 의해 그려졌으며 화공들은 당.송이 래로 내려오던 종교화의 전통과 기법에 충실하였고 또 대대손손 내려오던 그 림의 각종 분본(粉本)을 이용하여 수륙화를 제작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수륙화 들은 비슷한 양식을 띄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각 시대의 서로 다른 사회적 환경이나 종교적 활동상황 또는 예술발전에 있어서의 시대적 성과등도 반영되어있다. 중국 고대 종교화의 발전을 이해하고 그 전통이나 기법을 연구하는데 있어 수륙화는 매우 중요한 실질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글은 倪元로의 연구자료들을 전체적으로 鳥瞰한 가운데, 그 동안 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되어온 難題들을 분명히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에 중점을 두었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하여 처음으로 원시자료인 서화작품, 書札, 《上虞賀溪倪氏宗譜》, 《鴻寶應本》 등을 발굴 활용하였다. 더욱이 그 자료들의 眞僞를 우선 가려낸 상태에서, 자료간의 상호검증과 고증을 통하여 보다 정확한 倪元로의 歷史的 事實을 再現해 내었다. 더 나아가 41통 書札의 발굴과 고증을 통하여 깊이 있게 生平, 人格, 藝術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家族考'에서는 흔히 알려지지 않은 倪家의 家族史의 발굴과 고증에 중점을 두었다 : 祖父 倪應기와 長兄 倪元樸은 모두 정신병을 앓았으며, 두 사람의 다른 점은 祖父는 후천적이고, 長兄은 선천적이며 바보였다 ; 倪會召는 倪元로의 셋째아들로서 대략 1625년후에 출생하였고, 1633년에 北京의 倪元로의 官舍에서 病死하였다. 예로부터 倪元로의 出生 및 家宅地가 上虞라 알려졌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倪元로의 祖籍와 <한자생략>籍은 上虞이나 出生地는 紹興府城內의 會稽縣의 '東雙橋家'이며, '官帶閒住'시기인 1637年 겨울부터는 紹興府城南의 羅紋판에 園亭式住宅 '衣雲閣'을 지어 생활하였다. 殉國後 '道德人格'은 더욱 중시되었다. '人格硏究'에서는 思想·人格形成의 背景과 그의 藝術世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審美人格'과 '道德人格'을 살펴보았다. 어려서부터 倪元로는 父親으로부터 嚴格한 儒家聖賢思想을 敎育받았으며, 더욱이 13년간의 科擧準備중의 挫折로 苦盡甘來의 人生哲學과 가없는 藝術境界를 몸소 體驗하였다. '審美人格'은 衣雲閣 生活을 分岐點으로 前期는 浪漫어린 봄의 情感을 追求하였고, 後期는 寂寞한 가을의 自然攝理에 心醉하였으며 衣雲閣生活은 後期에는 完全無缺한 法을 主張하였다. '道德人格'은 衣雲閣生活을 分岐點으로 前期는 積極的이고 進取的인 狂人을 自處하였고, 後期에는 大自然의 法則을 追求하였다. 淸代 "明史學中 忠義觀"의 影響으로 倪元로의 書畵作品은 그의 高貴한 人品으로 해서 줄곧 重視되어 왔으나, 이는 극히 斷片的인 評價일 뿐이다. '書法硏究'에서는 天才藝術家로서의 獨創的인 면을 關心있게 보았다. 그의 文藝創新論은 書藝에 있어서의 意識있는 革新에 충분한 美學的 根據를 제시하여 준다. '書札考'는 倪元로 書藝作品에 年款을 기입하지 않는 硏究難題를 解決하였다. 行草書書藝作品을 통하여 古人(二王→蘇軾→顔眞卿→黃庭堅)에 대한 學習의 구체적 상황을 파악하였고, 나아가 書藝作品의 風格演燮(淸剛→ 渾厚→靜凝→空靈)을 알아보았다. 또한 그 革新의 歷程은 끊임없는 傳統에 대한 硏究와 자기만의 法을 찾아가는 科程中 끊임없이 "取"와 "棄"의 反復過程이다. 倪元로 書藝創新의 獨創的인 면은 우선 먼저 藝術家 자신의 靈感을 깊이 주의하였고, 또한 자신의 靈感을 整理 規範化하였으며, 그러한 規範化를 통하여 大自然의 攝理를 書法藝術로써 表現하였다. 이렇듯 倪元로는 자신의 天賦的인 才能으로써 자기만의 獨創的인 行草書를 規範化하였고, 또한 獨創的인 行草書로서 자신의 小楷書를 새롭게 規範化하였다. 이렇듯 倪元로는 大自然으로부터 書法藝術의 새로운 生命力을 얻었고 또한 書法藝術 美學에 있어서 자기만의 獨創的 審美境界인 "自然" "澹" "奇" 三者의 合一을 이루어 내었다. 이는 中國書法史에 있어서의 偉大한 革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