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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韓)·일경제(日經濟)의 산업성장(産業成長)과 생산구조변화(生産構造變化)의 要因分析(요인분석)

        이진면,藤川淸史,Lee,,Jin-Myeon,Fujikawa,,Shuji 한국개발연구원 1997 KDI 政策硏究 Vol.19 No.2

        일국(一國)의 경제발전(經濟發展)은 경제적 진보와 근대화를 수반하는 역사적 현상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산업구조(産業構造)의 변화(變化)에 의한 생산(生産)과 소득(所得)의 증가(增加)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발전과정에 수반되는 경제성장과 산업구조변화에 대한 요인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양국경제의 발전현상을 이해하고, 향후의 경제정책에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비례적(比例的) 성장(成長)으로부터의 편차(偏差)(DPG)" 방법을 일본의 경우는 1915~90년, 한국은 1960~90년까지의 장기적인 산업연관자료에 적용하여 양국의 산업성장과 산업생산구조변화에 대한 요인을 수요측면에서 비교 분석하였는바,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양국경제의 산업생산구조 및 주도산업의 변화는 시기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분석기간중 양국 모두에서 농림수산업은 계속해서 생산비중이 줄어들고 있고, 경제성장을 주도한 산업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그리고 중화학공업에서도 중공업으로 이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경우는 1970년대에는 생산자서비스부문을 중심으로, 그리고 1980년대에는 소비자서비스부문을 중심으로 "경제의 서비스화"가 진전되어 서비스산업이 주도산업으로 부상되고 있으나, 한국경제에서는 1990년까지도 서비스산업의 확대가 관측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향후 한국경제의 산업생산구조에 있어서 서비스산업의 중요성이 점차 커질 것이며, 특히 "경제의 서비스화"가 생산자서비스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양국의 성장패턴을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는 시기별로 성장요인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대체로 수출보다는 국내수요(國內需要)가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성장의 성장에는 수출과 투자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특히 수출은 분석기간중 지속적으로 정(正)의 효과(效果)만을 보여 경제성장의 견인차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까지 한국경제의 성장에 있어서는 수입대체보다는 수출확대를 통한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수출주도적인 중화학공업의 성장패턴은 현재 국내수요(國內需要)의 규모(規模)와 산업구조변화를 일본의 경우에 비추어볼 때, 향후 몇 년 동안은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 KCI등재

        새로운 SRR 구조를 이용한 다중대역 MIMO 안테나 시스템의 성능 향상을 위한 불요결합 억제법 연구

        이진일(Jin-Il Lee), 강승택(Sung-Tek Kahng), 금대건(Dae-Gun Keum) 융복합지식학회 2013 융복합지식학회논문지 Vol.1 No.2

        MIMO 안테나 시스템, 단말기, 혹은 중계기에서 채널 간 잡음과 그로 인한 간섭은 낮을수록 좋다. 본 논문에서는 4G 통신에서의 단말기 혹은 중계기 성능향상을 위한 LTE 대역 2.4GHz에 대한 PCS 대역 1.7GHz의 불필요 유입을 차단하는 구조를 설계하고자 한다. MIMO 시스템의 경우 다이버시티 이득 (Diversity Gain)을 얻을 수 있지만 근접해 있는 안테나 간 상관계수가 높아지면 안테나 성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안테나 사이에 격리도를 높여줄 수 있는 구조를 삽입하여 안테나를 좀 더 독립적으로 동작시킬 수 있다. 이러한 격리구조와는 별도로, 시스템 내부의 다른 채널로부터의 잡음 간섭은 제안하는 새로운 SRR로써 유도하여 억제 시킬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불요 신호를 억제하는 SRR의 물리적 길이를 줄임과 동시에 전기적인 길이를 연장시켜 제한된 면적에서 낮은 주파수의 잡음을 억제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In the MIMO Antenna system, cell phones or repeaters, the noise and interference between channels should be minimized. In this paper, we designed a structure which blocks the noise from PCS band(1.7GHz) into LTE band(2.4GHz) improving the performance of the repeaters or cell phones at 4G communication. If the correlation of the neighboring antennas increases, it can affect the antenna performances in spite of the better diversity gain at the MIMO system. To avoid this, the antennas should be less interactive with each other via the structures which improve the isolation between the adjacent antennas. Different from this approach, the noise from the other channel in the internal system can be suppressed using the proposed novel SRR. In this paper, we obtained the effect of suppressing the noise at a lower frequency with a limited geometry by shortening the physical size but lengthening the electrical size of the SRR.

