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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봉(芝峯) 이수광(李?光) 한시문학(漢詩文學)의 사실(寫實)과 한아(閑雅) 풍격(風格)

        박수천 ( Park,Soo-cheon ) 한국한시학회 2016 韓國漢詩硏究 Vol.24 No.-

        芝峯 李?光은 조선 중기 穆陵盛世를 대표하는 문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 시기에 盛唐의 풍격을 높이 거론하며 시풍의 전환에 큰 역할을 수행했고, 또한 자신의 시작품으로 당풍의 문학성을 구현해 내었다. 이수광이 지향한 證故實의 학문 태도는 그의 시작품 창작에도 크게 작용해 경물의 寫實지향으로 나타났다.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경물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고, 시작품의 회화성을 중시하면서 `詩中有畵`의 논의를 작품으로 실천해 보였다. 寫實지향의 시적 태도는 그가 만나는 情景을 가급적 구체적으로 그려 눈으로 보는 듯이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게 하였다. 이수광의 『芝峯集』에는 관료 문인으로서 충군애민의 의식을 담아낸 시작품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그는 <宮詞>에서 군왕을 그리워하는 궁녀의 애달픈 한을 노래하기보다, 爲民의 善政에 고심하고 노력하는 훌륭한 군주의 면모를 표현해 내 충군과 애민의 의식을 작품화하기도 했다. 이수광의 寫實정신은 實景의 묘사와 함께 實政의 祈願으로 그의 시작품에 나타났던 것이다. 寫實과 애민을 지향한 이수광의 시의식은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큰 축이라 하겠다. 이수광의 한시 작품이 나타낸 대표적인 풍격은 閑淡과 雅麗라 할 수 있다. 閑淡의 풍격은 비교적 일상의 삶이나 자연과 산수를 읊조릴 때, 雅麗의 풍격은 여성적 정서를 담은 艶體나 환상적인 遊仙의 시편 등에서 더 잘 나타나는 편이다. 이러한 이수광 시문학의 풍격은 그의 盛唐 추숭 문학론과도 관련이 깊다. 이수광은 그의 문학론으로 唐詩를 말하면서 자연스러움과 함축의 표현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수광은 『芝峯集』에 비교적 많은 수의 艶情詩를 남겨 놓았다. 艶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보니 그 전체적 분위기가 우아하고 곱게 펼쳐진다. 그의 시작품에서 雅麗, 婉麗, 溫雅 등의 풍격을 지적한 평가는 주로 이러한 여성적 정감을 다룬 艶情의 시에 많이 나타난다. 閑淡과 雅麗를 표현해 낸 이수광 시문학의 전체적 풍격은 그것을 한데 아울러 閑雅라 규정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Jibong(芝峯) Yi, Soo-gwang(李?光) was one of famous writers during middle period of Josun(朝鮮) dynasty. He argued the literary theory about the best T`ang (盛唐) style on the Chinese classic poems. Also he wrote several works the T`ang style(唐風) and made a role of transition as the T`ang style. He intended to the proof-investigation on his study. So he wrote his poems such as expressing reality. His works showed the real scenery as if someone had seen the landscape seriously. Jibongjib(『芝峯集』) which is a book of Yi, Soo-gwang(李?光)`s literary works records many poems including the thought of loyalty and love-people. His sprit of reality made his poems showing the righteous politics as well as describing real scenery. The representative style of Yi, Soo-gwang(李?光)`s poem is Clean-elegance (閑雅). The comfortable and clean style was expressed the poems of daily life and nature. The pretty and elegance style was expressed the poems of woman`s life and fantastic fairyland. Such literary style are related deeply with his literary theory insisting the best T`ang(盛唐) style. Yi, Soo-gwang(李?光) remained many poems about love in his collection of works Jibongjib(『芝峯集』). The poems about love show such mood as pretty and elegance generally. Yi, Soo-gwang(李?光) poem`s general style is comfortable- clean and pretty-elegance, so we can call it Clean-elegance(閑雅) style tot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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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天輔의 文學論과 詩文學

