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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의 『풍류정신(風流精神)』에 대한 검토

        최재목(Choi Jae-Mok),정다운(Chung Da-Un)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동북아 문화연구 Vol.1 No.20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thought of Kim, Jeong-Seol. His thought appeared to his hook An Liegant Spirit(『風流精神』).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was made after he died, and it was called His main text with A story cf The Flower Man(『花郞外史』). This hook has a different writing 4 papers. The papers are The Flower Man(「花郞」), A though of Choe, jae-woo(「崔濟愚論」), A though of Yin and Yang(「陰陽論」), Chweseong Kim si-seup 「贅世翁 金時習」). And as well as the purpose of these papres, there are different form. However, the core of this article is 'The Harmony(調和)'. This 'The Harmony(調和)' is read again in today's life history It is difficult to find his thought through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But the new approach to text is needed

      • KCI등재

        金源極을 통해서 본 1910년대 陽明學 이해의 특징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이 논문에서는, 아직 학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명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金源極(1871-1927)을 통해서 그가 ‘유교 이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이자 근대적 학술이 본격 유입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양명학’을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원극에 대한 소개는 서경석ㆍ김진량 엮음의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 세상유학기』, 최재목의 「日帝强占期 雜誌를 통해서 본 陽明學 硏究의 動向」, 금장태의 『한국 양명학의 쟁점』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본격적인 연구에 이르지는 못했다. 김원극은 그는 함경남도 永興郡 출신 유학자로, 松南, 春夢, 春夢子, 松南春夢 등의 필명을 사용하여 1908년부터 『西北學會月報』, 『太極學報』, 『大韓興學報』 등에 많은 다양한 글을 싣고 있다. 『태극학보』에는 주필로 활동하였고, 西北學會에서는 副總務로 활동하던 중 1909년(明治四十二年) 11월 11일 伊藤博文 被擊事件 嫌疑者로서 眞相調査를 받았으며 1910년에는 朴殷植에 이어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1934년 11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학과 경제학을 겸비한 정치객이었던 바 그 외에도 문맹퇴치에도 노력하여온 드문 지사이었던 바 지난 소화 2년 8월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김원극은 유교를 1910년대 당시의 서세동점, 약육강식의 세계사적 현실에 맞도록 근대적, 실천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개혁적 특성은 이태리 건국 삼걸의 강조하고 그러한 기풍을 한국의 청년들에게 계몽할 것을 기대하고 촉구한 데에서, 아울러 유교를 서구 기독교에 대항할만한 근대적 콘텐츠(교리, 텍스트 등) 및 종교적 체제를 갖추도록 요구한 바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수구적 보수 유림들과 사고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김원극은 박은식의 대동교 정신에 동조하는 유교 개혁 쪽에 서 있었다. 그는 유교의 본질은 계승하되 구체적 내용들은 한국의 지금ㆍ여기에 맞는 ‘時中’의 유교를 지향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유교가 새로운 체제로 개혁하고 나아가서 利用厚生 및 국민ㆍ청년계몽이라는 세계사적 문명에 발맞출 수 있는 학술이어야 함을 적극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교에 대한 관점은 그대로 양명학 이해에도 적용된다. 김원극의 양명학 이해는 「明代諸儒의 學說」과 「王陽明學論」에 잘 드러나 있는데, 먼저 「明代諸儒의 學說」에서는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은, 「王陽明學論」에서는 양명학이 나의 정신을 번롱하여 단순히 悟道를 주안으로 한 禪家와 다름을 지적하고 ‘人倫交際의 道’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각 학술은 그 세부적 특성을 유지하지만, 큰 틀에서는 합치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王陽明學論」에서는 근대학문의 한 장르인 ‘倫理學’으로서 양명학을 이해하는데 큰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은 아마도 1908년 그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얻은, 당시 일본에서 유포되고 있었던 최신의 양명학 지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추정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근대적 학술체계로 전통사상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양명학이 근대적 학문에 어울리는 특징이 있음을 평가하고자 했음을 인정해도 좋겠다. 김원극이 구상한 「倫理?」으로서의 양명학은 주체성과 능동성을 갖고 있으면서 ‘人倫交際의 道’로서 실제 사회에서 실용성을 갖춘, 化學ㆍ物理學ㆍ金石學ㆍ地質學등의 제 학문과 대등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인륜의 학문’(=윤리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의 한국에서, 외국의 신지식을 수용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양명학을 근대적 학술로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노력이 당시의 여러 양명학 연구가와 비교해 볼 때 큰 특징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his study focus on Kim Wongeuk(金源極. 1871-1927)’s Yangmyonghak(陽明學), especially, through reexamining his the famous two articles, Myongdaejeuhakseol (the Neo-confucian’s theories in Ming dynasty of china. 明代諸儒의 學說) and Yangmyonghakron(Essay on Yangmingxue. 王陽明學論). Kim Wongeuk is a man unknown to fame to us till now. But his Yangmyonghak (陽明學),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modern korea, is very important to know what is the characteristic of Modern Korea. He studied at Japan for a number of years, and so he had many information about Modern knowledge on sciences and academism in Japan. Based on this, I think, most of his knowledge on Yangmyonhak(陽明學) is also from modern japanese academic, scientific research information, such that modern japanese youmeigaku (Yangmyonghak, 陽明學) by Inouetetsujirou(井上哲次?)’s Youmeigaku-notetsugaku(陽明學派之哲學), Takasetakejiro(高?武次?)’s Ouyoumeisyouden(王陽明詳傳), and the Youmeigaku(陽明學) edited by Higasikeiji(東敬治). The most korean thought’s knowledge and action in Yangmyonghak(陽明學) are from these modern japanese. Kim Wongeuk try to define Yangmyonghak as Oriental ethics. And he think the Yangmonghak is one with the Buddhism. His the definition and interpretation on Yangmonghak are does not correspond with the original. an orthodox method. Most people in Joseon dynasty and modern Korea criticize the Yangmyonghak are very like with Buddhism, but it is a distinguishing mark that Kim Wongeuk take an active a point of view the two are fusing with.

