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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유사상과 유교(儒敎)의 습합(習合) -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

          이상성 ( Lee Sang-seong ) 한국철학사연구회 2020 한국 철학논집 Vol.0 No.64

          한국은 한국고유의 사상을 가진 나라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국이라는 지형 안에서 한국인에 의해 형성되어온 고유한 사상이 바로 한국고유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삶의 원천으로서 일상생활에 다양하게 작용하여 왔다. 한국고유사상의 특질로는 첫째, 신이한 영묘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민족의 시원인 단군신화에서부터 비롯되어 한국고대사회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이 스며들었다. 신이함은 비합리적 요소가 아니다. 하늘로부터 비롯된 높고 고귀한 정신이며, 이성만으로 설명 안되는 정신적 특성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시적 영명함은 한국적 고유 정신의 핵심이다. 다음으로, 일체적 공존성을 들 수 있다. 한국인들은 일찍부터 ‘한민족'이라는 일체감 속에서 한마음으로 살아왔다. 고대부터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 속에서 공동체를 가꾸며 삶을 영위해 왔다. 이러한 한국고유사상은 외래사상을 수용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것은 특히 유교사상을 수용하여 생활 속에 녹여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대 한국인들은 고유한 사상적 특징을 바탕으로 외래사상인 유교를 수용했다. 그런 과정에서는 크게 세 가지 특성을 보였다. 첫째, 유교를 자기 자신의 신념에 의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생활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둘째, 유교를 현실에 맞게 변용하고 실정에 맞도록 적용하거나 실천하였다. 셋째, 유교를 수용하되 다른 외래사상과의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는 형식을 띠었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한국고유사상이라는 특수성 속에서 유교라는 보편성을 띤 외래사상을 원만하게 수용하였으며, 한국적 특색을 지닌 한국유교로 발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런 모든 과정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Korea is a country which has its own indigenous thoughts. Ever since the beginning of its history, there have been some indigenous thoughts developed by Koreans within the terrain of Korea, which can be defined as indigenous Korean thoughts. They have been diversely affecting Korean's daily life, as the essence of their lives. The first characteristic of indigenous Korean thoughts is their mysterious and marvelous mysticalness. This characteristic started from the Dangun mythology, the origin of Korean people, and has been deeply infused into the ancient Korean society and people around that time. Mysticalness is not an irrational element. It is a high and sublime belief derived from the Sky and a spiritual trait that cannot be explained only through rationality. The theocratic mysticality or clarity which has been handed down from the ancient times is the essence of the indigenous Korean thoughts. The second characteristic is their compatibility that allows coexistence. Since early times, Koreans have been living their lives together within the sense of unity that they are ‘the Korean race.' That is, they have been lead a communal life with the sense of one race, while cultivating their communities. These indigenous Korean thoughts have become a foundation to accept the foreign thoughts. Particularly, they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process of accepting the thoughts of Confucianism and making them infused into the daily life. Ancient Koreans have accepted Confucianism, the foreign thoughts, based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indigenous thoughts. During this process, there have been three major characteristics as well. Firstly, they intended to independently adopt Confucianism based according to their own faith and belief, and then to implement it in their lives. Secondly, they adapted and transformed Confucianism to be true to reality and applied them or put them into action in a practical way. Thirdly, they had a format of accepting Confucianism yet promoting coexistence and harmony with other foreign thoughts as well. Accordingly, Koreans have smoothly accepted the foreign thoughts called Confucianism which possessed universality within the frame of particularity of indigenous Korean thoughts, establishing the foundation to develop them into Korean Confucianism with unique Korean characteristics. This dissertation studies these whole process with the focus on Samguk Yusa: Heritage of the Three Kingdoms and Samguk Sagi: History of Three Kingdoms.