        박수천(Park, Soo-Cheon) 동남어문학회 2012 동남어문논집 Vol.1 No.33

        The remarkable point of Yi Cheon-Bo(李天輔)’s literary understanding is regardind Rules of Creative works as important. His theory was based on Rules of Creative work, and he insisted that the writers must show their thought and energy freely. He argued the side of personality from nature, that meant actually the individuality of writers. He thought that the worthy works must keep Rules of Creative and show originality intactly. Yi Cheon-Bo(李天輔) estimated the natural Light and Plain(澹泊) of Works highly. The natural Light and Plain(澹泊) of Works is T’ang style(唐風) of Literariness, Yi Cheon-Bo(李天輔) wanted to follow that style as literary state all his life by himself. The poems of Yi Cheon-Bo(李天輔) was estimated as natural works that was made by new words. Yi Cheon-Bo(李天輔) kept following nature as his literary cognition, and he wanted to show natural on hie works. Such literariness is T’ang style(唐風), he was the famous poet as T’ang style(唐風) during his period. He wanted to follow the nature making composition. He wrote the theory of the rights and wrongs about the world clearly and frankly. He worried about his world, and he felt sad stuffy. So his works showed deep thought about his literature and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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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巖(연암) 朴趾源(박지원)의 漢詩文學(한시문학)

        박수천 ( Soo Cheon Park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5 石堂論叢 Vol.0 No.61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최고 문장가였지만 여타의 문인들에 비해 한시는 많이 짓지 않았다. 평소에 그가 한시 짓기를 그리 즐겨하지 않았고, 그가 지었던 한시 작품도 보관이 잘 되지 않아현존하는 한시 작품들은 모두 50수 정도이다. 그러나 박지원의 한시작품이 이루어낸 문학성은 일찍부터 그의 문장들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현존하는 박지원의 한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古調장편의 작품들이다. 그의 古調장편 작품들은 모두 매우 긴 편폭으로 구성되어, 탁월한 문장가로서의 필력과 역량이 한시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하겠다. 박지원이 시를 즐겨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때에 따라 거침없는 필력으로 도도한 氣勢의 장편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박지원은 한시를 지을 때 근체시의 격률에 얽매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律詩와 絶句는 그 형식의 구속으로 인해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어 항상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는 근체의 율조를 벗어나 古風으로 여러 편의 작품을 창작해냈다. 박지원이 써낸 단형의 고체 작품들은 그가 평소 지향한 ‘朝鮮之風’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영處稿』에 서문을 쓰면서 李德懋가 조선의 森羅萬象을 시편에 담아내었으니 그것을 ‘朝鮮之風’이라 부를 만하다고 말했다. 李德懋의 시에서는 우리나라 말을 시로 적고 민요에 다 운을 달아 자연스런 작품을 이루었던 점을 지목했는데, 박지원 스스로도 그의 시작품에서 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적거나 우리나라만의 풍속을 작품에 그려내고자 하였다. 박지원은 근체시의 격률에 구속되어 詩想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여 근체시를 짓다가는 그만두어 버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지원도 조선 시대를 살았던 문인이라 修學期에는 과거를 염두에 두면서 근체시 형식의 작품 쓰기를 배제하지 않았고, 燕行시기에도 근체의 작품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燕巖集』에는 고체시보다 근체시 형식의 작품이 더 많이 남겨져 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근체시는 5언보다 7언의 작품이 많아, 그가 근체시를 쓸 때 7언의 형식을 더 선호했다고 이해된다. 7언은 5언보다 글자 수를 더 많이 쓸 수 있어서 가슴속의 회포를 막힘없이 드러내기에 한결 편리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의 한시 작품에서는 寫實적 繪畵性이 두드러진 典實함의 풍격이 돋보인다. Yeonam Park Ji-won was a famous prose writer of the later period of Chosun dynasty(especially the king Yeongjo and Jeongjo period). His poems are not so much, but the literary level was estimated very highly. The conspicuous point is the Old style long form poem on the Park Ji-won’s poems. His the Old style long form poem was created very long, that showed his force of writing as an excellent prose writer. Park Ji-won didn’t like the restriction of the New style poem. So he wrote many poems using the Old style which broke rules of the New style. His the short Old style poem showed the Chosun style which he wanted to make on his literary works. Park Ji-won hated restriction of the New style poem, so he quit writing that form works very often. But he was a writer of Chosun dynasty, he did not exclude writing the New style poems. Actually there are many the New style poems on his works collection 『Yeonamjib』. He wrote more poem works as 7 letter form than 5 letter form. On his poem works, the realistic inclination is remarkable such as realistic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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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극관(南克寬)의 「사시자(謝施子)」에 나타난 문학의식(文學意識)

