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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비스 지향 아키텍처의 클라이언트를 위한 실용적 프로세스 모델

          이재유,김수동,Lee, Jae-Yoo,Kim, Soo-Dong 한국정보처리학회 2008 정보처리학회논문지D Vol.15 No.4

          서비스 지향 아키텍처(Service-Oriented Architecture, SOA)는 여러 어플리케이션들에서 사용될 수 있는 범용적인 서비스를 개발하여 배포(Publish)하고 동적으로 발견(Discover), 조립(Composition)하여 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기술이다. 따라서 SOA는 Publish-Discover-Invoke 형태의 컴퓨팅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객체지향, CBD의 컴퓨팅 방식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SOA의 서비스는 절차적 프로그래밍의 함수, 객체지향의 객체, CBD의 컴포넌트와는 다른 구성 단위(Unit)이며, 재사용성과 보편성이 서비스의 기본적인 요구사항이 된다. 또한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 간의 사전 상호인지나 정보의 공유없이, 서비스 제공자가 재사용을 고려하여 서비스를 개발하고, 서비스 사용자는 이를 검색한 후 사용하는 방식이므로 제공자와 소비자 간의 결합도가 매우 낮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SOA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실행시간에 검색, 선택하여 사용하는 방식도 기존 컴퓨팅 방식에는 적용되지 않은 개념이다. 따라서,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에서처럼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서버의 기능을 JSP, RMI 등을 사용하여 호출하는 방식은 SOA 서비스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설계 하는데 잘 적용될 수 없다. SOA 서비스 클라이언트 개발을 위해서는 서비스의 특징과 SOA의 서비스 사용 절차를 설계 단계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서비스 클라이언트 개발을 위한 실용적이고 체계적인 개발 프로세스가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비스 제공자 측면의 SOA 서비스 개발을 위한 프로세스조차 정의가 부족하고, 서비스 사용자 측면의 클라이언트 개발 프로세스는 소수의 가이드라인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효율적인 서비스 검색과 실행을 위한 실용적이고 체계적인 개발 프로세스와 각 단계별 지침을 정의하고, 호텔 검색 및 예약 서비스 시스템을 통하여 제시된 개발 프로세스를 적용한다. Service-Oriented Architecture(SOA) is an method to develop applications by developing and publishing reusable services which potentially be used in various applications, and discovering and composing right services dynamically. SOA adopts a paradigm of publish-discover-invoke, which is considerably different from object-oriented and component-based development(CBD) approaches. The service in SOA is different from function in procedural programming, object in object-oriented programming, and component in CBD, and its fundamental requirement is a high level of reusability and applicability. In SOA, service providers and service consumers are loosely coupled since the providers try to develop reusable services and the consumers try to locate right services without knowing much about the providers and their published services. Moreover, the process of searching, choosing and invoking right services is not presented in conventional programming paradigms. Therefore, conventional approaches to developing user interfaces and invoking the functionality on servers through JSP, and RMI in object-oriented programming cannot well be applicable to designing clients’ programs in SOA. Therefore, there is a high demand for a practical and systematic process for developing clients’ applications, and the such a process should be devised by considering key characteristics of services and SOA. However, little work on this area is known to date, and there has not a process for client side just except few guide lines for developing service client. In this paper, we propose a practical and systematic development process for developing clients' applications in SOA. Then, we define instructions for carrying out each activity in the process. To show the applicability of the proposed work, we show the result of applying our process in developing a services application for searching and booking hotels.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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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 -근대적 주체의 해체와 새로운 주체 가능성을 중심으로-

          이재유 ( Jae Yoo Lee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9 시대와 철학 Vol.20 No.2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클라우제비츠의 아포리아가 전쟁에 대한 정치의 지배를 통해 근대적 주체를 확립하고자 했다는 것에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전쟁에 대한 정치의 지배는 `비합리성`에 대한 `합리성의 지배`이며, `강제`에 대한 `동의`의 지배이다. 그러나 이 비합리성은 합리성을 깨 버리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역사 발전의 동인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역사적 경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아포리아는 클라우제비츠를 재해석하고 재전유한 맑스 주의에게서도 다른 방식으로 발견된다. 