        • KCI등재

          정암 조광조의 의리사상

          이상성 ( Sang Seong Lee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2 한국 철학논집 Vol.0 No.33

          이 논문은 정암 조광조 의리사상을 “명선(明善)”,”성의(誠意)”,”정심(正心)”,”성신(誠身)”으로 구조화 해 고찰한 것이다. 이 목차들은 다소 이념적인 접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리사상이라고 하면 매우 실천지향적인 특징이 강한데, 조광조 의리사상의 특징은 매우 이념지향적(理念志向的)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조광조가 입사(立仕)하여 지난(至難)한 현실 과제들을 개혁하는 과정은 당대의 현실을 주도면밀하게 고려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이상적일 정도로 지치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이유도 조광조의 의리적 실천이 현실보다는 근본, 즉 이상(理想)에 더 무게가 실려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당장의 문제보다는 근본적인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실재형(實在型) 정치가가 아니라 이념형(理念型) 도학자였음을 말해 준다. 그의 삶도 그런 일관된 목표를 지향하였다. 조선의 정치도 최고의 가치인 지치(至治)를 실현할 수 있으며, 왕조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의리사상은 유교적 이상사회와 정확하게 합치되는 방향으로 추구되었다. 그 의리사상 중 “명선”, “성의”, “정심”은 이타적(利他的) 성격을 띤 것이고, “성신”은 자리적(自利的) 의리라 할 수 있다. 조광조의 의리 사상은 이타를 지향하면서 자리적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자기를 위하는 것과 남을 위하는 길이 둘이 아님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런 점은 그 의리사상의 미래적 가용성이라 할 수 있고, 현대 학문이 지향할 바를 시사하기도 한다. This dissertation explores the Righteousness Thought of Cho Kwang-jo. The specific contents can be systemized as 1) “Defining the Good,” 2) “Making the Meaning Sincere,” 3) “Straightening the Mind,” and 4) “Acting Sincerely.” These contents are rather an ideologic approach. This is because the Righteousness Thought of Cho Kwang-jo tends to strongly pursue very fundamental ideology while general righteousness thought tends to be practice-oriented. He was rather an ideological thinker; the reason was that his practice more focused on the foundation, that is, the ideal, rather than on the reality. He pursued more fundamental things than problems from reality. It was because he was more an ideologic, spiritual leader than a realistic politician. His whole life also pursued such consistent goal. He was confident that the Joseon Dynasty`s politics could also realize the best value. His thoughts demonstrated that the way for my own sake is not a different way with the one for others` sake. This point is the futuristic value of his thought and should be thoughtfully considered by the today`s scholars.

        • KCI등재후보
        •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에 관한 고찰 : 인간은 진정 자유로운가?