        박수천 ( Soo Cheon Park ) 한국한시학회 2013 韓國漢詩硏究 Vol.21 No.-

        남극관은 오랜 질병으로 인해 26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20세 때에는 生員試에 2등으로 급제해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병으로 인해 立身의 꿈을 접고 집안에서 칩거하며 괴롭고 힘든 투병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문학의식을 다듬어 나갔고, 그것을 잡록의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 「謝施子」이다. 「謝施子」는 제명의 뜻처럼 쓸모없는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학문세계를 드러낸 저작이었다. 남극관은 성품이 곧고 깨끗해 별다른 욕심을 갖지 않았으나, 침식을 잊어 버릴 정도로 책읽기만 극히 좋아했다고 한다. 여러 잡기적 기술을 모은 「謝施子」에는 문학 분야 외에도 천문, 역법, 지리, 역사, 서법, 금석학, 언어, 문자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견해를 두루 담고 있어 그의 평소 독서가 아주 광범위했음을 증명해 보여준다. 「謝施子」에는 중국 문단에 대한 관심과 문학 비평의 기사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 당시 조선 문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公安派와 竟陵派의 문학론에 대한 전체적 평가를 내리고, 그 중 竟陵派를 주도한 鍾惺의 논의가 더 우월하다고 말했다. 남극관은 문장이란 세상의 治亂을 따라 그 盛衰를 같이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라의 흥망에 따라 그 문장의 성쇠가 나타나니 明나라 말기의 문학이 그렇게 낮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문학과 時運의 관계를 그가 처음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견해가 남극관의 문학에 대한 기본 인식이었던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남극관의 문학적 관점은 公安派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있다. 남극관은 袁宏道의 논의를 수용하면서 일단 적극적인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 문학이 개인의 정감과 얽매이지 않는 개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을 같이하고, 각 시대의 변화를 따라 문학도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견해에도 동감을 했다. 그러나 남극관은 袁宏道의 시작품이 복고론자들이 썼던 일상의 恒語를 애써 기피하느라, 도리어 辭語의 편폭이 좁아져 진실한 개성의 표현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지적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公安派와 竟陵派가 제시한 문학론을 남극관이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또한 그들의 미흡한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극관은 金昌協의 문학과 문학론을 거론하면서도 그의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남극관의 집안은 소론의 명문가라 노론계 인사들과는 政論이나 문학론에서 의견을 같이 하기 어려워 그의 논의에서 黨論의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겠지만, 일단은 남극관이 자신의 문학론적 견지에서 비판론을 개진한 것이라 하겠다. 金昌協이 주안점을 둔 것은 작품에 표현된 意趣였는데 비해, 남극관이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氣格이었다. 남극관은 문장의 경우 體裁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시에서는 우선 氣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남극관은 金昌協 시론의 성취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鄭斗卿 평가의 경우 그의 氣格이 가장 뛰어난데 단지 思致만으로 그를 낮추어 말한 것은 작품의 한 측면만을 본 편협한 처사였다고 비판했다. 작품의 평가는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또한 그 작품에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측면에 중점을 두어야 올바른 비평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남극관의 생각이었다. 남극관의 문학의식은 前後七子의 의고적 문학론을 기반으로 公安派와 竟陵派가 주장한 개성 발현 중시의 문학론을 함께 수용하고 있다. 公安派와 竟陵派는 의고론을 강력히 부정했지만, 남극관은 그들 이론의 장점을 아울러 자신의 문학론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작품의 氣格을 중시하면서 그것의 전범으로 盛唐을 존숭하였고, 지나친 擬古에 빠져 개성과 독창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謝施子」에서 남극관은 그의 문학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았고, 또한 자신의 문학의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지도 않아, 그의 문학론은 실제 미완의 단계에 머무르고 말았다 하겠다. 그가 일찍 요절하지 않고 在世의 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더욱 심도 있고 독창적인 문학론을 형성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Nam, Keug-Kwan(南克寬) died at the age of 26 from his disease. He was recognized his literary talents from the people around him. But he stayed indoors to overcome his disease almost everyday. During these days he had many times for reading books, and he made his own literary thoughts. He wrote his several thoughts as a form of miscellaneous notes, named 『Sasija(謝施子)』. 『Sasija(謝施子)』 was a kind of book which showed his high level study. He wrote several subject besides literature such as astronomy, calender, geography, history, calligraphy, language. In the book 『Sasija(謝施子)』, there are many articles about literary critique and Chinese literary circles. Nam, Keug-Kwan(南克寬) thought that the trend of literature followed the flourish of the society. As his view of literature, he accepted the theory of Kong-An group(公安派) critically. He had same opinion that literary works expressed individuality without any restricting. Besides he accepted the theory of Kong-An group(公安派), he didn`t passing over their weak points. Nam, Keug-Kwan(南克寬) criticized the works and literary theory of Kim, Chang-Hyub(金昌協). Kim, Chang-Hyub(金昌協). estimated the intention of writres(意趣), but Nam, Keug-Kwan(南克寬) showed the energetic spirit(氣格) of writers as his critique standard. To evaluating literary works, it needs diversified investigation. And it must focus on the excellent side of the works. That was Nam, Keug-Kwan(南克寬)`s literary thoughts. He estimated the best T`ang Style(盛唐) highly, and he insisted the originality(獨創性) of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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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급과 긴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을 시행한 임신부에서 조기분만 예측 인자로서 수술 후 측정한 자궁경부 길이의 유용성

