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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형사의 성질에 미치는 유기 점결제 중자사의 영향에 관한 연구

        문재숙,천병욱,김종철,최창옥 ( Jae Sook Moon,Byung Wook Cheon,Jong Cheol Kim,Chang Ock Choi ) 한국주조공학회 1998 한국주조공학회지 Vol.18 No.2

        N/A This study has been carried out to investigate the properties of green sand as system sand containing various organic core sand, such as Shell core, Cold Box core and Pep Set core sand. The permeability of the system sand containing Pep Set core sand was decreased, but increased from containing 5wt.% core sand. The compressive strength and the surface stability index were increased up to containing 5wt.% core sand, but decreased with containing more than 5wt.% core sand. The compactability index was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In case of the system sand containing Cold Box core sand, the permeability and the compressive strength were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and the surface stability index and the compactability index was a little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In case of the system sand containing Shell core sand, the permeability and the compressive strength were a little de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and the surface stability index and the compactability index was a little increased with the ratio of core sands. The bonded force of the system sand mixed with core sands were poor and the grain surface was rough. The loss of ignition of system sand containing shell core sand were more than it with others, it has been found that the system sands containing organic core sands have to reclaim for using molding sand. (Received December 31, 1997)

      • KCI등재후보

        심상건 가야금 산조 연구

        문재숙(Moon, Jae-suk) 한국국악교육학회 2014 국악교육 Vol.38 No.38

        심상건(沈相健, 1889~1965) 은 심창래의 아들로 1889년 충청남도 서산에서 출생하였다. 심상건이 조실부모 하여, 작은아버지인 심정순(沈正淳, 1873~1937)의 영향을 받았다. 그 예로는 심상건의 독특한 5괘 조현법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중고제의 대가 심정순의 5괘 조현법과 같은 것이다. 김창조계 중심의 전남제와 심상건 중심의 중고제 가야금 산조를 비교하여 보면, 심상건 산조의 특징은 “우조로 시작 해서 우조로 끝낸다”는 김창조계 산조의 법통과 달리 심상건의 진양조는 저음역에서 시작하며, 평조의 선율로 시작하는 것이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전남제의 경우 4괘법을 사용하며, 주로 g본청을 사용하는데에 반해 중고제는 5괘법을 사용하고, 제 1현에 ?을 사용하여 저음음역을 확대하여 연주하였으며, g본청에서 d본청으로 이동하는 변청도 사용 하였다. 또한, 전남제는 계면조를 중심으로 하는데에 반해 중고제는 평·우조, 계면조가 중심이 되며 진계면조가 없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심상건의 진양조는 독특하고 즉흥적인 선율이 많아 다른 산조와 유사한 선율이 거의 없으며, 심상건이 동일한 악장을 연주해도 동일 선율이 거의 없었다. 심상건은 즉흥적이며, 독주 시나위 성격을 가진 가야금 산조를 연주 해왔으며,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연주 되었던 김창조계 가야금 산조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중고제 산조를 만들었다. 즉흥적인 연주를 하였기에 제자를 양성하고, 꾸준히 계승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심상건 가야금산조 연구에서는 심상건의 sp음반과 김기수가 채보한 심상건 가야금 산조, 릴 테이프, 유성기 음반 등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토대로 타 산조와의 진양조 악장 구성의 비교, 타 산조들과의 조현법에 관한 차이점, 1950년 전후로 변화된 심상건류 가야금 산조의 변화 등에 관해 연구 하였다. Sang-gun Sim (심상건 沈相健, 1889~1965) is Chang-lae Sim’s son, born in Chungcheongnam-do Province Seosan in 1889. He was influenced by his uncle Jung-soon Sim(심정순 沈正淳, 1873~1937) because he lost his parents early in his life. For example, there is a unique 5 Gue tuning system(5괘 조현법), which is the same tuning system as Jung-soon Sim, the master of Jung-go Jae (중고제). Comparing Chang-jo Kim’s style oriented Jeon-nam Jae and Sang-gun Sim’s style oriented Jung-go Jae, the major characteristic of style Chang-jo Kim’s style sanjo is “starting with Ujo, end with Ujo.” However, Sang-gun Sim’s style sanjo is starting with the lower register and melody of Pyungjo. The difference between Junnam Jae and Jung-go Jae is that Jun-nam Jae uses 4 Gue method(4괘법) and mainly uses G tonic, but Jung-go Jae uses 5 Gue method (5괘법)and uses ? as a first string in order to play a wide range of lower scale and uses modulated melodies, which changed the G tonic into D tonic. In addition, unlike Junnam Jae; mostly based on Kyemyeonjo, Jung-go Jae is mostly based on Pyung-Ujo and Kyemyeonjo except Jin-Kyemyeonjo. Because Sang-gun Sim’s jinyangjo has unique and improvisatory, it has no similar melodies from other sanjo, and even when Sang-gun Sim plays the same movement, it rarely has a same melody. Sang-gun Sim played sanjo, which is improvisatory and has a nature of sole Sinawi. Regardless of Chang-jo Kim’s gayageum sanjo which was played mostly in Junnam province, Sang-gun Sim made his own unique Jung-go jae sanjo. He had trouble of fostering pupils and steady successionof his sanjo. Based on Sang-gun Sim’s SP record, Gi-sy Kim’s transcription of gayageum sanjo, reel tape, a gramophone record, and etc, the study of Sang-gun Sim’s gayageum sanjo researched the difference of jinyangjo and tuning system between other sanjos and the difference made in Sang-gun Sim’s gayageum sanjo before and after 1950s.

