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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人의 영수 鄭仁弘의 사상과 현실 대응

          신병주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07 東洋學 Vol.42 No.-

          Studying about Jeong, Inhong(The Leader of Bukin Party) is important because his execution which happened during Injo Banjeong, 1623, holds a major historic significance enough to be considered a diverging point in Joseon dynasty’s development of political and ideologic history. Jeong, Inhong, a possessor of a strong disposition and direct propensity, pursued practical academic traditions while dealing with the reality, and stood up as a politician and philosopher of an era while Gwanghaegun was on the throne. Unlike the legitimate Neo-confucianists, Jeong, Inhong was concerned with actually practicing the Neo-confucianism, and also showed an intention to perform social reformation, putting the accommodation of the people to the priority task. As for politics, he was positive of monarchism, and did not approve of the factional politics. However, in the political reality of Joseon dynasty, where the factional politics were already settled as the general trend, his path could not be accepted without being considered to be self-righteous. His tenacity to the past affairs, such as his action to regain the impaired reputation of the people concerned with Gichukoksa, and demand for enshrinement of his master, Nammyeong, in the royal confucian shrine, also helped to form the oppositions. Nevertheless, it is not right to evaluate Jeong, Inhong’s academic traditions and countermeasure to the reality negatively, due to the sole fact that he was defeated in politics. His ideology spoke for the reformatory intellectuals of the late 16th century, and his righteousness toward the king and respect to his master show the typical features of a scholar.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his ideology and action for his principles and conviction more objectively, not from the viewpoint of the restored force after the Injo banjeong.23 북인의 영수 정인홍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것은 그가 처형된 사건인 1623년의 인조반정이 조선시대 정치사, 사상사의 전개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강한 기질과 직선적인 성향, 실천적인 학풍을 추구하면서 현실에 대응해 나갔던 정인홍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한 시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정통 주자성리학자들과는 다르게 성리학의 실천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保民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으면서 사회 개혁의 의지도 보였다. 정치사상에 있어서는 군주권을 절대시하고, 붕당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미 붕당정치의 흐름이 대세로 자리 잡은 조선의 정치 현실에서 그의 행보는 독선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기축옥사 관련자의 명예 회복, 스승인 남명에 대한 文廟從祀 요구와 같은 과거사에 대한 집착도 반대파를 결집시켜 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패배했다는 점 때문에 정인홍의 사상과 현실대응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정인홍의 사상은 16세기 후반 개혁적 성향의 지식인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왕에 대한 의리와 스승에 대한 존숭은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과 신념을 위해 살아간 정인홍의 사상과 행동을 인조반정이후 반정 세력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요청되고 있다.

        • KCI등재

          五臺山 史庫本 실록의 특징과 학술적 가치

          신병주 동국사학회 2014 동국사학 Vol.57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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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산 사고본 실록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 까지는 완성본 직전의 교정쇄본이며, ?선조실록? 이후로는 다 른 지방 사고의 실록처럼 완성본을 보관하였다. 교정쇄본을 오대산에 보관 한 것은 선조대에 실록을 한꺼번에 제작하는 과정에서 많은 종이들이 필요 하였고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선조실록? 이후 오대산에 실록을 보관한 상황과 실록의 고출, 사각의 수리, 포쇄 등의 도서 점검 상태는 實 錄形止案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서 사고에서 실록을 비롯한 서책들의 구체 적인 보관 상태를 확인할 수가 있다. 오대산 사고본 실록은 일제시대인 1913년 도쿄대에 반출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이 유실되고 74책이 남았다. 오대산 사고본 은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50책과 ?선조실록? 15책이 남아 있다. 오 대산 사고본 실록의 특징은 조선전기 실록인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이 교정쇄본이라는 점이다. 주요 교정 사례는 글자의 바꿈, 글자의 추가, 글자 붙임, 띄어쓰기, 글자 뒤바꿈, 글자 경사 바로잡기 등이다. 잘못된 글자에 대해서는 붉은 글씨로 쓰거나, X, O, --- 등으로 표시한 것이 나타난다. 교정 사례를 통해 당시에 사용되었던 교정부호라든가 교정의 방식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비슷한 글씨의 착각, 같은 음을 가진 한자의 착각 등 당시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양상을 볼 수 있었고, 중국 황제 연호를 잘못 쓴 것 등에서 활자공들은 기계적인 작업만 했음을 추론할 수가 있었다. 2006년 47책의 오대산본 실록이 일본에서 반환되어 실록의 실 물 확인이 가능해지고 교정쇄본의 특징도 밝혀지게 되었다. 향후에는 오대 산 사고본 실록과 다른 사고본 실록의 실물을 꼼꼼하게 비교해 보는 연구 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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