        박수예 ( Soo Ye Park ),최수란 ( Soo Ran Choi ),이혜란 ( Hea Ran Lee ),양성 ( Sung Cheon Yang ),이용우 ( Yong Woo Lee ),송지은 ( Ji Eun Song ),문종수 ( Jong Soo Moon ),김성주 ( Seong Joo Kim ),이근영 ( Keun Young Lee ) 대한산부인과학회 2011 Obstetrics & Gynecology Science Vol.54 No.9

        목적: 응급과 긴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을 시행 받는 임신부에서 임신 30주 이전 조기분만을 예측할 수 있는 예측인자로서 수술 후 질식초음파를 이용하여 측정한 자궁경부 길이의 유용성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연구방법: 자궁경부가 개대 되고 양막이 질쪽으로 탈출되어 응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을 시행한 51명과 초음파상 자궁경부 내구의 깔대기모양 변화와 더불어 자궁경부 길이가 25 mm 미만으로 짧아져 긴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을 시행한 40명을 대상으로 후향적으로 연구하였다. Receiver-operating characteristic (ROC) curve 분석, Pearson`s partial correlation coefficient와 다중로지스틱회귀분석을 사용하여 통계학 적으로 분석하였다. 결과: 입원당시 평균 임신 주수는 응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을 시행한 군은 21.2 ± 2.3주 긴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을 시행한 군은 21.8 ± 3.2 주이었다. 수술 후 측정한 자궁경부 길이는 응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군은 17.6 ± 8.6 mm, 긴급 원형결찰술 군은 21.8 ± 8.7 mm로 증가하였다. ROC curve 분석에서 응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군은 자궁경부 길이를 16.5 mm로 기준할 때, 민감도 85%, 특이도 50%, 양성예측도 17%, 음성예측도 16%, 긴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군은 수술 후 자궁경부의 길이를 23.2 mm로 기준할 때, 민감도 65%, 특이도 45%, 양성예측도 17%, 음성예측도 8%이었다. 다중로지스틱회귀분석 결과, 수술 후 측정한 자궁경부 길이는 교란인자 보정 후 임신 30주 이전 조기분만과 독립적인 상관관계가 없었다(응급 원형결찰술군 P = 0.65, 긴급 원형결찰술군 P = 0.77). 결론: 응급과 긴급 자궁경부 원형결찰술 후 질식초음파를 이용하여 측정한 자궁경부의 길이는 증가하였으나, 임신 30주 이전 조기분만을 예측할 수 있는 유용한 인자는 아니다. Objective: The aim of this study is to evaluate the value of the ultrasonographic cervical length after emergent and urgent cervical cerclage to prediction of preterm delivery in patients with incompetence of cervix. Methods: Fifty-one women who underwent emergent cervical cerclage and forty women who underwent urgent cervical cerclage were studied respectively. Receiver-operating characteristic (ROC) curve analysis, Pearson`s partial correlation coefficient, and multiple logistic regression analysis were used for statistical analysis. Results: The mean gestational age at admission was 21.2 ± 2.3 weeks in emergent cerclage group and 21.8 ± 3.2 weeks in urgent cerclage group. Postoperative mean cervical length was 17.6 ± 8.6 mm in emergent group and 21.8 ± 8.7 mm in urgent group. The diagnostic indices of postoperative cervical length (cut-off value 16.5 mm in emergent cerclage, 23.2 mm in urgency cerclage) by ROC curve were sensitivity of 65%, specifi city of 45%, positive predictive value of 17%, and negative predictive value of 8% in emergent cerclage group and in urgent cerclage group, sensitivity of 85%, specifi city of 50%, positive predictive value of 17%, and negative predictive value of 16%. Multiple logistic regression analysis indicated that postoperative cervical length was not an independent predictor of preterm delivery after adjustment of confounding factors in emergent group (P=0.65) in urgent groups (P=0.77). Conclusion: In the both groups, the postoperative cervical length was longer than preoperative. However the postoperative cervical length is not a useful predictor of preterm delivery in patients with emergent and urgent cervical cerc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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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한시(漢詩)의 문학성(文學性)과 그 시대적 의미

        박수천 ( Soo Cheon Park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6 石堂論叢 Vol.0 No.64

