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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만주 부흥운동에 관한 연구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8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8 No.-

        중국과 만주지역 교회는 의화단 사건(1900년) 여파로 선교의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고 다시 선교의 활력을 되찾게 만든 것이 1908년 만주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1월에 일어난 평양 부흥운동 현장을 목격하고 중국을 방문한 맥라렌 부인과 하남주재 선교사 고포드가 만주 심양과 요양에 들러 한국 부흥운동의 실상을 전함으로 촉발되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 소식을 접한 만주와 중국주재 선교사들은 같은 부흥운동이 중국에서도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준비 기도를 시작하였다. 특히 요양지역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더글라스는 1908년 1월 중국인 전도자 장사정과 호만성을 평양으로 파송하여 직접 평양 부흥운동의 실상을 보고 오도록 하였고 이들의 방문보고와 2월 9일부터 시작된 고포드의 요양집회에서 비로소 한국에서와 같은 토착교인들의 통성기도와 공개자복, 회개와 배상을 통한 영적 갱신, 그리고 자발적 헌금과 헌신, 자원 전도운동이 나타났다.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만주지역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토착 교인들은 회개와 중생, 성결에 이르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 체험, 즉 ‘영적 각성’을 체험하였으며 이를 통해 교회 안에 화해와 일치, 협동과 연합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은혜를 체험한 교인들의 윤리적 갱신과 실천은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선입견과 편견을 해소하였고 교회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을 향상시켰다. 여기에 토착 교인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전도운동으로 인해 무너졌던 예배당과 기독교 학교가 복구되었고 선교에 활기를 띰으로 교세는 의화단사건 이전으로 회복되었다. 요양과 심양에서 발화된 만주 부흥운동은 1908~09년 그 불길이 만주 일대로 확산되었고 1910년 4월에는 북경의 연경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나 헌신적 전도자들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중국교회 부흥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만주 부흥운동의 동기와 단초를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ㆍ중 양국교회 관계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70~80년대 한국교회의 복음 수용과 전파 과정에서 한글성서 번역과 인쇄 및 반포의 거점이 되었던 만주교회가 의화단사건이후 침체에 빠져 있을 때 한국교회가 부흥운동의 열기를 전함으로 위기를 벗어나 선교의 활력을 되찾도록 만듦으로 한국교회는 ‘선교의 빚’을 갚았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아시아로’ 이어지는 신앙교류와 선교협력의 아름다운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19세기 일부 서구 제국주의 기독교 국가들이 추구하였던 강압적 무력을 동원한 ‘힘의 선교’가 아닌 섬김과 봉사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선교’였다. The situation of mission work in the earlier time of 1900s in Manchuria was very gloomy and critical at an anti-foreign atmosphere of the Chinese people after the Boxers' riot in 1900. But the atmosphere of stagnation was changed into that of growth and vitality in the latter days of 1900s by the Manchurian Revival Movement in 1908. The Manchurian Revival began in Laoyang(遼陽) with the return of two westerners from Korea, Mrs. D. McLaren and Mr. J. L. Goforth, who had just visited Pyengyang with news of religious awakening movement in that country. Especially Mr. Goforth, a pioneer of Canadian Presbyterian mission in China, on returning to his mission field Honan(河南), gave an account of the spiritual movement to the Churches at Laoyang, Moukden(瀋陽), Peitaho(北戴河) and Chikungshan(鷄蚣山) at which prayer meetings immediately began by the missionaries in order to be happened the similar phenomena in China. And it was in January 1908 that Mr. G. Douglas, a Scots presbyterian missionary of Laoyang, sent two Chinese evangelists to Korea, Mr. Chang (張賜禎) and Mr. Hu(湖萬成), who came across the Yalu to Pyengyang where they met Korean Church leaders, saw nearly two thousand people who were gathered for the study of the Bible and the evangelistic campaign, and were impressed greatly. On 9th Feb. 1908 just after their returned reporting, moreover, the one weekevangelistic meeting began at Laoyang Church led by Mr. Goforth who told the congregations about the revival in Korea and gave the address from the text,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Spirit of God" which made the people who were possessed by God' Spirit, outburst weeping, confessing their sins and crying for mercy. And also, Mr. Goforth went to Moukden and held also a meeting at 16th Feb. But at this meeting, people received the 'Shengling ti Kantung'(聖靈之感動) after Mr. Hu's testimony of Korean revival and showed the similar phenomena, such as vocal united praying, confession of sins openly, restitution, and voluntary offering of money and days for evangelism as in Laoyang and Pyengyang.