그것은 노동자 농민 대중이 계급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사물화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 자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무너져서는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노동자, 농민 대중들은 상당히 기회주의적이며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은 항상 계급의식을 지니지 못한 노동자, 농민 대중들로부터 일정하게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부르주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계몽적으로 조직할 수밖에 없다. `당`은 근대적 주체인 부르주아 국가처럼 `이성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클라우제비츠의 철학적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맑스를 재해석하고 재전유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처럼 근대적 주체(국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또한 기존의 맑스주의처럼 내전을 전쟁으로 간주하는 것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한 주체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 그 외부인 `코뮌`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Clausewitz`s Vom Kriege(On the War) shows that his aporia is in establishing modern subject through the control of politics to war. This political control of war is the control of `rationality` to `irrationality`, and the control of `agreement` to `coercion`. But in this irrationality, it is the nature which disconcerts the rationality. We find that this is just the cause of history development, and this has been proved by historical experience. But this Clausewitz`s aporia is found as a different form in marxism which reinterprets and appropriates Clausewitz again. It derives from that the mass of labour and peasant don1t have the class consciousness but the fetishistic consciousness. They have only a political fear about war. Because they have lived in bourgeois society itself, and have thought that they cannot go on their life when the bourgeois society fall down. At this time, the ruling class which carry out a war and revolutionary worker and intelligentsia which have the class consciousness, have the political fear about war too. Therefore the mass of labour and peasant can be timeserving and betrayed. So `the party` has to be divided from the mass of labour and peasant and organize them enlightingly like a bourgeois nation. `The party` has to become `the incarnation of reason` like a bourgeois nation. So we must reinterprets and appropriates Marx and Clausewitz again in order to solve Clausewitz`s philosophical aporia. We have to not remain in Clausewitz`s modern subject(nation). And we have to not remain in which the established marxism regarded a internal warfare as war. Beyond this, we must grope for the possibility of a new subject. This subject can be possible when we build up `commune` as the outside which is inside capitalism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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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이재유(Lee, Jae Yoo)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3 통일인문학 Vol.55 No.-

          이 논문의 목적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있다. 가부장제는 자본의 생산과정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착취와 억압의 체계이다. 이러한 점은 모든 것을 경제적 토대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기존 맑스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이런 점에 기초하여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특수한 역사적 국면인 자본주의와는 구별되며, 그리하여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초역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부장제를 이렇게 초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부장제는 근본적으로 해체될 수 없는 구조로 남게 되며 자칫 개량주의로 흐를 위험이 커지게 된다. 특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통일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구조는 헤겔의 절대정신의 운동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는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새로운 노동력 생산 과정 중에 개별적으로 자기 자신을 생산하여 자본가와 개별적으로 계약하고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부터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에 대한 계급투쟁은 곧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생산과정 속에 내재해 있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척결해 나가는 투쟁으로부터 시작되며 또한 이 투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가부장제 폐지 투쟁은 자본주의 폐지 투쟁의 전제이며 노동계급 투쟁의 진지를 구축하는 투쟁,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투쟁, 코뮌을 형성하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폐지 투쟁으로서 가부장제 폐지 투쟁은 자본의 자기 생산 전제 조건의 기존 기반을 무너뜨리는 투쟁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투쟁이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relation of capitalism and patriarchy. Patriarchy is another system of the exploitation and pressure that can’t be explained through the production process of capital. This point is the uncountable part through the existing Marxism that reduce all of things to the economical basis. On the basis of this, the radical feminism and the socialist feminism argue that Patriarchy is distinguished with capitalism which is a special historical epoche, and so that it is the transhistorical which precedes capitalism. However, when patriarchy is made such as the transhistorical, it would make a structure which is not dissolved radically and have some risk to flow to reformism. In particular, the theoretical structure of socialist feminism to unify Capitalism and Patriarchy is quite similar to Hegel’s ‘Absolute Geist’ movement structure. Patriarchy starts