      • KCI등재

        형태소의 교체 조건

        이진호(李珍昊) 형태론 2015 형태론 Vol.17 No.1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 KCI등재

        해방공간을 살다간 한 독일 지식인의 민주주의 인식: 에른스트 프랭켈

        이진일 ( Jin-il Lee ) 수선사학회 2017 史林 Vol.0 No.60

        Ernst Fraenkel is the founder of the theory of New Pluralism in Germany. Born in 1898 as the son of Jewish parents in Koln, Fraenkel had been promoted in 1923 to Hugo Sinzheimer, who was famous social-democratic employment law specialist at Frankfurt University. He had to leave Germany in 1938 to avoid the oppression of the Nazi government, and emigrated to America, where he graduated the Law school of University Chicago. Fraenkel worked for a pluralist model of democracy theory, whose normative aim was to help to secure the “future of the working-class movement” in a social democracy. His pluralistic concept of democracy was derived not only from the analytical observation of the reality of western democracies, but also from Experience of his Life.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ese colonialism, Fraenkel visited Korea as an American military adviser and gave his opinion on many legal issues in Korea. When Korean War broke out, he had to leave Seoul hastily. After he returned to Germany in the year of 1951, he concentrated on a Neo-Pluralism theory at the Univ. Berlin. He was one of the founder of political science as a discipline at German University. But His Neo-Pluralism theory remained fragmentary. He emphasized the interest group for the Democracy in a pluralistic society. His theory of pluralism was constructed at his various stages of life, and therefore, it had to be clear from the outset, that it could not be organized into systematic completion. Today, including his theoretical limitations, his concept of pluralism is accepted as an important measure and a structural element in modern democratic institutions, which is the basis of democratic constitution.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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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민족사 서술과 동아시아 전이

        이진일(Lee, Jin-Il) 한국사학사학회 2014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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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근대 역사학의 형성은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전파된 전통적 역사서술 방식과 서구의 근대적 역사서술방식이 상호 결합한 결과였다. 서구역사학의 동아시아 전이를 통해 받아들인 역사서술 방법론은 왕조중심의 전통적 역사서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식의 역사서술이었다. 큰 틀에서 시대가 구분되고 자국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사의 개념이 들어온다. 국경의 명확한 분할과 영토상의 주권이 강조되면서 지리는 역사가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즉 역사의 공간적 차원을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과 함께 지역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끌어들이게 된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서구 역사사상과 서구적 역사 글쓰기 패턴이 전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기존 전통과의 마찰과 융합을 통한 다양한 형식들이 제시되었으며, 새로운 역사학을 서구문화와 그들의 정치적 지배에 대응하는 지적 무기로 쓰고자 하는 시도들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방법론들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서구와 그들 문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입장과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민족 중심 역사학의 전 지구적 확산과 함께 근대 역사학의 국제적 확대 또한 지속되었다. 일본에서의 "과학적 역사학" 개념이 무엇보다 전문 역사학자들이 증거의 비판적 검토에 기반해 역사를 서술하는 랑케류의 객관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면, 중국의 경우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회 다윈주의'와 관련을 맺게된다. 중국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의 법칙들이 세상을 지배함을 느꼈고, 그 중에서도 다윈의 진화론과 이로부터 도출된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원칙들을 역사와 역사서술에서 곧 "과학적 역사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에 반해 일본은 그 수용과정에서 중국보다 넓은 선택범위를 갖을 수 있었으며, 국가의 주도하에 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을 모델로 학문체계의 틀을 구성하였다. 일본에서는 프로이센 모델이 갖는 국가중심주의적 역사학을 통해 국민국가에 충성하고 기존체제의 유지를 정당화하는 민족주의적 기준들이 제시된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이 받아들인 근대적 역사학의 상징은 랑케였지만, 그의 의도는 좁은 전문가의 역할로 제한되어 해석되었다. 이런 왜곡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수용에서도 다르지 않았고 랑케는 오직 사료를 통해 역사적 사실의 진위만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료실증주의자' (Quellenpositivist)로 오해되어왔다. 서양 역사학의 동양으로의 왜곡된 전파는 동아시아가 직면해야 했던 새로운 이념, 즉 국민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구성되고 확산되어가는 내적 합리성의 귀결로 해석할 수 있을 듯 싶다. 우리는 근대역사학의 성립과정에는 국가권력과 결탁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The recent development of historical scholarship is the shift to a global perspectives, which emphasizes the transnational connections between western Europe and the other nations. The transnational historiography is a globally dispersed phenomenon, even though the institutional fixtures on the one hand and the relationships to political discourses, and other forms of public practice on the other hand may diverse according to nation and region. This article compared the trajectories of historical development in both China and Japan from the mid 19th Century on. The Japanese historians revealed the diverse character of this Cultural transfers as they sought to bring Western scientific history to Japan. They adapted Rankes Quellenkritik to articulate an understanding of the scientific method. The modern, methodical source criticism has two precursors: the philological textual criticism from the Renaissance and the somewhat later work with old documents. They did not believe that the adoption of western scientific methods as a repudiation of japanese traditional historiography. in their skepticism about the validity of ancient texts and their belief to rigorous source criticism found a scientific method of Western. The Japanese historians had begun to apply in this way not only to the study of their own history but also the history of East-Asia. They urged the need for a more scientific and objective approach to historical research. The Chines historian also sought history writing on a scientific basis through the "National Studies". They declared their purpose, to "reorganize the national past and to create (its) civilization", absorbed knowledge of western historiography via Japanese trans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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