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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岡田朝太郎的應聘來華與『大清新刑律』草案

        YANG Ben Juan(楊本娟)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18 아시아연구 Vol.- No.22

        Asataro Okata, a Japanese legal expert who was hired by the Chinese government, participated in the reform of criminal law in late Qing Dynasty and the writing of Draft of New Criminal Law of Qing Dynasty(1644-1912). Influenced by the work experience of MuraBaishi Tano, Asataro Okata sympathized with the vocation of associating legal reform in China.Reviewing his previous experiences, it is worthy of note that Asataro Okata worked as a member of Japan Code Investigation Association and participated in the reform of criminal law in Japan. During the reform process, part of his ideas about criminal law was not accepted by the Japanese legal academia and therefore was not written into the country’s new criminal law of 1907, which was likely to prompt him to apply for a legal job in China to realize his dream that could not be achieved in his homeland. During the negotiation on the employment contract, Asataro Okata and the Chinese side disputed over his title. In the end he was entitled “investigator” and “teacher” instead of “consultant”, which implied that the Qing government did not attach as much importance to codification as Asataro Okata did. Just because Asataro Okata was keen to realize his dream of criminal law reform, he eventually made a concession on his job title and agreed to accept the offer. He worked diligently at the Draft of New Criminal Law of Qing Dynasty to realize his dream. He even ignored his deteriorating health. In just over eleven months, the Draft of New Criminal Law of Qing Dynasty and Court Law was completed. Between them, the Draft of New Criminal Law of Qing Dynasty was the main result of his hard work in China. Although the Draft of New Criminal Law of Qing Dynasty was revised for several times, its overall framework and main legislative thought were not changed. Later, it was promulgated by the Qing government on January 25, 1911. On March 30, 1928, The Criminal Law of the Republic of China was promulgated by the Republic of China, which was evolved from the former, recognizing the value of it. In general, the Draft of New Criminal Law of Qing Dynasty represented Asataro Okata’s pursuit of new legal principles and embodied his unusual ideas about criminal law. 清末法制變革中應聘來草的日本刑法專家岡田朝太郎來華主要參與了清末刑律變革,起草了『大清新刑律』草案等。岡田朝太郎因受田能村梅上的影響,對應聘來華幫助修律的工作產生認同感。在岡田朝太郎來華前的經歷中,值得注意的是其曾在日本法典調查會擔任委員、參與過刑法改革。在參與日本刑法改革的過程中,岡田朝太郎的部分刑法思想並未被日本刑法學界所接受,未能寫入1907年日本新刑法中,這一結果極有可能促使岡田朝太郎積極應聘來華以實現其在日本無法實現的刑法夢想。從商談來華聘約的過程來看,雙方圍繞職名產生了事議。職名中並未出現“顧問”字樣,其中“調查員”和“教習”的先後排序問題,暗示著清政府和岡田朝太郎對法典編纂工作的認知和重視程度不同,清政府對職名的處理結果為“教習兼調查員”。正因為岡田朝太郎有著自己的刑法夢想和應聘目的,所以在職名上給予退讓,最終和清政府達成一致意見,同意來華。正因為岡田朝太郎積極主動應聘來華,所以其來華後工作十分努力,即使身體狀態出現問題也無暇顧及,仍堅持專心起草『大清新刑律』草案等,僅用十一個多月就完成了『大清新刑律』草案和『法院編制法』草案的起草工作。其中,『大清新刑律』草案是其在草工作期間的主要成果。其起草的『大清新刑律』草案雖經若干次修改,但其整體框架結構和立法主導思想殺未被改變,清政府於宣統二年十二月二十五日(1911年1月25日)將其頒佈。之後,民國十七年三月三十日(1928年3月30日)公佈的『中華民國刑法』以正式刑法典的形式認可了『大清新刑律』草案的立法成果。總體而言,『大清新刑律』草案一方面體現了岡田朝太郎對最新法理的追隨,另一方面還包含了岡田朝太郎的許多獨特刑法思想。 청말 법제 변혁 중, 일본 형법 전문가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는 중국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청말 형률 개혁에 참여하고, 『대청신형률(大淸新刑律)』 초안 등을 기초(起草)하였다.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는 타노무라 메이즈(田能村梅士)의 영향을 받았는데, 중국에 와서 법률 수정을 지원하면서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가 중국에 오기 전에 일본법전조사회위원을 역임했고 형법 개혁 과정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일본 형법 개혁의 과정 중,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의 일부 사상이 일본 형법학계에 수용이 되었는데, 1907년 일본 신형법에서는 수용되지 못하자,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가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에서 그가 이룰 수 없었던 형법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중국의 요청을 받은 계약 상담 과정에서 쌍방은 직명(職名)을 둘러싸고 쟁의가 있었다. 직명 중, “고문” 글자는 보이지 않았고, “조사원”과 “교습(敎習)”의 선후 배열 문제가 있었는데, 이는 청정부와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가 법전 편집 업무의 인지와 중시 정도 방면에서 인식이 서로 다름을 암시한 것인데, 청정부의 직명의 처리 결과는 “교습 겸 조사원”이었다. 왜냐하면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는 자신의 형법의 꿈과 청정부의 초청에 응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직명을 양보하고, 청정부와 최종적으로 의견 일치를 달성하여 중국 방문을 동의하였다.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는 적극적으로 요청에 응하여 중국에 왔기 때문에, 중국에 와서도 업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비록 몸 상태에 문제가 생겼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대청신형률(大淸新刑律)』초안에 심혈을 기울여 11개월 만에 『대청신형률(大淸新刑律)』과 『법원편제법(法院編制法)』의 초안을 잡았다. 그 중, 『대청신형률(大淸新刑律)』 초안은 중국에서 업무를 하는 기간 동안 이룩한 주요 성과이다. 초안을 잡았던 『대청신형률(大淸新刑律)』이 비록 여러 차례 수정을 거처야 할 만큼 고난의 과정을 거쳤지만, 전체 구조와 입법 사상은 변하지 않았으며, 선통(宣統) 2년 12월 25일(1911年 1月 25日) 청정부가 반포하였다. 그 후, 중화민국 17년 3월 30일(1928年 3月 30日) 공포한 『중화민국형법(中華民國刑法)』은 정식 형법법전의 형식으로 『대청신형률(大淸新刑律)』 초안의 입법 성과를 인가하였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대청신형률(大淸新刑律)』은 일면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의 최신 법리를 실현했고, 또 오카다 아사타로(岡田朝太郎)의 독특한 형법 사상도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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