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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 전략(1895-1953)

          이철순 ( Chul Soon Lee )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12 韓國 政治 硏究 Vol.21 No.3

          이 논문은 1895년부터 1953년까지의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통한 국가생존 전략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록 식민지 시기에 그의 대미외교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성공하였고 자신의 오랜 염원이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1953년에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문서상으로 보증 받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국가생 존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이 대미외교를 수행할 때 지속적으로 사용한 방법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약속을 지키지 않은 배신행위를 계속해서 지적하는 것이었다. This paper examines Syngman Rhee`s strategy of national survival by U.S. diplomacy from 1875 to 1953. Even though his U.S. diplomacy could not show visible outcom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e succeeded in establishing the Republic of Korea under the unfavorable conditions and securing a U.S. guarantee of Korea`s national security in writing by singing the R.O.K.-U.S. Mutual Defense Treaty with the U.S. in 1953. Accordingly, his strategy was successful. The method he used in conducting his US diplomacy was to persistently point out the betrayal of U.S. failure to live up to the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of 1882, which stipulated the duty to exert "good offices" to help the other in need.

        • KCI등재후보

          한국전쟁 이전 미국의 한국의 가치에 대한 평가

          이철순(Lee Chul Soon) 한국국제정치학회 2003 國際政治論叢 Vol.43 No.1

          이 논문은 한국전쟁 이전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한국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였는가를 검토한다. 미국의 군부는 미소간의 전면전 발생을 상정하고 그 경우 한국은 지상군을 투입할 정도의 군사전략적 가치는 없다고 시종일관 판단하였다. 이에 반해 국무부는 한국은 미소간의 위신 대결이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미국의 국력을 상징하는 곳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보았다. 국무부와 ECA 관리들은 적극적인 대한경제부흥정책을 통해 한국에서 미국의 신뢰와 위신을 고양시키려고 하였다. 한국의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경제적인 가치는 낮게 평가되었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의 경제적 가치는 어느 정도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한국은 미국의 원조 달라를 기반으로 한일본의 상품시장으로서의 가치만 평가되었을 뿐 원료공급지로서의 가치는 평가되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볼 때 미국이 한국에 곽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한국이 갖고 있는 상징적 가치 때문이었다. This paper discusses American estimation of Korean values before the Korean War. Among American prestige(symbolic value) at stake in Korea, Korean economic values or Korean military strategic values, what kind of interest did America mainly pursue? America mainly pursued prestige rather than Korean economic value. American decision makers thought that Korea was economically valuable for Japan's security which is closely connected with America's security. Korea was thought to be valuable not because it could provide food and raw materials for Japan. It was because it could serve as a commodity market for Japan if America would give economic aid to Korea. Compared to prestige, Korean economic value was not considered essential. American decision makers placed very low value on Korea in terms of military strategy, assuming that a future war with U. S. S. R would be general.

        • 부산정치파동과 국가보안법파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 비교

          이철순 ( Chul Soon Lee )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2007 세계정치 Vol.8 No.-

          이 논문은 부산정치파동과 국가보안법파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비교하고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얻었다. 첫째 국가이익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두 번의 개입에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이승만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규범을 어김으로써 미국의 위신이라는 국가이익이 크게 손상된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의 경우 단기적인 군사안보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더 우려하였다. 둘째 개입을 위한 수단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부산정치파동에서는 군사적 수단의 동원이 고려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외교적 수단이 동원되었다. 국가보안법파동에서는 군사적 수단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외교적 수단만 동원되었다. 셋째, 관료집단내부의 갈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부산정치파동에서는 군부와 국무부간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지만 국가보안법 파동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없었다. 넷째, 개입의 공개성 여부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부산정치파동에서는 은밀한 개입이 시도되었으나 4·19 발발의 시점에서는 준공개적 개입이 시도되었다. 다섯째, 미국은 두 번의 개입에서 이승만 주변의 강경세력을 배제하고 온건한 세력을 포진시키려했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었다. This paper aims at a comparative study of the ``Pusan Political Crisis`` and ``National Security Law Crisis,`` whereby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intervened in the Korean domestic politics during the 1950s. Results of this study may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American decision-makers were deeply concerned about the erosion of the U. S. prestige which both political crises might bring about. Yet, American military leaders tended to give priority to military security over the issue of prestige in the former crisis. Second, although American government considered the possibility of military means to solve the former crisis, the plan never materialized. In the latter incident, they mobilized only diplomatic means. Third, there was serious conflict between military and civilian leaders in the former crisis. However, there existed little dispute among two groups over the latter crisis. Fourth, while they attempted to maneuver covertly in the former crisis, they intervened almost publicly in the latter crisis. Fifth, while excluding hard-liners, they tried to maintain soft-liners within Syngman Rhee regime in both crises.

