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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세대 성서’를 통해 이루어진 복음의 토착화

        이덕주(Deok Joo Rhie) 한국신학정보연구원 2010 Canon&Culture Vol.5 No.2

        이 글은 1910년 번역을 끝내고 이듬해 출판된 신?구약 한글 성서의 번역과정을 정리하고 그 100주년의 역사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1870-1880년대 중국 만주에서 시작된 한글 성서 번역과 출판은 한국 개신교회 복음 선교의 단초를 제공했고 1885년 일본에서 인쇄된 한글 성서를 갖고 내한했던 개척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곧바로 성서 공동 번역에 착수하여 1887년 마가복음을 인쇄하였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자회를 조직하여 처음엔 일본과 만주에서 번역된 성서를 교정하는 형태로 진행하다가 1893년 상임성서실행 위원회와 번역자회를 새로 조직하면서 개인 역→번역자회 역→위원회 역→시험 역→공인 역으로 이루어진 번역 원칙과 방법론을 제정하였다. 이런 원칙하에 전면적인 번역 작업에 착수하여 1900년에 시험 역본과 개인 역본이 혼합된 형태의 신약전서를 인쇄하였다. 이어서 1904년 영국과 미국,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한국 선교에 착수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들이 참여한 한국성서위원회를 조직하고 체계적인 성서 번역과 인쇄, 반포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인 번역자들도 참여하는 성서 번역자회를 새롭게 구성하여 신약 개정 작업에 착수하여 1906년 공인 역본 신약전서를 인쇄하였고 이어 구약 성서 번역에 착수, 1910년 4월 번역을 끝내고 1911년 3월에 구약 전서 및 신?구약 합본 성경전서를 인쇄하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비로소 한글로 번역된 성서 전체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신?구약 성경전서는 한국개신교회 선교 개척을 담당했던 내한 1세대 선교사들과 이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종한 1세대 토착 교인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제1세대’ 한글 성서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1세대’ 한글 성서로 1910년 번역을 끝낸 신?구약 성서는 다음 세 가지 역사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성서 번역을 통해 복음의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화(成肉化) 과정처럼 성서 속에 담긴 기독교 신앙과 신학적 의미가 한글 번역을 통해 한국의 토착 언어와 종교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둘째, 성서 번역과 인쇄를 통해 한글의 과학적 연구와 실용화가 이루어졌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문서를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는데 그 결과 세종대왕 창제 이후 4백 년 넘게 긴 잠을 자고 있던 한글의 실용화와 연구가 이루어져 한글이 ‘한국민의 생활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셋째, 성서 번역과 인쇄, 반포 사업을 통해 교회 일치와 연합 운동이 촉진되었다. 외국의 3개 성서공회, 한국 선교에 임하고 있던 6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가 조직한 성서위원회는 물론 성서 번역자 회도 초교파적으로 조직, 운영되었는데 이를 통해 교파주의를 극복한 교회 일치와 연합 운동이 가능하였고 그 결과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하나의 성서’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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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만주 부흥운동에 관한 연구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8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8 No.-

        중국과 만주지역 교회는 의화단 사건(1900년) 여파로 선교의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고 다시 선교의 활력을 되찾게 만든 것이 1908년 만주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1월에 일어난 평양 부흥운동 현장을 목격하고 중국을 방문한 맥라렌 부인과 하남주재 선교사 고포드가 만주 심양과 요양에 들러 한국 부흥운동의 실상을 전함으로 촉발되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 소식을 접한 만주와 중국주재 선교사들은 같은 부흥운동이 중국에서도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준비 기도를 시작하였다. 특히 요양지역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더글라스는 1908년 1월 중국인 전도자 장사정과 호만성을 평양으로 파송하여 직접 평양 부흥운동의 실상을 보고 오도록 하였고 이들의 방문보고와 2월 9일부터 시작된 고포드의 요양집회에서 비로소 한국에서와 같은 토착교인들의 통성기도와 공개자복, 회개와 배상을 통한 영적 갱신, 그리고 자발적 헌금과 헌신, 자원 전도운동이 나타났다.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만주지역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토착 교인들은 회개와 중생, 성결에 이르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 체험, 즉 ‘영적 각성’을 체험하였으며 이를 통해 교회 안에 화해와 일치, 협동과 연합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은혜를 체험한 교인들의 윤리적 갱신과 실천은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선입견과 편견을 해소하였고 교회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을 향상시켰다. 여기에 토착 교인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전도운동으로 인해 무너졌던 예배당과 기독교 학교가 복구되었고 선교에 활기를 띰으로 교세는 의화단사건 이전으로 회복되었다. 