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장소로서의 이카이노와 재일조선인 문화지리의 트랜스내셔널
허병식(許炳植) 동악어문학회 2016 동악어문학 Vol.67 No.-
재일조선인의 자기 구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와 장소를 둘러싼 문화적, 사회적 이해가 구성되어 경쟁하고 협상되어가는 방식에 주목하여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문화와 장소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융합하고 분열하는 다양한 방식을 탐구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카이노라는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재일조선인이라는 하나의 집단이 오사카 이카이노라는 역사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에서 정체성, 소속감, 차이 등을 수행해서, 그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어 나가는 방식과 그 실천은 그 장소에 대한 다른 입장들과 함께 탐구 될 필요가 있다. 재일조선인이 제국주의의 지배와 식민지의 일상적인 차별, 그리고 출신지 국가에서의 소외와 중첩되는 억압이라는 자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의 디아스포라적 존재 방식은 그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층위에서 다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민족 문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소외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과 그들이 (탈)구축하려는 정체성의 맥락에서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현월(玄月)의 소설은 이카이노라는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대한 기억과 재현이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던 공간을 새로운 문화적이고 지정학적인 위치로 이동시키고, 거기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민들을 발굴하고 있다. 이는 ‘국민 = 민족적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수자들 (minority)의 자기 서사의 시작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정체성의 구축은 재일조선인 문학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봉쇄된 목소리와 회수되는 여성의 자기서사-다큐멘터리 영화 < HARUKO >를 중심으로-
허병식 ( 許炳植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한국학연구 Vol.0 No.43
재일조선인 1세 여성에 관한 다큐멘터리 필름 < HARUKO >에서 아들 김성학은 자신이 징용으로 일본에 왔다고 말하는 어머니에 대해서, 법률이 생기기 전에는 징용이라는 것이 없었고, 따라서 어머니 정병춘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에 남아 있는 공식기억과 법률이라는 증거에 기반하여 어머니 정병춘이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재일 1세들의 경험이 가로새겨진 여러 가지 맥락들에 주의를 기울여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것이다. 국가의 공식기억 앞에서 침묵당한 서발턴으로서 재일 1세의 기억을 복원하고 그들을 포스트식민적 주체로 호명하고자 하는 기획이 이러한 목소리에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병춘/가나모토 하루코라는 여성을 바라보고 그녀를 주체로 호명하고자 하는 시각이 놓여진 그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의 초반부에 어머니의 삶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지켜야 할 것은 법률보다는 가족. 어머니의 체포 이력은 37회에 이른다.”라고 이야기했던 아들(카메라)의 나레이션과 앞서 살핀 “법률이 없던 시대에 징병이 있느냐”고 묻는 아들의 비판은 묘하게 길항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힘겹게 생계를 이어왔던 어머니의 삶에 대한 헌사가 이 영화의 주요 서사이다. 김성학은 법을 지키는 것보다 그것을 위반하면서까지 가족을 위한 삶을 이어갔던 어머니의 삶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기록하는 카메라맨의 위치를 고수했지만, 어머니의 삶에 대한 기억과 감사를 표하는 영화의 이야기는 그가 경찰서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기억과 법률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다큐멘터리 <어머니! 찢겨진 재일가족>이 < HARUKO >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더욱 강조되는 것이 어머니 삶의 보편성이라면, 그 보편성의 감동 안에서 소거되는 것은 찢겨진 가족들의 삶과 그 역사적 문맥일 것이다. 가부장적 아버지의 고집으로 인해 제주도에 남겨진 큰 딸, 어머니의 신산한 삶과 동행하며 그로부터 발생한 어머니의 폭력으로 인해 가족의 품을 떠난 둘째 딸, 그리고 귀국 사업으로 인해 북한으로 떠난 셋째 딸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스무명의 손자와 손녀들에 둘러싸여 행복해 하고 손녀의 결혼식에서 그 행복을 확인하는 어머니의 숭고한 모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는 재일조선인의 삶의 이야기를 어느 한 지점으로 회수하고 싶어하는 카메라의 시점이 예비하고 있던 결과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在日朝鮮人1歳の女性に関するドキュメンタリーフィルム< HARUKO >で息子キム·ソンハクは自分が徴用で日本に来たと言うお母さんについて、法律が起こる前には徴用というものが無くて、したがって、母チョンビョンチュンは自発的に日本に来たと主張する。彼は歴史に残っている公式の記憶と法律という証拠に基づいて母チョンビョンチュンが自分の人生を虚偽証言していると強く批判している。しかし、在日1世らの経験がそれて長いになった様々な脈絡に注意を傾け、その意味を正しく理解しようとする試みは意味があるのだ。国家の公式記憶の前で沈黙されたソバルトンとして在日1歳の記憶を修復し、彼らをポスト植民地的主体とお呼びしようとする企画がこのような声に込められているといえるだろう。しかし、チョンビョンチュン/金本春子という女性を眺めて彼女を主体とお呼びしようとする見方が置かれた陰に対して見つめることはまた、重要な意味を持つ。 映画の序盤に母の人生の履歴を紹介しながら、"守るべきものは法律よりは家族。母の逮捕歴は37回に達する。"と話した息子(カメラ)のナレーションとリードして見た"法律がなかった時代に徴兵があるのか"と尋ねる息子の批判は妙に拮抗する。家族を守るために法を違反してまでかろうじて生計を立ててきた母親の人生に対する献辞がこの映画の主要な叙事だ。キム·ソンハクは法を守ることよりそれを違反してまで家族のための人生を送って行った母親の人生を中立的な立場で記録するカメラマンの位置を固守したが、お母さまの人生に対する記憶と感謝を示した映画の話は彼が、警察署の敷居を越えなかったのと同様、公式的な記憶と法律の境界を越えない。 ドキュメンタリー<お母さん! 破れた在日家族>が< HARUKO >に轉化される過程で、もっと強調されるのが、母親の人生の普遍性ならば、その普遍性の感動の中で消去されるのは破れた家族の暮らしとその歴史的文脈であろう。家父長的に父のこだわりによって済州島に残された長女、母の辛酸をなめる日と同行して彼から発生した母親の暴力によって家族のもとを離れた二番目の娘、そして帰国事業によって北朝鮮入りした三女の話は映画で二十人の孫と孫娘たちに囲まれて幸せし、孫娘の結婚式でその幸せを確認する母親の崇高な姿の中に消えている。これは在日朝鮮人の人生の物語をある一つの地点で回収したいカメラの視点が予備していた結果だとみてもいいだろ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