      •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

        최재목(Choi Jae-Mok)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2 다산과현대 Vol.4,5 No.-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Dasan Jeong Yak-yong in 1930"s japanese imperialism era of modern korea. In 1935,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Dasan Jeong Yak-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ong won and Su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Dasan Jeong Yak-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 KCI등재

        문화(文化) : 조선후기 위항인(委巷人)의 음악 활동에 관한 연구

        최재목 ( Jae Mok Choi ),안선희 ( Sun Hee An ) 퇴계학부산연구원 2014 退溪學論叢 Vol.0 No.23

        이 연구는 조선후기 새로운 문인계층인 위항인들의 음악 활동을 문집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문인음악은 양반 출신의 문인 뿐만 아니라, 중인 이하의 계급인 위항인들도 그 향유대상이었다. 위항인들은 조선후기에는 경제적인 안정과 양반들이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함양한 중인계층은 부와 학문적 소양을 가졌으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중인의 신분에서 양반의 신분으로 이동하지 못하는 신분적 굴레 속에 놓여있었으며, 내면적 고통을 해소하는 방편은 위항문학(委巷文學)운동을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의 하나로 음악 방면에서의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등장은 조선후기 문인음악의 발달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했다. 음악예술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유교적 신분질서가 엄격한 조선시대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양반 출신의 문인들과 함께 연주활동을 펼쳤던 풍류방의 음악문화는 위항인들의 음악향유 및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 양반문화와 서민문화를 함께 수용하여 전파하는 역할을 하여 조선후기 음악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위항인들의 음악 활동은 확대되어 더욱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형태로 존재하였다. 조선후기는 이전의 양반이나 사대부들이 전유했던 음악은 위항인까지 확산하여 풍류방의 연주형태로도 연주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위항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수 있었으며, 음악수용층의 확대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이들은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펼쳤는데 현실을 초월해서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창조적인 인간상, 그리고 예속과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세계를 가꾸어가는 근대 지향적인 음악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즐긴 풍류는 자유와 평등사회에 대한 의지 표출과 함께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This study examined the musical activities of Wihangin, a social class of literary persons newly appearing in late Chosun centering around the collection of works. Literary men`s music during late Chosun was enjoyed not just by literary men in the social status of yangban but also by Wihangin, people in the social status lower than that of jungin. During late Chosun, Wihangin was in the jungin`s status equipped with economic stability as well as basic refinement that yangban had then, so they were with both wealth and academic refinement; however, they were bridled for their social status that could not be elevated from jungin`s to yangban`s in a legitimate way. The aspects that they tried to relieve such internal pain were shown in Wihang Literature Movement. As an aspect of that context, they did musical activities particularly. With the advent of them, literary men`s music during late Chosun could be developed more actively. As an aspect of practicing the art of music, both literary men in the social status of yangban and they enjoyed the pungryubang music culture playing instruments together regardless of their social status in Chosun where a Confucian social class system was strictly applied, and in fact, this formed the drive that encouraged Wihangin to enjoy music and do musical activities. In addition, they played roles in accepting and transmitting yangban`s culture and folk culture both and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music culture in ate Chosun