요양과 심양에서 발화된 만주 부흥운동은 1908~09년 그 불길이 만주 일대로 확산되었고 1910년 4월에는 북경의 연경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나 헌신적 전도자들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중국교회 부흥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만주 부흥운동의 동기와 단초를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ㆍ중 양국교회 관계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70~80년대 한국교회의 복음 수용과 전파 과정에서 한글성서 번역과 인쇄 및 반포의 거점이 되었던 만주교회가 의화단사건이후 침체에 빠져 있을 때 한국교회가 부흥운동의 열기를 전함으로 위기를 벗어나 선교의 활력을 되찾도록 만듦으로 한국교회는 ‘선교의 빚’을 갚았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아시아로’ 이어지는 신앙교류와 선교협력의 아름다운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19세기 일부 서구 제국주의 기독교 국가들이 추구하였던 강압적 무력을 동원한 ‘힘의 선교’가 아닌 섬김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선교’였다. The situation of mission work in the earlier time of 1900s in Manchuria was very gloomy and critical at an anti-foreign atmosphere of the Chinese people after the Boxers' riot in 1900. But the atmosphere of stagnation was changed into that of growth and vitality in the latter days of 1900s by the Manchurian Revival Movement in 1908. The Manchurian Revival began in Laoyang(遼陽) with the return of two westerners from Korea, Mrs. D. McLaren and Mr. J. L. Goforth, who had just visited Pyengyang with news of religious awakening movement in that country. Especially Mr. Goforth, a pioneer of Canadian Presbyterian mission in China, on returning to his mission field Honan(河南), gave an account of the spiritual movement to the Churches at Laoyang, Moukden(瀋陽), Peitaho(北戴河) and Chikungshan(鷄蚣山) at which prayer meetings immediately began by the missionaries in order to be happened the similar phenomena in China. And it was in January 1908 that Mr. G. Douglas, a Scots presbyterian missionary of Laoyang, sent two Chinese evangelists to Korea, Mr. Chang (張賜禎) and Mr. Hu(湖萬成), who came across the Yalu to Pyengyang where they met Korean Church leaders, saw nearly two thousand people who were gathered for the study of the Bible and the evangelistic campaign, and were impressed greatly. On 9th Feb. 1908 just after their returned reporting, moreover, the one weekevangelistic meeting began at Laoyang Church led by Mr. Goforth who told the congregations about the revival in Korea and gave the address from the text,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Spirit of God" which made the people who were possessed by God' Spirit, outburst weeping, confessing their sins and crying for mercy. And also, Mr. Goforth went to Moukden and held also a meeting at 16th Feb. But at this meeting, people received the 'Shengling ti Kantung'(聖靈之感動) after Mr. Hu's testimony of Korean revival and showed the similar phenomena, such as vocal united praying, confession of sins openly, restitution, and voluntary offering of money and days for evangelism as in Laoyang and Pyengyang.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Manchuria Revival Movement. From 1908 to 1909, the spiritual fever of the revival movement was spread to the Manchurian cities, such as Pensihu(本溪湖), Anping(安平), Tunghwa(通化), Kaiyuen(開元), Yilu(懿路), Newchang(牛庄), Tieling(鐵嶺), Paoting(保定) etc. It was also at last in Apr. 1910 that a revival meeting was held by the native evangelists from Tieling among the students of the Methodist University(燕京大學校) in Peking(北京), and over 300 students volunteered to give themselves to the inland mission work. In this way, the revival movement was spread to the whole land of China by the native pastors and preachers. In Oct. 1909, on returning from his furlough, Dr. J. Ross, a pioneer of Protestant mission in Manchuria, could find out that a great change was happened in his mission field. So many native Church leaders and members, who had been disappointed and timid in religious life, testified their spiritually awakened lives in moral regeneration, embodied the reconciliation and peace among the people, built up the voluntary, and united cooperation in mission works. So the native Christians could recover the vitality of faith and mission, and also, the Church statistics of 1910 show the ongoing growth after the Manchurian revival of 1908. Furthermore the moral and conscientious lives of the regenerated Christians could not only get rid of the negative and anti-Christian prejudice of non-believers, but also help to acquire of Church leaders' authority and leadership over the social community. Thus the native and indigenous Church could be formed by the self-propagation in evangelism, the self-supply in Church economics, and the self-government in politics by Chines Christians. In the history of relationship and inter-change