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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성서적, 역사적 고찰과 바람직한 교회상 모색

        정주득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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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개혁교회의 본질에 대한 모호성을 볼 때 과연 예수께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셨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교회의 본질이 너무나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생명과 관련된 것인데 재테크와 관련지어서 말하고, 교육은 교리를 설명하는 것인데 대학입시와 관련짓고 있으며, 부유함과 화려함 그리고 부의 가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로써 선포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개혁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규약 상 종교로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던 복음에 형태와 형식를 부여하고 외적으로 완성시켜서 종교적으로 만든 제도적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축소주의(Reductionism)와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모호성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제도적 교회와 축소주의의 속성은 지키려하는 것과 안주하려는 경향 때문에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역은 교회의 한 요소 혹은 한 기능정도로 축소되는 것이다. 그것은 2006년 통계청 발표에서 개신교인 수가 14만4천명 감소한 수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성서적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 규명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어원적인 의미에서 교회란 용어는 70인 역과 관련성을 가지므로 교회를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구약교회에서 교회란 원 의미는 하나님에 의해 소집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며, 언어적인 변천과정을 거쳐 신약교회에서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교회가 실제로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로 이루어 졌다고 말할 때 이 단어는 언어학적인 고려보다는 실제적인 고려에 의한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이 어원적인 연구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실존에서 본질의 변질을 차단하고 바른 교회의 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교회스스로 모인 목적에 대한 의미부여를 반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헬라세계의 일상적인 모임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그 기원을 가지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자기 인식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처음 구약의 원시교회는 가정교회의 모습을 띠고 출발하여 회막, 성전, 회당교회의 모습으로 변천해 왔는데 그 중에서 현실교회가 가장 선호하는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교회의 상이라는 것이 성서적인 증언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성전에서 행해졌던 웅장하고 화려한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내면적인 신앙의 외연(外延)을 원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신명기서와 에스겔서의 반성전적, 반제도적인 사상과 계시에서 확인되고 있다. 신약교회 또한 원시교회와 같은 가정교회의 형태로 출발하였다. 현실교회가 가장 모델로 삼고자 하는 교회는 사도행전 2장의 교회인데 처음에는 전도하는 교회, 종말론적인 교회였다.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재림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면서 제도적 교회의 형태로 변해 갔으며 지역적인 교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세계선교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이방교회는 제도적 교회를 지양하고 선교적 교회를 지향하므로 해서 로마는 물론 유럽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었다. 현실교회가 본받아야 할 교회는 종교적인 행위로 만족하는 솔로몬 성전이 아니며 유대인과 담을 쌓고 구별된 교회로 남은 예루살렘 교회도 아니다. 문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선교를 실천한 이방인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교회는 얼마든지 다른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 교회의 증언이다. 교회사에 영향을 끼친 교부들과 중세신학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이해를 살펴보면 이는 정론적이기는 하니만 대부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정행에서는 해석에 많은 차이점이 보이고 있었다. 예컨대 아퀴나스는 교회의 표지에 교황 권을 첨가 시키는가 하면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의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여 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을 해소시키는데 일조했다. 그 결과 교황을 교회의 표지로 추가시킨 아퀴나스는 진리를 외곡한 대가로 성 아퀴나스로 추앙되었고, 유세비우스는 왕의 측근으로써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를 정의 할 때 정론만으로는 정의하지 못하게 하는 정당성을 입증 받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김명용 교수의 말대로 “하나님의 교회라기보다는 사탄의 공회당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합당한 교회도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들이 세울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 결과 교회 종말론적인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었으며,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적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본질적인 사변을 제거하는 일도 교회의 사명이요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신학적인 정론이 확립되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교회의 본질을 정의 할 수 없다. 어원적 의미에서 교회는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과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으로 요약된다.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coetus vocatorum)으로 정의하면, 이는 유형적인 본질을 보여주며, 외적인 표식, 즉 세례, 성찬 등의 표식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으로 참된 구원의 증거를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나 다 선택되었다고는 말 할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여 다 믿는 것도 아니며, 이스라엘 출신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coetus electorum)으로 정의를 하면, 교회가 전적으로 하나의 관념(idea)에 머물며, 실재(實在) 속에는 완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택을 받았지만 아직 교회의 회원이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며, 선택은 받았으나 아직 믿지 않고 하나님의 의중이나, 하나님의 결정 속에만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잠정적으로 교회 회원으로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직은 교회회원이라고 말 할 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은 완성될 교회에만 적용이 가능하며, 현재 경험될 수 있는 실재로서의 교회는 될 수 없으므로 불가시적인 교회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어원적 정의는 너무 관념적인 정의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 두 가지 요약만으로 는 교회의 본질을 모두 대변할 수 없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정의하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 의하면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나누어 표현되고 있다. 