significantly. As Wihangin`s musical activities became even more vitalized, they existed as more opened and inclusive forms. During late Chosun, the music that had been enjoyed by either yangban or sadaebu exclusively before were spread to Wihangin as well, and it was enjoyed also in the form of pungryubang performances. This led to even more vitalization of Wihangin`s activities and contributed to the expansion of the class accepting music. Also, they exhibited musical activities freely. We can see from them the aspects of creative men enjoying mental freedom beyond limitations lying in reality and also the aspects of music people pursuing modernism and making a world of art not restricted for their social status or any subordination. Pungryu they enjoyed, in fact, embraced their expression of will to realize the society of freedom and equality and spirit pursuing a broader world.

      • KCI등재

        왕양명의 초상과 폐병, 그리고 측달지심(惻怛之心)의 관련성 시론(試論)

        최재목(Choi Jae-Mok)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퇴계학논집 Vol.- No.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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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왕양명의 초상과 폐병, 그리고 측달지심(惻怛之心)과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논한 것이다. 양명학을 보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많은 사상가들의 생전 모습은 대체로 초상화를 통해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왕양명의 경우는 좀 특별하다. 어딘가 병을 앓는 듯하다. 양명의 질환에 따른 고통, 그런 신체감각이 철학사상을 구축하는데 깊이 연관돼 있음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양명 스스로 ‘오신지질통(吾身之疾痛)’이란 말을 썼다. 그의 사상의 발신지는 구체적 몸(신체)이지 관념적 머리(정신)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사상 언어는, 신체가 만들어낸 : 신체감각 즉 ‘체감(體感) 언어’이지, 두뇌가 만드는 개념적 ‘추상(抽象) 언어’가 아니다. 양명이 말하는 ‘신체의 질통’(身之疾痛)은 바로 ‘진성측달지심’(眞誠惻怛之心)이고, 진성측달지심은 ‘양지’(良知)의 활동/전개(=致良知)이다. ‘신체의 질통’(身之疾痛)=‘진성측달지심’(眞誠惻怛之心)=‘치양지’(致良知)는 ‘시비(是非)’, ‘호오(好惡)’를 직관한다. 왕양명은, 스스로 질병을 껴안고 있으면서 병들고 아픈 세상을 치유하고자 했던 이른바 ‘상처 입은 의사’(wounded healer)’였다. 그래서 왕양명은, ‘진성/성애측달지심(眞誠/誠愛惻怛知心)이 없다면’, ‘양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눈’의 진정한 의미는 ‘눈물’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성과 논리(=눈)의 진정한 의미는 구원과 자비(=눈물) 쪽에 있다는 말이다. 왕양명은 그의 치양지(致良知) 철학을, 성애측달지심(誠愛惻怛之心)이라는 ‘구원과 구제의 자비(慈悲)’ 쪽에서,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는 ‘지혜(智慧)-이성(理性)’을 껴안는 방향으로 구축하였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portrait of Wang Yang-ming, Consumption, and Empathy[Cedazhixin] There are many ways to study Yangming. The life of many thinkers can be guessed through the portraits. However, the case of Wang Yang-Ming is a little special. It seems to be somewhere ill. The pain associated with bilateral diseases, such a sense of body, is deeply related to building philosophical thought. This paper has paid attention to this point. Yangyang himself wrote the phrase pain in my body(wushenzhijitong吾身之疾痛) . The source of his ideas is the concrete body, not the ideological mind. So his thought language was the so-called body sensory language created by the body. It is not a conceptual abstract language that the brain makes. Wang s pain in my body is the function of mind that judges right and wrong(shifeizhixin) and is the zhiliangzhi(Moral judgment and willingness to practice in human beings). Wang Yangmyong was a so-called wounded healer who was hugging himself and trying to heal the sick and sick world. So Wang Yang-ming said that we shall realize zhiliangzhi would not be possible without sympathy and compassion. This means that the true meaning of the eyes is in tears. The true meaning of rationality and logic is that it is toward salvation and mercy. Wang Yang - ming s zhiliangzhi philosophy sees wisdom and reason in salvation, salvation, and compassion.

