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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 문헌기록(文獻記錄)을 통해 본 안용복(安龍福)의 기억과 변주 -무명소졸(無名小卒)에서 국가적(國家的) 영웅(英雄)의 탄생과정까지-

        진재교 ( Jae Kyo Jin ) 한국한문학회 2015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60

        安龍福은 하찮은 신분으로 越境하여 울릉도를 爭界하고, 일본의 울릉도 탈취간계를 저지하였다. 당시 안용복은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인의 처지가 되어 유배되었지만, 조선조 후기 문사들은 역사적 공간에서 안용복을 호출하고, 강역문제와 결부시켜 그를 역사 공간에서 복권시켰다. 범죄자에서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포착하고, 영토문제를 해결한 상징적 인물로 기억하였다. 문사들은 그를 역사적 인물로 부활시키고, 국가적 영웅으로 호출하는 과정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17세기 안용복이 울릉도를 쟁계한 이후,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억하는 방향은 달랐다. 조선조 후기에는 강역인식의 상징으로, 근대 전환기에는 애국계몽 운동의 차원에서 주목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민족해방 운동의 차원에서 그를 호출하였다. Even though An Yongbok(安龍福) was lowly status, he crossed the border and devoted his life to the territorial dispute over Ulleung Island. He prevented Ulleung Island from Japanese invasion, but he was exiled as an offender who had violated the positive law. However, intellectuals in the late Chos.n Dynasty rehabilitated An Yongbok in the contemporary historic space by connecting him with diplomatic affairs in the territory(疆域問題). The intellectuals sprang him from offender to national hero and remembered him as a representative figure who settled the dispute over the territory. It is worthy of notice that the intellectuals revived him as a historical figure and described him as a national hero. In particular, they remembered and recorded him in different ways upon the contemporary historical circumstances from the 17th century to the 20th century. Intellectuals in the late Chos.n Dynasty emphasized him as a symbol of awareness for the territorial dispute, intellectuals in the transition period to modern era paid attention to him for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and intellectuals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evived his reputation for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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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후기 안경(眼鏡)과 문화(文化)의 생성(生成) -안경으로 읽는 조선조 후기 문화의 한 국면-

        진재교 ( Jae Kyo Jin ) 한국한문학회 2016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62

        조선조 후기 안경은 독서계의 변화와 함께 지식ㆍ정보를 축적하고, 방대한 저술을 남기는데 기여한다. 일부 사대부 계층은 안경을 끼고 총서류 저술이나 다양한 필기를 남긴 바 있다. 또한 藝人들도 안경을 착용하여 자신들의 예술적 영감과 능력을 작품에 표출하기도 하고, 일부 계층은 오락을 위해 안경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조선조 후기에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은 안경을 활용하여 자신의 능력과 정감을 발산시킨다. 안경의 보급과 확산은 조선조 후기 문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견인하고, 한편에서는 문화변동의 자양분으로 기능한 것이다. In the late Choson dynasty the glasses made the literati class possible to not only accumulate knowledge and information but also produce a large amount of writings, bringing the changes to the reading public. Some of the literati could leave a collection of books and various kinds of handwritings, wearing the glasses. The artists also put on the glasses to express their artistic inspiration and capability in their works and some of them even conjugated the glasses for their pastime. In short, people in every work of life utilized the glasses to pour out their talents and feelings. The distribution and spread of the glasses drew the culture to a new direction in the one way and functioned as a driving force for the cultural changes in the other way in the late Chos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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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후기 현실과 敍事漢詩

        陳在敎(Jin, Jae-kyo) 대동한문학회 2011 大東漢文學 Vol.35 No.-

        전근대 국가는 전란의 수습을 위하여 공식 기록 이외에 개인의 전란 체험과 기억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기억을 ‘忠’과 ‘節義’, 여기에 ‘烈’이라는 이념으로 은폐하거나 왜곡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조와 집권층도 胡亂의 발발과 수습 과정에서 만주족의 침략이라는 공식기록만 부각시키고, 전란의 원인이나 전란으로 인한 개인의 고통과 기억을 은폐하고 들추어내는 것을 억압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문인들은 전란이 남긴 상흔을 개인의 사적 체험을 기반으로 서사로 포착하고 그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崔承太의 「漂商行」과 崔成大의 「梨花菴老僧行」은 이러한 문제를 포착하여 문학적 성과를 내고 있다. Most premodern states more often than not repressed any personal war experiences and memories other than official records with a view to resolve post-war situations. They would attempt to conceal personal memories and even pervert them into ‘loyalty 忠,’ ‘fidelity 節義,’ and ‘ardor 烈.’ King Injo and his ministry also tried to highlight official records on Manchu invasions in the process of post-war settlement, while repressing personal traumas caused by the wars. However, literary men of the time revealed war traumas through the poetic mode of haeng epic to express their own personal memories. In this sense, “Peddlers (Pyosang haeng 漂商行)” by Choi Seungtae 崔承太 and “An Old Monk at Yihuaam hermitage (Yihuaam noseung haeng 梨花菴老僧行)” by Choi Seongdae 崔成大 should be considered exceptional literary works, which grasped the real.

