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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初(洪武~永樂期)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倭寇

        윤성익 명청사학회 2011 명청사연구 Vol.0 No.35

        倭寇は東アジアの海域を舞台に活動した存在である。その舞台は陸上の観点から見れば朝鮮半島と中国大陸、そして日本列島になる。倭寇を理解する為にはこれら日本列島と朝鮮半島、中国大陸を含む視座が求められると言える。しかし、今までは各地域の立場とそこから生まれる関心の違いによって主に「韓国ー日本」と「中国ー日本」という両者的関係で倭寇問題は取り扱われたし説明されてきた。観点を広めて韓ㆍ中ㆍ日の史料を相互的ㆍ総合的に検討すると前には見られなかった問題と新しい事実の発見も可能であろう。明初(洪武~永樂)の倭寇に関してはその被害を言い及ぶ時、しばしばその回数、正確には侵寇の回数が挙げられる。ところが、高麗の倭寇に対してはすでに「点から線へ」の観点が提議され評価されている。明の倭寇もこの「点から線へ」の観点によって再検討する必要がある。例えば史料で「轉掠」と表現している場合は一つの集団が移動しながら複数の侵寇行為をしたことだと判断出来る。このような観点から史料に現れる洪武から永樂までの期間中倭寇の被害を調べると中国沿海で活動した倭寇集団の数は年に一つ二つに過ぎない。このように中国沿海で活動した倭寇は朝鮮半島とも関連性が深い。朝鮮半島の倭寇と中国沿海の倭寇とを直接に線で繋ぐ史料で証明出来る確実な例は多くはない。が、倭寇行動の様相とか特徴などを考慮すれば他の多数の場合も朝鮮半島の倭寇と中国沿海の倭寇は別のものではなく、根本的には同一な性格のもの、時には同一集団だったのである。故に両地域の倭寇に対する理解と説明ー発生の原因ㆍ集団の構成及び特性などーは両地域の倭寇を共に満足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どころが、洪武年間と永樂年間にはそれぞれ中国大陸と朝鮮半島での倭寇活動が明らかに対比される不均衡の時期がある。一方面では倭寇が活動するが他の方面では倭寇活動が現れない相反する状況である。このような現状は日本の国内の状況及び、明と日本、朝鮮と日本とに外交関係と連繋して説明できる。それは外交関係を念頭に置いた日本中の権力が倭寇集団へある程度の影響力を及ばした事だと考えられる。倭寇集団の性格に対し自立的な海上勢力とみるかあるいは権力に直属するものと見るかに関する議論が対立するなかで、明初においてのこのような現状は注目すべきである。

      •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중국에서의 시각 愛國主義·中華民族主義 敎育下에서의 對日本觀과 관련하여

        윤성익 경희대학교(국제캠퍼스) 국제지역연구원 2006 아태연구 Vol.13 No.1

        In Korea and China, it has been a politically controversial issue toward Japan that Japanese Prime Minster's visits Yasukuni War Shrine every year. 'History' becomes the field of study with many different views in East Asia. It is a good example that the history textbooks of each country have brought many controversial issues since 1980s. All of East Asia countries describe history based on the perspective of their own nationalistic viewpoints. Strongly, they tend to understand East Asia either based on self-centered historic view or nationalism, ultranationalism standpoint. It is obvious that Japanese 'historical issues', based on Japanese viewpoint, emphasize on its nation and people. It is same that Chinese standpoint blaming Japanese attitude is based on Chinese nation and its people. Recently, China is in the process of making new 'national polity', that is a nation-state, by emphasizing on patriotism and Chinese nationalism. Therefore, its perception of history and history education based on such stance are accomplished by thorough focus on nationalism. They keep same position toward international relations. Chinese perception and criticism on Japanese 'historical issues' are affected by Chinese nationalism. In other words, though there are different viewpoints between wrongdoer and its victim, each country criticizes the issues which is derived from nationalistic and historic viewpoints using the same points of view. Sticking to nationalistic viewpoint never becomes the solutions for problems caused by country-centered or nation-centered standpoint. The issues of historic perception and history textbook are not just generated from history itself or historic perception. 'History as political device' should be excluded, however, it is true that it exists in the real world.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문제가 매년 일본과 관련해 한국과 중국에서 중요한 정치현안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1980년대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한 역사교과서 등의 예에서처럼 ‘역사’는 동아시아 3국에서 가장 큰 이견을 보이는 분야가 되어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자국·자민족 중심주의에 입각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자국중심의 역사관에 입각하고 있거나 국가주의·국수주의적 시각에 기초하여 동아시아사를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일본을 기점으로 한 ‘역사문제’는 국가 및 민족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일본에서의 태도를 비판하는 중국의 입장 역시 국가와 민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중국은 현재 愛國主義와 中華民族을 강조하며 새로운 國體, 곧 국민국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다. 역사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역사교육은 따라서 철저하게 國家와 民族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대외관계에서도 이런 점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과 일본에서의 ‘역사문제’에 대한 중국에서의 인식과 비판 역시 이것이 기준이 된다. 즉 국가·민족중심적 역사인식에서 도출된 문제에 대해 비록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민족중심적 역사인식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국가 혹은 민족중심적인 시각의 문제점을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역사인식 문제와 교과서 문제는 순수하게 역사나 역사인식 그 자체의 문제만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역사의 정치적 도구화’는 배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 KCI등재

