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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滄江 金澤榮 漢詩의 文學性과 그 시대적 의미

        박수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6 石堂論叢 Vol.0 No.64

        Kim Taeg-young(金澤榮) was a famous writer during the last period of Sino-Korean literature. His poem works were some recording of his whole life and the literary respondence on the sudden change era. He sticked to Sino-Korean literature although literary circle changed pure Korean literature already. And he represented his inner side on his poem works such as discord, regret, resentment, deploring. The main literariness of Kim Taeg-young(金澤榮)’ poems were Shinoon(神韻). Following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his poem works showed T’ang style(唐風) frequently. T’ang style(唐風) which want to make natural and implication is close to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is possible by the sejf-recognizing(自得) with endless effort. The Korea Empire was such as a candle front of wind around 1905, Kim Taeg-young(金澤榮) did’nt want to be a Japan’s slave, so he exiled himself finally. After he went to Sanghai China, the Korea Empire contracted the Eulsa treaty(乙巳條約) by Japan’s enforcement. During this period, there was no meaning writing poems with any ornament and sound euphony. So he wrote several poems containing with emotion of resentment(感憤) directly. He discussed the literariness of Shinoon(神韻) on the 「Jabeon(雜言)」, but that was not his original thought. At that time, there was no meaning on the discussion about Sino-Korean literature. Because of that, Kim Taeg-young(金澤榮)’s literary theory of Shinoon(神韻) had limitation from the beginning. 滄江 金澤榮은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시기 문인이었다. 그가 살았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전후는 조선의 국권이 침탈당해 결국 일제 치하에 놓이게 되는 심각한 국난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甲午改革과 함께 한문 문학이 급속히 쇠퇴를 하고 국문에 의한 新文學이 문단의 전면으로 상승하던 때이기도 했다. 김택영의 시문학은 그의 평생 삶의 기록이며 급변하는 시대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었다. 그는 이미 국문 중심의 문학으로 전환이 된 시기에도 끝내 한문학을 고수했으며, 그의 삶에서 지녀야 했던 갈등과 회한, 그리고 울분과 강개로 점철된 내면의 모습을 작품으로 나타내었다. 김택영이 지향한 한시 작품의 중심적 문학성은 神韻이라 평가되어 왔다. 김택영은 과거 급제에 이르는 동안 시를 배우고 익히면서 神韻의 문학성을 스스로 깨우쳐 나갔다. 神韻을 지향했던 그의 시작품에는 당연히 唐風의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자연스러움과 함축의 여운을 추구하는 唐風 작품의 문학성이 바로 神韻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택영은 시를 정밀하고 공교롭게 짓자면 심혈을 기울여 애써 생각해 만들 수 있겠지만, 神韻은 그렇게 애써 생각을 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이러한 神韻의 경지는 부단한 노력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自得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光武 9년(1905)에 대한제국은 治安警察權까지 일본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國運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김택영은 스스로 일본의 종이 될 수 없다고 결심을 해 망명을 단행하였다. 김택영이 중국 上海로 건너간 후 고국은 끝내 일본의 강압에 의해 乙巳勒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김택영은 극도의 비감한 심회를 시작품에 드러내었다. 이 시기에는 辭語를 다듬거나 성률의 효과를 고려하는 작품을 쓰기 어려웠다. 이즈음 서정의 작품에서는 구절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直敍的으로 토로했다. 김택영의 망명 이후 한시에는 感憤과 悽楚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었다고 하는 평가가 이 시기 작품에서 나타나 보인다. 중국 망명 시절에 김택영은 그의 시문학론을 「雜言」의 기록으로 피력해 놓았다. 이른 시기부터 그가 추구해 왔던 神韻을 여기서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함축에 의한 天然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였다. 그가 「雜言」에서 神韻의 문학을 논의했지만 그것도 독자적이거나 새로운 관점은 아니었다. 한문학이 종말을 고한 시점에서 그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펼치는 것 자체가 아무런 쓸모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김택영의 神韻 지향 문학론은 처음부터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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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巖 朴趾源論

