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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종가의 계승과 세거지

        홍순석(洪顺,,) 포은학회 2013 포은학연구 Vol.11 No.-

        포은종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포은의 위상에 비해 종가의 실상은 극히 미미하다. 여말선초의 벌족 가운데 포은종가처럼 부침(浮沈)이 많은 종가는 없으리라 본다. 포은의 순절 이후, 세조 때 손자 보(保)의 참화, 성종 때 증손 윤정(允貞)의 참화 등으로 역대 임금의 시혜(施惠)에도 불구하고 고려말기 포은종가의 성세를 회복할 수 없었다. 포은종가의 봉사손은 조선 태종 때 포은이 신원되고 추증된 이후, 조선 말기까지 역대 임금으로부터 여러 차례 복호(復戶)와 녹용(祿用)의 시혜를 받았다. 숙종 재위 기간에는 이정구, 송시열의 각별한 배려로 봉사손의 녹용은 물론, 포은의 현양을 위한 여러 사업이 추진되었다. 무엇보다도 단종 복위와 함께 정보에게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포은과 설곡의 충절이 크게 부각되고 칭송되었다. 충렬서원의 건립, 포은영당의 중건 등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재위기간의 이 같은 특별한 배려로 16세기에는 무관직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온 영일정씨 포은공파 가문이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여러 명의 명망 있는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종가의 봉사손에서는 명망 있는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 포은 봉사손의 입계 양상에서 살폈듯이 포은종가는 11세손 찬광(纘光) 이후 22세손 의열(義烈)까지 13대에 걸쳐 6차례나 입계하여 봉사손을 계승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 같은 불운이 포은종가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포은종가의 통혼관계에서도 조선 전기에는 포은의 명성이 그대로 반영되었던 반면, 후기에서는 한미한 가문으로 몰락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포은의 장남 종성(宗誠)은 정종의 4남인 선성군(宣城君)과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順城君)을 사위로 맞아 왕실과 혼척관계를 맺었다. 이 당시야말로 통혼관계에서도 영일정씨 포은공파의 최대 성세였다. 손자 보(保)의 당대까지도 통혼관계는 벌족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설곡의 참화 이후에는 그같은 성세를 살필 수 없다. 포은공파 종가의 경우 죽산박씨, 경주이씨, 창녕성씨, 전의이씨, 청주한씨 등의 가문과 통혼하였다. 그 가운데 용인지역에 세거하는데 상호 영향을 미쳤던 가문은 죽산박씨, 용인이씨, 연안이씨, 순흥안씨, 한양조씨 등이다. 특히 연안이씨 저헌공파(樗軒公派)와의 통혼은 모현면 능원리에 정착하여 세거하는데 상호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에는 은진송씨(恩津宋氏)와의 통혼관계가 주목된다. 포은종가 봉사손의 세거지는 조선 건국 이래 말기까지 한양 도성 안에 있었다. 세조 때 정보가 참화를 당하기 이전에는 중부 견평방(堅平坊) 의금부 자리에 거주하였다. 정보의 참화로 포은종택이 적몰된 이후, 두 아들 윤정(允貞)ㆍ윤관(允寬)은 정보의 적소(謫所)인 단성(丹城) 문태촌(文泰村)에서 함께 거주하였다. 정보가 단성 적소에서 졸한 이후에는 장남 윤정은 선조의 향사를 모시기 위해 용인에 거주하였으며, 3남 윤관은 단성에 남아서 정착하였다. 