        滄江 金澤榮은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시기 문인이었다. 그가 살았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전후는 조선의 국권이 침탈당해 결국 일제 치하에 놓이게 되는 심각한 국난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甲午改革과 함께 한문 문학이 급속히 쇠퇴를 하고 국문에 의한 新文學이 문단의 전면으로 상승하던 때이기도 했다. 김택영의 시문학은 그의 평생 삶의 기록이며 급변하는 시대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었다. 그는 이미 국문 중심의 문학으로 전환이 된 시기에도 끝내 한문학을 고수했으며, 그의 삶에서 지녀야 했던 갈등과 회한, 그리고 울분과 강개로 점철된 내면의 모습을 작품으로 나타내었다. 김택영이 지향한 한시 작품의 중심적 문학성은 神韻이라 평가되어 왔다. 김택영은 과거 급제에 이르는 동안 시를 배우고 익히면서 神韻의 문학성을 스스로 깨우쳐 나갔다. 神韻을 지향했던 그의 시작품에는 당연히 唐風의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자연스러움과 함축의 여운을 추구하는 唐風 작품의 문학성이 바로 神韻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택영은 시를 정밀하고 공교롭게 짓자면 심혈을 기울여 애써 생각해 만들 수 있겠지만, 神韻은 그렇게 애써 생각을 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이러한 神韻의 경지는 부단한 노력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自得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光武 9년(1905)에 대한제국은 治安警察權까지 일본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國運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김택영은 스스로 일본의 종이 될 수 없다고 결심을 해 망명을 단행하였다. 김택영이 중국 上海로 건너간 후 고국은 끝내 일본의 강압에 의해 乙巳勒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김택영은 극도의 비감한 심회를 시작품에 드러내었다. 이 시기에는 辭語를 다듬거나 성률의 효과를 고려하는 작품을 쓰기 어려웠다. 이즈음 서정의 작품에서는 구절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直敍的으로 토로했다. 김택영의 망명 이후 한시에는 感憤과 悽楚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었다고 하는 평가가 이 시기 작품에서 나타나 보인다. 중국 망명 시절에 김택영은 그의 시문학론을 「雜言」의 기록으로 피력해 놓았다. 이른 시기부터 그가 추구해 왔던 神韻을 여기서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함축에 의한 天然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였다. 그가 「雜言」에서 神韻의 문학을 논의했지만 그것도 독자적이거나 새로운 관점은 아니었다. 한문학이 종말을 고한 시점에서 그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펼치는 것 자체가 아무런 쓸모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김택영의 神韻 지향 문학론은 처음부터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Kim Taeg-young(金澤榮) was a famous writer during the last period of Sino-Korean literature. His poem works were some recording of his whole life and the literary respondence on the sudden change era. He sticked to Sino-Korean literature although literary circle changed pure Korean literature already. And he represented his inner side on his poem works such as discord, regret, resentment, deploring. The main literariness of Kim Taeg-young(金澤榮)` poems were Shinoon(神韻). Following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his poem works showed T`ang style(唐風) frequently. T`ang style(唐風) which want to make natural and implication is close to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is possible by the sejf-recognizing(自得) with endless effort. The Korea Empire was such as a candle front of wind around 1905, Kim Taeg-young(金澤榮) did`nt want to be a Japan`s slave, so he exiled himself finally. After he went to Sanghai China, the Korea Empire contracted the Eulsa treaty(乙巳條約) by Japan`s enforcement. During this period, there was no meaning writing poems with any ornament and sound euphony. So he wrote several poems containing with emotion of resentment(感憤) directly. He discussed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on the 「Jabeon(雜言)」, but that was not his original thought. At that time, there was no meaning on the discussion about Sino-Korean literature. Because of that, Kim Taeg-young(金澤榮)`s literary theory of Shinoon(神韻) had limitation from the begi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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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정언묘선(精言妙選)』 풍격론(風格論)