        • KCI등재후보

          고등학교 한국사교사 교육방향 탐색: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이철순 ( Lee Chul Soon ) 부산대학교 과학교육연구소 2016 교사교육연구 Vol.55 No.4

          이 연구의 목적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사들의 교육방향 개선을 탐색하는 것이다. 기존의 7차교육과정과 그 이후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현대사 해석의 쟁점을 찾아보고 이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 한다. 기존의 교과서들은 특히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서술이 많이 보이고 이에 대한 연장으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폄훼도 많이 나타난다. 이 연구는 여러 쟁점 가운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즉 대한민국의 수립과 관련한 쟁점들에 대하여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대안적인 해석은 이승만의 반공주의, 정읍연설, 단계적 통일론으로서의 단독정부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제시된다. 첫째,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단순한 정략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이었으며 구한말의 반러의식에서 출발하여 오랜 기간을 통해 숙성된 것이었다. 둘째, 그의 정읍연설은 1945년 9월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의 비밀지령에 따라 이미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된 이후에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분단을 획책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의 단독정부론은 “선정부수립 후통일”이라는 단계론적 통일론으로서 남한을 먼저 강력한 자유반공기지로 만든 후에 남한 주도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전략이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은 비록 남한에 국한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고려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반공주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에 근거해 북한을 통일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explores the directions for Korean History teacher`s education. Most Korean contemporary history textbooks have a negative view of the legitimacy of the Republic of Korea (ROK) mainly because the government was established not in the whole Korean Peninsula but in its southern part. This view is connected with the underestimation of the first president, Syngman Rhee, who was deeply involved in establishing the ROK. This research provides new interpretation of Syngman Rhee`s founding of the R.O.K based on an investigation of his anti-communism, his Jeongeup address, and his strategy of separate government which has a characteristic of step-by-step unification policy.

        • KCI등재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과 한국 정치세력에 대한 정책 (1945∼1960)

          이철순(Lee, Chul Soon)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 2011 국제정치연구 Vol.14 No.2

          This paper examines the U. S. policy toward the South Korean Politics from 1945 to 1960. It elaborates whether the U. S. policy reflected the third and the fourth beliefs derived from America"s liberal tradition(“Radicalism and Revolution are Bad.” and Distributing Power is more Important than Accumulating Power.”) or not. Due to the third belief, the U. S. decision makers tried to exclude the extreme left, i. e. the communist regime and extreme right i. e. the authoritarian regime. However, anticommunist authoritarian regime was accepted by them as the second best. Therefore, anti-communist authoritarian Syngman Rhee regime was tolerated by them in 1948 when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as established. On the other hand, the fourth belief also had influence upon the U. S. policy. The U. S. policy makers endeavored to build the moderate left-right coalition in 1946 and the coalition of moderate factions of Liberal Party and Democratic Party in the late 1950s. They also made an consistent effort to liberalize the authoritarian Rhee regime to protect its leaning toward dictatorship.

        • KCI등재

          우사 김규식의 삶과 정치활동

          이철순(Lee Chul Soon) 한국인물사연구소 2011 한국인물사연구 Vol.16 No.-

          Most of previous works about Kyu-sik Kim's political activities describes him as idealist who puts emphasis on political ideas and motives. Thorough investigation of his political activities from 1945 to 1948, however, leads us to find new fact that he has also some aspects of political realist who sets high value on political outcomes and interests. The reasons for that are as follows: First, when he was selected "president" by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officials in 1946, he showed his desire for power. Second, when the UN general assembly decided to hold an election in Korean Peninsular in 1947, he welcomed it. He changed his position, however, when the UN little assembly decided to hold election in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r in 1948. He thought that his participation in the election was disadvantageous to his political interests because he had very weak organizational power in South Korea. Third, even though he initiated "north-south joint conference idea", he was very negative and pessimistic about that conference after he saw the translation of Pyongyang draft constitution of Korean People's Republic which meant the actual establishment of North Korean separate regime. Fourth,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officials thought that while on surface Kyu-sik Kim cried out for "unification of Korea", in reality basic cause of his proposal for north-south conference and acceptance of Pyongyang's invitation was realization that he had no real following. They had also information that Kyu-sik Kim had secretly(because he was openly boycotted election) told his friends to nominate candidates and campaign for them in the first general election in 1948. In all consideration of these facts, we find that Kyu-sik Kim has also some aspects of political realist as well as political idealist.