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Manchuria Revival Movement. From 1908 to 1909, the spiritual fever of the revival movement was spread to the Manchurian cities, such as Pensihu(本溪湖), Anping(安平), Tunghwa(通化), Kaiyuen(開元), Yilu(懿路), Newchang(牛庄), Tieling(鐵嶺), Paoting(保定) etc. It was also at last in Apr. 1910 that a revival meeting was held by the native evangelists from Tieling among the students of the Methodist University(燕京大學校) in Peking(北京), and over 300 students volunteered to give themselves to the inland mission work. In this way, the revival movement was spread to the whole land of China by the native pastors and preachers. In Oct. 1909, on returning from his furlough, Dr. J. Ross, a pioneer of Protestant mission in Manchuria, could find out that a great change was happened in his mission field. So many native Church leaders and members, who had been disappointed and timid in religious life, testified their spiritually awakened lives in moral regeneration, embodied the reconciliation and peace among the people, built up the voluntary, and united cooperation in mission works. So the native Christians could recover the vitality of faith and mission, and also, the Church statistics of 1910 show the ongoing growth after the Manchurian revival of 1908. Furthermore the moral and conscientious lives of the regenerated Christians could not only get rid of the negative and anti-Christian prejudice of non-believers, but also help to acquire of Church leaders' authority and leadership over the social community. Thus the native and indigenous Church could be formed by the self-propagation in evangelism, the self-supply in Church economics, and the self-government in politics by Chines Christians. In the history of relationship and inter-change of faith between China and Korean Churches, we must point out that the clue of this meaningful Manchuria Revival Movement was given by the revival of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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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1운동과 기독교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7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선교역사가 30년이 되지 않은 ‘신흥종교’ 수준이었다. 종교인 비율로 봐도 전체 인구의 1.5% 수준에 머무는 ‘소수종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 1운동의 준비, 모의단계로부터 대중 투쟁단계, 그리고 3 · 1운동 후 임시정부 조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기독교계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선교초기부터 강력한 ‘민족주의 종교’로 성격이 형성되었다. 19세기말 근대화시기에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소개된 기독교 복음은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한민족에게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적 사회체제에서 억압당하며 살았던 하층민과 부녀자 계층이 기독교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체득, 실천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기독교를 통하여 서구문화와 문명의 유입이 이루어졌고 그와 함께 수직적 질서가 강조되던 봉건사회가 붕괴되면서 수평적 가치가 구현되는 시민사회로 바뀌었다. 이처럼 한말 민족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한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종교로 변모하였다. 그것 역시 일제의 억압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는 민족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참여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식민통치 상황에서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투쟁하는 ‘민족운동 공간’이 되었다. 선교초기부터 서구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며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나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활동에 간섭하지 않도록 정치권(총독부)과 타협하였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교회는 선교사들의 보호 아래 ‘치외법권적 영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총회와 연회, 지방회(노회)를 연결하는 전국 연락망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경찰력이 미치지 않았던 교회와 기독교 선교기관 안에서 (선교사들의 의도와 달리) 민족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항일 민족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3 · 1운동 때 만세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자료가 지방에 신속하게 전파되어 전국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전국 연락망’을 갖춘 교회와 기독교의 연결 조직이 있어 가능했다. 셋째, 한국 기독교의 초교파 연합운동 경험이 종파를 초월한 ‘전 민족적’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였다. 선교초기 각기 다른 교파와 교단을 배경으로 하여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해 ‘교파중심’ 교회 설립과 선교가 추진되었다. 