      • KCI등재

        명(名)과 호(號)를 통해서 본 왕양명(王陽明)

        崔在穆 ( Choi Jae-mok )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2021 退溪學論叢 Vol.38 No.-

        이 논문은 名과 號 등의 별명을 통해서 陽明 王守仁(1472~1528)(이하 왕양명)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적 성향을 재검토해보는데 목적이 있다. 문학에서는 문학가의 작품 자체에 주목하는 작품론과 그 작품을 만들어 낸 작가에 주목하는 작가론이 있다. 이렇듯, 왕양명의 경우에도 그가 남긴 ‘자료(학술 자체)’를 검토하는 방향이 있고, 다음으로 왕양명이라는 ‘사람(사상가 자신)’을 살펴보는 방향이 있을 수 있다. 후자에 주목하는 경우에는 보통 삶(=생애)을 살피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왕양명의 名(초명 포함)과 별명인 ‘字’, ‘號’, 諡號에 주목하여 그의 인물과 사상적 성향을 재검토하는 방식으로 양명학을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왕양명의 생애라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상적 특징이 그의 이름과 호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이름과 호에 숨은 왕양명이라는 인물과 그 사상적 성향을 밝힘으로써 학문적 체계내의 논리를 넘어서는 왕양명의 은유적 면모를 새롭게 조명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논문에서는 왕양명의 인물과 그 사상적 성향을 ‘이름’[=初名과 名(본명)] 또는 별명이나 호[=字, 號, 諡號]에 주목하여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왕양명의 傳記를 배경으로 하되, 다양한 해석을 곁들여 평이하게 풀이하는 식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 논문의 서술은 <출생배경 및 지역적 특성>, <초명, ‘雲’ >, <본명, ‘守仁’>, <字, 伯安>, <號, 陽明>, <諡號, 文成公> 순서로 서술되었다. 그래서 왕양명의 초명-본명-자-호-시호에는 각각 그의 성격, 사상적 지향점 등이 잘 은유되거나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그의 인물됨뿐만 아니라 철학사상의 전개에 하나의 배경음으로 직간접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a person named Wang Shouren (hereafter Wang Yangming) and his ideological tendencies through name and nicknames. In literature, there is a two methode that pays attention to the work of the writer itself and the author who created the work. As such, in the case of Wang Yang-myeong, there may be a direction to examine the ‘data (scholarship itself)’ he left behind, and then there may be a direction to examine the ‘person (the thinker himself)’ named Wang Yangming. When paying attention to the latter, it is common to look at life. So far, research on Wang Yangming has not focused on his name and nicknames. However, by this study we able to revealing the character of Wang Yangming and his ideological tendencies hidden in his name and title. So, I think that it will be possible to shed new light on the metaphorical aspect of Wang Yangming that goes beyond the logic within the academic system. In this study, I will describe Wang Yangming's name immediately after birth(初名), his real name(本名=名), his name after becoming an adult(字), his pen name(號), and his nickname given by the king after his death(諡號). And to help understanding, based on the biography of Wang Yangming, various interpretations will be added and explained in a plain manner. I think that Wang Yangming's name and nicknames not only express his character, but also act as a background sound that determines the development of his philosophical thought.