        • KCI등재
        • KCI등재

          ‘한국적 (국제)정치학' 정립을 위한 담론 비평

          이철순(Lee Chul Soon) 21세기정치학회 2012 21세기 정치학회보 Vol.22 No.3

          이 논문은 1960년부터 2012년까지의 ‘한국적 (국제)정치학' 정립을 위한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개관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되었다. 첫째, 지금까지 ‘한국적 (국제)정치학'을 정립 해야 한다는 담론은 많이 생산되었지만, 그러한 논의들은 대부분 원론적인 반성에 머무르고 구체 적인 실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둘째, 구체적인 대안이나 실제로 ‘한국적 (국제)정치학'을 모 색하려는 연구 성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후였다. 셋째, 구체적인 대안 가운데는 ‘근본접근'보다는 ‘실용접근'이 중요하며, 우리 말과 글로 학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넷째, ‘한국적 (국제)정치학'을 위한 담론은 이제 충분히 논의되었으며 이제는 쉽고 초보적 인 실천부터 하는 것이 ‘한국적 (국제)정치학'의 정립을 위해 필요하다. This paper critically reviews discourses on 'Korean-style Political Science' from 1960 to 2012.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s. First, although there have been many discourses on it, they were not able to propose practical alternatives for establishing it. Second, there appeared practical alternatives and researches for seeking it after 2000. Third, among practical alternatives, there are arguments that 'pragmatic approach' is more important than 'fundamental approach' and that Korean political scientists have to do research using Korean language. Fourth, the establishment of 'Korean-style Political Science' has been much discussed and it is needed to do an elementary practice for founding it.

        • KCI등재

          소련의 북한 정치세력에 대한 정책 : 1945-1948

          이철순(Lee Chul Soon) 21세기정치학회 2010 21세기 정치학회보 Vol.20 No.1

          이 논문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이 북한 정치세력에 대하여 어떠한 정책을 실시하였는지를 살펴 본다. 구체적으로 첫째 소련은 북한에서 어떤 정치세력을 지원, 육성하려 하였으며 여러 정치세력을 어떻게 재편하려고 하였는가, 둘째 김일성은 소련에 대하여 얼마나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1945년 8월 하순부터 1946년 1월 초순까지의 순수형 연립단계 시기에는 북한의 소련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자 지령대로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하여 조만식과는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월 초순 조만식이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함으로써 순수형 연립단계는 끝나게 된다. 김일성은 입북하기 전 이미 스탈린이 면담하였고 소련공산당은 10월 13일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을 설치하는 과정, 14일 환영대회 연출 과정에서 시종일관 김일성을 지원하였다. 또한 12월 중순에는 김일성을 분국의 책임비서로 임명함으로써 사실상의 북한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1946년 1월 초순부터 48년 9월 초순까지의 시기 즉 사이비형 연립단계로부터 공산당 단독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시기에도 소련공산당은 김일성에 대한 신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스탈린은 1946년 7월 김일성과 박헌영을 동시에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을 더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소련공산당은 북조선노동당을 만드는 과정, 1948년 4월의 남북협상회담에도 깊이 개입하여 김일성을 지원하였다. 한편 스티코프는 이 시기 북한정치의 총연출자였다. 결론적으로 북한정권은 소련의 강력한 후견 하에 있던 위성국가였다고 할 수 있으며 김일성은 소련에 대하여 거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This paper examines Soviet policy toward the North Korean political contest from 1945 to 1948. It elaborates which political forces the Soviet Union intended to support and how autonomous Kim Il Sung was from Moscow's intervention. During the first 'genuine coalition'(August 1945- January 1946), the Soviet Communist Party coaligned with nationalist leader Cho Man-sik to build the National United Front. Cho was discarded in January 1946 because he opposed the Moscow conference decision. Simultaneously, Stalin interviewed Kim Il Sung to confirm his loyalty to the Soviet Union before return back to North Korea in September 1945. The Soviet Communist Party supported Kim Il Sung's establishment of the Northern Branch of Korean Communist Party in October 1945 and orchestrated a welcoming rally for Kim on October 14, 1945. The Party made Kim North Korea's de facto leader by appointing him as general secretary of the Northern Branch of Korean Communist Party in mid-December 1945. The next stage, a 'bogus coalition'(January 1946-September 1948), preceded the final emergence of the 'monolithic regime'. The Soviet Communist Party had full confidence in Kim. Stalin summoned Kim and another communist leader, Park Heonyoung to Moscow and interviewed them simultaneously in July 1946. Stalin showed greater trust in Kim than Park at this meeting by letting Kim sit to his right. The Soviet Communist Party further backed Kim in building the North Korean Worker's Party and by intervening heavily in the South-North meeting of April 1948. At this time Stalin's confidant Shtykov actually dominated North Korean politics. In conclusion, North Korean Communist regime was 'satellite regime' under the strong patronage of the Soviet Union and thus Kim had little autonomy from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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