of faith between China and Korean Churches, we must point out that the clue of this meaningful Manchuria Revival Movement was given by the revival of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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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색 순교에서 적색 순교로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0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대표적인’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는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장로교 신앙과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손종일 장로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스가모중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일본 동양선교회 창설자 나카다,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등으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고 복음 전도자로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귀국해서 경남노회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 나환자교회인 부산 상애원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경남노회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38년 졸업한 후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의 초빙을 받고 나환자 목회에 임하였다.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비판, 거부하였고 그 때문에 1940년 9월 체포되어 1945년 해방되기까지 5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 여수 애양원교회에 복귀하여 목회하면서 부흥사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 교회와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48년 ‘여순사건’ 사건이 터졌을 때 순천에서 유학 중이던 두 아들이 공산주의 학생들에게 희생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가해자 학생을 용서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아 그로 인해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이 그에게 붙여졌다. 다시 2년 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갈 수 없다”며 애양원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희생되었다. 나환자 목회로 출발하여 일제말기 신사참배 거부투쟁과 투옥, 그리고 해방 후 부흥사역과 순교에 이르는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신학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1) 성경 절대주의, 2) 종말론적 소명감, 3) 대속적 자기희생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30여년 나환자 목회를 통해 ‘자기 비움’과 겸비를 경험, 실천하였고 성경중심적 복음주의 신앙과 종말론적 재림신앙에 입각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였으며 해방 후 민족분단과 좌우익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두 아들을 잃고도 가해자(원수)를 용서하는 ‘완전사랑’의 본을 보였고 전쟁 중에도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목자’의 자리를 지키다가 순교자가 되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평소 목회자로서 자기 비움과 희생을 실천하는 ‘백색 순교’의 삶을 살다가 결국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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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이 정치를 만날 때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4

        해방 후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가 겪은 신학갈등과 교회분열의 배경과 원인은 해방 전, 일제강점기 형성된 한국교회 신학의 ‘다양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신학의 다양성은 19세기말 한국 선교에 착수한 후 해방후까지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소속했던 교단과 선교회의 다양한 신앙과 신학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선교사 개개인의 신앙 고백과 신학적 경향에 따라 일제강점기 한국교회가 경험한 신학은 극보수 근본주의 신학으로부터 급진 자유주의 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파’ 신학을 한국교회에 소개, 주입하였는데 그것은 각 교파교회마다 설립한 교단 신학교 교육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은 ‘복음주의’라는 신학개념을 통해 (개신교회 안에서) 교파주의를 극복하려는 초교파 연합, 일치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신학을 통해 ‘구별’과 ‘연합’라는 서로 상반되면서도 연대할 수 있는 신학 기능을 경험하였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 교회 지도자들의 오류와 실수로 인해 잘못된 역사를 청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개, 그리고 거기에 피해자의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였는데 한국교회는 두 가지 모두 실패하였다. 그 결과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는 분열을 경험하였고 특히 장로교회는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재건교회와 고신파의 분열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출옥성도’ 한상동의 민족의식과 교회재건 의지, 그리고 박윤선과 박형룡의 ‘구평양신학교’ 보수 칼빈주의 ‘정통신학’ 전통을 복원하려는 의지가 모여서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서울의 조선신학교와 구별되는 보수주의 신학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해방 당시 유일했던 ‘교단직영’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는 처음(1940년) 출발할 때부터 ‘반(反) 근본주의/선교사/평양신학교 신학’, ‘신학의 세계화’,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성서비평설과 신정통주의 신학 등 서구의 진보적 신학을 ‘자유롭게’ 강의하였다. 