        박수천 ( Park Soo-cheon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21 石堂論叢 Vol.- No.79

        『정언묘선(精言妙選)』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자신의 문학 인식에 따른 시학의 전범(典範)을 보여주기 위해 찬집한 중국시 선집이다. 율곡은 『정언묘선』에서 시적 전범을 간결하게 요약된 풍격(風格)으로 제시하고 그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선별해 수록하고 있다. 「원자집(元字集)」에서 주로 선발해 모은 작품은 충담소산(沖澹蕭散)의 풍격을 가진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의 중심 개념은 당연히 충담(沖澹)이며 소산(蕭散)은 이 충담(沖澹)함을 부연 설명해 놓은 말이다. <정언묘선서(精言妙選序)>에서도 충담소산(沖澹蕭散)을 다시 요약해 충담(沖澹)이라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율곡은 충담(沖澹)을 여러 시적 전범들 중 가장 대표적 풍격으로 인식하였다. 「형자집(亨字集)」에서 표방한 한미청적(閒美淸適) 풍격은 한가로운 아름다움으로서의 ‘한미(閒美)’가 중심적인 의미라 할 수 있다. 율곡 자신의 정신적 지향의 한 면모가 ‘한가로움’이었기 때문에 문학에서도 전범으로 삼을 만한 하나의 문학성을 ‘한미(閒美)’라 말한 것이다. 「이자집(利字集)」에서 표방한 청신쇄락(淸新灑落)의 풍격도 ‘청신(淸新)’ 중심의 문학성을 지목한 것이라 여겨진다. ‘쇄락(灑落)’은 ‘청신(淸新)’의 이미지를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해 부연된 말이라 하겠다. 『정언묘선』 각 권에서 제시한 풍격들을 살펴보면 율곡은 문학비평의 주요 준거를 의경(意境), 사어(辭語), 격조(格調) 등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그는 의경을 가장 중심적 요건으로 파악했다. 『정언묘선』의 「정자집(貞字集)」은 용의정심(用意精深)을 기준으로 선집한 것이라 하였다. 선발된 작품은 ‘정심(精深)’함이 두드러진 풍격으로 구현되었는데, 바로 작가의 의경이 ‘정심(精深)’함을 파악한 것이다. 「인자집(仁字集)」에서는 정심의원(情深意遠)한 작품들을 가려 뽑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작가의 ‘정과 뜻[情意]’이 ‘심원(深遠)’한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선발했다는 말이다. 「정자집(貞字集)」의 용의정심(用意精深)한 풍격은 의경 중심의 작품 선발 기준이면서 한편으로는 작품 창작기법의 한 측면을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시인이 작품을 창작할 때는 그 의경이 정밀하고 깊게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자집(仁字集)」에서 표방한 선발 기준인 정심의원(情深意遠)의 경우도 작품의 창작방법을 함께 말하고 있다. 작품이 지향해야 할 바의 깊은 서정과 길게 이어지는 의경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인이 작품을 창작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의자집(義字集)」에서는 격사청건(格詞淸健)을 말했는데 작품의 격식과 사어(辭語)의 측면에서 맑고 굳센 면모를 평가한 것이다. 여기서는 작품 비평의 층위로서 격식과 사어를 들고, 본받아야 할 문학성과 창작방법으로서 격사(格詞)의 청건(淸健)함을 보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자집(禮字集)」 작품들의 대표적 풍격은 정공묘려(精工妙麗)라 했는데, 이 말은 ‘정공(精工)’에 의미 비중이 더 있고 ‘묘려(妙麗)’는 ‘정공(精工)’의 효과를 부연해 설명한 풍격이라 보여진다. 