      • KCI등재후보

        이조 후기 한문학에서 언어생활의 수용과 교섭 - 창작에서 언어의 수용문제를 중심으로 -

        진재교(Jin Jae-kyo) 대동한문학회 2004 大東漢文學 Vol.20 No.-

        이 논문은 한문학이 언어 생활을 어떻게 수용하여 창작과정에서의 이원적 문제를 해소하고 어떻게 문학적 성취를 이룩하였던 가를 살펴본 것이다. 국문 문학과 한문학의 상호 번역과정에서 보여준 교섭, 그리고 야담과 한시 창작에서의 구연의 수용 등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하였다. 생활언어와 한문학, 한문학과 국문문학 양식에서의 상호 교섭, 문학간의 넓나듦을 통한 교집합의 확대 등이 그 예이다. 이는 한문학이 언어 생활과 현실 생활에서 맛볼 수 있는 정취를 살리려 한 점에서, 주체적 자각에 기대어 창작의 개성을 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일정한 성취를 낼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진전을 보여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생활에서 쓰는 언어를 한문학이 여하히 수용하였던 가 하는 문제는 한문학을 도입할 시기부터 생래적으로 가진 모순이자, 풀기 어려운 난제의 하나였다. 그런 점에서 서로의 거리를 좁히는 노력은 문학사의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는 매우 제한적 의미를 지니며, 본질적인 한계가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문학에서의 언어생활과 한문학의 거리를 좁히는 데서 보여준 ‘變貌’라던가, 일부 작가들의 성취도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위에서 그 의의를 따지고 들어야 할 것이다. 곧 한문학 양식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그 논의는 가능할 터이다. This essay purports to examine how the literature of late Joseon in classical Chinese language adopted and expressed the colloquial Korean native language in their writing. The author especially uses for its object of study various styles of literary works either written both in classical Chinese and native colloquial languages or translated from either to the other. The tendency of expressing the peculiar styles of Korean vernacular expressions in literary works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language of late Joseon shows the literati's independent spirit in composition and their efforts to accept the heart of Korea people. It is especially meaningful to attempt to examine such a tendency in late Josoen. This is because the issue of accepting Korean vernacular language in the writing in classical Chinese language existed from the very beginning that Korean people started using classical Chinese for their writing instrument but reducing the distance between the native language of Korea and its writing has never been easy. What is discussed and claimed in this essay, however, will merely have limited meaning, unless readers understand the difference in nature between the colloquial Korean and the written classical Chinese. Otherwise, the concentrated efforts made by the literati discussed here would not be regarded as more than non-Korean Chinese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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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문화교류(文化交流)와 한국한문학(韓國漢文學) ; 18,19세기 동아시아와 지식(知識), 정보(情報)의 메신저, 역관(譯官)

        진재교 ( Jae Kyo Jin ) 한국한문학회 2011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47

        이 글은 18,l9세기 조선의 역관들이 동아시아의 지식과 정보를 매개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특히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역관의 역할 중, 주로 지식, 정보와 관련한 그들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역관의 존재 양상을 1) 지식·정보의 전달자, 2) 지식·정보의 중개자, 3) 지식·정보의 생성자, 4) 지식·정보의 발신자 등 네 측면을 논하였다, 1) 에서는 친지 등에게 부탁받은 서적을 통해 지식을 단순 전달함으로써 지식의 생성과 유통에 간접 기여하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2) 에서는 스스로 새로운 서적을 사서 지식·정보를 획득하여 국내에 유통시키는 측면을 고찰 하였으며, 3) 에서는 역관들이 지식, 정보를 국내에 유통시키는 것을 넘어 새로운 지식, 정보를 체득한 것을 토대로 스스로 지식·정보를 유통시켜 새로운 지식·정보를 생성하는 주체가 되는 경우를 살폈다. 4) 에서는 역관들이 스스로 지식·정보의 발신자가 되어 체험한 견문 지식과 정보를 서울 학계에 끊임없이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더러 서울과 연경의 學藝界를 향해 지식·정보를 발신하는 경우를 검토하였다. 이는 여항문학의 성과를 사대부 문학과의 거리를 언급한 것에 대한 재조명이다. 18·19세기 문학과 문화에 끼친 역관의 역할과 영항은 그들이 남긴 문학 작품과 그 성과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 문학 작풍을 포함하여 문화적 역할과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한 것 등, 제반 사항을 두루 살펴 논해야 그 실상에 다가갈 수 있다. 새로운 지식·정보의 국내 유입과 생성, 그리고 유통에 기여한 점과, 역관이 이국에서 체험한 견문지식 등이 당대 사회에 던진 파장을 두루 고찰해야 한다. 역관들은 실제 견문지식과 체험, 그리고 이국의 창을 통해 시각을 국내에 두지 않고 항상 시대조류와 호흡하고 세계사의 방향에 민감하게 인지하였다. 사대부 지식인들이 구축한 지식체계 속에 가두어 두고 역관의 문학과 문화 활동을 평가하는 구도를 전환시켜, 일국을 넘어 밖의 시각을 끌어 들여 역관이 남긴 자취와 역할을 평가할 때, 이전과 사뭇 다른 의미가 주어질 수 있다. Most remarkably, translating officials themselves played an active role as the subject of knowledge/information who conveyed knowledge and information with their own intellectual capacities. For a new understanding of yeohang 閭巷 literature, we should pay due attention to those translating officials who played a key role in producing knowledge/information and circulating it. Translating officials not only had abundant knowledge through traveling experiences, but also could obtain much information on new books by way of mediating the book trade. It was a few leading scholar-officials who evaluated and criticized the knowledge/information provided by translating officials, but such intellectual impacts made by those scholar-officials were limited to domestic knowledge/information. As far as knowledge to the foreign was concerned, translating officials played an active role as its subject by evaluating, receiving, and even recreating it. In this sense, these translating officials were the sender of knowledge/information, We should not limit our focus to the literary works written by translating officials, in reconsidering their literary and cultural impact in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We should reexamine their role to bridge international cultural exchange if we attempt to appreciate their true cultural impact on Korean society. Furthermore, we should reexamine their contribution to the reception of new knowledge/information and its circulation and the social influence made by their knowledge of foreign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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