그러다가 1903~07년 일어난 초기 부흥운동의 여파로 교회 일치운동이 일어나 성서번역과 문서출판, 의료와 교육 사역에서 초교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연합과 연대 경험을 바탕으로 3 · 1운동 때 장로교와 감리교목회자, 평신도 지도자들이 천도교와 불교 등 다른 종파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고 서울과 지방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다른 종파 지도자, 일반 시민들과 연대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3 · 1운동을 통해 교파와 종파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는 민족운동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렇듯 선교초기부터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던 한국 기독교는 3 · 1운동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종교로서 그 성격과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배경에서 한국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 하에서 항일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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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초기 부흥운동과 여성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6 No.-

        이 논문은 1903년 원산 부흥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1907년 평양 부흥운동에 이르는 한국 교회 초기 부흥운동 과정에 나타난 토착교회 여성들의 종교 체험과 그 결과 형성된 여성의식의 변화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초기 부흥운동은 한국 토착교회 성격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바, 한국교회 여성사에서도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한국교회 여성들은 부흥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시발이 된 여름 선교사 연합 기도회는 원산에 주재하거나 원산을 방문한 여성 선교사들이 조직한 것이었다. 이 모임에 성경공부 인도자로 초청을 받아왔던 하디가 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성령 감동’을 느끼면서 자신의 한계와 실수를 인정하고 자백한 것이 부흥운동의 출발이 되었는데 현장에 있던 여성 선교사들도 같은 ‘성령 체험’을 하였다. 이후 하디는 개성과 서울, 평양, 인천 등지로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던 바, 이들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던 전도부인과 교회여성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 여성 사역자들은 부흥운동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부흥운동에 참여한 교회 여성들은 부흥회에 참여하여 회개와 중생과 성화의 체험을 하였다. 기독교의 기본 체험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체험을 통해 교회 여성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체득하였고 이를 통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토착교회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토착적’ 문화 양식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서구 기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토착적 신앙 양태들이 나타났다. 초기 부흥운동 기간 중에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난 새벽기도회와 날연보, 성미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토착적 신앙 양태를 통해 기독교는 ‘서구적’ 종교가 아닌 한국의 토착 종교와 문화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토착교회 여성들은 부흥운동 체험을 통해 여성의식이 변화되었다.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기 전 봉건적, 가부장적 제도 하에 의사 표현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 부흥회 중에 공개 자백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성령에 감동된’ 여성들은 남성들도 참석한 모임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초이성적 종교체험이 여성들에게 그런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던 것이다. 초기 교회 여성들의 지도력은 이런 체험과 고백을 통해 형성되었다. 부흥운동 기간 중 이루어진 종교체험과 의식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가정과 사회, 민족 차원에서 자유와 해방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봉건시대 가부장적 제도의 폐해인 축첩 문제가 부흥회 기간 중 심각한 죄악으로 인식되면서 축첩 폐지현상이 기독교인 가정에서 나타났으며 교회 안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의무를 확인하였다. 이러한 자유와 해방 체험은 한말 민족이 처한 위기 상황에서 민족 해방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남성들의 경우, 부흥운동이 교회의 비정치화를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한 면이 강했으나 교회 여성들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 현실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운동에 적극 나세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1905년 11월 을사 5조약 체결 직후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전개한 구국기도회를 들 수 있다. 1904년 봄 하디 부흥회 이후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은 신앙적 성격의 기도회를 정기적으로 갖았던 바,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기도회의 주제가 구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초기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 토착교회 여성들로 하여금 기독교라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교회 안에서, 가정과 사회, 국가와 민족에서 여성의 역할이 남성과 동등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 토착교회 여성들에게 초기 부흥운동은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고 실천하도록 만든 ‘영적 축복’이었다. This paper aims for declar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role and experience of the Church women in the early revival movement from 1903 to 1907. This movement has a very important meaning in history of Korean Church for promoting of Christian initial experience for native Christians, accelerating of the Church growth and shaping of indigenous Christian characteristics in Korea. From the