      • KCI등재

        일제강점기 정다산(丁茶山) 재발견의 의미 -신문,잡지의 논의를 통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7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하 ‘다산’ 혹은 ‘정다산’) 관련 기사 및 논고를 토대로 당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재발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정다산’의 연구와 ‘언론 매체’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는 바로 1930년대에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한국학’인 ‘조선학’ 때문이다. 그 핵심 세력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고 협조를 거부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연구자들 즉 안재홍安在鴻(1891~1965)·백남운白南 雲(1895~1979)·최익한崔益輪(1897~?) 등이었다. 그들이 펼친 조선학은 ‘조선문화 부흥’의 일환이며, 그것은 문화제국주의의 한국학인 ‘청구학靑丘學’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 대립되는 양자는 ‘한국사회·한국문화 특수성론’으로 공통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자가 후자의 전도형태 顧倒形態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다산에 대한 연구는 1934년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 서거 98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들은 조선학 부흥운동을 꾀하면서 그 일환으로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비롯하여 여타의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인 작업은 역시 1938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2면 기사에 「茶山與觸堂全書 完刑記念祝寶 來十六日 明月館에서」 라고 있는 것처럼, (1934년에 시작하여) 1938년 12월에 이뤄지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신조선사新朝雖社 출판)의 완간 작업이었다. 『여유당전서』의 출판에 참여한 인물로는 실학 관련 기사를 쓴 정인보, 최익한, 문일명文一平(1888~1936), 안재홍 등이다. 최익한은 65회에 걸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힘」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다산의 『여유당전서』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조선학운동에서 ‘정다산`은 분명 우리나라 ‘위인’의 표상이자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 개념, 인물을 새롭게 영유領有하는 방법론이기도 하였다. 그를 둘러 싼 좌의 ‘세계’ 지향과 우의 ‘민족’ 지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근대적’ 학술의 논의가 진척되었고 ‘허虛의 학’을 넘어선 ‘실實의 학’을 추구해가는 절실한 논의의 지명이 열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크게는 〈구(전통-구식)〉⇔〈신(현대-신식〉이 극명하게 대립되고, 그 대립 속에서 새로운 이념들이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익’측에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한 대응 논리로 포괄적인 민족사상 및 학문의 전통 확립을 위해 정인보鄭寅普가 ‘얼’을, 안재홍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분일평이 ‘조선심朝鮮心’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주도해갔다. 이에 반해 ‘좌익’측에서는 이청원, 백남운 등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세계사의 보편성에서 한국사체계를 구성해 사회경제사학을 확립하는 한편 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세계’에 관심을 둔 좌, 민족에 관심을 둔 우의 ‘시점視點’은 정다산, 실학, 나아가서는 조선학을 서술해가는 방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정다산 논의는 ‘민족民族’과 ‘세계世界’ 사이에서 새로운 연구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Tasan Cheong Yagyong in japanese imperialism era, especially, here focused the media and the journal in those days. In 1935,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Tasan Cheong Yag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eongwon and Seo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Tasan Cheong Yag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 왕양명(王陽明)과 퇴옹(退翁)의 심성론·수행론 비교 -퇴옹의 양명학 논의를 단서로 한 시론(試論)-