          이상성(Sang seong Lee) 혜암신학연구소 2016 신학과교회 Vol.5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신학과 교회』 제5호의 주제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의 삶과 신학적 주장들과 역할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주제 하에서 본 논문은 종교개혁의 마지막 선구자이자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엿보고 그가 격랑의 시대를 어떤 사상을 가지고 지나갔는지를 탐구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에라스무스의 생애를 고찰한 후 그의 사상의 발전과정을 정리하고 그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에라스무스가 살았던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였는데 이는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사라센 제국에서 고대 희랍 철학 원전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고대의 문예가 부흥기를 맞이한 데서 기인한다. 이로 인해 중세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게 되고 이는 보편논쟁을 불러와 결국 중세신학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시대적 영향을 받은 에라스무스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공적을 강조하는 교리에 반대하여 구원은 오로지 은혜로서만 가능하다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반기를 들고 비록 인간의 이성이 타락해서 완전성은 상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며, 비록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은총이 작용해야 하지만 개인의 자유의지가 은총과 협력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따라서 인간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인간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최소한 자신의 행위, 또는 신앙에 대한 선택의 자유는, 비록 그것이 아무리 작다고 하여도, 가지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성서의 말씀들 중 자유의지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말씀들을 예로 들고, 또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성서의 내용도 예를 들어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 역시 긍정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당시 종교개혁가들의 사상과 사회 분위기를 고려할 때 에라스무스는 분명히 선구자였고 인간성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한 인문학 사상가이기도 했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rticulate the life, the theological thoughts, and the role of the religious reformers in general, and those of Desiderius Erasmus in particular. To accomplish that goal, I investigated the situation of the era when Erasmus lived, and how he had gone through the time. The era Erasmus lived is called Renaissance. The Renaissance is a period in Europe, from the 14th to the 17th century, called to be the cultural bridge between the Middle Ages and modern history. It started as a cultural movement in Italy in the Late Medieval period and later spread to the rest of Europe, marking the beginning of the Early Modern Age. The Renaissance s intellectual basis is its own invented version of humanism, derived from the rediscovery of classical Greek philosophy, such as that of Aristotle. This new thinking became manifest in art, architecture, politics, science and literature. Renaissance was also affected by the crusade, which brought a lot of books and technologies into the western Europe to close its medieval period. Erasmus studied Greek hard to understand the classical Greek philosophy and was influenced by the English thinkers and writers such as Thomas More and John Colet. He also studied in Paris, France, where he met Jacques Lefevre, a famous humanist. Influenced by the Renaissance spirit, Erasmus became an ardent humanist and to believe human free will. He thought humans are capable of thinking freely, and acting freely. He took many examples from the Scripture which suggest human free will. He also took some examples which suggest human incapability of free will. But he concluded those phrases suggesting human incapability of free will actually imply the opposite. He thought human being needs not only grace to get salvation but also free will. Without free will, human being needs not take any responsibility as any tool does not take any responsibility for its owner's activity with it. It is very natural for people present day to accept human free will. But Erasmus needed a lot of courage to insist on human fre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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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철학 : 조광조 도학의 이념적 순정성과 감성의 문제

          이상성 ( Sang Seong Lee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0 한국 철학논집 Vol.0 No.30

          조선조 사림의 영수이자 한국 도학의 태산북두로 평가되는 조광조는 지치주의라는 순수이념으로 절대적인 도덕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현실 정치에 임하여서는 군신간에 부자(父子)의 예로써 소통하여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것은 인간관계의 격의를 해체함으로써 객관적, 이성적 존재보다는 주관적, 정서적 존재로서 친밀한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또 스스로 애군(愛君), 우국(憂國)을 애부(愛父), 우가(憂家)의 감정으로써 실천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점은 그가 지향한 지치적 순수정치는 인간의 감성이 통하는 세상임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기묘사화라는 정치적 폭거를 계기로 깊은 인간적 고뇌와 슬픔을 절감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견디지 못하는 아픔을 자연스런 감정 표현으로 숨기지 않았는데, 특히 능주에서 유배 이후의 생활과 종명 과정에서는 매우 인간적인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단지 슬픔으로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되어 후세 사람들의 마음에 길이 살아 있게 되었다. 인간의 성정(性情) 문제에서 도학[생리학]은 정보다는 성을 강조하지만, 이성보다는 감정이나 정서를 중심으로 도학자의 삶을 살피는 것은 한 인간의 실존적 내면을 살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Cho Gwang-jo(趙光祖, 1482-1519) was the moralist who had the purest conscience and aimed the devoted politics among many fellow Confucianists of Chosun Dynasty. He even criticized his teacher who was in his late forty years for not being able to control his emotions when he was just a teenager. That is to say, he was the one who have kept his cold reasons for entire life. Nevertheless, as mentioned before, Cho Gwang-jo was very faithful to his emotions and also very honest. We find that he was definitely emotional. He demanded to chang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ing and the courtier to the one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with humane communication. He expressed his mind and emotion he had used to have at the moment of his death: he loved his king just as he loved his father. However, the king, Joongjong, was indifferent at the human`s emotion as if he was a senseless figure. That was the saddest frustration and grief he had. However, his grief did not remained just as the mere grief but again survived as the hope for the survivors and descendants with the big echo. In this respect, his gried did not just end as the grief but it can be said that it even revived itself as the strength and courage. Then, Cho Gwang-jo`s life as a human being was never a failure. Moreover, his grief and agony did not just remained as the vain emotion and 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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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정암 조광조의 정치지도자론