전체적인 혹은 우주적인 교회는 무형교회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총망라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로 모인 선택 받은 자 전체의 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며 만유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다. 유형 교회도 역시 복음 아래서 전체적이요 우주적이며, 온 세계에 퍼져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하나님의 집이요 가족이며 그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 받을 어떤 규정된 가능성도 없다. 요약하면 선택 받고,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가 참 교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교회의 본질은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을 규정함에는 정론과 함께 정행을 중요한 요소로 취급해야 한다. 비록 예배당 건물에 이 세계의 검정된 모든 신학적인 정의들로 가득 채워 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소금으로 녹아지지 못한다면(마5:1-48), 참교회로 정의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적 교회를 지양하고, 사도행전 2장의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증인공동체를 지향하며, 이를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으로 삼고 실천한 이방인 교회의 선교적 교회와 개혁자들이 정의한 축소하지 않은 교회의 정론(orthodox)과 정행(orthopraxis)을 근간으로 하는 가운데, 디다케에서 교회사역자들에게 적용된 목회 윤리를 실천하는 교회가 참교회의 상이라고 본다. 교회의 본질 규명(糾明)과 규정(規程)을 위한 어원적인 고찰 결과 구약교회의 원 의미는 하나님에 의해 소집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였으며 언어적인 변천과정을 거쳐 신약교회에서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되었다.하지만 교회가 실제로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로 이루어 졌다고 말할 때 이 단어는 언어학적인 고려보다는 실제적인 고려에 의한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러므로 교회는 실존에서 본질의 변질을 차단하고 바른 교회의 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교회스스로 모인 목적에 대한 의미부여를 반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헬라세계의 일상적인 모임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둘째,교회의 기원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기원으로서 교회에 희망과 소망을 안겨준 사건이다.처음 원시교회는 가정교회의 모습을 띠고 출발하여 회막, 성전,회당교회의 모습으로 변천해 갔다.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교회는 솔로몬의 성전에서 행해졌던 웅장하고 화려한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내면적인 신앙의 외연(外延)이었다.이런 사실은 신명기서와 에스겔서의 반성전적,반제도적인 사상과 계시에서 확인되고 있다.신약교회 역시 원시교회와 같은 가정교회의 형태로 출발하였다.그러나 현실교회가 가장 모델로 삼고자 하는 사도행전 2장의 교회는 처음의 전도하는 교회,종말론적인 교회의 상을 지속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제도적 교회의 형태로 변해 갔다.그러나 사도바울이 사역한 이방교회는 문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교회로 나가지 않고 선교지향 적이며,종말론적인 형태를 띠었다.이는 현재 정체되어 있는 현실교회에 선택과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본다. 셋째, 교회사에 영향을 끼친 교부들과 중세신학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이해를 살펴본 결과,그들 대부분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였다.차이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유기적 인가,아니면 관계적인가 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이런 교리적인 해석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신학 하는 사람의 정신이라고 본다.아퀴나스는 교회의 표지에 교황 권을 첨가 했으며,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의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여 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을 해소시켰다.교황을 교회의 표지로 추가시킨 아퀴나스는 진리를 외곡한 대가로 성 아퀴나스로 추앙되었고,유세비우스는 왕의 측근으로써 부귀영화를 누렸다.이러한 문제는 교회를 정의 할 때 정론만으로는 정의하지 못하게 하는 정당성을 입증 받게 된다.참으로 김명용 교수의 말대로 “하나님의 교회라기보다는 사탄의 공회당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합당한 교회도 있다.”271)는 말에 동의한다. 넷째,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살펴보았다.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들이 세울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했다.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한없이 남용(濫用)하고 오용(誤用)했다.그 결과 교회의 종말론적인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었으며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지 않게 되었다.비제도적 교회를 고찰한 결과,예수께서 교회를 제정하셨지만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제도적 교회는 원하시지 않았다는 근거를 사도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개혁교회가 제도적 교회를 지양하는 것은 구약교회로부터 신약교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 번째,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교회의 표지와 속성 등을 종합하여 교회의 정의를 내려 보았다.신학적인 의미에서 무형교회가 본래적 의미를 가진 선택받은 자들이라면,유형교회는 수단적 의미의 교회이다.이 두 개념의 교회를 271) 김명용,『열린 신학 바른 교회관』(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20쪽. 어원적인 의미로 특징지으면,선택받은 자들의 모임(coetuselectorum)과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coetusvocatorum)으로 요약된다.문제는 어떤 교회를 기준하여 정의 하느냐 이다.그러나 오늘 현실교회에서 요구되는 교회는 이러한 교리를 담은 정론만으로는 온전한 교회로 정의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정론과 함께 정행을 실천하는 교회를 참교회로 정의하였다.그러나 그 정의를 지키는 데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언제나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의 본질을 고찰한 결과 역사속의 교회는 언제나 완전히 부패해 버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원래 복음은 규약 상 종교로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종말에 대한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종교적,제도적이 되어버린 까닭도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이러한 문제는 교회로 하여금 계속 개혁되어야할 당위성을 제공하게 된다.또한 반동(反動)으로 나온 사상도 언제나 진리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그리고 상황적 요인이나 시대사조의 영향 아래 교회는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상황적으로 해석되고 외곡 되어 복음에 근본적으로 모순되게 하는 일도 있었다.이렇게 교회의 본질은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적용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점은 그러한 역사 속에서 유기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 사이에 간헐적인 긴장관계가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오늘 날 개혁교회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수용하여 균형을 이루고자 했지만,결국 제도 쪽으로 기울어지고 만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교회의 상은 마치 구원의 효과처럼 변함없이 성서와 역사를 통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본 논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그것은 제도적 교회를 지양하고,사도행전 2장의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증인공동체를 지향하며,이를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으로 삼고 실천한 이방인 교회의 선교적 교회와 종말론적인 교회를 목표하며, 개혁자들이 정의한 축소하지 않은 교회의 정론(orthodox)과 정행(orthopraxis)을 근간으로 하는 가운데,현실교회의 불완전성을 고려하여 항상 개혁을 지향하는 정신을 가지고 실천하며,디다케에서 교회사역자들에게 적용된 목회 윤리를 실천하는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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