        박수천 한국한시학회 2022 韓國漢詩硏究 Vol.30 No.-

        Park Ji-won is one of the most famous verses of the late Joseon Dynasty. Here, I will examine his poetic aspect of Chinese poetry, targeting the beginnings, not the sentences of Park Ji-won. Although Park Ji-won left a few poems, it is regarded as a literary achievement that can never be overlooked in his works. As he began his studies, he was already literary enough to write his views in a long editorial. The writings left at this time show that Park Ji-won's sentence ability has already reached a very high level. Park Ji-won has been concentrating on preparations for the Taking Bureaucratic Selection Test for many years since he was 20 years old, and it seems that he left many poem works at this time. Park Ji-won finally got a traveling Beijing chance to experience when he was 44 years old. Park Ji-won, who did not enjoy writing poetry very much, seems to have made a lot of works during the period. Park Ji-won did not write much poetry, but the level of the works created was never so good. It is a sentence of a brilliant style, but it shows the skill of detailed observation and coherent description in the poem. Park Ji-won first made his debut at the age of 50, and he moved to Gyeongsang-do Aneu in December 1791. It is noteworthy that he leaves several poems containing his thinking in various periods of official time. Park Ji-won's poems are not many left behind, and it is also true that he did not enjoy making new-form poems tied to the rhythm. However, it is very difficult to see that his poems left in and other related materials show a considerable level. 燕巖 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손꼽히는 문장가이다. 박지원의 문장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이미 최고의 수준을 인정받아 학계의 연구 성과도 별도의 연구사를 정리할 만큼 많이 축적되었다. 여기서는 박지원의 문장이 아닌 시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그의 한시 작가적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박지원은 20세 되던 해부터 수년간에 걸쳐 보통의 사대부 집안 자제들처럼 과거 준비에 힘을 쏟았는데 이 시기에도 많은 한시 작품을 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20대의 시기에 과거를 준비하면서 학문과 문장의 역량이 점차 성숙해졌다. 이와 함께 자신이 살고 있던 당대의 사회와 정치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은 1780년에 進賀別使로 선발된 朴明源을 따라 燕行의 체험을 할 기회를 얻었다. 시 쓰기를 그리 즐겨하지 않았던 박지원이었으나 이 燕行 기간 동안에는 비교적 많은 시작품을 지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의 한시 작품은 그 수준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호방한 기풍의 문장가이면서도 한시 작품에서는 세밀한 관찰력과 공교로운 묘사의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燕行 시기의 한시 작품이 지금 燕巖集 에 남겨진 작품들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크나, 현존 자료로는 그런 정황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박지원은 1786년 50세 되던 해에 兪彦鎬의 천거로 처음 出仕를 하게 된다. 1791년에는 漢城府 判官으로 옮겼다가 이해 12월에 경상도 安義縣監에 보임되었다. 그는 沔川郡守로 3년 정도 재임했다가 1800년 64세 때에 襄陽府使로 승진하였다. 이후 지병이 점차 위중해져 69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런 仕宦의 시기에도 틈틈이 그의 심회를 담은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을 남기고 있어 주목이 된다. 박지원의 현존 한시 작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그가 율조에 얽매이는 근체시 짓기를 그리 즐겨하지 않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燕巖集 과 여타 관련 자료들에 전해진 그의 한시 작품들이 상당한 수준을 보여 주고 있는 점은 매우 示唆的이다. 더욱이 그의 北京과 熱河의 紀行 시기에는 새로운 異國 체험을 여러 시편으로 작시했을 가능성이 높아 이에 대한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절실하다.

      • 후발고령국가에 적합한 노인수발정책 - 일본 개호보험이 한국 등에 주는 시사점 -

        박수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5 보건복지포럼 Vol.109 No.-

        인간수명의 연장과 저출산으로 세계가 고령화되고 있다. 앞으로 고령자 수발은 경제부담 능력이 부족한 후발고령국가에 더 큰 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후발고령국가에 적합한 대안을 일본의 개호보험 시행 5년의 경험을 토대로 찾아보고자 한다. 그 대안은 ① 고령자가 선택하는 주체적 수발, ② 가족·이웃이 참가하는 따뜻한 수발, ③ 차세대에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수발시스템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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