5세손 희(熹)가 성종의 시혜로 사옹원 참봉으로 탁용되면서 다시 한양 도성 안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7세손 진(震)의 집이 한성의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었다는 기록을 전제하면, 희(熹)-세건(世健) 부자가 거주한 곳도 낙선방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8세손 응선(膺善)ㆍ명선(明善)ㆍ종선(從善) 모두 낙선방에서 출생하였다. 1640년(인조18)경 9세손 준(儁)의 집을 방문한 정극후(鄭克後)는 <쌍봉정사부극후시병서(雙峯鄭師傅克後詩幷序)>에서 포은종손이 대를 이어 '남산골'에 2백여년간 거주하고 있음을 칭송하였다. '남산골'은 바로 낙선방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준의 다음 세대인 운한(雲翰)-원징(元徵)-찬광(纘光) 까지도 낙선방에 출생하여 세거하였다. 1679년(숙종5)에는 민정중(閔鼎重)의 건의에 따라 묵사동(黙寺洞)에 사당을 건립해주고 자손을 녹용하게 하였다. 1706년(숙종32)에는 포은의 봉사손 호(鎬)가 사당 및 영당을 호동(壺洞)에 옮겨 세웠다. 19세기까지 포은종가가 한성에 있었음을 증빙한다. 1865년경 해주에서 거주하던 종손 정규화(鄭奎和)가 비로소 모현면 능원리에 전입하여 머물게 되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모현면 능원리에 포은종가가 세거하고 있다. 포은의 묘하에 세거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5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圃隐世家可谓是韩国代表性的世家. 虽然和圃隐在韩国的地位相比世家的状况还是微不足道的. 处于15世纪丽末鲜初的名门望族中像圃隐世家这样历经多次浮沉的不多见. 圃隐殉节以后, 经历过世祖时期郑保的惨祸, 成宗时期郑允贞的惨祸之后尽管历代王不断加恩施惠,但是高丽末期圃隐世家的盛况一去不复返了. 自从朝鲜太宗时期为圃隐伸冤, 并使之受到推崇之后到朝鲜末期,圃隐世家的奉祀孙屡次受到復户和祿用的恩惠. 肃宗在位期间受到李廷龟, 宋时烈的特别照顾不仅奉祀孙得以录用,对推崇圃隐思想也起到推进作用. 端宗復位同时对郑保追赠李朝参议的名号. 使得圃隐和雪谷的忠节思想被重点突出一再称颂. 忠烈书院的建立, 圃隐影堂的重建等也都是在这个时期完成. 端宗在位期间的特别优待让16世纪勉强维持着武官职的迎日郑氏圃隐公派家门到了17世纪出了许多有名望的人物. 但是世家的奉祀孙中并没有出有名望的人物. 原因是圃隐世家从第11代的世孙郑纘光到第22代的世孙郑义烈这13代曾经6次入系, 导致奉祀孙继承上的不幸. 圃隐世家的通婚关系在朝鲜前期是反映了圃隐的名望. 后期则显现出了寒微家门的没落现象. 圃隐的长男郑宗诚和王室通婚. 这种通婚在当时也是迎日郑氏圃隐公派最大的盛势. 孙子郑保维持着和当代名门望族通婚的位相. 圃隐宗派世家和竹山朴氏, 庆州李氏, 昌寧成氏,全义李氏, 淸州韩氏等家门通婚. 其中在龍仁地区居住并相互影响的家门有竹山朴氏, 龍仁李氏, 延安李氏, 顺兴安氏, 汉阳赵氏等. 特别是和延安李氏的通婚使得其得以扎根慕贤面陵院里世代居住, 并深受影响. 朝鲜后期和恩津宋氏的通婚关系更是令人瞩目. 圃隐世家奉祀孙的居住地从朝鲜建国以来到末期一直在汉阳都城内. 世祖时期孙辈郑保在遭受惨祸之前在中部坚平坊居住. 郑保发生惨祸之后圃隐宗宅被没收, 长子允贞和三子允宽在郑保的謫所丹城文泰村一起居住. 郑保去世以后长子贞为了祭祀先祖搬到龍仁居住, 第五代世孙郑熹又重新搬回汉阳都城. 有记录显示第代7世孙震在汉城的南部樂善坊居住, 由此郑熹-郑世健父子在樂善坊居住的可能性很高. 第8代世孙郑膺善ㆍ郑明善ㆍ郑从善也都是在樂善坊里出生. 之后的子孙郑儁-郑云翰-郑元徵-纘光也都是在樂善坊出生并居住于此. 1679年(肃宗5)由閔鼎重建议下在黙寺洞建立祠堂并且录用圃隐子孙. 1706年(肃宗32)圃隐的奉祀孙镐把祠堂和影堂搬到壶洞. 直至19世纪有圃隐世家在汉城居住的证据. 1865年郑奎和第一次搬入慕县面陵院里居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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