in the process which workers product themselves individually in the process of reproduction and new production of the labor force the new labor power. So, the class struggle is started from the struggle that worker class root out the contradiction of patriarchy which is in the process of his production, and also is inseparable from this struggle. The abolition struggle of patriarchy is the premise of the abolition struggle of capitalism, and is the struggle to build a stronghold of the worker class, the struggle to construct material foundations and the struggle to form the commune. As abolition struggle of capitalism, the abolition struggle of patriarchy is the struggle to break down the existing base of the capital self-production premise. And so, this struggle is the struggle by which capitalism can’t be operated any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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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레닌과 카우츠키의 보편 논쟁을 중심으로-

          이재유 ( Jae Yoo Lee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4 시대와 철학 Vol.25 No.4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이 두 가지견해 중 하나는 레닌으로 대표되는 볼셰비키의 견해, 다른 하나는 카우츠키로 대표되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 두 견해는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며 이율배반적이다. 둘 다 자본주의 독재(부르주아 독재)를 해체해야 한다는 회의론적 입장에 서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이라는 ‘보편’을 해체해야 한다는 회의론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의론적 입장은 다시 두 입장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자본이라는 보편 자체는 원래부터 선험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상품 사회 내에서 여러 상품들의 ‘동의’를 거쳐서 존재했던 ‘일반적인 것’ 또는 ‘공통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금 새로운 ‘동의’를 거쳐서 새로운 일반적인 것 또는 공통적인 것을 도출해 내자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동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즉 자본이라는 ‘물신’을 가능하게 하는 ‘비물질적인 것’으로서의 실체로부터 다시 새로운 판을 짬으로써 자본의 ‘물신’(실체)성을 해체하자는 입장이다. 그런데 전자의 입장은 흄의 경험론적(회의론적) 입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후자의 입장은 데카르트의 합리론적(신회의론적) 입장으로 이어진다. 이율배반이 생겨나는 철학적인 지점은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것’은 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카우츠키나 레닌 모두 형이상학적·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물신인 자본을 지양하고자 했다.그렇지만 이 둘 모두 이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고자 했지만 결국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는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칸트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자본-노동이라는 관계로 묶여 있는 사회인데, 이 관계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 다루고 목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거나, 오로지 목적으로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철폐하여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는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코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코뮤니즘 사회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로운 각 개인이 서로 연대하는 사회.’ ‘자유로운각 개인이 서로 연대하는 사회’에서 각 개인은 서로를 자기동일화시키지 않지만, 또한 자기동일화시킬 수도 없지만,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서로에게 타자이며, 물자체이다. 예를 들면 가치형태에서 등가형태의 자리에는 항상 ‘자기동일화될 수 없는’, 하지만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타자가 온다. 이러한 타자는 공통감각을 가지고 있는 특정한 공동체에 대립하여 이 특정한 공동체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개인이다. 이 개인은 바로 맑스가 말한 ‘사회적 개인’이다. ‘사회적’이라고 할 때, 이는 각각의 개별적 개인의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관계 구조도 아니고, 이 개인들이 특수한 관계 체계에 속해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사회적개인’이라고 했을 때 이 ‘사회’는 특정한 관계 체계 또는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인 의미에서, 즉 일반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관계 체계 자체(즉 물자체)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사회적 개인이며 특정한 관계 체계(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코스모폴리탄’이며, 따라서 (특정한 공동체에 대하여) 물자체이다. It is largely two position on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One of the two is the Bolshevik position represented by Lenin, the other is Kautsky position. But this two positions are conflict, contrary and antinomic each other. The both are based on the skeptical position which must dissolve the capitalism dictatorship(bourgeois dictatorship). In other words, they are based on the skeptical position which must dissolve the capital as ‘the universal’. But this skeptical position branches off into two. One is the position that derive the new general or common through the new ‘agreement’ because capital as the universal itself is not the transcendental originally, ‘the general’ or ‘the common’ that is with consent of commodities in commodity society. The other is the position that builds a new structure which derives from substance as ‘the non-material’ which enables this ‘agreement’ and the capital as ‘fetish’, and so