그러나 그런 신학교육이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신조로 여기던 보수 신학생들에게 반발을 일으켜 1947년 ‘조신신학교 51인 학생 진정서사건’이 일어났다. 예장/기장 분열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주의(근대주의) 신학 비판가로서, 그리고 보수주의 선교사와 평양신학교를 통해 구축된 ‘사도적 정통신학’의 ‘적통’(嫡統) 계승자로서 박형룡은 ‘절대적’ 위상을 확립했다. 특히 보수진영에서 박형룡은 ‘지존’(至尊)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물론 그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57년 ‘총회신학교 3천만환 사건’이 터졌고 위기에 처한 박형룡을 구명하려는 운동이 ‘복음동지회’(NAE)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박형룡의 독주를 비판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해방 후 조직된 한국기독교연합회(NCC)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결국 신학교 교수와 이사회, 교단 지도부는 복음동지회측과 에큐메니칼측으로 양분되었고 복음동지회측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 신학과 용공주의 노선, 초교파 단일교회 설립의도 등 신학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에큐메니칼측을 ‘비정통’으로 비난하였다. 서로 상대방을 용납하지 않는 양측의 교권투쟁은 1959년 제44회 총회를 파행으로 이끌었고 결국 예장은 통합측(에큐메니칼측, 연동측)과 합동측(복음동지회측, 승동측)으로 분열되었다. 예장 합동/통합 분열은 교권투쟁 과정에서 신학적 이해 차이와 갈등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 경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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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엥겔(G. Engel)의 선교사역과 신학사상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0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2 No.-

        일제시대 호주장로교회 해외선교부를 대표하여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활동한 엥겔(George/Gelson Engel, 王吉志, 1864-1939)의 선교활동과 신학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엥겔은 한국의 사역기간 중 대부분인 31년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강의함으로 초기 한국 장로교회 신학 교육의 기반을 닦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뛰어난 어학(특히 성서 원어) 실력에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일제시대 장로교회의 대표적 선교사 신학자였다. 엥겔은 19세기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중요 거점 중 하나였던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에서 출생하여 대학생 시절 경건주의 운동을 바탕으로 조직된 해외선교단체인 바젤선교회에 가입하여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1892년 인도 푸나지방에 파송을 받아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건강 때문에 인도 사역을 6년 만에 중단하고 인도에서 결혼한 아내의 고향인 호주로 가서 일반학교 교육에 종사하다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개척한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해외여선교부 요청을 받아 1900년 내한하여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재개하였다. 처음엔 부산을 동래를 거점으로 동래와 울산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6년 부터 평양신학교 교수로서 성서원어와 교회사를 강의하였는데 그 사이 경남노회장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성경 개역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엥겔은 1937년 은퇴한 후에 호주로 돌아가 멜버른에서 요양하다가 2년 후 별세하였다. 신학자로서 엥겔은 자신의 전공인 교회사 분야에서 『更正後史記』(1915)와 『古敎會辨證論』(1915) 두 권의 저서와 교회사 및 성서학, 이론신학, 목회학, 선교학 관련 3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역사신학자로서 엥겔은 자신의 저술 두 권에서 보이듯 초대교회 변증신학과 종교개혁 이후 근대 선교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엥겔은 경건주의 전통의 바젤선교회에 가입한 후 선교사 훈련을 받았던 에든버러에서 접한 스코틀랜드장로교회의 개혁주의 신학과 선교운동을 중요시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두었다. 그러면서도 인도와 호주에서 사역하는 동안 감리교회와 호주 장로회 신앙 전통을 접하였고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내한 후에 교파와 교단이 다른 선교부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다양한 연합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선교사로서 엥겔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열린’ 사고와 입장에서 한국의 토착 문화와 전통을 대하였다. 내한 직후 발표한 영문 논문들은 한국의 전통 민담과 설화를 소개한 것으로 피선교지 한국인의 전통문화와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반영된 것들이다. 그는 토착 문화와 종교를 구별하여 대할 것을 요구하면서 토착 문화와 전통, 관습과 풍속에 대해서는 선교사들이 ‘적응주의’(adaptionism) 입장을 취할 것을 촉구하였고 비생산적이거나 비도덕적인 풍습의 개선도 토착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고쳐나가도록 계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토착종교의 미신적 요소도 ‘영적으로 깨친’(enlightened spiritually) 교인들이 스스로 정리해 나가도록 기다리고 도와주는 것이 선교사의 역할인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 면에서 엥겔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서구(특히 미국)의 일부 선교사들에게서 발견되는 민족적 우월감, 인종적 차별주의를 극복한 선교사의 예를 보여주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서구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구별하면서 “한국이 사악한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토착 