          이상성 ( Sang Seong Lee ) 동양철학연구회 2012 東洋哲學硏究 Vol.70 No.-

          조광조는 자신이 신념화한 이상정치의 모형을 최고 권력자인 군주가 실천해 주기를 갈망하며, 지도자의 요건도 최고 이상 국가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자질들을 제안했다. 그 요건들은 다음과 같다. 1) 지도자는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의 이상적 모형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조광조는 도학적 이념의 지향처로 지치주의를 제안하고, 구체적으로는 함여유신의 상향평준화를 도모하는 융평적 태화지역(泰和之域)을 제시했다. 2) 지도자의 인지적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 조광조는 네 가지 인지적 자질로 ‘총명강단(聰明剛斷)'의 ‘사용(四用)'을 제시했다. 3) 지도자는 공사(公私), 의리(義利) 분변 의지를 확고하게 지녀야 한다. 이것은 이욕(利慾)에 빠지기 쉬운 권력자들을 리더하는 필수 지도 요건이다. 4) 지도자는 유교의 가족주의적 관계 덕목으로써 국가를 위해 봉사를 해야 한다. 특히 최고지도자는 신료들을 가족의 감정으로써 대함으로써 군부동정(君父同情)의 순정한 통합을 도모해야 한다. 5) 지도자는 엄정한 원칙을 지키면서 동시에 유연한 변화를 도모할 줄 알아야 한다.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그 내용은 현실중시형이라기 보다는 이념지향형에 가까운 지도자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광조의 정치지도자 자질론은 한마디로 지치적 순정형(醇正型)이다. 그것은 그가 조선조의 여러 도학자들 중에서 누구보다 순수 이념지향형 도학자였던 점에서 기인한다. 그의 정치지도자론은 조선시대 최고지도자를 위한 요청이었지만, 그 내용은 현대 사회의 지도자에게도 여전히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Cho Kwang-jo was eager for the lords, men of supreme powers, to realize his ideal model which he believed in and shaped on himself. Therefore, the essential qualifications of leader that he suggested were what was necessary for leading the most ideal country. Here are the qualifications of a political leader which have been suggested by him: 1) A leader should definitely suggest an ideal model of the society that he aims. 2) Among all the qualifications, the most important ones are especially intelligence, clearness, determination and discernment. 3) A leader should certainly draw a sharp line between official and private matters and distinguish justice from profit. 4) A leader should serve for his country as a virtue of family relations from Confucianism. He should treat his vassals with a sense of family members. 5) A leader should strictly follow principles and at the same time, should attempt flexible change. From these lists above, it can be said that Cho Kwang-jo put strong emphasis on the innocent part of an ideology which society or nation aimed for, rather than solving specific problems of the reality. This is not irrelevant to the situation of this time. Although his political leadership theory was a call for the supreme leaders of Chosun Dynasty, it still has significant meaning in this moder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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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훤당 도학사상의 연구 성과와 향후 과제

          이상성 ( Sang Seong Lee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2 嶺南學 Vol.0 No.22