dissolves the capital as ‘fetish’(substance). But the former is directly connected to Hume’s empiricism position, while the latter to Descartes’s rationalism position. The philosophical point, making the antinomy, is ‘the universal’. ‘The universal’ makes one’s appearance as ‘the metaphysical’ in philosophical history. Both all Kautsky and Lenin tried to sublate capital, fetish as the metaphysical and universal. Nevertheless they did not succeed. So how we can to sublate? We can see the clue of the answer to the question in Kant. Kant thought that one must practice the universal moral law, ‘treat the other not only as the means but also as the purpose!’, in order to get freedom. But capitalism society in which we live, basically is not the society which Kants freedom can be realized. Because capitalism society is undamentally tied up with capital-labour relation and by the relation the other is treated only as means and not as purpose, or only as purpose and not as means. To abolish the realation and practice the duty, treating the other not only as means but also as purpose, that is communism. Marx talk about communism society. ‘Society, free individuals associate each other.’ In ‘Society, free individuals associate each other’, individuals don’t and can’t self-identify each other, and as being, having a common sense, are the other and thing itself each other. For example, the other, not self-identified always but forming a common sense, takes a place on the equivalent form in form of value. This other is the individual as ‘cosmopolitan’, conflicting to a certain community and giving universality to this community. This individual is Marx’s ‘social individual’. To talk about ‘social’, this is not a certain relation system, existing out of each individual, and does not mean that the individual belong to a certain relation system. To talk about ‘social individual’, this ‘society’ does not mean a certain relation system, in transcendentalism, is the relation system itself(thing itself) as the universal, not as the general. Therefore the individual is social individual and belongs to a certain relation system(community), but the cosmopolitan out of it and so thing itself(opposing a certain rela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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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의 地域發展 隔差와 西部大開發

          이재유(LEE Jae You),허흥호(HUR Heung-Ho) 신아시아연구소(구 신아세아질서연구회) 2004 신아세아 Vol.11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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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진입 후 중국은 낙후된 서부지역의 경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도로, 철도, 공항, 수로 등의 인프라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있는가 하면, 역사적 이유와 자연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해 낙후된 산업구조도 지역적 특성과 비교우위에 따른 방향으로 적극 조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구 급증에 따른 식량부족 문제의 해결과 그 동안 무분별한 산림개간 등으로 인해 발생했던 자연재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하여 생태환경 보호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이러한 서부대개발은 성공적으로 수행될 경우 중국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은 물론 그동안 분리 독립의 원천인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된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지역경제 확대 등 내부적으로 취약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이름뿐인 강대국으로 전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서부대개발이 동서부지역간 발전격차를 해소하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는 서부대개발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단기적 성과를 이룩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 이유는 우선 현 단계에서 추진되고 있는 서부대개발이 인프라건설과 생태환경 건설 등 단기적 성과보다는 장기적 성과를 이룰 수 있는 프로젝트일 뿐 아니라 서기동수(西氣東輸), 서전동송(西電東送), 남수북조(南水北調) 등의 프로젝트가 서부지역보다는 동부지역 등 그 밖의 지역에 경제적 효과가 더 큰 프로젝트이며, 또한 서부대개발에 필요한 외자도입의 우대조치도 동부지역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동서부지역간의 발전격차의 주 원인인 서부지역의 농촌경제 활성화에 대한 획기적 조치도 없기 때문이다. Since the dawning of the 21st century, China has embarked upon several major developmental projects aimed at improving the economic environment of its western region, including roads, railroads, airports, and waterways. In light of historical reasons and geographical conditions, at the same time, its outdated industrial structure is now being substantially overhauled in accordance with local characteristics and comparative advantages. Moreover, the Chinese government's new efforts are designed to address food shortage caused by rapid population growth as well as protect the eco-environment affected by irrational forest development. Should the ongoing ""Western Development"" is proceeded as planned, it would not only ensure continued economic growth but it could also undercut a major rationale for separate movements by ethnic minorities, thus contributing