      • KCI등재후보

        고려시대 가야금 연구

        문재숙(Moon, Jae-sook) 한국국악교육학회 2015 국악교육 Vol.40 No.40

        고려시대는 약 50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우리나라의 왕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야금에 관한 문헌은 매우 소략하여 고려시대 가야금 관련 선행연구 또한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는 고려시대의 가야금과 관련된 기사가 미비하게나마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악지(高麗史樂志), 『고려도경』(高麗圖經),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 이색(李穡)의 『목은시고』(牧隱詩藁) 등과 도상자료를 통해 가야금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고려시대를 4기로 나누었는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부터 헌종(1084~1097)까지 국가제도를 정비한 시기를 제1기, 제9대 왕인 덕종(1016~1034) 부터 제 16대 왕인 예종(1079~1122)까지 고려문화가 전성기를 이룬 시기를 제2기, 고려 의종왕(1127~1173)부터 공민왕(1330~1374)까지 무신들이 집권하고 몽고가 간섭한 시기를 제3기, 공민왕 말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까지를 제4기로 나누어 각 시기에 해당되는 문헌을 살펴보았다. 고려 초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태조의 훈요 10조 통해 고려시대의 정신사조를 살펴보면 불교․도교․유교를 모두 수용하는 다원화 시대였다. 이러한 정신사조는 가야금 음악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인 이규보(1168~1241)는 자신의 문학을 가야금을 반주에 맞추어 연주한 성악곡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가야금은 기생이라는 음악집단에 의해서 연주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유교가 융성하였기 때문에 윤선도(尹善道: 1587〜1671) 등 당대 문인들은 거문고를 많이 연주하였다. 연주형태는 가사가 있는 성악곡을 주로 연주하였는데, 음악적인 내용은 오늘의 판소리 성음의 가야금 병창과 달리 가사전달에 중점을 둔 문학적인 면을 더 강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가야금이라는 이름외에 絲(사), 絃(현), 十二絃(12현), 금(琴) 이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었음에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가야금이라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가야금이라는 악기 이름이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고려 말부터 이곡의 『가정집』은 가야금이라는 용어를 점차 사용하였고, 가야금이라는 악기이름으로 확실하게 정착된 것은 조선의 세종시대 이후로 간주된다. 고려시대는 이곡의 『가정집』 제7권 중 ‘새로 만든 12현의 명’ 이라는 시에서 不雅不俗, ,匪古匪今이라는 문구를 통해 고려 당시 가야금을 雅하기도 하지만 俗하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현대식도 아니고 옛날식도 아니라고 표현한 것이 가야금의 특징 중 하나이고 고려시대 문인들은 다원화시대였기 때문에 가야금의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많이 애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가야금은 거문고 중심의 조선시대와 달리 가야금이 문인들을 중심으로 더욱 성행했으며, 연주되어졌다. 더불어 가야금은 전문가의 음악이라기보다 문인으로서 자기의 시를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악기로 간주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가야나라의 금이었던 가야금은 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아내며 2000여 년 동안이나 사랑을 받아온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 KCI등재후보

