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이순신 정 IV : 거북선 구조, 철갑문제

        정진술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2 이순신연구논총 Vol.- No.17

        거북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아직도 학자들 간에 그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몇가지 사항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첫 번째로 여러가지 이견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접근하기 위하여 이해의 출발점으로 거북선의 인원 구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16세기 임란 당시 거북선의 승조원은 이순신과 나대용의 장계에 의해서 125~ 130명으로 알려졌다. 임란 당시 거북선의 승조원 직무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이순신의 장계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주요 승조 원의 직무에는 사부(射夫), 격군(格軍), 방포장(放炮匠)이 있었으며, 1) 해군사관학교 해양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144 이순신연구논총 제17호 이들 세 직무는 임란기 거북선의 구조 해석에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17세기에는 조총의 도입에 따라 포수 직무가 추가되고, 18세기에 이르면 거북선 승조원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정원은 148명으로 책 정되었다. 또한 임란 때의 방포장 명칭이 화포장으로, 격군의 명칭이 노군으로 변화되었다. 이들 네 직무 즉 사부, 화포장(방포장), 포수, 노군(격군)은 조선 후기 거북선의 구조 해석에 중요한 고려 요소이다. 거북선의 승조원 명칭에 나타나는 무상(舞上, 無上)이 지금까지 범주(帆柱) 위에서 작업하는 사람 등으로 다양하게 주장되어 왔으나, 필자는 통영에서 발견된 조선 후기 수군문서와 임수간(任守幹)의 『동사일기(東槎日記)』에 나타나는 통신사선의 선원 명칭을 분석하 여 ‘무상’의 우리말 뜻이 ‘물래를 작동하는 선원’의 명칭이며, 조선시 대의 군선에서는 대개 닻만을 다루는 정수(碇手)와는 별도로 선수에 서 닻물래를 다루는 선원을 일컬었음을 밝혔다. 두 번째로 임란기 거북선의 포 설치 위치가 2층인가 3층인가에 대 하여 살펴보았다. 거북선이 2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는 이들은 2층 에, 3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는 이들은 3층에 포가 설치되었다고 보는데, 어느 주장이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하였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임진년 해전에서 거북선의 사상자 통계를 조사하였는데, 격군의 사상자가 23명인데 반하여 사부는 부상자 1명 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방패로 보호된 2층에서 활동하는 거 북선의 격군들이 적의 탄환 및 화살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사실 을 나타내고 있다. 격군들의 이러한 피해는 그 원인이 방패에 뚫린 포 구멍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므로 임란기 거북선은 격군의 노질 공간과 화포의 발사 공간이 동일한 2층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사부와 격군의 피해 정도가 현저하게 다른 것으로 보아 그들의 활동 공간도 서로 달랐으며, 2층에 위치한 격군 과는 달리 사부는 3층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것은 1795 이순신 정론Ⅳ 145 년에 발행된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의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 수영 거북선의 포 구멍의 위치와 동일하다고 하겠다. 참고로 조선 후기의 판옥선 즉 『각선도본(各船圖本)』의 전선도 에는 2층 방패에 포혈이 나타나 있지 않다. 판옥선의 방패에 포혈의 유무는 화포의 발사 위치가 2층인가 3층인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그런데 1633년에 경기 수사 최진립이 작성한 해유문서와 1778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풍천유향(風泉遺響)』에는 포판과 상포판에 서 모두 대포를 발사하였다고 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그려진 수군조 련도에도 판옥선의 2층 방패에 포혈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조선 후 기 판옥선의 포혈이 2층 방패와 3층 여장에 설치되었음을 명확히 보 여주고 있다. 임란이 끝난 후 조총의 사용이 보편화되므로서 판옥선 에는 포를 다루는 화포장 외에 조총을 다루는 포수가 새롭게 편성되 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판옥선의 2층 포혈은 화포를, 3층 포혈은 조총을 발사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을가 추정된다. 세 번째는 『이충무공전서』귀선도설의 거북선 그림에 대한 올바 른 이해에 관해서이다. 오늘날 거북선에 관한 논란은 상당 부분이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 거북선 그 림들에는 2층 방패와 3층 개판에 포혈이 각각 배열되어 있으므로 그 것은 3층 구조가 확실하다. 그런데 귀선도설의 거북선이 3층으로 구 성되어 있고 2층은 물론이거니와 3층도 전통(全通) 갑판이라면, 2층 의 높이가 4. 3자(약 129cm)라는 『이충무공전서』귀선도설의 기록 은 이해될 수 없다. 동양식 노는 노군들이 서서 노질을 해야 하며, 조선 말기에 남자들의 평균 신장 실측치 163.8cm를 고려해 볼 때, 4. 3자 높이에서는 노군들이 자유롭게 노질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 문이다. 이 어려움 때문에 필자는 귀선도설 거북선의 3층 갑판이 전 통 갑판으로 되어 있지 않고 노군들이 노질을 하는 머리 위 부분은 갑판이 비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네 번째는 거북선의 철갑 유무에 관한 문제이다. 거북선이 철갑선 146 이순신연구논총 제17호 이었다고 주장하는 편의 주요 근거는 안골포 해전을 기록한 일본측 문헌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 조선의 대선(大船) 중의 3척이 철로 요해(要害)되어 있었다고 했던 내용이다. 거북선이 일본수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철갑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반면에 거북선의 철갑선 주장에 회의적인 견해는, 철갑으 로 되어 있다는 내용이 거북선과 관련된 우리측의 기록에서 확인되 지 않으며, 일본측 기록도 철갑선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 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기록을 비롯한 임란 당시의 사료들이 거북 선의 철갑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고, 그림으로 도시된 조선 후기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도에도 등에 판자만 깔렸으며, 전 라좌수영 거북선도의 등에는 거북 무늬만 그렸다고 기록되었다. 그 러므로 필자는 거북선의 철갑선 주장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의 견을 갖고 있다. 주제어 : 거북선, 임란(임진왜란), 이순신, 무상(舞上, 無上), 이충무 공전서, 귀선도설(龜船圖說), 통제영거북선, 전라좌수영거북선