beginning, the Church women took initiative roles and get religious experiences in this revival movement. Especially on the Aug. 24th of 1903, the birthday of Wonsan revival movement, a few female missionaries took a week prayer meeting at Wonsan mission station and requested Dr. R.A. Hardie to lead Bible study in which Hardie himself enthralled by Holy Spirit, became aware of the reason of past failure in mission work, confessed it publicly and was strengthened with full spiritual power. Female missionaries who had invited him were also experienced Holy Spirit and empowered in fullness in this meeting. After this meeting Hardie took revival meetings for Korean Church leaders in which they also received Holy Spirit, repented their sins and got renewal life. Thereafter consecutive revival meetings were held in Songdo, Incheon, Seoul and at last in Pyongyang on Jan. of 1907 that made a turning point for a rapid growth of the Korean Church. In these revival meetings female missionaries and Korean Bible women also experienced a bountiful grace and took important role in promoting the revival fever to countries. Church women who had participated in the revival meetings had experienced the Christian initial experiences such as repentance, renewal, reconciliation and sanctification, which was the most characteristic phenomena of the early revival movement, By these experiences Korean Church women could understand and discern Christianity from the other native religions. And the inspired Korean Church women began to express their faith in their familiar native religious metaphor as 'Sung mee'(rice offering), 'Nal Yunbo'(day offering) and 'Sae Byuk Gidohoi'(Daily early morning prayer meeting) etc. which formulated the Korean indigenous faith. In this way, Church women took a important role in the indigenization of Christianity on the Korean soil and culture. Revival experiences also changed the consciousness of Korean Church women toward gender, family, society and nation. At the days of beginning of Christian mission, Korean women were under the oppressive male-centered confucian social system so requested only silence and submission to determination of men in family or society. But in the midst of revival meetings, Church women empowered by Holy Spirit stood up or interrupted speeches of male preachers during the session to confess their sin and opinion publicly. By these extraordinary religious experiences Church women could acquire a consciousness of liberation and freedom from male-centered social custom and applied it to their family and social life. Their sense and value of equality in gender was embodied as the voluntary evangelistic campaign by women to women, extension of the education for women in Church and abolition of concubine custom in Christian home, They also engaged in patriotic movements that were monopolized by men in ancient times. In Oct. of 1905, just after signing of unequal treaty between Japan and Korea, Church women spontaneously held ‘Gukuk Gidohoi'(save-nation prayer meeting) in which they prayed for liberation and freedom of nation in the critical times by Japanese imperial invasion. In this way, the Korean Church women obtained the feministic consciousness on equality of gender by initiative engagements in the early revival movement and embodied it in voluntarily evangelism, educational works for women and nationalistic movements by women. That is the reason which I call the early revival movement as the 'spiritual' gift of liberation and freedom to Korean women who were oppressed and victimized so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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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이 정치를 만날 때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4