작품에서 이루어진 정공묘려(精工妙麗)한 풍격은 율곡이 생각한 또 하나의 시적 전범이면서 창작방법의 일면이기도 하다. 율곡은 『정언묘선』의 여덟 편에 각각 기준으로 삼은 작품의 풍격을 제시해 놓았다. 「원자집(元字集)」에서 ‘충담(沖澹)’의 풍격을 먼저 거론해 그것을 가장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나머지 일곱 편에서 기준으로 삼은 풍격들이 모두 학시(學詩)의 전범이라 하였다. 시문학 작품이 지닌 여러 층위들 중에 율곡은 특히 의경의 측면을 중시하여, 그것을 올바르게 구현하는 창작방법을 각 편의 표제적인 풍격으로 나타내 보였다. 율곡은 이러한 시학을 통해 『정언묘선』이 학자들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위한 하나의 교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Jeongeunmyosun(精言妙選)』 is an anthology of Chinese poems which was made by Yulgok(栗谷) Lee-yi(李珥) for showing the best model of poetry. He presented several short name of style and collected many equivalent works. The poems of 「Wonjajip(元字集)」 have the style as Clean-light(沖澹). Yulgok(栗谷) thought that the Clean-light(沖澹) were the representative style as the best model of poetry. The poems of 「Hyungjajip(亨字集)」 have the style as Leisure-beauty(閒美). Yulgok(栗谷) intended ‘Leisure’ mentally, so he mentioned Leisure-beauty(閒美) as a model of poetry. The poems of 「Leejajip(利字集)」 have the style as New-clean(淸新). New-clean(淸新) is the literariness of neat and tidy. Studying the showed style of 『Jeongeunmyosun(精言妙選)』’s each part, we can know that Yulgok(栗谷) recognized important matters of literary critique such as Intention(意境), Words(辭語), Forms(格調). Especially Yulgok(栗谷) understood that Intention(意境) was the most important matter. The mentioned style of 「Jeongjajip(貞字集)」 is deep precisely Using-Intention(用意精深). That is a standard of collecting poems focus on Intention(意境), also that seemed an aspect of work-writing skill. The mentioned style of 「Injajip(仁字集)」 is deep-emotion and long-intention(情深意遠). It showed an aspect of work-writing skill as well. The mentioned style of 「Eujajip(義字集)」 is Form-word’s clean and sound(格詞淸健). It estimated the aspect of poem’s form and words. The mentioned style of 「Lyejajip(禮字集)」 is skillful-elegant(精工妙麗). Yulgok(栗谷) also insisted that it is another model of poetry and an aspect of work-writing skill.