to political and social stability as well as China's emergence as a major power in name and in reality. If not, however, a future China with internal vulnerabilities will not make it on par with other major powers in the world. Irrespective of the prospect that the ""Western Development"" would contribute to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by narrowing the gap between the eastern and western regions, there will emerge many difficulties in achieving results in the short term. One reason is that the ongoing ""Western Development"" is oriented toward the longer-term, rather than shorter-term, results e.g., the construction of the industrial infrastructure and the eco-environment. Another is such major projects as ""Transporting Western Gas to East,"" ""Sending Western Electricity to East,"" and ""Transferring Southern Water to North"" would have greater economic effects on eastern rather than western region. Still another is the fact that the western region neither offers a preferential system for foreign investment compared with that of the eastern region, nor does it have a drastic measure for the revitalization of the agricultural economy in the western region the locus of regional disparity between the western and the eastern reg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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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 자유론의 의미에 관하여

          이재유(Lee, Jae Yoo)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4 통일인문학 Vol.57 No.-

          이 논문의 목적은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과연 인간의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칸트의 자유론에 기초하여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의 자유론이 자본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철학적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음을 살펴보는 것이다. 칸트에게서 자유는 필연적 인과성을 뛰어넘는 ‘초월론적’인 것이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필연적인 인과계열의 제1원인으로 지칭될 수 있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차이’ 또는 ‘어긋남’에 의해 결코 자기동일화될 수 없는 ‘타자’, 즉 ‘물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초월론적인 것은 공간적으로는 어떤 특정한 공동체와 관계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공동체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죽은 자로서의 타자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타자이다. 초월론적인 것으로서의 타자는 자기동일화된 것으로서의 어떤 특정한 공동체에 대해 대자적 존재로서의 개인, 즉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개인이다. 이러한 개인은 물 자체로서, 특정한 공동체가 특수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향할 수 있게끔 해 준다. 그리하여 이 개인은 보편성을 지니게 되며, 자유로운 인격체, 즉 주체가 된다. 그런데 이 주체는 타율적인 것에 저항해야 하는 의무를 실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해야’ 하는 의무를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타율적인 것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이러한 실천을 통해 이 주체는 ‘어느 누구와도 자유로이 연대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다. 맑스가 말하는 이 자유로운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코뮤니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칸트의 자유론은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내용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철학적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how human freedom is possible based on Kant’s Freedom in capitalism, in which treat most men as a means, not as a object. And to study that Kant’s Freedom provides a philosophical clue for making a new alternative plan beyond the capitalism. Kant’s Freedom is ’transzendental’ beyond the inevitable causality. ‘Transzendental’ is not ‘a priori’ in the epistemological aspect, which is referred to as the first cause of the inevitable causality, means ‘the other’, namely ‘thing itself’ that is never identified by ‘difference’. This ‘transzendental’ in spatial aspect can be related to a community but is never in it, in time aspect is the other as the past dead and the future being. The other as ‘transzendental’ is the individual as ‘fur sich’ to a community as the identified, that is the individual as a Cosmopolitan. This individual as thing itself, makes a community does not remain in a specific and point to the universal. So it has the universality in itself, becomes the free personality, the subject. This subject must practice the duty which have to resist heteronomy, that is, have to ‘treat the other as not only a means but also a object’. Through this praxis as a resisting heteronomy, this subject can become ‘a free individual to associate freely with anybody’. The society, this free individual associate with each other, is communism society as a new society which overcomes capitalism society. So I think that Kant’s Freedom provides a philosophical clue for taking shape a substance of ‘proletarian dictatorship’ in Marx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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