      • 명 수군의 참전 과정과 조․명(朝․明)연합함대의 형성

        정진술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2018 충무공 이순신과 한국 해양 Vol.- No.5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War of Korea the Koreans could not defeat the Japanese troops, which is why Korea asked China for help. China and Korea formed an alliance to try to defeat Japan. In July of 1592 Korea requested assistance from China for the naval battle against the Japanese, however, China declined at first because it appeared that the Korean navy was holding its own against Japan. In 1593 China and Japan had a meeting to discuss a ceasefire in the war. China thought that the hostilities were ending and the war would be over so they felt no need to get involved with their own navy. Talks continued between China and Japan as they attempted to come to an agreement for ending the war. During that time there was a temporary partial ceasefire that ended in 1596 when the war erupted again. When war broke out again, Korea requested that China send their navy to help defend Korea. By February, 1597, China decided to send its navy to back up the Koreans. China dispatched naval troops and vessels five times. When we factor in the magnitude of the Chinese naval contribution to the defeat of the Japanese.

      • 명량해전 연구사와 주요 관점

        정진술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6 이순신연구논총 Vol.- No.25

        명량해전의 일본 함선 수는 문헌에 따라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이순신의 정유년(1597) 일기에 나오는 133척이 정확하다. 특히 『이충무공전서』의 「행록」에 일본 함선 수를 333척이라 한 것은 편찬자의 오류이다. 「행록」의 원본은 1715년에 간행된 『충무공가승』의 「행록」인데, 거기에는 133척으로 되어있고, 또한『충무공가승』의「행록」원본으로 보이는『충무록』에도 역시 133척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본 함선 수의 이러한 혼동은 최유해의「행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행장」은「행록」보다 후대에 편찬된 문헌이다. 명량해전 전후 이순신함대의 전선 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증가하였다. 이순신은 정유년 8월 18일 회령포에 도착하여 10척의 전선을 수습한 이후, 9월 7일 벽파진에 머무를 때는 12척, 9월 23일 고군산도에서는 13척, 10월 11일 발음도에서는 15척의 전선을 보유하였다. 조석과 조류는 명량해전에 미친 영향이 크다. 최근의 연구 결과, 오전 조류의 전류 시간은 06:30-06:50시, 낮의 만조 시간은 12:30시 전후, 오후 간조 시간은 18:30시-19:00시경이다. 명량해전 시작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오전에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해전이 끝난 시간은 오후 간조 무렵으로 18:30시-19:00시경이다. 명량해전의 승리 원인으로‘철쇄이용설’도 대두되었으나, 근래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후대에 등장한 설화로 정리되었다.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사살한 일본 수군장 마다시(馬多時)는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로 판단되었다. 명량해전 연구의 가장 큰 쟁점은 해전 장소이다.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이 주장한 장소는 세 곳으로서, 첫째는 명량의 협수로 북서쪽 출구, 둘째는 양도 동쪽 우수영 수로, 셋째는 양도 서쪽 넓은 바다이다. 필자는 이순신의 정유일기 내용 곧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백여 척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결진처를 향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와 또“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는 내용, 그리고“해전을 치렀던 곳에서 정박하고 싶었으나 물이 빠져서 배를 정박시키기에 마땅하지 않으므로 건너편 포구로 진을 옯겼다”라는 이순신의 기록으로부터 둘째 주장인 양도 동쪽 우수영 수로에 동의하였다. 명량해전의 승리 요인은 세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첫째는 조류, 협수로의 지형지물, 피란선의 의병(疑兵) 이용 등 이순신의 전략전술이다. 둘째는 전선의 전투력 증강과 승조원의 전투의지의 고양 등 이순신의 지휘통솔력이다. 셋째는 조선 함선의 성능과 무기체계의 상대적 우월성이다. 주제어 : 명량해전, 이순신, 철쇄이용설, 마다시, 구루시마 미치후사, 양도, 전라우수영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