        전자포탈영상 (EPI)을 이용한 의료용 선형가속기의 성능평가에 관한 연구

        윤성익,권수일,추성실 한국의학물리학회 1998 의학물리 Vol.9 No.2

        고에너지 광자선을 발생시키는 의료용선형가속기의 선질은 경우에 따라 변이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변이를 정확하게 판정하여 줄 수 있는 방사선측정법의 활용은 매우 중요하다. 보편적으로 광자선의 측정에 있어서 전리함의 사용이 아주 빈번하였으나 전자포탈영상장치(EPID)의 등장은 새로운 방사선측정법에 대한 가능성의 시작을 예견해준다. 실험은 6MV 광자선의 대칭성, Light/Radiation congruence, 그리고 Wedge filter를 통한 간편한 에너지의 변화에측과 위치의 정확도에 대하여 측정을 시행하였다. 사실 방사선측정의 대표적인 방법은 물팬톰-전리함응 이용한 모델인데 본 실험에서는 영상의 화소가 지니는 디지탈 값을 적절한 소프트웨어로 읽어내어서 데이터를 환산하여 결과를 얻었다. 선행실험에서 얻은 상대선량률을 적용하여 대칭성에서는 조사야영역이 l0$\times$10$cm^2$ 일 때 횡축과 종축에서 1.2%, 1.2%로 비교적 오차가 적었다. 그리고 Light/Radiation field congruence 여부는 횡축이 0.3%, 그리고 종축이 0.2%로서 예상한 기대값에 접근하였다. 다음으로 wedge filter를 활용한 에너지의 변이와 위치의 정확도에 대한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Accurate radiation dosimetric characters is very important to determine of dose to a radiotherapeutic patient. Medical linear accelerators have been developed not only its new quality of convenient operation but also electric moderation. It is reliable to measure more detail physical parameter that linac's internal ability. Typically, radiation dosimetric tool is classified ionization chamber, film, thermoluminescence dosimeter, etc. Nowaday, Electronic Portal Imaging Device is smeared in radiation field to verification of treatment region. EPID's image was focused that using both on-line image verification and absolutely minimum absorbed dose during radiotherapy. So, Electronic Portal Imaging was tested for quality evaluation of medical linear accelerator had its pure conditional flash. This study has performed symmetry, Light/Radiation field congruence, and energy check, geometry difference on wedge filter using a liquid filled ion chamber (EPID). Prior to irradiated on EPID, high energy photon beam is checked with ion chamber. Using these results more convenient dosimetric method is accomplished by EPID that taken digital image. Medical image is acquired with EPID too. Therefore, EPID can be analyzed by numerical information for what want to see or get more knowledge for natural human condition.