        최재목 ( Choi¸ Jae-mok ) 성철사상연구원 2020 퇴옹학보 Vol.17 No.-

        이 논문은 중국 명대의 사상가로, 흔히 심학(心學)을 대성한 학자로 불리는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과 해방 이후 해인총림 초대 방장과 조계종 제7대 종정 등을 역임한 퇴옹(退翁) 성철(性徹)이라는 두 인물의 심성론·수행론을 비교한 것이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퇴옹의 양명학 논의를 단서로 하여 비교론적으로 서술하였다. 양명과 퇴옹은 돈오돈수적 ‘깨달음’[覺·悟]이 먼저 있고 나서 그것을 철학사상적으로 이론·체계화하고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을 갖는다. 아울러 심성론·수행론에서도 유사한 사유를 보이고 있다. 이 논문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퇴옹과 양명은 돈오돈수적 깨달음이 먼저 있고 그것을 생애 동안 철학사상적으로 이론화, 체계화하는 방식을 택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둘째, 양명과 퇴옹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완전무결하여 더 이상 언어문자로 보탤 필요가 없다는 성선론적 인간 심성 파악(=심성론)에서 일치한다. 셋째, 수행론에서는 양명과 퇴옹의 이론적 논의 형식의 측면에서는 일치하나 실제적 현실적 차원의 대응에서, 양명은 수행마저 방편이라 보는 자연주의, 자유주의의 길을 열었고, 퇴옹은 수행마저 방편이라는 단언(斷言)에서 엄격주의, 엄숙주의, 경건주의를 어느 정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양명과 퇴옹은 당시의 현실이 가진 보수적 권위주의나 유교, 불교 교리의 선험성에 대해 전자는 급진적 해체의 길을 열었고, 후자는 내적인 순수성 심화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구체적인 각 지역의 역사 속에서, 퇴옹과 양명의 심성론-수행론의 ‘행방’은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양명은 심성론-수행론은 그 이후 제자들 사이에서 좌, 우, 중도라는 여러 파(派)로 나뉘면서 다채롭고 치열한 전개를 보이며 이론적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비해 퇴옹의 그것은 한국 불교계에서 특정 시기의 논란을 제외하면 양명학파만큼의 지속적인 논의와 다양한 이론적 분화를 보여주지 못했다. This paper aims at studying the mind and performance theory comparatively between Wang Yangming and Toeong Sungchol. Wang Yangming, one of the well known Neo-confucian thinkers during the Ming Dynasty in China, is famous for his understanding of the mind called Shim Hak, while Toeong Sungchol, one of the most famous Seon masters in contemporary Korea, leaves a rich legacy of Korean Seon contemplative meditation tradition especially in the Sudden Awakening and Sudden practice. Both Yanming and Toeong, having accomplished their awakening of the mind, started to establish their theory of the mind by philosophically theorizing, systematizing, and storytelling on the basis of their awakening experience. Interestingly there are similar patterns on their way of thinking on the mind and its performance. First of all, both are in favor of the Sudden Awakening and Sudden Practice. They both dedicated their life on systematizing as well as philosophically theorizing this perspective on the process of awakening or enlightenment. Secondly, both are in favor of the innate goodness of the individuals. While Yanming was following along with the Confucius theory of self suggested by Mencius, Toeong was agree on the Buddha-Nature theory meaning every living creatures have capability to become awakened. Thirdly, while Yangming preferred naturalistic as well as literalistic attitude on discipline, Toeong adhered to strict, solemin, and pious attitude on discipline. Fourthly, Yangming opened a path for radical dissolution of the conservative Neo-Confucianism, whereas Toeong initiated a mind practice on inner purity among the conservative Korean Buddhists. Lastly, there are differences in their understanding of the mind and its performance. While Toeong was silent the discussion on the mind, Yangming caused lots of debate on diverse understanding of the mind in terms of its developments.