교인들이 ‘동양적인’ 방법으로 한국에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해 나가기를 간구하였다. Dr. George Engel(王吉志, 1864-1939) was born and nurtured in Wurtemberg of Southern Germany under religious atmosphere of pietism. He studied Arts and Theology in Basel, Switzerland and went to Edinburgh, Scotland for training program as a missionary of Basel Missionary Society. In 1892 his missionary career opened in India where he served at the Taylor School in Poona and married to Clara Bath, daughter of Methodist pastor in Australia. But in 1898, to his sorrow, he had to suspended mission work in India for his ill health and migrated to Australia where for some years he served as principal of a local school. In 1900 when a new door of Korea mission opened to Engel, he arrived with his family in Pusan as a superintendent of Korea mission of the Women's Missionary Society but later transferred to the Foreign Missions Committee of the Victorian Presbyterian Church in Australia. He took pastoral work in Pusan with itinerary evangelistic trips in southeast part of Kyungsang-do at first and from 1906 began to serve as a professor of 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in Pyengyang until his retirement from mission in 1937. Engel lost his wife in 1906 and one year later he married again to Miss A. Brown, one of the pioneer women missionaries to Korea. During his teaching of Church history and biblical languages at the seminary Engel began to publish a theological journal The Theological Review(神學指南) and partook in the ecumenical revision work of Korean Bible. Also he took the position of the chairman of the general assembl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 1913 and an editor-in-chief of History of Korean Presbyterian Church(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In 1920 the Wooster College, Ohio of America, gave him the degree of D.D. in honour of his various services in mission field. After retirement Dr. Engel returned to Australia and spent his last two years in Melbourne. Dr. Engel served as a professor at the theological seminary 31 years in his 37 years of missionary service in Korea. Korean students and missionaries altogether told him a scholar by nature. As Charles I. McLaren commented, “Learning was his bent and teaching an instinct.” He wrote two books in Korean as the text book for theological students, Church History: Post Reformation Period(更正後史記) and Apologetic History of Ancient Church(古敎會辨證論) with about fifty articles in English and Korean. As a presbyterian theologian, he took the position of a conservative evangelical tradition which stressed upon the salvation of Christ and paracleitos work of the Holy Spirit but also took ecumenical attitude to other protestant denominations. As a Church historian, he wrote many articles and books on the early Church's dialectical theologies and mission history of protestant and catholic Churches in post-reformation era. He showed deep concern to the reformation history of Scotland in 17th century but also took a ‘neutral' attitude toward Catholicism. And finally, as a missionary, he had a confidence firmly in evangelicalism but also an inclusive attitude to native culture. In his article “Native Customs and How to Deal with Them”(1904), he suggested that foreign missionaries should have ‘large hearted and liberal' attitudes in regard to the native customs and national traditions. He warned against the national prejudices and peculiarities of westerners in mission field. He insisted that if there were something to be changed in native customs they would be changed by the Korean Christians as they received more ’spiritual enlightenment' and God's Word and His Holy Spirit would bring about the changes in the customs of this nation that would make it a truly Christian nation, as truly as nations in the west. And he closed his writing in a following prayer: “May God grant that western civilization, with it's baneful influences, will leave the Korean church untouched!” Truly, Dr. Engel was one of a few foreign missionaries who could overcome the error of orien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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