      • KCI등재

        朝鮮 初, 明으로의 倭寇侵寇 정보 제공에 대한 朝鮮의 태도

        윤성익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동국사학 Vol.54 No.-

        1419년(朝鮮世宗元?明永樂17)은 朝鮮과 明에서의 倭寇문제 및 조선?일본(對馬島) 관계에서도 큰 획기를 맞은 해였다. 그 직접 계기가 된 사건은 明에서의 望海?대첩과 조선에 의한 對馬島정벌이었다. 그런데 ⌈대마도정벌⌋ 의 원인 및 목적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 대부분은 왜구근거지의 토벌에 의한 왜구소멸을 들어왔지만, 정벌이 행해졌던 무렵 조선에서의 왜구상황, 조선과 명의 관계, 그리고 정벌과정 중에 나타난 조선측의 태도 등을 생각해보면, ⌈대마도정벌⌋ 의 원인과 목적을 단순히 왜구 소멸이나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에 대해 주변국과의 관계와 조선 초 대외정책의 목표 등에 주의하면서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에서는 對馬島정벌을 조선과 왜구의 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고 명과의 관계까지 포함해서 살펴보고, 정벌의 원인을 明의 조선에 대한 압력과 征倭論?北伐論에서 찾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런 설명에는 크게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조선으로부터 명에 전달된 ‘倭寇의 침구 정보’이다. 조선이 ‘倭寇정보’를 明에 전하는 과정을 통해 정보를 전한 조선의 의도, 나아가 對馬島정벌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종래 연구에 따르면 1419년 이전에는 朝鮮이 明으로 倭寇가 침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명으로 전하지 않았지만, 1419년초를 기점으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朝鮮이 明으로의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적극성이야말로 대마도 정벌의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것처럼 1419년을 기점으로 조선이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졌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 朝鮮이 明으로 전했던 정보가 望海?대첩에 도움이 되었다고 明과 朝鮮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이명으로 전한 정보가 어떤 명확한 의지를 통해 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望海?대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朝鮮이 이때 明으로 왜구와 관련된 정보를 전한 것은 통상적인 ‘被擄人’의 처리문제와 연관된 부가적인 행위였다고 판단된다. 또한 對馬島정벌이 이루어지기 직전, 조선은 倭寇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明으로의 침구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이에

      • KCI등재후보

        뇌영역의 동적 자화율 대조도 영상에서 Gd-DTPA 조영제의 비투과성 조사: 새로운 비선형 곡선조화 알고리즘 개발의 예비연구

        윤성익,장건호,강현수,김영주,최보영 대한자기공명의과학회 2007 Investigative Magnetic Resonance Imaging Vol.11 No.2

        목적 : 정상인의 뇌영역의 동적 자화율 대조도 (dynamic susceptibility contrast)에서 새로운 비선형 곡선조화 알고리즘을 사용한 Gd-DTPA의 비투과성 (non-permeability)을 조사하고자 한다. 대상 및 방법 : 전반적인 혈관내의 이동에 대한 전달함수(Ktrans)에 대하여 첫 번째 통과된 조합변수인자의 화소에 대한 정량적인 분석을 실시하였다. 정확한 복셀값의 산출을 위하여 개선된알고리즘에 의한 경계값을 적용하여 최적화 과정을 반복수행하였다. 결과 : 비선형 곡선조화 알고리즘을 적용함으로서, 뇌혈류와 뇌혈류량 측정은 T2*-강조 dynamic contrast enhanced (DCE)에서 상당히 개선 되었다. 재산출된 인자들로부터 뇌관류 강조영상의 형성은 수정된 비선형 곡선조화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획득하였다. 가상공간의 계산과 데이터 입력은 T2*-강조 DCE 영상에서 조영제 포화도를 산출하였다. 결론 : 본 연구에서 개발한 새로운 비선형 곡선조화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DCE-T2* 강조 자기공명영상 데이터를 얻은 후에 역동학적 인자들의 정확성 및 효율성을 개선시키는데 도움을주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KCI등재