      • KCI등재

        동아시아 양명학 연구의 새 지평에 대한 모색

        최재목 ( Choi Jae-mok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7 儒學硏究 Vol.38 No.-

        이 논문은 동아시아 양명학연구의 과제를 화두로 현재 시점에서 양명학연구를 성찰해 보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다. 디테일보다도 거시적 안목에서 양명학연구의 새 지평을 성찰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 논문에서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자학의 방향 즉 `언어문자의 입장=언어·문자문화(literacy)의 인간탐구`와 상산학 혹은 양명학의 방향 <육성·소리의 입장=소리문화(orality)의 인간탐구`라는 주제에 대한 보다 세밀한 탐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주자학과 육왕학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자학이나 육왕학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으나 결국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진정한 세계 - 동일한 지점(場) -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즉 보르헤스가 말한 “많으면서 하나인 달=우리 자신의 존재”처럼 말이다. 둘째, 동아시아의 양명학 탐구는 일단 동아시아라는 지리적, 역사적 현실이 `울퉁불퉁한, 어설픈, 불편한` 형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지역이 산출해낸 학술적 번민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각기 다른 지리적, 역사적 형식이 만들어낸 굴곡된=뒤틀린 스탠스 혹은 시야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컨대 `일본 양명학은 원래의 양명학이 아니다, 왜곡된 양명학이다` 등등의 상투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문제는 원본 양명학을 미리 설정한 다음 여타의 전개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 전개된 내용(팩트) 자체를 직시하고, 그것을 그대로 명확히 기술해내는 태도이다. 평가는 그 다음이다. 있는 것(사실)과 있어야 할 것(당위)의 간극을 인정하고 혼동하지 않는 냉정함에서 양명학은 기술되어야 한다. 셋째, 양명학 연구에 대한 상상력 부분이다. 동아시아 전체를 바라볼 때 양명학은 마치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사물들 사이에 변하지 않는 어떤 공통된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인 `위상수학`(位相數學, Topology)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양명학은 `심(心)`이란 주제를 근간으로 만나고 갈라진다. 진흙과 다양한 도자기, 물과 다양한 얼음, 고무줄-끈과 다양한 변형, 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만나면서 다시 흩어지고, 흩어지고선 다시 만난다. 그러나 `같은 형태…사물들 사이에 변하지 않는 어떤 공통된 성질`을 추구하지만 디테일에 들어서면 `마지막 어휘`를 거머쥐기는커녕 아찔한 떨림-실망감-황당함 같은 `정신적 경련`을 일으키고 만다. 하나의 `고무줄`이 가만히 있으면 짧지만 당기면 한없이 늘어나듯, 양명학은 각각의 장(場)에 맞는 길이와 넓이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본 양명학이 있을 수 없고 각각의 지역에 따른 전개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양명학의 그 위상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각각의 자리(場)에서 특수한 바이브레이션-왜곡-재해석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This paper is written with the intention to reflect on Yangmingxue at the present time with the issue of East Asia Yangming Studies. The aim is to reflect on the new horizon of Yangming Studies in macroscopic perspective rather than detail. The summary of the discussion in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 the lecture was `human inquiry of literacy` and Sangjak or Yangmyung was a human exploration of orality. First, Zhuzixue was human inquiry through literacy, and Xiangshanxue or Yangmingxue was `human inquiry through orality. This point should not be overlooked. However, the difference between these two people is not fundamental. That is the difference of academic tendency or characteristic. Second, the differences in East Asia`s Yangming studies are rooted in geographical and historical differences in East Asia. The space called East Asia is not the same. It is rugged, not uniform. Not one but many. Each region has its own social and historical agonies. There is also a different academic consciousness. So it is natural that the twisted sight and stance created by different regions. It is an error, for example, pointing from A to B, A is not Yangmingxue, and A is wrong. Third, it is the imagination problem of Yangmingxue. Looking at East Asia as a whole, Yangmingxue can be compared to Topology. Because Yangmingxue is sharing the problem of mind. But it meets and divides around it. It is like a variety of ceramics made of mud, and various kinds of ice made by water. It is like a work that is made by variously changing rubber bands and strings. There can be no original Yangmingxue. There is only development according to each area.