        해방 후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가 겪은 신학갈등과 교회분열의 배경과 원인은 해방 전, 일제강점기 형성된 한국교회 신학의 ‘다양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신학의 다양성은 19세기말 한국 선교에 착수한 후 해방후까지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소속했던 교단과 선교회의 다양한 신앙과 신학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선교사 개개인의 신앙 고백과 신학적 경향에 따라 일제강점기 한국교회가 경험한 신학은 극보수 근본주의 신학으로부터 급진 자유주의 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파’ 신학을 한국교회에 소개, 주입하였는데 그것은 각 교파교회마다 설립한 교단 신학교 교육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은 ‘복음주의’라는 신학개념을 통해 (개신교회 안에서) 교파주의를 극복하려는 초교파 연합, 일치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신학을 통해 ‘구별’과 ‘연합’라는 서로 상반되면서도 연대할 수 있는 신학 기능을 경험하였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 교회 지도자들의 오류와 실수로 인해 잘못된 역사를 청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개, 그리고 거기에 피해자의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였는데 한국교회는 두 가지 모두 실패하였다. 그 결과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는 분열을 경험하였고 특히 장로교회는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재건교회와 고신파의 분열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출옥성도’ 한상동의 민족의식과 교회재건 의지, 그리고 박윤선과 박형룡의 ‘구평양신학교’ 보수 칼빈주의 ‘정통신학’ 전통을 복원하려는 의지가 모여서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서울의 조선신학교와 구별되는 보수주의 신학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해방 당시 유일했던 ‘교단직영’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는 처음(1940년) 출발할 때부터 ‘반(反) 근본주의/선교사/평양신학교 신학’, ‘신학의 세계화’,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성서비평설과 신정통주의 신학 등 서구의 진보적 신학을 ‘자유롭게’ 강의하였다. 그러나 그런 신학교육이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신조로 여기던 보수 신학생들에게 반발을 일으켜 1947년 ‘조신신학교 51인 학생 진정서사건’이 일어났다. 예장/기장 분열 과정을 거치면서 자유주의(근대주의) 신학 비판가로서, 그리고 보수주의 선교사와 평양신학교를 통해 구축된 ‘사도적 정통신학’의 ‘적통’(嫡統) 계승자로서 박형룡은 ‘절대적’ 위상을 확립했다. 특히 보수진영에서 박형룡은 ‘지존’(至尊)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물론 그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57년 ‘총회신학교 3천만환 사건’이 터졌고 위기에 처한 박형룡을 구명하려는 운동이 ‘복음동지회’(NAE)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박형룡의 독주를 비판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해방 후 조직된 한국기독교연합회(NCC)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결국 신학교 교수와 이사회, 교단 지도부는 복음동지회측과 에큐메니칼측으로 양분되었고 복음동지회측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자유주의 신학과 용공주의 노선, 초교파 단일교회 설립의도 등 신학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에큐메니칼측을 ‘비정통’으로 비난하였다. 서로 상대방을 용납하지 않는 양측의 교권투쟁은 1959년 제44회 총회를 파행으로 이끌었고 결국 예장은 통합측(에큐메니칼측, 연동측)과 합동측(복음동지회측, 승동측)으로 분열되었다. 예장 합동/통합 분열은 교권투쟁 과정에서 신학적 이해 차이와 갈등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 경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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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색 순교에서 적색 순교로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0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대표적인’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는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장로교 신앙과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손종일 장로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스가모중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일본 동양선교회 창설자 나카다,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등으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고 복음 전도자로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귀국해서 경남노회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 나환자교회인 부산 상애원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경남노회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38년 졸업한 후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의 초빙을 받고 나환자 목회에 임하였다.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비판, 거부하였고 그 때문에 1940년 9월 체포되어 1945년 해방되기까지 5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 여수 애양원교회에 복귀하여 목회하면서 부흥사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 교회와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48년 ‘여순사건’ 사건이 터졌을 때 순천에서 유학 중이던 두 아들이 공산주의 학생들에게 희생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가해자 학생을 용서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아 그로 인해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이 그에게 붙여졌다. 다시 2년 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갈 수 없다”며 애양원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희생되었다. 나환자 목회로 출발하여 일제말기 신사참배 거부투쟁과 투옥, 그리고 해방 후 부흥사역과 순교에 이르는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신학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1) 성경 절대주의, 2) 종말론적 소명감, 3) 대속적 자기희생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30여년 나환자 목회를 통해 ‘자기 비움’과 겸비를 경험, 실천하였고 성경중심적 복음주의 신앙과 종말론적 재림신앙에 입각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였으며 해방 후 민족분단과 좌우익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두 아들을 잃고도 가해자(원수)를 용서하는 ‘완전사랑’의 본을 보였고 전쟁 중에도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목자’의 자리를 지키다가 순교자가 되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평소 목회자로서 자기 비움과 희생을 실천하는 ‘백색 순교’의 삶을 살다가 결국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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