        연구논문 : 조선(朝鮮) 초(初),명(明)으로의 왜구침구(倭寇侵寇) 정보 제공에 대한 조선(朝鮮)의 태도 -1419년의 왜구사건을 중심으로-

        윤성익 동국사학회 2013 동국사학 Vol.54 No.-

        1419년(朝鮮 世宗 元·明 永樂17)은 朝鮮과 明에서의 倭寇문제 및 조선·일본(對馬島) 관계에서도 큰 획기를 맞은 해였다. 그 직접 계기가 된 사건은 明에서의 望海鍋대첩과 조선에 의한 對馬島정벌이었다. 그런데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 대부분은 왜구근거지의 토벌에 의한 왜구소멸을 들어왔지만, 정벌이 행해졌던 무렵 조선에서의 왜구상황, 조선과 명의 관계, 그리고 정벌과정 중에 나타난 조선측의 태도 등을 생각해보면, 「대마도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단순히 왜구소멸이나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에 대해 주변국과의 관계와 조선 초 대외정책의 목표 등에 주의하면서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에서는 對馬島정벌을 조선과 왜구의 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고 명과의 관계까지 포함해서 살펴보고, 정벌의 원인을 明의 조선에 대한 압력과 征倭論·北伐論에서 찾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런 설명에는 크게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조선으로부터 명에 전달된 ``倭寇의 침구 정보``이다. 조선이 ``倭寇 정보``를 明에 전하는 과정을 통해 정보를 전한 조선의 의도, 나아가 對馬島정벌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종래 연구에 따르면 1419년 이전에는 朝鮮이 明으로 倭寇가 침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명으로 전하지 않았지만, 1419년 초를 기점으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朝鮮이 明으로의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적극성이야말로 대마도 정벌의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표 본 것처럼 1419년을 기점으로 조선이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졌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 朝鮮이 明으로 전했던 정보가 望海鍋 대첩에 도움이 되었다고 明과 朝鮮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이 명으로 전한 정보가 어떤 명확한 의지를 통해 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望海鍋 대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朝鮮이 이때 明으로 왜구와 관련된 정보를 전한 것은 통상적인 ``被擄人``의 처리문제와 연관된 부가적인 행위였다고 판단된다. 또한 對馬島 정벌이 이루어지기 직전, 조선은 倭寇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明으로의 침구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이에 대해 정보전달과 관련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明에의 ``왜구 정보 제공``에 대한 조선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즉 조선의 입장은 이전과 비교해 특별히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1419년 이후에도 朝鮮은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전시기처럼 明에 대해 필요이상의 정보제공은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았단 것이다. 이를 被擄人의 문제와도 함께 생각해보면 조선은 조선 내부의 사정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혹은 유리한 정도만의 정보를 명 측에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는 존선 초의 對明관계 및 ``對明事大``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19年(朝鮮 世宗 元·明 永樂17)は朝鮮と明における倭寇問題幷び、朝鮮と日本(對馬)との關係のおいても大きな畵期を迎た年である。その直接な切っ掛けになった事件は明においての「望海鍋大捷」と朝鮮による「對馬征伐(已亥東征·應永外倭)」であった。「對馬征伐」の原因及び目的に關して旣存硏究の多くは倭寇根據地の討伐による倭寇消滅を擧げて來たが、征伐が行われた當時の朝鮮での倭寇狀況、朝鮮と明との關係、征伐進行中に現れる朝鮮側の態度などを考えると朝鮮の「對馬征伐」の原因と目的を倭寇消滅とか倭寇問題解決のような單純な說明だけでは理解できないどころが多い。これに對し、朝鮮と周邊國との關係と朝鮮初對外政策の目標などに注意しながら「對馬征伐」の原因と目的を解明しようとする試みもある。これらの硏究では「對馬征伐」の原因を明から朝鮮への壓力と征倭論·北伐論から探ぃ求めている。自分もこういう考え方は正しいと思う。どころが、その論說で重要な倫理根的據提として提示されるのが朝鮮から明へ傳わった「倭寇侵寇關情報」である。朝鮮が「倭寇情報」を明へ 傳える過程を通じて情報を提供した朝鮮の思惑、進んで「對馬征伐」の意圖を明かしている。以前の硏究での說明によると1419年の以前まで朝鮮は明へ倭寇が侵寇するという情報を入手した場合、その情報を明へ傳えなかったが、1419年初から突然方針を變え、朝鮮が明への情報提供に積極性を持つようになったという。そしてこの積極性こそ「對馬征伐」の眞の目的を語ってくれるものだと主張する。しかし、本稿で明かした所、1419年を轉機として朝鮮が情報提供で積極性を持つようになったとみるべき根據は微弱である。朝鮮が明へ傳えた情報が「望海鍋大捷」の助けになったと明と朝鮮ともに認識してはいたが、朝鮮が明へ 傳えた情報はある明確な意思の基で明へ渡され、それが「望海鍋大捷」という結果を産み出したとは言難い。この時、朝鮮が明へ「倭寇情報」を傳えたのは通常の‘被擄人’處理問題と關連した付加的行爲であったと判斷される。また、「對馬征伐」の實行の寸前、朝鮮は朝鮮の西海岸を侵入した倭寇から極めて具體的な明への侵寇情報を入手したが、これに對して朝鮮は何の行動もしなかった。こういう狀況はなによりも明への「倭寇情報」提供にたいしての朝鮮の立場をよく表してくれる。すなわち、朝鮮の態度は以前と比べ別に變化はなかったのである。ちなみに1419年以後も朝鮮はこういう態度を堅持していった。以前の時期と同じく明へ必要以上の情報提供は敢えてしようとはしなかった。それを被擄人の問題と評せて考えると朝鮮は朝鮮の內部都合に從って自分達に必要な、或は有利な程だけの情報を明側に傳えてい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朝鮮の態度は朝鮮初の對明關係と「對明事大」の實態が反映されたものだと言えるだろう。