      • KCI등재

        聖人을 꿈꾼 조선시대 여성철학자 張桂香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14 陽明學 Vol.0 No.37

        조선의 유교는 여성들에게도 교육적, 문화적, 생활사적 차원에서 남성에 준하는 주요 기능을 수행해오고, 심지어는 일부 상위계층의 여성들에게 학문적, 지적, 문화적, 문예적 전망을 갖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가 申師任堂(1504-1551), 시인 許蘭雪軒(1563-1589)과 金浩然齋(1681-1722), 성리학자 任允摯堂(1721-1793)과 姜靜一堂(1772-1832)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유교가 길러낸 지성인들이다. 아울러 학자이자 시인, 화가등등 많은 호칭을 가진 여중군자 張桂香(1598-1680)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유교라는 시대정신 속에서 임윤지당과 장계향은 성인을 꿈꾸었다. 남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여성의 신분으로 유교의 정상을 꿈꾸었다는 점은 동아시아 지성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만하다. 張桂香은 퇴계 이황의 심학 학통을 이어받은 敬堂張興孝(1564-1634)의 무남독녀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장계향은, 退溪李滉(1501-1570)의 학풍과 맥을 잇는 鶴峰金誠一(1538-1593)의 수제자인 아버지 경당 밑에서 자랐기에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다. 10세에『小學』과 『十九史略』을 깨쳤고, 13세에는 敬身吟, 聖人吟, 蕭蕭吟등의 시를 남겼다. 아버지에게서 持敬과 修身을 배우고, 타고난 재능과 더불어 아버지의 공부법을 본받아 문예적 기법과 안목, 역사에 대한 의식, 인생과 우주의 원리(=文史哲)에 대한 기반을 다지면서 性理學者= 哲學者로서의 면모를 다듬어 갔다. 장계향이 학문과 시?서?화에 능했고,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表題는 閨?是議方](1670년경)을 썼다. 최근 한국에서 여성리더십이 재평가되면서 그 전통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장계향은 ‘나눔과 사랑으로 세상을 치유한 조선의 여인’, ‘깨달은 조선 여인’, ‘慶北女性의 큰 별’, ‘女性君子’, ‘여성철학자’, ‘조선의 큰어머니’, ‘최초의 한글 조리서의 저자’ 혹은 ‘아시아 최초로 요리서를 남긴 여인’, ‘과학자’, ‘실학자’, ‘전란 속에 민초를 구휼한 사회사업가’ 등등 수많은 호칭으로 이른바 <장계향 붐> 내지 <장계향 르네상스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여성리더십’의 전통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새롭게 글로벌 차원에서 브랜드화하여, 새로운 한류로 연결해 가는 일이다. Confucianism of Joseon Dynasty greatly influenced to Korean Women. Especially it provide to have a perspective and intelligence are necessary in confucian society. So many women philosophers and intellectuals have grown in here Joseon Dynasty. The typical women are Sinsaimdang, Henanseolhyeon, Kimhoyeonjae, Imyunjidang, Gangjungildang. In addition to these one, we must not forget a person is Janggyehyang(張桂香, 1598-1680). She had many titles, scholars, poets, painters, social workers, educators, and the great korean mother. She is, generally, called intellectuals of the intellectuals(Yojunggunja. 女中君子). She wrote the first manual book of Hangul cooking food, Eumsikdimibang(飮食地味方). She showed the importance of making food. The food is making is just honoring human(Gyeong In, 敬人). Further, it is honoring things(Gyeong Mul, 敬物) and heaven(Gyeong Ceon, 敬天). These are from to the ancient Korea traditional ethnic thinking form, Gyeong(敬, Reverence and piety). Another import one is that she declared “I can be a Confucian a sage.” Such a declaration would be very rare in East Asian Confucianism. Recently in South Korea have became to discuss the importance of women leadership. By this reason, she began to re-evaluated in Gyeongsangbuk-do which she was born, and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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