      • KCI등재

        이계(耳溪) 홍량호(洪良浩)의 문학론(文學論)과 시문학(詩文學)

        박수천 ( Soo Cheon Park ) 한국한시학회 2015 韓國漢詩硏究 Vol.23 No.-

        홍양호의 문학론은 자연스런 天機의 발현으로 집중되고 있다. 그의 문학론에서 여타의 비평가들과 대비되는 독자적인 면은 문학을 經과 緯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문학이란 바로 經緯라 할 수 있는데, 날줄인 經은 道로 이루어지고 씨줄인 緯는 氣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베틀에서 베가 짜지듯이 날줄의 道와 씨줄의 氣가 서로 교차해 얽혀져 자연스럽게 篇章을 형성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문학 작품이라 말한 것이다. 이러한 道와 氣가 錯綜되어 문학 작품이 되는데, 道는 문학에 실려야 밝게 드러나게 되니 상호간의 의존관계는 서로 떼 낼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의 道는 성인의 윤리적 道學에 매인 것이 아니라 천지자연의 본래적인 모습을 수용한 道였다. 홍양호는 문학의 典範과 표준으로서 至高不變하는 道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단지 시대에 따른 문학적 현상이 그 道와 이격되어 나타났음을 지적하였다. 불변의 道는 언제나 존재해 왔으나 그것을 체득해 문학으로 드러낸 모습은 시대마다 달랐고, 특히 근체시 성립 이후로는 문학이 지나친 격식에 치우쳐 자연스런 道의 발현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는 진단을 했다. 홍양호의 문학관은 天機之眞과 性情之正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작품이 바로 至高不變의 道에 합치하는 것이란 견해인데, 우리나라의 근체시 작품은 전혀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홍양호의 고체시 작품에 대해 淸의 紀윤은 和平하면서도 溫厚해 재주를 부리는 사람의 곱게 꾸미고자 하는 모습이 없다고 평가를 했다. 또 그 내용이 백성들과 나라를 늘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어 일반적 名士들의 放誕하거나 풍류를 드러내는 기운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그의 고체 작품들이 보인 道氣의 詩敎적 면모를 높이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홍양호는 그의 시 창작에 있어서 古調의 장편시만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체의 형식을 이용한 작품은 실제 그의 문집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의 詩稿는 대부분이 근체시로 채워져 있다. 그는 근체시의 폐단을 깊이 인식했기에 그 폐단을 스스로 극복하고 자연스런 율조를 구사하면서 天眞한 道氣를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홍양호는 자신의 근체시에서 자연스러움을 이루어내고자 하였다. 비록 근체의 형식을 활용했지만, 격식에 매인 흔적이 없이 자신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다. 홍양호는 자신의 평생 시작품에 唐風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唐風 추구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道를 강조한 그의 문학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홍양호가 처음 燕京으로 사신갔을 때 만났던 戴衢亨은 홍양호의 시작품을 보고 그것의 ‘淸주老健’함을 높이 칭찬했다고 하였다. 淸주와 老健은 작품이 淸新하면서도 힘이 있으며 솜씨가 익숙해 대가의 노련함을 갖추고 있음을 지목해 말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홍양호가 그의 시작품에서 추구한 문학성이었다. The literary theory of Hong Yang-ho(洪良浩) was the presentation of the profound secrets of Nature(天機). He insisted that the literary was such as Warp and Woof(經緯). It means that literary is same making clothes using cotton machine. He recognized the existing Tao(道) as a standard and model of literary which was not changing with highest level. Especially he thought that the new style poem(근체시) followed strict form so that was far from natural Tao(도). As his view point of literary, he estimated highly the works that showed the true presentation of the profound secrets of Nature(天機). Hong Yang-ho(洪良浩) emphasized the beauty of the Old style poem(고체시), his Old style poems were evaluated as moderation and deep gentle(和平 溫厚). But he didn`t write only the Old style poems. His Old style poems are not so many, on the contrary he wrote the new style poems much more. He wanted to make Nature on his New style poems. Although he used the New style poem, he expressed his emotion naturally without restricted by formality. Hong Yang-ho(洪良浩) wanted to make the T`ang style(唐風) on his poem works. His T`ang style(唐風) goes along with his literary theory that emphasizes pure natural Tao(道). His New style poems were estimated as being fresh strong and stout experienced(淸주老健). That was the literariness which Hong Yang-ho(洪良浩) pursued to establish on his poem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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