      • KCI등재후보

        北韓의 倭寇觀

        윤성익 동국사학회 2009 동국사학 Vol.46 No.-

        왜구에 대한 시각 및 설명은 각 국가 ? 민족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루어져왔다. 크게 가해자 ? 피해자로 나눌 수 있는 그 입장은 상반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양극에서 있다. 동일한 실체에 대한 다른 해석은 왜구 그 자체에 기인하는 정도 있으나 ‘국민국가 하에서의 역사인식 ? 역사교육’이라는 외적요인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한 ? 중 ? 일 삼국과 함께 북한은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분이며 왜구에 대해서도 역시 직접적 당사자의 하나이다. 북한에서는 대내외적으로 주체사판을 주장하며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 역시 국민국가 형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북한의 역사관에는 특히 ‘국가’ 혹은 ‘국가권력’의 의지가 다른 어느 곳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같은 민족으로 통일한 역사를 공유하는 한국과 북한이지만 각자의 입장에 의해 역사 해석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예가 많다. 왜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대외침략자로서의 왜구’라는 인식은 양측에게 동일하지만 그 상세한 설명에서는 차이가 있으며 북한의 독특한 해석이 나타난다. 주체사관에서는 역사를 ‘인민대중의 투쟁과 창조의 역사’로 본다. 반침략투쟁의 일환인 ‘반왜구투쟁’의 주체 역시 인민대중이 된다. 전인민의 투쟁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전쟁영웅에 대한 평가도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반 그 가운데 이성계는 그에 대한 북한의 입장에 따라 반왜구투쟁에서는 그 역할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 반왜구투쟁은 승리한 전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승리의 정점에 두는 것이 쓰시마 원정이다. 그렇지만 쓰시마 원정의 내용과 그 영향에 대해서는 과장된 서술이 눈에 띈다. 이것은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생긴 무리수라고 생각된다. 또한 왜구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일본의 ‘상업자본’이 그 배경이 되었다고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역시 북한의 입장에 의해 이루어진 다소간의 무리한 해석 내지는 설명 이라고 생각된다. ‘왜구는 일본인의 침략’ 이라는 점에 대해서 남한과 북한은 배우 강한 공통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설명과 해석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결과는 양측의 입장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점에서 남한 역시 자유로운 상태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 KCI등재

        朝鮮 初, 明으로의 倭寇侵寇 정보 제공에 대한 朝鮮의 태도 -1419년의 왜구사건을 중심으로-

        윤성익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동국사학 Vol.54 No.-

        1419년(朝鮮 世宗 元․明 永樂17)은 朝鮮과 明에서의 倭寇문제 및 조선․일본(對馬島) 관계에서도 큰 획기를 맞은 해였다. 그 직접 계기가 된 사건은 明에서의 望海堝대첩과 조선에 의한 對馬島정벌이었다. 그런데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에 관해서 기존의 연구 대부분은 왜구근거지의 토벌에 의한 왜구소멸을 들어왔지만, 정벌이 행해졌던 무렵 조선에서의 왜구상황, 조선과 명의 관계, 그리고 정벌과정 중에 나타난 조선측의 태도 등을 생각해보면, 「대마도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단순히 왜구소멸이나 왜구문제해결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에 대해 주변국과의 관계와 조선 초 대외정책의 목표 등에 주의하면서 대마도정벌의 원인 및 목적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이들 연구에서는 對馬島정벌을 조선과 왜구의 관계로만 파악하지 않고 명과의 관계까지 포함해서 살펴보고, 정벌의 원인을 明의 조선에 대한 압력과 征倭論․北伐論에서 찾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런 설명에는 크게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조선으로부터 명에 전달된 ‘倭寇의 침구 정보’이다. 조선이 ‘倭寇 정보’를 明에 전하는 과정을 통해 정보를 전한 조선의 의도, 나아가 對馬島정벌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종래 연구에 따르면 1419년 이전에는 朝鮮이 明으로 倭寇가 침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명으로 전하지 않았지만, 1419년초를 기점으로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朝鮮이 明으로의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적극성이야말로 대마도 정벌의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것처럼 1419년을 기점으로 조선이 정보 제공에 적극성을 가졌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 朝鮮이 明으로 전했던 정보가 望海堝 대첩에 도움이 되었다고 明과 朝鮮에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이 명으로 전한 정보가 어떤 명확한 의지를 통해 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望海堝 대첩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朝鮮이 이때 明으로 왜구와 관련된 정보를 전한 것은 통상적인 ‘被擄人’의 처리문제와 연관된 부가적인 행위였다고 판단된다. 또한 對馬島 정벌이 이루어지기 직전, 조선은 倭寇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明으로의 침구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이에 대해 정보전달과 관련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明에의 ‘왜구 정보 제공’에 대한 조선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즉 조선의 입장은 이전과 비교해 특별히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1419년 이후에도 朝鮮은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전시기처럼 明에 대해 필요이상의 정보제공은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았단 것이다. 이를 被虜人의 문제와도 함께 생각해보면 조선은 조선 내부의 사정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혹은 유리한 정도만의 정보를 명 측에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는 조선 초의 對明관계 및 ‘對明事大’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1555년 ‘을묘왜변 제주대첩’에 관하여 -달량왜변과의 차별성 및 을묘왜변의 실행 주체-