          The Chosun Dynasty`s Dohak(道學) has been eventually ``characterized`` by Hanhweondang(寒暄堂) Kim Goeng-Pil(金宏弼). Although Hanhweondang inherited Dohak from his master Jeompiljae Kim Jong-Jik, he constructed a totally new system of thoughts which was different from the one that his master had created. Also, he established the foundation for the most innocent type of politics in our history through his pupil, Cho Kwang-Jo. The key points of Hanhweondang Dohak were new understanding and practice movement of 『the Elementary Learning(小學)』. Before him, other Dohak scholars had also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Elementary Learning』. However, 『the Elementary Learning』 has finally become the most important scripture of Dohak thanks for Hanhweondang, which meant that Dohak has turned from pursuit and emphasis on metaphysical value to practice of fundamental duty of human reality: emphasis on realistic practice of absolute truth, rather than denial of transcendental foundation and truth. Although Chosun Dynasty chose Neo-Confucianism as its founding principle, the Dynasty`s Dohak has been set its main direction by Hanhweondang`s faith and spirit. The characteristics of Hanhwendang Dohak are strong spirit of independence, self-practice, high-degree of theory, and philosophical innocence. Based on these characteristics, Chosun Dynasty`s Confucian scholars appraised Hanhwendang as the very first figure of Chosun Dynasty to succeed the stream of Korean Confucianism. In our current academic worlds, products of Hanhweondang Dohak study are rather not sufficient. No master`s or doctor`s thesis has been yet submitted in philosophical field and it has been about forty years since his collection of works, 『Gyeonghyeonrok』, which is inappropriate for today`s scholars to study. At the same time, volume of book about Hanhweondang Dohak is not enough compared to other Dohak scholars. The reason for this insufficient products of Hanhweondang Dohak study not only rests on lack of documents and reference, but also on scholars` passive understanding and cognition. In order to solve such problems, I suggest three further tasks for future study of Hanhweondang Dohak. First, we should newly publish `『Today`s Sohak of Hanhweondang』`` to distribute it widely and develop its practice movement. Second, ``Hanhweondang Academic Society` or ``Research Center for Hanhweondang Dohak`` should be established. Finally, modern interpretation of <Hanbinggye> and its practice movement is necessary. 寒暄堂 金宏弼(1454~1504)에 의해 조선의 道學은 비로소 그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한훤당은 스승 점필재 김종직에게 도학을 전수 받았으나 스승과는 다른 성격의 사상 체계를 이룩하였고, 그의 제자 정암 조광조를 통해 우리 역사상 가장 醇正한 정치〔至治〕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한훤당 도학의 핵심은 『小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 운동이었다. 그 이전에도 다른 도학자들이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지만, 한훤당에 이르러 『소학』은 도학의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도학이 형이상학적 가치의 중시와 추구로부터 인간 현실에서의 근본적 도리의 실천으로 그 성격을 전환함을 의미하였다. 초월적 근원과 진리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절대 진리의 현실적 실천을 중시하는 의미하는 지닌 것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채택하였지만, 조선조 도학은 한훤당의 신념과 정신에 의해 큰 방향이 결정되었다. 한훤당 도학의 특징은 강한 주체성, 修己的 實踐性, 고도의 이론성, 철학적 醇正性을 들 수 있다. 이런 내용으로 인해 조선조의 유학자들은 한훤당이 한국 유학의 統序를 잇는 조선조 첫 번째 인물〔首賢〕이라고 평가하였다. 한훤당의 도학사상의 현대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는 매우 적은 편이다. 철학적인 분야에서 석사, 박사학위 논문이 한 편도 제출되지 않았으며, 그의 문집인 『국역 경현록』은 출판된 지 40여년이 지나 오늘날 연구자들이 참고 하기에 매우 부적합하다. 뿐 만 아니라 한훤당 도학에 대한 단행본 역시 다른 도학자들에 비해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한훤당 도학에 대한 철학적 연구 성과가 부족한 것은 무엇보다 문헌이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연구자들의 소극적인 이해와 인식에도 원인이 있다. 이런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향후 한훤당 도학 연구의 향후 과제로는 첫째, ``『한훤당 선생의 현대 소학』``을 새로 편찬하여 널리 보급하고 그 실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며, 둘째, ``한훤당학회`` 혹은 ``暄두道學 연구소``의 창립이 요청된다. 끝으로, <한빙계>의 현대적 해석과 실천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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