        전통음악과 찬송과의 만남에 관한 연구

        문재숙(Jaesuk Moon) 한국국악교육학회 2013 국악교육 Vol.36 No.36

        이 글은 이 시대에 왜 국악찬양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당위성과 필연성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이래로 200여년이 되는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에서 전통음악이라는 기존용재가 적극 활용되지 못하는 점이 매우 아쉽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전통음악에 대한 수용의 문제점과 방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연구해 보았다. 첫째, 기존 찬송가를 얹는 방법으로 한국의 전통악기인 가야금에 서양음악으로 이 땅에 전래된 찬송가를 연주한다는 것은 서양음악을 한국식으로 포용하여 한국화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가야금 병창의 찬양이다. 가사를 가진 성악곡은 악기로만 연주되는 곡들보다 대중들에게 빨리 접근될 수 있는 영역이다. 때문에 가야금을 반주하며 노래하는 형태는 가야금만을 연주했을 때보다 강하게 대중에게 전달된다. 더욱이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어야 하는 성가곡의 경우에 가사가 있는 성악곡은 기악만을 연주했을 때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 병창의 방법은 기존의 판소리창법과 달리 하는 방법도 있다. 영어가사도 원문대로 부를 수 있다. 셋째, 가야금 기악곡의 창작 찬양이다. 기존 찬송가를 가야금에 얹는 방법이나 가야금 병창으로 연주하는 성가 곡은 이미 연주되어 보급되고 있지만은, 새로운 가야금 기악곡의 성가 곡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가야금 병창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나, 가야금만이 갖는 독특한 음악어법으로 내용을 지닌 기악곡을 만드는 것도 개척해 볼 만한 영역이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 작곡의도와 다른 이미지로 들을 수 있다는 난점이 있다. 넷째, 가야금과서양악기를 접목시키는 방법이다. 현재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이미 한국의 전통음악보다는 서양음악에 더 친숙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가야금의 약점인 소리를 길게 지속시킬 수 없다는 점을 보완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보완할 수 있는 신디사이저가 사용되기도 한다. 더 많은 나라의 악기와의 만남도 가능하다. 다섯째, 기존의 민요가사를 성가로 바꾸는 방법이 있다. 한국 사람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민요를 가사만을 바꿔 부른다는 것은, 새로운 한국적인 찬송가를 탄생시킨다는 역사적인 의의에는 미흡한 것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우리나라의 지방의 외진 곳에서는 쉽게 복음전파에 도움이 된다. 여섯째, 몸찬양이다. 찬양을 악기나 소리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춤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이 시대 중요한 새로운 영역의 확장이다. 다윗왕의 몸으로 드린 찬양을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 받으셨다. 일곱째, 금가무(琴歌舞)의 찬양이다. 고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에 제사할 때 금가무의 찬양을 하였다. 악가무(樂歌舞)가 어우러져 드리는 찬양방법은 앞으로 계속 연구하여 다음세대에 넘겨줄 이 시대의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된다. 가야금을 통한 성가곡을 만드는 것, 더 나아가 교회문화의 토착화하는 작업은 개인의 영역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을 두고 연구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과도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나 성도들 그리고 국악인들의 의식구조에 진보적인 사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문화는 다른 종교의 문화현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 문화적 현상이다. 문화는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현상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고, 이러한 다양성은 사회를 풍성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풍성하게도 한다. 기독교음악도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역시 다양한 음악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교회의 전통음악 수용은 성숙된 사회분위기가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음악인 스스로도 받은 재능을 하나님과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 KCI등재후보