        윤성익 한일관계사학회 2024 한일관계사연구 Vol.83 No.-

        1555년은 중국에서 후기왜구 혹은 가정왜구의 활동이 피크를 이루었던 때였다. 이 해에 조선에서도 두 차례 왜변이 발생했다. 음력 5월 전라도에서의 달량왜변과 음력 6월 27일 제주왜변이 그것으로 보통 이를 통칭해 을묘왜변이라고 부른다. 제주도에는 왜선 40여 척이 나타나 1,000여 명이 상륙했는데 군(軍)과 민(民)이 협력해 이를 격퇴했다. 그동안 제주왜변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을묘왜변을 서술할 때도 종종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제주도에서는 제주왜변에 대한 역사 재발견 작업과 함께 이를 제주대첩(濟州大捷)으로 재평가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잊힌 역사의 복원과 지역사로의 활용은 충분한 의의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제주대첩에 관한 사료는 극히 적고 각 사료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사실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료비판과 이를 보충하기 위한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제주도 및 한반도에서의 왜구는 중국에서의 후기왜구활동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당시 중국 및 일본의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관련 사료와 당시의 상황을 폭 넓게 고려하면 제주왜변을 일으켰던 왜구는 그 이전 달량왜변을 일으켰던 왜구와는 별개의 집단이었다고 판단된다. 1555년을 전후한 시기 제주도에 나타났던 왜구사건의 경우를 참조하면 제주대첩 때의 왜구도 중국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주도에 나타났던 이유도 다른 사건들과 동일하게 풍랑 등으로 인해 일본으로의 정상적인 항해가 불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The year of 1555 was the peak of the activities of later Japanese pirates(later Wako) or the Jiajing(嘉靖)’s Japanese pirates(Jiajing Wako) in China. In this year, two Japanese Invasions also occurred in Joseon(朝鮮). Dalryang Japanese Invasion(達梁倭變) in Jeolla-do in May of the lunar calendar and Jeju Japanese Invasion(濟州倭變) on June 27 of the lunar calendar are commonly called Eulmyo Japanese Invasion(乙卯倭變). More than 40 Japanese ships appeared on Jeju Island and 1,000 people landed, and in response, Jeju's military and civilian cooperated to repel them. Until now, the Jeju Japanese Invasion has not received much attention, and it has often been omitted when describing the Eulmyo Japanese Invasion. Recently, there has been an active movement in Jeju Island to re-evaluate it as the Great Victory on Jeju(濟州大捷) along with rediscovering the history of the Jeju Japanese Invasion. It can be said that the restoration of forgotten history and its use as a local history are of sufficient significance and value. However, there are very few historical records about the Great Victory on Jeju, and there is a problem that the contents of each historical record contradict each other. Therefore, in order to restore the facts, thorough criticism of feed and careful consideration to supplement them are required. The Japanese pirates in Jeju Island and the Korean Peninsula can be said to be an extension of later Japanese pirates activities in China, so the situation in China and Japan at that time should be fully considered. Considering the related historical records and the situation at that time, it is believed that the Japanese pirates who caused the Jeju Japanese invasion were a separate group from the Japanese pirates who caused the Dalryang Japanese invasion before that. Referring to the case of the Japanese pirates which appeared on Jeju Island around 1555, it can be seen that the Japanese pirates along the Jeju Japanese Invasion also came from China. In addition, the reason for appearing on Jeju Island seems to be that normal navigation to Japan was impossible due to wind and waves, just like other c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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