        조선시대 가야금 연구

        문재숙(Moon Jae Sook) 한국국악교육학회 2016 국악교육 Vol.42 No.42

        「조선시대 가야금 연구」는 「고대 가야금연구」, 「고려시대 가야금 연구」에 이어서 우리나라의 가야금 역사에 관해 연구해본 것이다. 조선시대 가야금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시대의 시대구분을 실제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분류하기 쉽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초기(태조(392)~성종(1494))․중기(연산군(1494)~경종(1724)) · 후기(영조(1724)~1910)로 3기로 나누었다. 『조선왕조실록』, 문집, 그림자료에 나타난 가야금에 대해서 사료(史料)를 수집하고 시기별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다행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초기사료 중 문집, 그림자료가 전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병자호란(1636) 등 왜침을 겪으면서 소실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문집의 가야금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았으며, 중기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그림자료를 살펴보고 더불어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가야금과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거문고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후기 또한 초기, 중기와 동일하게 『조선왕조실록』과 선비들이 남겼던 문집, 그리고 그림자료에 남겨진 가야금을 살펴보았으며 더불어 후기에 편찬된 가야금 악보와 가야금 산조의 출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에는 가야금 관련 문집을 살펴보면 금(琴), 현(絃), 사(絲), 12현(十二絃) 등으로 가야금이 불렸는데 조선시대 초기에는 현(絃) 또는 가야금(伽倻琴)으로 불리어 졌다. 세종시대부터 가야금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세종 때 수양대군(훗날 세조, 세조의 대군시절 이름)이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외가의 가풍과 명망 있는 집안 분위기가 그대로 세종의 집안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이후에는 왕가에서 연주되는 기록이 없는데, 이는 세종 이후에 유교문화가 정착되면서 가야금보다는 거문고를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거문고가 유교사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헌자료는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의 거문고 악보는 55여 종이 전하는 반면 가야금 악보는 『졸장만록(拙庄漫錄)』과 『방산한씨금보(芳山韓氏琴譜)』 등 에만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예악(禮樂)사상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졸장만록』은 가곡, 졸장만록 이후에 간행된 『방산한씨금보』는 기악곡을 전하는데 이는 성악곡에서 기악곡화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림자료를 보면 칠태부인 경수연도(慶壽宴圖)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양반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고, 피리, 대금, 해금 등의 관악기는 댓뜰 아래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많다. 이것은 가야금이나 거문고가 음량이 작아서 야외에서 연주하기에는 제한될 수도 있었겠지만, 관악기 보다는 현악기 연주한 사람들이 좀 더 대접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1796년 졸장만록이 만들어 졌는데 악보 내용은 거의 가야금 중심의 악보이다. 송만재(宋晩載: 1788~1851)가 쓴 『관우희(觀優戱)』가 1810년도에 만들어 졌고, 판소리가 19세기 전후로 성행했던 것으로 볼 때 가곡을 뒤를 이어 판소리가 성행했으며 이어서 1916년 『방산한씨금보』에 나타난 기악곡 중심의 가즌영산회상으로 이어졌다. 가야금 산조 창시자인 김창조(金昌祖: 1865~1919)가 1895년에서 1919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김창조는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를 두루 섭렵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야금 산조 음악 속에는 가곡과 민간풍류와 판소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가야금 산조가 위대한 악곡이 탄생된 것은 그 전에 있었던 가곡, 판소리, 민간풍류의 악곡들의 우수한 점들이 응집되어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판소리 에서는 성음을 가곡에서는 가곡성 우조를 포함한 평우조 선법을, 민간풍류에서는 가야금 연주수법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김창조는 가곡, 민간풍류, 판소리, 퉁어(퉁애), 해금 등 까지도 섭렵할 수 있었던 명인이었기 때문에 가야금 산조 악곡을 창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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